< 선박의 죄수들 (3) >
괜히 한 번 주변을 둘러본 데인이 다급히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약초로 보이는 풀잎이 한가득 들어있는 자루였다.
그것을 철창 틈으로 던졌다.
"자, 네가 말했던 아루마 풀잎이다. 빨리 처먹어라."
"......"
물끄러미 바닥에 떨어진 자루를 바라보던 주술사가 음산한 웃음을 흘리며 철창 가까이 다가왔다.
데인은 혀를 차며 그의 입에 물린 재갈을 느슨하게 풀어줬다.
이내 주술사가 자루에 고개를 처박고 풀잎을 으적으적 씹어삼키기 시작했다.
'젠장, 시간이 얼마 없는데...'
데인은 속으로 욕을 뇌까리며 그 광경을 지켜봤다.
죄수의 이름은 아구프.
하이더 시의 인근에 위치한 마을의 주민들을 몰살한 죄목으로 잡혀온 주술사였다.
시작은 운송을 시작하기 전 임시 수감소에서부터였다.
데인은 그곳에서도 지금과 같이 경비를 포함하여 죄수들의 관리를 맡았었는데, 어느 날 죄수들에게 배식을 하는 중 놈이 말을 걸어왔다.
[너, 주술에 재능이 있군. 주술 부족의 피가 이어진 것도 아닌데 아주 희귀한 경우야.]
[동료와 하는 이야기를 들어보니 관심을 둔 계집이 있는 모양인데, 암시 주술을 익히면 쉽게 마음을 얻을 수 있을 거다.]
놈이 말한 여인이란 건 아까 동료와 잡담을 떨며 이야기가 나온 로자엘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기사단 내의 동료 단원이자 데인이 좋아하는 상대였다.
몇 번이고 은근히 마음을 내비쳤으나 받아주지 않아 이뤄지기 힘든 사랑이었지만.
그래서 답답한 마음에 함께 경비를 서던 동료에게 푸념했던 걸, 놈이 건방지게 엿듣고 있었던 것이었다.
기가 막힌 데인은 분노하며 아구프를 그대로 굶긴 채 짓밟았다.
한데 놈은 그렇게 구타를 당하면서도 끝까지 말을 이었다.
[못 믿겠다면 보름달이 뜬 밤, 전신을 물로 적시고 그 아래에서 명상을 해봐라. 그러면 주력을 각성할 수 있을 테니...]
처음에는 당연히 코웃음치며 무시했었다.
뭔 괴상한 수작을 부리는 건가 상부에 보고할까도 하다가, 너무 사소한 일이다 싶어 그냥 관뒀다.
하지만 어느 보름달이 뜬 밤, 또다시 로자엘에게 차여 울적하게 취해있던 밤.
아구프의 말이 문득 떠오른 데인은 술기운에 집 밖으로 나섰다.
집 근처에 있던 연못 웅덩이에 몸을 담근 채 눈을 감고 명상을 시작했다.
병신처럼 죄수 놈 말에 휘둘려서 뭘 하는 건가 싶다가도, 몇십 분 정도를 그러고 있자니 놀랍게도 정말 몸 속에 흐르는 오러와 다른 이질적인 기운이 느껴졌다. 바로 주력이었다.
[어떤가? 내 말이 맞았지?]
조롱이 섞인 듯한 놈의 웃음이 기분 나빴으나, 이미 주력의 존재를 인지한 데인은 호기심을 억누를 수 없었다.
무엇보다 정말 로자엘의 마음을 얻을 수 있는 주술을 익힐 수 있는지가 궁금했다.
[가르침엔 대가가 따르는 법이지.]
그에 대해 놈이 요구한 바는 별 거 없었다.
가끔씩 질 좋은 식사를 몰래 챙겨주는 것.
죄수들의 배식으로 나오는 건 형편없는 빵 쪼가리뿐이니, 데인은 그 요구에 대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기사로서의 임무, 그리고 사랑하는 여인의 마음을 얻는 것.
그 사이에서 잠깐 의지가 방황했으나 결정은 빨랐다.
간단히 할 수 있는 정말 별 것 아닌 요구일 뿐이었으니까.
그렇게 데인은 아구프에게 몰래 음식들을 챙겨주며 주술에 대해 조금씩 배우기 시작했다.
[이건 암시 주술의 일종이다. 네 미천한 수준으로 급격한 진전은 무리고, 상대를 조금씩 물들이는 게 최선이지.]
효과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뛰어났다.
놈에게 배운 주술을 로자엘에게 몰래 조금씩 사용할수록, 차갑기만 하던 그녀의 태도가 눈에 띌 정도로 서서히 변했다.
가시적인 변화가 뚜렷이 나타나자 데인의 마음은 더욱 조급해졌다.
주술의 실력을 늘려 그녀와의 관계를 더욱 빠르게 진전시키고 싶었다.
[주술의 진전을 빠르게? 큭큭... 말했다시피 공짜는 없다.]
놈의 요구가 더욱 까다롭게 변했다.
음식만 챙겨달라는 게 아니라 웬 이상한 약초들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거기서 조금이라도 이상함을 느꼈어야 정상이나, 데인의 정신은 이미 주술에만 온통 쏠린 상태였다.
이제 곧 섬에 갇힐 놈이 건강을 챙기나 코웃음치며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약초들을 챙겨와 가르침을 닦달했다.
그리고 다가온 운송의 날.
놈이 마지막으로 요구한 약초를 뒤늦게 구하게 된 데인은, 운송이 시작된 후에나 기회를 노릴 수밖에 없었다.
도착까지 며칠 남지 않은 지금, 죄수실의 경계가 해이해진 지금에서야 겨우 아구프와 단둘이 마주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어이! 시간이 얼마 없다."
데인의 닦달에도 불구하고 아구프는 말없이 약초만 연신 씹어삼켰다.
그 여유로운 모습에 인내심이 다다른 데인은 철창을 쾅 두드렸다.
"내 동료가 금방 올 거란 말이다! 네가 그때 말했던 주력을 증폭시키는 방법부터 어서 불어!"
약초를 전부 먹어치운 아구프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칠흑처럼 어두운 눈동자에 데인이 움찔 놀랐다.
킥!
어쩐지 불길한 웃음이 울려퍼졌다.
"좋군."
입가에 기괴한 미소를 건 아구프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내 부족은 오래 전부터 동대륙 끝의 광림에 터를 잡고 살던 부족이었다. 환경이 그런 만큼, 부족원들 모두가 약초를 활용한 주술과 배합에 능했지. 그곳엔 정말 온갖 약초들이 넘쳐났거든."
"...뭐?"
"그중엔 네놈들이 역류독이라 부르는 약물의 배합 역시 수십 가지로 다양하게 존재했다. 부족 내에서 규율을 어긴 부족원을 처벌하는 데 주로 사용하곤 했었는데... 그때가 그립군. 지금이야 빌어먹을 제국 놈들에게 멸망해버렸지만."
다시 한 번 음산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제야 이상함을 느낀 데인이 철창에서 한 발짝 물러났다. 검자루에 반사적으로 손이 올라갔다.
"도멜리, 로자구스, 하몰, 프라톤. 그리고 아루마."
"......"
"네놈이 멍청하게 지금까지 내게 가져다 바쳤던 약초들이다. 이건 특별히 아무런 대가도 없이 알려주지. 그것들을 배합하면 어떤 효과가 나타나는지 아나?"
화아악!
아구프에게서 뻗어나간 잿빛 기운이 데인의 몸을 뒤덮었다.
"......!!"
가공할 속도에 데인은 차마 검조차 뽑아들지 못했다.
완벽히 속박된 몸. 목소리조차 내뱉을 수가 없다.
쩡! 쩌정!
이어 아구프를 결박하고 있던 쇠갑들이 하나둘씩 박살났다.
자유를 되찾은 아구프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데인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고 두 눈만 부릅뜬 채 그 광경을 지켜봤다.
그의 주위로 넘실거리는, 이쪽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압도적인 주력이 느껴졌다.
데인은 곧바로 깨달았다.
믿을 수가 없지만, 아구프의 역류독이 해독되었음을.
"꽤 지독한 독을 썼다만, 몸 내부에서 조금씩 주력을 굴리는 것까진 어떻게든 가능하더군."
아구프가 킥킥 웃으며 데인을 바라봤다.
그가 사용한 방법은 간단했다.
데인이 가져다준 약초들을 소화하지 않고 몸속에 고스란히 저장한 채, 끝내 재료를 모두 모아 해독제로 배합한 것이다.
아구프 정도 되는 경지의 주술사라면 그런 상식을 거스르는 기행위조차 해낼 수 있었다.
"부족신께서 아직 날 버리지 않으신 게지. 반쯤 포기하고 있었거늘 끝내 마지막 재료를 가져왔구나."
꾸득!
데인을 속박하고 있던 잿빛 기운이 붉게 변했다.
그와 동시에 데인의 육체가 순식간에 말라비틀어지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빨려나온 생명력이 주력을 타고 아구프에게로 흡수됐다.
오랜 죄수 생활로 피폐해진 아구프의 몸이 빠르게 활기를 되찾았다.
툭.
바닥에 떨어지는 데인의 시체.
이어 가볍게 철창을 부숴버린 아구프가 감옥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하아..."
간만의 자유를 만끽하듯, 눈을 감고 크게 숨을 내쉰다.
하지만 아직 완벽한 자유가 아니다.
도로 눈을 뜬 그가 철창 근처에 떨어진 약초 자루를 주워들었다.
그리고 입 가까이에 가져다 대더니, 그대로 뭔가를 토해내기 시작했다.
"우웨엑!"
이내 자루를 가득 채우는 걸쭉한 녹빛의 액체.
한참을 토해내던 걸 멈춘 아구프는 그것을 들고 옆방의 죄수에게로 이동했다.
철창 너머에 온몸이 결박된 거구의 사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구프를 바라봤다.
우드득!
철창을 뜯어낸 뒤 속박을 풀어주자, 거한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씨벌, 뭐야? 댁 어떻게 탈옥한 거야?"
아구프는 대답하지 않고 그에게 자루를 내밀었다.
"해독제다. 한 웅큼 퍼서 먹어라."
거한이 인상을 찡그리고 자루에 담긴 녹빛 액체를 바라봤다.
"이게 해독제라고? 꼭 누가 토한 것처럼 생겼는데? 아까 토하는 소리 들리더니 댁이 토한 거 아니야, 이거?"
"더 대꾸하면 죽이겠다. 먹기나 해라."
"......"
그 말에 거한은 아구프를 노려보면서도 액체를 한 주먹 퍼서 삼켰다. 뒈지긴 싫었으니까.
아구프는 곧장 걸음을 옮겨 다른 방의 죄수들 역시 결박을 풀어주고 해독제를 먹였다.
"오? 이거 정말 효과가...!!"
"크하핫! 자유다, 자유!"
이내 죄수실에 있던 모든 죄수들이 힘을 되찾고 죄수실의 복도에 모였다.
누군가는 얼떨떨한 표정을, 누군가는 간만에 맛보는 자유에 황홀한 표정을, 누군가는 히죽거리며 바닥에 말라비틀어진 데인의 시체를 발로 툭툭 장난스럽게 건드렸다.
죄수들의 시선이 모두 현재 상황을 야기한 아구프에게로 모였다.
"대충 이걸로 끝인가."
아구프는 죄수들을 한 차례 둘러봤다.
그때 맨 처음의 거한이 나섰다.
"이봐, 풀어준 건 고마운데 입을 건방지게 놀린 값은 치뤄야지?"
그가 팔을 붕붕 휘두르며 아구프에게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대꾸하면 죽이겠다니, 감히 내가 누군지 알고 그딴 망발을 지껄여? 이 몸이 바로 가스본에서 백도 넘는 용병들을 모조리 맨손으로 찢어죽인..."
우드득!
거한의 말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순식간에 목이 비틀어진 채 허물어지는 시체.
죄수들 중 몇몇이 재밌다는 표정으로 그 광경을 지켜봤다.
"내게 유감이 있는 놈은 지금 나와라."
아구프가 거한에게 내뻗은 손을 거두며 말했다.
나서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악랄함과 잔혹함이라면 이곳의 죄수들 모두가 둘째가라면 서러운 이들이었지만, 방금 걸 보고도 격의 차이조차 깨닫지 못하는 머저리는 없었다.
"와, 카리스마 대박. 얼굴만 더 잘생겼으면 딱 내 스타일인데."
한 여인이 양손을 들어올리고 실실 웃으며 말했다.
그저 가만히 서있을 뿐인데 그녀에게선 요염한 색기가 흘러나왔다.
"그래서 우리한테 원하는 게 뭔데? 어중간하게 생긴 주술사 오빠?"
다른 죄수들도 마찬가지로 궁금하다는 표정이었다.
아구프가 입꼬리를 올렸다.
"뭘 묻고 있는 건지 모르겠군. 너희들을 풀어준 이유가 하나 말고 더 있겠나?"
손가락으로 죄수실 밖을 가리키며.
"자유는 돌려줬으니 나가서 멋대로 날뛰어라. 섬에서 평생을 썩기 싫으면 기사 놈들을 전부 죽이고 선박을 차지해야겠지."
죄수들의 입가에 섬뜩한 미소가 걸렸다.
아구프는 죄수실 밖으로 빠져나가는 죄수들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정신을 집중했다.
교란의 밤안개.
이내 자욱한 칠흑이 죄수실 밖으로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주술 전개를 마친 아구프는 바닥에 떨어진 데인의 검을 주워들었다.
그리고 죄수들을 뒤따라 빠져나가는 대신 더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죄수실 가장 안쪽에 위치한 독방으로.
"이봐."
철창 반대편의 사내가 고개를 들었다.
콰드득!
아구프는 철창과 사내를 결박한 철갑들을 부숴버렸다.
자유를 되찾은 사내, 바혼이 손목을 매만지며 무표정한 얼굴로 아구프를 응시했다.
아구프는 그의 앞에 해독제가 담긴 자루와 검을 내던졌다.
"홀데인의 검귀."
"......"
"당신에 대해선 조금 알고 있지. 굉장한 유명인사더군. 설마 계속 이곳에 갇혀있을 생각은 아니겠지?"
"감옥에선 어떻게 빠져나온 거냐?"
"그게 중요한가?"
바혼이 바닥에 떨어진 검을 주워들었다.
입가에 소름 끼치는 미소를 내건 채.
"아무래도 상관없긴 하지."
* * *
복도를 가로질러 숙소로 돌아가는 기사들.
"...음?"
한 기사가 걸음을 멈춰세웠다.
옆에 있던 동료가 돌아보며 물었다.
"왜 그래?"
"아니, 앞쪽이 뭔가..."
밤이니 선박 내부가 어두운 거야 당연했지만, 앞쪽으로 펼쳐진 어둠은 어딘가 이질적이었다.
이내 동료도 이상함을 느꼈는지 인상을 찌푸리며 검자루에 손을 올렸다.
서서히 퍼져온 어둠이 손에 들고 있던 발광구마저 검게 물들였다.
"이게 무슨...?!"
완전히 가려진 시야에 기사들이 당황하며 서로 등을 붙였다.
단지 시야만 가려진 게 전부가 아니라, 인지 능력과 감각마저 흐릿해졌기 때문이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어둠이 점점 주위를 옥죄여왔다.
피잇!
날카로운 파육음. 비릿한 혈향.
한 박자 늦게 동료가 당했다는 걸 깨달은 기사는 기겁하며 검을 휘둘렀지만, 맥없이 허공만 가를 뿐이었다.
"너 지금 어디 베냐?"
푸확!
이어서 남은 기사의 목도 순식간에 떨어졌다.
이윽고 어둠 속에서 몇몇의 한 쌍의 사내와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사내가 검에 묻은 피를 털어내며 새삼스런 표정으로 주변의 어둠을 살폈다.
"이거 진짜 신기하긴 하네. 우리만 멀쩡하고 기사 놈들은 아예 맥을 못 추리는데?"
"원래 주술사들이 이것저것 괴상한 재주가 많으니까."
해독제로 힘은 되찾았지만 오랜 수감 생활로 나빠진 몸 상태였기에, 본래라면 기사들을 정면에서 상대하기는 어려웠을 터다.
하지만 주술사의 지원이 죄수들을 마음껏 날뛸 수 있게 해주었다.
죽은 기사들의 얼굴을 살피던 여인이 히죽 웃었다.
"아, 다행이다. 전부 못생겼네. 잘생겼으면 아까울 뻔했잖아."
"너도 어지간히 미친년이구나. 이제 슬슬 갑판 위로 올라가보자고."
그들이 지나온 길에는 이미 터지고 찢기고 잘린 시체들이 여럿 쌓여있었다.
다른 방향으로 나아간 죄수들도 지금쯤 선박 내부의 사람들을 신나게 사냥하고 있을 것이었다.
여인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난 찾아야 할 사람이 있어서. 올라갈 생각이면 먼저 가, 못생긴 오빠."
"엉? 찾아야 할 사람?"
그녀의 눈이 가늘게 휘었다.
처음 선박에 올랐을 때, 멀리서 눈을 마주쳤던 한 청년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하아...!!'
그런 기분은 정말이지 처음이었다.
그를 처음 봤던 순간 그녀는 이성이 마비될 것 같은 황홀함을 느꼈다.
눈부신 금발에 새하얀 피부, 그리고 사파이어 같이 반짝이는 푸른 눈동자.
지금껏 수많은 사내들을 탐하고 죽였지만 그만큼이나 완벽한 이상형은 없었다.
자유를 되찾은 지금 그녀의 최우선 목표는 탈출보다도 그 청년을 찾는 것이었다.
"저기 또 오네."
마침 반대편에서 걸어오다 주춤거리는 한 선원이 보였다.
"...꺄아악!"
갑작스레 눈앞에 나타난 두 살인귀의 모습에 그녀가 기겁하며 주저앉았다.
여인이 히죽 웃으며 쪼그리고 앉아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착하지? 내가 남자한테는 관대해도 시끄러운 년은 딱 질색이거든? 그러니 묻는 말에만 잘 대답하렴."
"으, 으으..."
"이 선박에 탄 사람 중에 금발에 푸른 눈동자를 가진, 엄청 잘생긴 남자가 하나 있을 거야. 그 사람이 지금 어디 있는지 아니?"
공포에 덜덜 떨던 선원이 더듬더듬 대답했다.
"그, 그 사람은 3층 숙소에..."
"아, 3층? 여기는 지금 몇 층인데?"
"6층..."
"그럼 위로 세 칸 올라가면 된다는 거네. 난 먼저 갈게~."
자리에서 일어난 여인이 곧장 사내를 지나쳐갔다.
사내는 멀어지는 여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선원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루발리의 광녀라고 했던가? 아무튼 저 미친년한테 걸릴 놈이 불쌍하네. 안 그래? 귀여운 아가씨?"
"아, 아아..."
"나도 사내 새끼들만 베어 죽이다 보니까 영 손맛이 나질 않아서 말이야. 아가씨 덕분에 잠깐 좀 재밌게 즐길 수 있겠어."
사내의 입가에 기괴한 웃음이 걸렸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시퍼런 검날이 그녀를 향해 나아갔다.
꺄아아아악...!!
선박의 복도에 잔혹한 파육음과 끔찍한 비명이 연달아 울려퍼졌다.
* * *
칼은 눈을 떴다.
자다 깨서 뻑뻑한 눈을 비비며 침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
어딘가 거슬리는 감각.
칼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곧이어 방 밖에서도 소란이 일었다.
칼은 걸음을 옮겨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다급한 뜀박질 소리가 이쪽을 향해 가까워지더니, 곧 복도 반대편에서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메이린?"
기사 메이린이었다.
그녀의 표정에 서린 다급함을 보고 칼은 무언가 사달이 났음을 알 수 있었다.
그녀도 복도에 나온 칼을 발견하고서 황급히 다가왔다.
"갑판 위로 빠져나가야 합니다! 어서!"
"아니, 이 밤중에 무슨 일..."
"죄수들이 대거로 탈출했단 말입니다! 지금 선박 내부는 이미 반쯤 점령당했습니다!"
"...뭐라고요?"
칼은 인상을 와락 찌푸렸다.
"일일이 설명할 시간 없습니다! 어서 절 따라오십시오!"
일단 그녀의 뒤를 따르며 감지 마법부터 활성화하려던 순간이었다.
콰앙!
그때 왼편으로 꺾이는 복도 끝에서 무언가가 날아와 벽에 처박혔다.
메이린이 기겁하며 멈춰섰다.
벽에 처박힌 것의 정체는 다름 아닌 선원의 시체였다.
뚜벅. 뚜벅.
울려퍼지는 발걸음 소리.
이윽고 한 흑발의 여인이 복도 앞쪽에 모습을 드러냈다.
"어?"
칼과 메이린을 발견한 여인의 눈이 반짝였다.
정확히는 뒤쪽의 칼에게 시선이 꽂힌 상태였다.
칼 역시 그녀를 알아볼 수 있었다.
처음 선박에 올랐을 때, 죄수 행렬에 껴서 기분 나쁜 눈웃음을 지었던 바로 그 여인.
"찾았다, 내 사랑."
그녀의 입가에 요염하면서도 소름 끼치는 미소가 걸렸다.
< 선박의 죄수들 (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