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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마법사로 살아가는 법-64화 (64/132)

< 선박의 죄수들 (1) >

"야, 인마! 멀쩡한 돛 붙잡고 농땡이 피우지 말고 와서 짐이나 날라!"

"아니, 아무리 그래도 5실버는 너무하지 않습니까? 그러지 말고 적당히 4실버 정도로..."

"방금 막 들어온 싱싱한 놈이오! 세 마리를 사면 특별히 한 마리 더 얹어서 드리지."

항구의 정오는 부산스러웠다.

배에 달라붙어 운항을 준비하는 선원들, 뱃삯을 흥정하는 여행가, 길거리에 생선을 늘어놓고 팔고 있는 소상인들까지.

그런 바쁜 풍경에 섞이지 않고 부두 한구석에 홀로 우두커니 앉아있는 한 남자가 있었다.

바로 칼이었다.

"......"

칼은 팔짱을 끼고서 부두 한편에 정박된 함선들을 바라봤다.

하나하나의 크기가 주변에 있는 다른 배들 몇 개를 합친 것만큼이나 거대한 함선들.

어제는 보이지 않았던 기사들이 배 앞을 지키고 서서 주위를 경계하고 있었다.

그 삼엄한 기세에 근처를 지나치던 행인들이 괜히 눈치를 보며 거리를 벌리는 모습도 보였다.

"죄수 운송 군함이라..."

어제 한 선원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리며 중얼거리는 칼이었다.

스테믹 군도.

이명은 죄수들의 섬.

그곳에 위치한 루게시움의 악명이야 적어도 룬 대륙 전체에는 널리 알려졌을 정도로 모르는 이가 없다.

사형을 몇십 번이고 선고받아도 부족할 세턴 왕국 최악의 범죄자들이 모이는 수감소니까.

뿐만 아니라 타 국가의 부탁을 받고 그쪽의 고위 귀족들도 비밀리에 수감한다는 소문도 있고.

칼에게야 아무래도 좋은 사실들이었다.

현재 그에게 중요한 건 최대한 빨리 몬 대륙으로 넘어갈 배편을 구하는 것뿐이었으니까. 그런데...

"...저것도 몬 대륙으로 간다는 말이지."

물론 운항의 주 목적은 섬으로 죄수들을 운송하는 데에 있지만, 그 밖에도 무역 등의 이유로 스테믹 군도를 중간지점으로 거쳐 몬 대륙까지 나아간다고 한다.

한 번의 항해로 여러 일들을 한꺼번에 처리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는 편이 효율이 훨씬 좋을 테니까.

어쨌든 칼로서는 탐이 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저게 아니면 앞으로 몇 달은 멍청하게 다음 몬 대륙 배편을 기다려야 할 처지였으니까.

온갖 범죄자 놈들이 올라탈 선박이라지만 뭐,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그놈들이 멀쩡히 풀려서 있는 것도 아닐 텐데.

'어떻게 승선할 방법이 없나?'

고민을 거듭하며 뚫어져라 군함들을 쳐다보고 있을 때였다.

기사 하나가 시선을 느꼈는지 칼이 있는 쪽을 돌아봤다.

칼은 능청스레 고개를 돌렸지만, 조금 늦었는지 기사가 검자루에 손을 올리고 다가왔다.

"이봐, 왜 이쪽을 빤히 보고 있었지?"

"......"

대답이 궁색해진 칼은 머리를 긁적였다.

기사의 눈빛이 더욱 차가워졌다.

"꾸물거리지 말고 대답해라. 저 선박이 왕국의 죄수 운송선이라는 걸 모르나? 제대로 답하지 않으면..."

"무슨 일인가?"

그때 어디선가 다가온 다른 기사가 끼어들었다.

한눈에 봐도 강렬한 인상을 지닌 중년의 사내였다.

복색으로 보나 분위기로 보나 앞선 기사보다 직급이 높아보였는데, 실제로도 그런 모양이었다.

서늘한 기세를 내뿜던 젊은 기사가 한순간 순한 양처럼 돌변해서 공손히 고개를 숙였으니까.

"아, 단장님. 수상해보이는 자가 있어 잠시 붙잡은 참이었습니다."

"흐음?"

이야기를 전해들은 중년 역시 칼을 돌아보며 눈매를 좁혔다.

노려보는 사람이 둘로 늘어났다.

어쩐지 적당히 넘어갈 수 없을 것 같은 분위기에, 칼은 한숨을 내쉬며 신분증을 꺼냈다.

"수상한 사람 아닙니다. 선박 좀 쳐다봤다고 심문을 받는 건 또 색다른 경험이군요."

칼의 신분증을 확인한 그가 흠칫 놀랐다.

"알티우스? 잠깐... 그런데 이건 원로원 명하의 학파원증이 아닌가?"

그 말에 칼도 조금 놀랐다.

학파 내부의 인물도 아니고, 외부인이 원로원의 문양까지 알아보는 경우는 드물었기 때문이다.

"예, 맞습니다만..."

"역시 그렇군. 혹시 어느 분에게 가르침을 받고 있는지 말해줄 수 있겠는가?"

왜인지 갑자기 호감을 내비추는 듯한 그의 모습에, 칼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적당히 대답했다.

"세인달 원로님입니다."

"......!!"

중년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그러더니 돌연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이거 정말 반갑군! 설마 세인달 님의 제자를 이런 곳에서 만나게 될 줄이야!"

"......??"

"나는 세턴 왕국군 흑상어 기사단의 단장 헨리라고 하네. 세인달 원로님과는 오래 전부터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사이지. 그분께 단원들의 목숨을 크게 빚진 적이 있었거든."

그렇게 말하며 옆에 있던 기사의 팔을 툭 건드렸다.

"어서 사과드려라. 알티우스 학파 소속의 마법사 분이시다. 넌 모르겠지만 우리 기사단에 큰 도움을 주셨던 분의 제자고."

세인달의 제자는 아니었지만 분위기가 좋았기에 칼은 굳이 정정하지 않았다.

젊은 기사가 즉시 고개를 꾸벅 숙였다.

"죄송합니다. 실례가 많았습니다."

"자네도 이해해주길 바라네. 이제 바로 하루 뒤면 운항이 시작되는 터라 다들 신경이 예민하거든. 아... 혹시 저게 무슨 선박인지는 아는가?"

칼은 고개를 끄덕였다.

헨리가 군함을 힐끗 돌아보며 말했다.

"워낙에 흉악한 놈들을 태워야 하니 경계를 철저히 할 수밖에 없지. 한데 자네는 왜 운송선을 바라보고 있던 건가?"

"아, 다름이 아니라..."

칼이 간략하게 사정을 들려주자 헨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군. 몬 대륙이라, 연구 재료라도 구하러 그곳으로 가는 건가?"

"예, 뭐. 그런 셈입니다."

"아무튼 알겠네. 흐음... 외부인이라도 신분은 내가 보증하니, 사람 하나를 추가로 태우는 것 정도야 어려울 건 없네만."

승선 허락이 떨어졌다.

내심 기대했던 말에 칼은 화색을 띄며 물었다.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혹시 폐를 끼치는 건 아닌지..."

"하하, 내가 통솔자인데 폐를 끼치고 말고 할 게 뭐가 있겠나? 자네가 배 위에서 마법이라도 쏘면서 난동만 부리지 않는다면 뭐라 할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 걱정 말게."

헨리의 농담에 칼도 마주 웃었다.

이후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누다가 헨리가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아쉽지만 나중에 더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지. 일이 바쁘던 참이라 말이야. 근처에서 머물고 있는가? 선박 내부에 있는 방을 내어줄 테니 괜찮다면 지금 바로 승선해도 상관은 없네."

"아닙니다. 정리해야 할 짐이 있으니 출발 시간에 맞춰 다시 오겠습니다."

헨리가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러도록 하게. 내일 정오에 출발할 예정이니 늦지만 않으면 되네."

* * *

다음 날 아침.

여관을 나선 칼은 유유히 부두로 나섰다.

아침부터 부지런히 돌아다니는 뱃사람들을 지나쳐 군선으로 향했다.

어제의 그 젊은 기사가 오늘도 경비를 서고 있는 게 보였다.

"아, 오셨습니까."

가까이 다가가자 그가 먼저 인사를 건네며 길을 터줬다.

"단장님은 갑판 위에 계십니다. 바로 배에 오르시면 됩니다."

칼은 판자를 타고 배 위로 올랐다.

선박의 크기만큼 높이도 어마무시했기에 꽤 한참을 걸어야 했다.

마침내 갑판 위로 오르니 저멀리 끄트머리에 헨리가 뒷짐을 지고 서있는 것이 보였다.

기척을 느꼈는지 그가 시선을 돌렸다.

손을 휘휘 흔드는 모습에 칼은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가까이 다가갔다.

"일찍 왔군 그래. 식사는 했는가?"

"예. 헨리 경께서는?"

"나도 막 마친 참이었네."

칼은 헨리와 나란히 서서 바닷물을 내려다보며 잠시 대화를 나눴다.

둘의 공통분모인 세인달에 관한 이야기였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그가 과거 세인달에게 입었다는 은혜가 뭐였는지도 들을 수 있었다.

"...그때 마침 세인달 님께서 나타나셨고, 나와 내 단원들은 간신히 목숨을 건질 수 있었지. 후에 듣기로는 중간에 들렀던 여관의 종업원 소년이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세인달 님을 찾아갔다더군. 참으로 신기하지 않은가? 따지고 보면 그 소년에게 주었던 은화 한 닢의 팁

이 우리를 살린 셈이니 말이야. 하하."

"정말로 그렇군요."

"그러고 보니 요새 세인달 님께 통 연락을 드리지를 못했군. 건강히 잘 지내신다니 다행이지만 그래도 꼬박꼬박 안부를 여쭈었어야 했는데 말이야. 업무가 바쁘니 영 정신이 없어서."

당장 보이는 대로 알 수 있듯, 흑상어 기사단의 주 임무는 세턴 왕국의 중범죄자들을 잡아들이고 운송하는 일이라고 헨리가 설명했다.

그런데 요즘 들어선 왕국 곳곳에서 일어나는 기현상들 때문에 인력난이 심해져 추가 업무에 치이는 실정이라고.

"세턴뿐만 아니라 대륙 전체의 분위기가 무언가 심상치 않아. 자네도 학파에서 들은 게 있겠지만, 흑마법의 흔적들이..."

곧 괜한 이야기를 꺼냈다고 생각했는지 헨리가 말꼬리를 흐렸다.

입에 담는 것만으로도 꺼림칙한 게 흑마법이 지니는 세간의 인식이었다.

"말하다 보니 쓸데없는 이야기까지 꺼냈군. 아무튼 나중에 본원으로 돌아가면 안부를 좀 전해드리게."

칼은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흑마법이라...'

하나둘씩 전조가 나타나고 있는 건가?

이상할 건 없었다. 대전쟁까지 아주 먼 일도 아니었으니까.

흑마법과의 대전쟁.

끔찍한 대참사지만 그건 개인의 힘으로 바꿀 수 있는 흐름이 아니었다.

어차피 전쟁은 발발한다.

이기적이지만 칼은 과연 그때까지 지구로 돌아갈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만약 차원의 조각을 전부 모으면?'

그래서 정말 지구로 돌아갈 수 있게 된다면?

그때는 이 세계를 버려두고 그대로 슝 돌아가는 게 맞는 일인가?

이쪽이 가진 지식이라면 전쟁에서 죽어나갈 수많은 목숨들을 구할 수도 있을 텐데?

'...어차피 게임이었을 뿐이잖아.'

이 세계가 정말 실재하는 현실이라는 보장이 있기는 한가?

게임 캐릭터가 되고 나서 수도 없이 해왔던 생각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누구는 게임 속에 들어오고 싶어서 들어온 거냐고. 이쪽도 억울한 피해자일 뿐인데.

칼은 애써 합리화하며 욱씬거리는 양심을 짓눌러버렸다.

괜히 한산한 배 위를 둘러보며 생각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근데 이제 곧 출발할 때가 아닙니까? 보이는 사람이 거의 없는데요."

"죄수들을 끌고 와야 되니 대부분 인원이 그쪽으로 빠졌지. 아무리 결박하고 있다 해도 만약을 대비해야 하니 말이야. 이제 곧 어수선해질 거라네."

"상당히 위험한 자들인가 봅니다."

너무도 당연한 말이었기에 헨리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렇지. 달리 스테믹 군도로 이송되겠는가? 죄질도 죄질이지만 하나같이 흉포하고 사나운 놈들이라네. 까딱 잘못 놓쳐서 도시 대로에 풀리기라도 하면 수십 수백의 인명 피해는 순식간에 날 정도로."

그때 한 기사가 헨리의 뒤로 다가와서 경례를 한 뒤 말했다.

"이제 곧 선박에 도착한다고 합니다."

"음, 알겠네."

이윽고 선박 위로 일런의 무리들이 줄줄이 늘어서서 올라왔다.

섬으로 운송된다는 죄수들이었다.

입에는 재갈을 물고 사지 곳곳을 복잡한 쇠갑들로 결박당한 모습.

주위에 선 기사들의 사나운 눈빛 아래 그들은 비척비척 걸음을 옮겼다.

"......?"

칼은 문득 고개를 돌렸다.

죄수들 중 웬 흑발의 여인이 이쪽에 빤히 시선을 고정한 채 걷고 있었기에.

거리가 꽤 떨어져 있었지만, 또 죄수인 만큼 너저분한 꼴이었지만 그럼에도 강렬한 색기가 느껴지는 여인이었다.

칼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이 순간 초승달처럼 휘었다.

그 기분 나쁜 눈웃음에 칼은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대부분이 인간이길 포기한 짐승들이지. 괜히 봐서 좋을 건 없네."

옆에 있던 헨리가 혀를 찼다.

"방금 그 여자는 '루발리의 광녀'라고, 루발리 시와 그 인근에서 젊은 청년들을 수십이나 간살하고 각종 신체 부위를 수집한 죄목을 지녔지. 그중에 귀족가의 자제와 기사들도 여럿 섞여 있어 루게시움 수감이 결정된 거고."

"그렇군요."

그녀의 바로 뒤에 있는 죄수는 외팔이었는데, 돌연 그가 이쪽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눈에서 살기를 내뿜었다.

이번에는 칼이 아니라 헨리를 향한 것이었다.

"저건 내가 직접 잡아들였던 놈이군. 어린 소녀들만 노려서 연쇄 살인을 저지르고 고위 귀족가의 영애까지 건드린 놈인데..."

"저렇게 노려보는 걸 보니 팔은 경께서 직접 자르신 모양입니다."

"하하! 자네도 눈치가 빠르군 그래."

물론 죄수가 더 헨리를 노려보는 건 불가능했다.

곁에 있던 기사들에게 즉시 저지를 당했으니까.

"이 새끼가 감히 어딜!"

칼은 잠시 무자비한 구타의 현장을 구경하다가, 다시 헨리에게 물었다.

"그런데 저런 결박만으로 괜찮은 건가 싶습니다. 평범한 죄수들도 아닌데..."

[Lv.36]

[Lv.41]

[Lv.43]

슥 훑어서 보이는 레벨들만 해도 하나하나가 30은 가볍게 넘는 놈들이었다. 적어도 기사급의 무력을 지녔다는 뜻이다.

저깟 결박구들을 부수는 것쯤이야 일도 아닐 텐데.

심지어 행렬 가장 뒤쪽에 서서 심상치 않은 기세를 풍기고 있는 죄수의 레벨은 무려...

[Lv.51]

머리를 치렁치렁 늘어뜨린 괴인.

느껴지는 기운이 무인이나 마법사는 아니었다.

'주술사로군.'

50레벨이 넘는 주술사 죄수까지 있는 마당에 정말 괜찮은 건가?

헨리가 칼의 의문을 해결해주었다.

"설마 저 결박이 전부일 리가 있겠는가? 저들은 모두 '역류독'에 중독되어 있는 상태라네."

"아, 역시 그렇군요."

칼은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류독.

명칭 그대로 내부의 힘을 끌어올리려 하면 그것을 역류시키는 독이다. 오러, 마력, 주력, 그 종류에 상관없이.

배합에 따라 강도와 지속 시간은 제각각이지만, 저들에게야 당연히 꽤 상등품의 역류독을 썼을 터였다.

헨리가 호언장담하듯 말했다.

"애초에 그럴 일도 없지만, 만에 하나 저들이 결박에서 풀려나더라도 전혀 위협이 될 건 없으니 염려 말게. 역류독에 제대로 중독된 이상에야 그냥 평범한 사람이나 마찬가지니 말이야. 언제나 그랬듯 이번 운송도 별 문제 없이 무사히 마쳐질 거네."

< 선박의 죄수들 (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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