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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마법사로 살아가는 법-61화 (61/132)

< 천검성 (6) >

두 진영 간에 극명히 나뉘었던 분위기는 이제 반대로 뒤바뀌었다.

애초에 아키온이 등장했을 때부터 그랬지만 천검성의 젊은 무인들은 완전히 들뜬 상태였고, 알티우스 측 학파원들의 얼굴에는 하나같이 어둡게 그늘이 져있었다.

"말도 안 돼, 르믹이 이렇게나 쉽게..."

르믹의 처참한 패배는 그들에게 크나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대련이 진행되었던 양샹을 보면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아키온은 르믹의 마법을 대부분 회피하지 않았으니까.

공격을 그대로 허용하면서도 조금도 타격조차 입지 않은, 말 그대로 엄청난 위용을 보여주었으니까.

숙소 장원에서 있었던 잠깐의 충돌을 제외하고, 아키온 역시 다른 젊은 무인들처럼 마법사를 상대하는 건 이번이 최초였지만, 이렇듯 결과는 정반대였다.

압도적인 격의 차이 앞에선 경험의 차이조차 무용지물이었던 것이다.

"허..."

허스도 경악한 얼굴이었다.

그녀가 처음 등장했을 때부터 르믹의 패배는 그 역시 예상했지만, 이 정도 무위는 상상 이상이었다.

허스가 힐끔 칼이 있는 쪽을 돌아봤다.

마침 칼 역시 그를 바라보고 있었기에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칼은 싱긋 웃으며 입을 뻐금거렸다.

'그러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언제나 만약이라는 게 있다고.'

천검성으로 출발하기 전 허스를 설득하기 위해 했던 말이었다.

지금에서야 완벽히 맞아떨어지는 예언이 되어버린 상황.

만약 칼을 데려오지 않았다면 이번 대련은 처참히 패배했을 것이었다.

르믹에 이어 남은 열한 명 모두 줄줄이 그녀에게 나가떨어졌을 테니까.

'잘도 저런 괴물을 숨기고 있었군.'

성주와 똑같은 타오르는 듯한 적발.

그녀의 정체가 이 천검성의 후계자일 것임은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

이제야 시종일관 여유로웠던 천검성주와 간부 무인들의 태도가 이해되었다.

저런 괴물이 있으니, 남은 열아홉 명을 어떤 애송이들로 채우든 애초에 아무런 상관도 없었던 것이다.

"...음."

다시금 칼을 바라보는 허스의 눈빛에 염려가 차올랐다.

방금의 대련을 보니, 솔직히 칼조차 그녀에게서 승리를 거둘 수 있을지 확신이 들지 않았기에.

"기다리다 날 새겠군. 다음 안 나올 거냐? 뭣하면 그냥 한 번에 다 나와도 된다니까."

르믹까지 그렇게 패배한 마당에 그녀를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었다.

학파원들은 그녀의 말에 굴욕감을 느끼면서도 감히 연무장으로 발걸음을 옮기지 못했다.

'슬슬 나서볼까.'

칼은 바숀이 있는 쪽을 힐끔 바라봤다.

그가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고개를 끄덕이는 게 보였다.

마주 고개를 끄덕여주고 연무장으로 올라서려는데, 옆에 있던 샤론이 갑자기 어깨를 붙잡았다.

"......?"

고개를 돌리니 굳은 표정으로 아키온을 응시하고 있는 샤론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가 입을 열었다.

"내가 먼저."

"...방금 못 봤냐? 쟤 네 상대 아니야."

"알아. 그래도 해볼래."

칼은 샤론을 빤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뭐, 마음대로 해."

이쪽이 나서면 끝날 대련이다.

한 차례 양보해주는 것 정도야 못할 이유는 없었다.

칼은 도로 물러서서 연무장 위로 올라서는 샤론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어제 훈련을 도와줬을 때, 그녀의 실력이 얼마나 증진했는지 확인했었다.

비록 승리는 거두지 못하더라도 르믹보다는 좀 더 재밌는 대련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그래, 네가 나올 것 같더라."

아키온이 연무장 위로 올라온 샤론을 보며 고개를 까닥였다.

르믹과 더불어 그나마 가장 강한 기운이 느껴졌던 마법사였다.

"검, 뽑아."

샤론의 입에서 흘러나온 서늘한 말에 아키온이 입꼬리를 올렸다.

그녀는 여전히 허리춤의 검에는 손도 대지 않은 상태였다.

"너도 그 소리냐? 자존심 상하면 어디 능력껏 뽑게 만들어보라니까."

"......"

샤론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마력을 끌어올렸다.

아키온도 피식 웃으며 대련을 준비했다.

후우웅!!

이내 샤론의 주위로 돌풍이 몰아치는가 싶더니, 거친 칼바람이 전방을 향해 우수수 쇄도했다.

아키온이 가볍게 몸을 틀어 피했다. 마지막에 날아든 거대한 칼바람은 손으로 잡고 부숴버렸다.

"...오."

그녀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며 짧게 감탄을 터뜨렸다.

오러를 크게 끌어올리진 않았지만 막은 손이 제법 얼얼했다.

르믹의 것보다 훨씬 잘 응축된 마력이었다.

샤론의 마법이 곧장 이어졌다.

아키온이 이전의 대련과 똑같은 태도로 나올 것을 알았기에 방어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이었다.

화르륵!

마법진에서 뿜어져 나온 화염 줄기가 아키온이 있던 자리를 강타했다.

보통의 화염과는 무언가 다른 시뻘건 불꽃이었다.

아키온은 이미 옆으로 몸을 날려 피한 상태였다.

그러나 화염은 바닥을 강타하고 그대로 튕겨져서 다시 한 번 목표물을 찾아 날아들었다. 이번에는 아키온도 피하지 않았다.

퍼엉!!

오러를 두르고 내뻗어진 주먹이 풍압을 일으키며 불꽃의 중앙에 거대한 구멍을 냈다.

놀랍게도 불꽃은 그 상태로도 흐트러져 소멸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크게 덩치를 불리더니, 다시 한 번 꾸물꾸물 뭉쳐져서 아키온을 향해 쇄도했다.

비전 마법, 불사조의 숨결.

이 마법은 시전자의 지배력이 마력에 미치고 있는 이상 소멸하지 않는다.

한마디로 샤론이 정신을 잃거나 스스로의 의지로 마법을 거두지 않는 이상 불꽃이 꺼질 일은 결코 없었다.

비록 샤론의 경지가 낮아 본연의 힘은 완전히 끌어낼 수 없으나,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위협적인 마법이었다.

화르륵!!

화염은 이리저리 튕기고 나눠지며 끊임없이 아키온을 쫓았다.

어느새 수십 줄기도 넘는 화염이 연무장 전체를 어지럽게 휘몰아치며 그녀를 옥죄고 있었다.

단지 비전 마법이기 때문이 아니라, 전부 샤론의 뛰어난 제어 능력이 뒷받침이 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와, 이건 좀...'

마법이 더러운데?

이리저리 화염을 피하며 아키온이 느낀 감상이었다.

주먹을 휘둘러 흩어버려도 끝없이 재생해버리니, 뭐 이런 귀찮은 마법이 다 있나 싶었다.

'오러를 둘러서 방어했다간 붙어서 꺼지지도 않겠군. 확실히 위협적인 마법이긴 해.'

슬슬 피하는 것도 질리기 시작했기에 아키온은 그만 끝내기로 했다.

아무리 꺼지지 않는 불꽃이라 해도 그걸 시전하는 마법사가 쓰러지면 소멸할 수밖에 없을 터.

후욱!

한순간 방향을 튼 아키온이 순식간에 샤론의 앞까지 도달했다.

지금까지는 그저 장난에 불과했다는 걸 여실히 보여주는 광경이었다.

샤론이 어떤 마법을 펼치든, 아키온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뚫어내고 그녀의 지척까지 접근할 수 있었다.

그리고, 샤론 역시 그걸 알고 있었다.

쩌적!

갑작스레 지면에서 터져나온 냉기가 아키온의 다리를 얼려버렸다.

화염으로 쉴 새 없이 그녀를 몰아붙이며, 샤론이 다른 한편으로 은밀하게 주변에 펼치고 있던 빙결 마법 결계였다.

한 박자 늦게 인지한 아키온은 미처 피하지 못했다.

순식간에 뒤쪽으로 쫓아든 화염이 그녀를 뒤덮었다.

화아악!!

회오리처럼 몰아치는 시뻘건 홍염.

잠시 그걸 가라앉은 눈으로 지켜보던 샤론이 한숨을 내쉬었다.

곧 화염을 뚫고 아키온이 온몸이 불타는 채로 걸어나왔다.

자세히 보면, 전신을 둘러싼 오러 위로 불꽃이 붙어서 넘실거리는 것뿐이었지만.

"이거 그만 꺼. 나도 공격하기 전에."

"......"

샤론은 마법을 거두었다.

불꽃이 그녀의 얇은 오러막조차 뚫지 못하는 마당에, 더 이상의 대련은 아무 의미도 없었다.

"뭐, 아까 그놈보다는 훨씬 전략적이라 괜찮았어. 이 더럽게 안 꺼지는 불꽃 마법도 신기하고."

"......"

"그때 마법이 요란스럽기만 하고 형편없다고 말했던 건 취소하지. 마냥 그런 것만은 아니네. 생각보다 위협적인 것들도 많..."

"야."

샤론이 그녀의 말을 끊고서 말했다.

"적당히 까불어."

"...뭐?"

"세상에서 네가 제일 잘난 것 같지? 그 자만심 못 버렸다간 너도 꺾였을 때 충격이 클 거야."

그 말에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은 아키온이 곧 웃음을 터뜨렸다.

"패배자의 마지막 자존심인가? 귀담아들을 것도 없는 말이네."

샤론은 더 말하지 않고 터덜터덜 연무장을 빠져나왔다.

처음부터 정해진 결과였지만 그럼에도 무력감이 몸을 휘감는 건 별 수 없었다.

그때 어깨를 툭 건드리는 손길이 있었다.

바로 칼이었다.

"잘했어. 생각보다 훨씬 선전했네."

"......!!"

짧은 칭찬만 남기고 곧장 연무장으로 올라서는 칼이었다.

"......?"

샤론의 뒷모습을 보며 비웃음을 짓고 있던 아키온이, 칼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아직 더 남았나? 질질 끌 것 없이 그냥 나머지 전부 한꺼번에 올라오라니까..."

칼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렇지 않아도 대련은 이걸로 끝이다."

"그래? 그럼 너희가 졌다고 인정한다는 건가?"

"네가 나를 이길 수만 있다면 그렇겠지."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이었는지 아키온이 두 눈을 깜빡였다.

이내 헛웃음을 터뜨린 그녀가 머리를 긁적이며 칼을 바라봤다.

"이건 또 뭐라는 건지 모르겠네... 너 어디서 자다가 방금 여기 왔냐? 네가 나를 이기겠다고?"

"나야말로 뭘 그렇게 놀라는 건지 모르겠는데. 그럼 설마 고작 그 수준으로 평생 패배를 모르고 살 수 있을 줄 알았나?"

고작 그 수준?

기가 막힌 걸 넘어서서 슬슬 불쾌해지려던 아키온은, 그제야 묘한 분위기를 감지했다.

앞선 두 대련에서 그렇게 처참히 졌는데도 알티우스 진영의 학파원들이 포기한 기색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기대와 희망에 찬 눈빛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

아키온은 다시 칼을 바라봤다.

아무리 봐도 르믹이나 샤론만큼의 강한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어딘가 묘한 감각은 있었다.

처음 봤을 때는 기분 탓이라 여겼었지만 이제 보니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하... 그런 거야? 앞의 둘이 아니라 네가 진짜였단 말이지?"

칼은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턱을 까닥여 그녀의 허리춤을 가리켰다.

"검 뽑아."

그에 아키온이 도발하듯 입꼬리를 올리며 팔짱을 꼈다.

"싫은데? 어디 능력이 되면 뽑게 만들어보라니까?"

"그래?"

칼도 입꼬리를 올렸다.

"그럼 그러지, 뭐."

콰아앙!!

말이 끝남과 동시에 무형의 충격파가 섬전처럼 쇄도했다.

아키온이 눈을 부릅 뜨고 황급히 몸을 틀었다.

방금까지 그녀가 서있던 자리가 거인이 발을 내리찍은 듯 터져나갔다.

'뭐...'

전에 겪었던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위력과 속도.

생각을 더 이어갈 틈도 없었다.

옆으로 몸을 날려 지면에 착지하기도 전에, 어느새 또 다른 충격파가 덮쳐들고 있었으니까.

"......!!"

이건 못 피한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검을 뽑아들어 마력을 베어냈다.

하지만 거기서 끝난 게 아니었다.

그녀의 감각이 다시금 경보를 울렸다.

앞선 두 공격과는 달리 거대한 마력의 유동이 칼에게서 느껴지고 있었다.

【워해머 스트라이크】

마력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망치의 형상이 이쪽을 향해 순식간에 내리쳐졌다.

이번 대련에서 처음으로, 아키온도 전력으로 오러를 끌어올렸다.

검날을 두껍게 덮고 빚어진 선명한 핏빛 검기가 망치를 항하여 마주 휘둘러졌다. 그리고...

쨍그랑!!

그녀의 검이 산산히 부서져나갔다.

< 천검성 (6)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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