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검성 (3) >
"...예?"
칼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바숀의 요구가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던 탓이다.
"다시 말해줘야 하는가? 이번 대련에서 내 딸에게 패배를 안겨주라 했네. 철저히, 일말의 여지도 없는 완벽한 패배를 말이야."
"아니, 그러니까 왜... 어째서 말입니까?"
순간 머릿속에 그런 생각까지 스쳤다.
자식에게 권력의 위협을 느껴, 대련이라는 명목으로 미리 싹을 짓밟으려는 게 아닌가 하는.
물론 이어진 말에 바로 오해라는 걸 깨달았다.
푹 한숨을 내쉰 바숀이 심려가 섞인 눈빛으로 천장을 올려다봤다.
"녀석은 하늘이 내린 무재를 타고났네."
"......?"
"그래서 젊은 나이에 지나치게 높은 경지에 올라버렸어. 바로 자네처럼 말이지. 아비이자 이 천검성의 주인으로서 후계의 대성은 더할 나위 기꺼운 일이긴 하다만... 그게 또 마냥 그렇지만도 않더군. 한 가지 경시할 수 없는 문제가 생겼거든. 그게 뭐일 것 같은가?"
경시할 수 없는 문제라.
칼은 금세 답을 떠올렸다.
녀석이 오늘 숙소 장원에 다짜고짜 쳐들어와 보였던 태도를 생각하면 뻔한 답이었다.
"오만함... 같은 게 아닐까 싶습니다만."
"맞네. 더 포괄적으로 말하자면 자신과 대등한 상대가 없는 것에서 오는 허무함과 공허함이지. 그것들이 오만함과 나태함 등을 불러오는 것이고. 무인으로서 아주 치명적인 감정이 아닐 수가 없지."
바숀이 미간을 좁히고서 말을 이었다.
"어려서부터 패배라는 걸 조금도 모르고 자란 녀석이네. 처음 검을 잡았던 그때부터, 이미 또래에는 적수가 없었지. 열 살이 됐을 때는 비록 최하급이라지만 성의 정식 무인을 꺾었고, 몇 년이 더 흘러 열 다섯이 됐을 때는 중급 무인들 사이에서도 녀석을 감당할 이가 없었네.
그리고 성년이 되기 전에 기어코 상급 무인까지 넘어섰으니... 음, 이렇게 말하면 자네는 잘 모르겠군."
칼은 고개를 저었다.
"충분히 알아들었습니다. 그리고 이미 만나봐서 설명해주지 않으셔도 알고 있습니다."
"...뭣? 만났다고? 대체 언제?"
바숀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칼은 오늘 낮에 있었던 일을 그에게 들려주었다.
"녀석이 또 그런 짓거리를..."
바숀이 작게 혀를 차며 말했다.
"손님을 초대해놓고 실례를 저질렀군. 워낙에 제멋대로인 녀석이라 말이야. 아무튼... 그래서 어떻던가?"
그녀에 대한 평가를 묻는 것이었다.
칼은 한 치의 과장 없이 느꼈던 그대로의 감상을 말해주었다.
"괴물이더군요. 대륙 전체를 뒤져도 비슷한 나이대에 적수를 찾기 힘들 겁니다."
그 대답에 바숀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나도 지금껏 그런 줄로만 알았지. 그런데 아니었지 뭔가!"
그의 시선은 흔들림 없이 칼을 향해서 고정되어 있었다.
"역시 세상은 넓고 많은 천재들이 존재한다는 걸 새삼 실감하게 되네. 아까 자네를 처음 마주했을 때, 내가 얼마나 경악했는지 자네는 모를 거야."
"...절 너무 높게 평가하시는 것 같습니다."
약간 민망해진 칼이 목덜미를 긁적였다.
"아무튼, 제가 대련에서 그녀를 꺾어버리길 바라시는 거군요."
"하하! 못하겠다는 말은 안 하는군?"
"......"
"역시 내 눈이 틀리진 않은 모양이야. 그래, 압도적이면 압도적일수록 좋지. 체면 같은 건 신경도 쓰지 말고 완벽하게 짓눌러버리게. 그거면 됐네."
아니, 아무리 그래도 자식이라면서.
나중에 괜한 원망을 듣는 건 아닐까 순간 걱정이 들었지만, 기대감 넘치는 그의 눈빛을 보니 쓸데없는 걱정인 듯 싶었다.
어쨌든 차원의 조각을 얻을 수만 있다면야 뭐가 됐든 거절할 이유가 없는 제안이었다.
"잘 알겠습니다."
바숀이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칼은 문득 궁금해져서 물었다.
"그런데 그녀의 이름이 어떻게 됩니까?"
그 정도 되는 인물이 기억에 없는 것이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바숀이 대답했다.
"아키온이라고 하네."
"......!!"
칼은 속으로 경악했다.
아키온.
그 이름이라면 분명히 기억 속에 있는 이름이다.
단, 천검성주가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 파격적인 이명을 가진 이름이었다.
'...검성 아키온.'
현 대륙에 단 셋밖에 존재하지 않는 검성.
그녀는 훗날 네 번째 검성좌를 차지할 인물이었다.
칼은 다시 눈앞의 바숀을 바라봤다.
[Lv.68]
[천검성주]
68레벨.
어마무시한 수치지만 그는 아직 검성의 경지에는 오르지 못했다.
그리고 앞으로 남은 생에 있어서도 아마 도달하지 못할 것이었다.
바숀 핵서라는 인물은 칼의 기억 속에 검성으로서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70레벨까지 고작 2레벨의 차이일 뿐이지만, 그 격차는 고작 숫자 2로 표현되기에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아득한 것이었다.
'하지만 바숀과 달리 아키온은 도달했다는 거군.'
온갖 괴물들이 넘쳐나는 이 세계에서도, 절대자라 칭해지기에 부족함이 없는 검성의 경지에.
천검성의 후계자인 아키온 핵서는 아마 미래의 검성 아키온이 맞을 터였다.
설마 이런 엄청난 재능에, 똑같이 아키온이라는 이름을 지닌 인물이 또 존재하지는 않을 테니까.
그녀에 관한 일화라면 수도 없이 많았다.
특히 흑마법과의 대전쟁이 다시 한 번 발발했을 때, 그녀는 누구보다도 많은 수의 흑마법사와 악마들을 처단했다.
최상급 악마 베가도스와 사흘 밤낮에 걸친 격전을 벌여 끝내 목을 베어버린 건 훗날 수많은 음유시인들의 입에 수없이 오르내릴 그녀의 전설적인 일화 중 하나였다.
'그런데 대체 왜?'
자연스레 의문이 뒤따랐다.
성주가 되기는 커녕, 그녀가 천검성과 관련된 인물이라는 정보는 전혀 기억에 없었으니까.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혹시 나중에 어떤 불화가 생겨 천검성을 나오게 된 건가?
그도 아니면 그녀 스스로의 의지로 천검성을 나온 걸까.
현재로선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니 알 수 없었지만, 그녀의 자유로워 보이던 성향을 생각하면 후자도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일이었다.
어쨌든 칼은 급격히 부담히 차오르는 걸 느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거 내가 너무 흐름을 바꿔버리는 건 아닌가?'
그녀는 함부로 간섭하기에 비중이 너무 큰 인물이었다.
무엇보다 미래의 대 흑마법전에서 누구보다 큰 역할을 해줄 이였다.
이번 대련에서 바숀의 요구대로 큰 패배를 안겨주었다가 미래가 뒤틀리기라도 하면...
'...뭐, 쓸데없는 걱정이지. 이미 간섭한 일들이 얼마인데.'
칼은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이 세계에 떨어져서 그간 뒤바꾼 흐름들이 한두 개도 아니고.
이미 미래는 기존에 알고 있던 스토리에서 뒤틀릴 대로 뒤틀리고 있었다. 굳이 이제 와서 신경 쓸 필요가 있겠는가.
이후에 칼은 바숀과 이런저런 대화를 좀 더 나누다가 숙소로 돌아갔다.
'검성, 흑마법사, 차원의 조각...'
이런저런 상념들로 깊어가는 밤.
칼은 침상에 누워 뜬 눈으로 천장을 바라보다 어느새 잠들었다.
간만에 꾼 꿈에서 그는 지구의 거리를 걷고 있었다.
* * *
아침이 밝고 칼은 방에서 나왔다.
식사는 어제와 같이 따로 천검성 측의 사람들이 따로 찾아와 준비해주었다.
대련까지는 이제 하루 남았다.
오늘까지만 휴식을 취하고 바로 내일 방문의 본 목적인 친선 대련이 시작되는 것이었다.
대련에 나서는 학파원들은 각자 나름대로 준비를 행하고 있었다.
명상을 한다거나, 땀을 뻘뻘 흘리며 서서 마력을 제어하고 있거나, 서로 간단하게 마법전을 펼치는 모습들이 보였다.
"흠..."
혼자만 딱히 할 일이 없던 칼은 장원 이곳저곳을 구경하다가 도로 숙소 건물로 돌아왔다.
그런데 건물 내에 있던 연무장에 어느새 누가 나와있는 것이 보였다.
샤론이었다.
그녀는 공중에 수많은 마력구를 띄워놓고 제어 훈련을 하고 있었다.
완전히 집중하고 있는지 이쪽이 온 것도 눈치채지 못한 모양새.
"...후우."
이윽고 그녀가 숨을 내쉬며 마력구들을 없앴다.
그리고 뒤늦게 자신을 지켜보고 있던 칼을 발견하고 흠칫 놀랐다.
"아, 미안. 방해하려던 건 아니었어."
칼은 미안하다는 듯 손을 휘저어주고는 지나쳐 자신의 방으로 올라가려 했다.
"잠깐... 만."
샤론이 모기만 한 목소리로 칼의 걸음을 붙잡았다.
칼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봤다.
"방금 나 부른 거냐?"
"......"
미묘하게 찡그린 얼굴로 칼을 바라보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대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
"네가 쓸데없이 학파 바깥을 나다니는 동안, 나는 계속 수련만 했어. 자는 시간도 절반 가까이 줄이고 연마실에 박혀서 죽어라 마법 수련만 했다고."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깨달은 칼은 팔짱을 끼고 고개를 기울였다.
"그래서?"
"...이런 건 불공평해. 대체 왜 좁혀지지가 않는 거야? 넌 그동안 뭘 했길래 벌써 5서클에 도달한 거냐고. 나는, 나는..."
푸념하듯 내뱉던 그녀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말하다 감정이 북받쳤는지 물기가 섞여 떨리기까지 했다.
'어떻게 벌써 5서클에 도달했냐라...'
칼은 샤론을 빤히 바라보며 생각했다.
진실을 안다면 그녀가 자신 같은 가짜에게 열등감을 느낄 이유 따윈 전혀 없을 텐데 말이다.
이건 정상적인 재능이 아닌, 그저 시스템의 힘일 뿐이다.
레벨이 오르면 그에 따라 서클의 능력이 상승한다.
마력량, 캐스팅 능력, 제어 능력 등등, 전부 레벨이라는 수치에 따라 게임 스탯처럼 상승할 뿐이었다.
물론 이러한 사실들을 줄줄이 늘어놓을 수는 없는 법이다.
믿고 말고는 커녕 제대로 이해하기나 하겠는가.
대신 칼은 그녀에게 좀 더 도움이 될 만한 쓴소리를 해주기로 했다.
"억울하냐? 날 따라잡을 수가 없어서?"
"......"
"근데 내 생각에 말이지, 너는 딱히 억울해할 자격이 없어."
예상치 못한 말이었는지 샤론의 얼굴에 당혹감이 차올랐다.
칼은 쯧쯧 혀를 차며 말을 이었다.
"타고난 마법적 재능, 알티우스 원로의 손녀라는 최상의 배경. 적어도 너는 전부 다 갖췄잖아. 지금껏 얼마나 많은 학파원들이 너를 올려다보며 같은 기분을 느꼈을까? 네 반의 반도 안되는 자질을 가진 마법사들은 얼마나 큰 박탈감을 느꼈을 것 같아?"
"......"
"몇 년 피나는 노력을 하며 마법을 수련해도 소규모 마법 학파에조차 들어가지 못하는 마법사들도 세상엔 넘쳐나겠지. 재능이 부족해서, 그리고 배경이 형편없어서. 그런데 너는 둘 다 가진 상태로, 이제 고작 몇 개월 해놓고서 아직도 못 따라잡았다고 징징대고 있네."
샤론의 얼굴이 시뻘겋게 물들었다.
뭐라 반박하고 싶었지만 입술만 달싹일 수밖에 없었다. 틀린 게 없는 말이었으니까.
"뭐, 내가 이런 말을 할 처지도 아니긴 하지만... 결국 다 상대적일 뿐이란 얘기지. 그렇게 억울해하지 말라고. 내가 너한테 어떤 모습으로 비춰지는진 몰라도, 남들이 널 보는 모습 역시 별반 다를 것 없지 않겠어?"
"......"
"세상은 원래 불공평해. 너도 그동안 그걸 누려왔으면 이제라도 그 이상으로 노력해보든가.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날 따라잡을 수도 있겠지."
물론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겠지만.
쓸데없는 뒷말은 삼킨 채 칼은 다시 계단을 올라가려 했다.
그러나 다시금 작게 들려온 그녀의 말에 또 멈춰설 수밖에 없었다.
"...훈련."
"뭐?"
"훈련 도와달라고! 너 어차피 남아도는 게 시간이잖아!"
그렇게 소리치는 샤론의 얼굴은 방금보다 훨씬 붉어진 상태였다.
잠시 그녀를 빤히 바라보던 칼은 피식 웃으며 계단을 도로 내려왔다.
적어도 내일 대련 때까지 시간 때우기로는 적당하다 싶었다.
< 천검성 (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