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검성 (1) >
천검성으로 이동하기까지 이틀의 여유 시간.
칼은 우선 할 일부터 마쳤다.
지부 내 마학관에 들러 마도구의 술식 코드를 고치고, 다시 마장간을 찾아가서 금이 간 부분까지 수리했다.
남은 시간 동안은 지부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구경했다.
돌아다니다가 아는 얼굴을 마주쳐서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아, 선배님!"
라일은 여전히 그렇게 뭐가 바쁜지 짐을 한가득 들고 복도를 총총 걷고 있었다.
그녀는 이미 여러 번 했던 감사 인사를 다시 한 번 하고는 이야기를 하다 떠나갔다.
중앙탑 입구에선 라판과 다시 마주치기도 했다.
그는 칼을 발견하고서 어색하게 인사를 건냈다.
"어, 음... 반갑네."
칼도 피식 웃으며 답했다.
"별로 반가우시진 않을 것 같은데요. 그 녀석은 괜찮습니까?"
르믹을 말하는 것이었다.
라판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얌전히 방에서만 지내고 있네. 자네에게 패한 이후로 충격이 큰 것 같다만."
칼은 반사적으로 당신은 괜찮냐고 물을 뻔했다가 말았다.
그걸 눈치챘는지 라판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사실 충격으로 따지면 내가 더 크기는 하지. 설마 이 나이를 먹고 훨씬 젊은 후배에게 패배할 줄은 몰랐으니까."
"살다 보면 이런 저런 일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굳이 선배님이 아니라 다른 이들이었어도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뭔가 조금 이상한 위로였지만 다행히 라판이 기분 나쁘게 듣지는 않았다.
몇 마디를 더 나누다 보니 그도 이내 떨떠름한 기색을 완전히 털어냈다.
"그때 자네를 그런 식으로 몰아붙였던 건 미안했네. 그 아이가 전투부에 있어선 무엇보다 중요한 인재이다 보니..."
"괜찮습니다. 저도 조금 심하긴 했었죠."
"아, 자네도 이번 천검성행에 함께하게 됐다고 허스 원로님께 들었네. 이곳 지부에 방문한 목적이 그거였나?"
마도구를 고치러 왔다가 상황이 우연찮게 맞아떨어졌을 뿐이지만, 칼은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라판이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자네가 있으니 이번 대련은 질 수가 없겠군. 아무리 천검성이라도, 설마 그쪽의 젊은 제자들 중 자네에 버금가는 천재가 있을 리는 없지."
누가 들으면 낯이 뜨거워질 정도의 찬사였지만, 라판의 말은 과장 없는 그대로의 사실이기도 했다.
칼도 잘 알고 있었다.
스스로의 존재가 타인이 보기엔 비상식 그 자체라는 걸.
비슷한 나이대에, 시스템의 비호를 받는 자신과 비교될 천재가 존재하는 건 아무래도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곧 시간이 흘러 떠날 때가 되었다.
천검성까지의 안내는 제안을 전하려 내려왔다가 돌아가지 않고 남았던 두 무인이 맡았다.
"이제 슬슬 출발하지."
성문 앞에 모여선 학파원들이 곧 말을 몰고 도시를 빠져나갔다.
천검성이 위치한 칼날 산맥을 향해서.
* * *
칼날 산맥의 어느 숲 지대.
"......"
누군가 멍하니 바위에 누워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불꽃처럼 이글거리는 적발이 인상적인 여인이었다.
그녀의 갈색 눈동자가 떠다니는 구름들을 느릿하게 훑었다.
그러다가 이내 하품을 쩍, 지루함이 여실히 드러나는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폈다.
"아... 심심해."
여인의 이름은 아키온 핵서.
천검성의 하나뿐인 후계자였다.
해가 중천에 뜬 지금 시간이면 그녀와 같은 배열의 무인들은 성내에서 열심히 수련을 하고 있을 것이었다.
오직 그녀만 바깥을 나돌며 이렇게 시간을 축내고 있는 것에 별 대단한 이유는 없었다.
수련이고 뭐고 다 귀찮았으니까.
그녀는 언젠가부터 더 높은 경지로의 성취에 대한 갈망을 잃어버렸다.
주위를 둘러보면 항상 저멀리 아득히 뒤쳐진 이들뿐이니 의욕이 나려야 날 수가 없었다.
아키온이 공허한 눈빛으로 숲의 한편을 바라봤다.
곧 그곳에서 누군가 달려오며 모습을 드러냈다.
"...어이! 아키온!"
천검성의 무인이었다.
또한 그녀와 같은 배열인 중급 무인이기도 했다.
아키온이 귀찮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여긴 왜 왔냐, 피터."
"하, 그게 니가 할 말이야? 너야말로 또 여기 팔자 좋게 늘어져있었냐! 이 위험한 곳에!"
"나한테는 안 위험하거든. 약해빠진 너한테나 그렇지."
틀린 말이 아니었기에 그의 입이 잠시 다물어졌다.
그러다 돌연 날카로운 눈빛으로 옆쪽의 수풀을 쳐다봤다.
"......"
묘한 정적.
아카엘도 고개를 돌려 피터의 시선이 향한 쪽을 쳐다봤다.
커흥!
섬뜩한 괴수성과 함께 거대한 흑호가 수풀에서 튀어나와 피터를 향해 돌진해왔다.
칼날 산맥의 중상급 몬스터인 크락이었다. 설마 입부에서부터 마주할 줄은 몰랐다.
피터가 기겁하며 피하려는데, 그보다 훨씬 빠르게 쏘아져온 무언가가 크락의 머리를 터뜨려버렸다.
퍼어엉!!
"......"
순식간에 머리를 잃고 싸늘한 사체가 되어버린 크락.
피터는 어느새 그 앞에 서서 피 묻은 손을 무심하게 털어내고 있는 아키온을 바라봤다.
그 먼 거리에서 순식간에 여기까지 도달하여 크락을 일격에 죽여버린 것이었다.
천검성의 상급 무인들도 상대하는 데에 꽤나 애를 먹는 중상급 몬스터를.
'역시 이 녀석은...'
피터는 찌릿찌릿 올라오는 전율을 느끼며 아키온을 빤히 응시했다.
그 역시 젊은 무인들 사이에서 천재라 불리며 주목받는 인재였지만... 그녀는 완전히 격 자체가 달랐다.
이렇게 멋대로 바깥을 나돌아도 누구도 그녀에게 뭐라 할 수 없는 이유였다.
잘 털어지지 않는 끈적한 피에 아키온이 혀를 차며 말했다.
"그래서 왜? 너도 갑자기 모험심이 솟구쳐서 여기저기 나다니고 싶어졌어?"
"...설마 그럴 리가 있겠냐? 너 없는 거 들켰으니까 빨리 돌아오라고 전하러 왔다. 그리고 성주님께서 말씀하신 게 있는데..."
이어지는 설명을 들은 그녀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뭐? 마법사?"
* * *
성으로 복귀한 그녀는 곧장 성주탑으로 불려갔다.
못마땅한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시선을 피하며, 호통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릴 준비를 했다.
"이야기는 들었더냐?"
그러나 바숀의 입에서 튀어나온 건 노호성 대신 물음이었다.
뭘 물어보는 건지 바로 이해한 아키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 곧 바깥에서 마법사 놈들이 대련을 하려 찾아올 거라면서요. 알리우스랬나?"
"알티우스다. 대륙에서 가장 명망 높은 마법 학파들 중 하나지."
그녀가 무성의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뭐가 됐든 아무래도 좋다는 듯한 태도였지만, 바숀은 그녀의 얼굴에 약간의 호기심이 떠오른 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
평생을 칼날 산맥 아래로 내려가본 적이 거의 없는 그녀에게 마법사란 미지의 존재였다.
예상대로 나쁘지 않은 반응에 바숀은 속으로 자그마한 쾌재를 불렀다.
"중급 무인들을 스물 정도 선발해서 친선 대련을 진행할 예정이다. 마법사를 상대해본 적이 없는 젊은 녀석들을 내보내면 상당히 좋은 경험이 되겠지."
"그래서 저도 거기에 끼라는 거네요."
"그래. 싫으냐?"
그녀는 지금까지 말로만 전해들어온 마법사라는 존재에 대해 잠시 상상했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불을 피워내고 전기를 뿜어대고, 온갖 괴상한 술수를 부리는 이들이랬던가.
성내에 나이가 꽤 있는 무인들 중에는 그들을 마법쟁이라고 부르며 욕하는 자들도 몇몇 봤었다.
직접 상대해보면 제법 재밌을 것 같기도 했다.
아키온이 머리를 긁적이다 답했다.
"한번 보고 재밌어 보이면 하죠, 뭐."
수락이나 마찬가지인 답이었기에 바숀도 별달리 말을 덧붙이진 않았다.
"흐음."
이야기를 마치고 성주탑을 빠져나오는 그녀의 눈빛에서 미약한 흥미와 기대감이 일렁였다.
"마법사라..."
* * *
알티우스가 도시를 떠나 칼날 산맥에 도착한 건 대략 일주일 정도가 지난 뒤였다.
이제부터의 안내는 천검성의 무인들의 몫이었다.
"개척로라도 길이 무척 험악하니 발을 헛디디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산맥을 오르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아, 학파원들은 금세 그 경고를 뼈저리게 실감할 수 있었다.
이게 정말 오르는 길이 맞기는 한 건지, 산세가 무척이나 가파르고 옆쪽으로는 절벽들 천지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악명이 높은 이유를 알겠군. 이런 곳에서 사람이 대체 어떻게 지내는 거야?"
한 학파원이 앞서서 쭉쭉 나아가는 천검성의 무인들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이대로 따라가면 정말 성이 나오기는 하는지 의심까지 차오를 지경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지형에 성채가 세워져 있을 거라고는 상상이 잘 가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그렇게 이틀 정도 산을 오르자 마침내 그들은 서서히 마주할 수 있었다.
봉우리의 정중앙에 우뚝 솟아있는 거대한 성채의 모습을.
몇몇 학파원들이 탄성을 터뜨리며 그것을 바라봤다.
안내하는 무인들이 작게 웃으며 말했다.
"이제 거의 다 왔군요.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하셨습니다."
그렇게 반나절이 지나지 않아 마침내 천검성의 입구에 도달할 수 있었다.
쿠구궁...
거대한 성문이 서서히 열리며 광할한 성 안쪽의 풍경이 드러났다.
성대한 환영 인사 같은 건 없었다.
그에 젊은 학파원들은 조금 얹짢은 기색이었으나, 나이가 찬 이들은 무파의 성격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기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
잠시 입구에 기다리고 서있자니 안쪽에서 일련의 무인들이 다가왔다.
가장 선두에 서있던 민머리의 노인이 인사를 건냈다.
"천검성에 오신 걸 환영하오."
노인을 자신을 천검성의 대원로인 '카르밴'이라고 소개했다.
거의 천검성주 다음이나 마찬가지인 거물급 인사였다.
성주가 지금 위험 지대들에 대한 개척 문제로 출성 중이니, 그가 대신 대표로 맞이하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이후 허스와 대화를 좀 더 나누다가, 학파원들은 천검성에 머물 동안 지낼 곳으로 안내받았다.
이번 대련에 참여할 젊은 마법사들은 전부 같은 숙소로 안내받았다.
성내의 변두리에 위치한 작은 장원 안으로 들어서며 그들은 감탄을 터뜨렸다.
"오, 뭐야. 엄청 넓잖아?"
"이런 형태의 건물은 처음 보는데."
칼도 한편으로 조금 놀라고 있었다.
'이건 동양풍의 건물 양식에 가깝네.'
장원의 중앙에 가장 큰 건물이 하나 있었고, 양옆으로 작은 건물들이 하나씩 더 붙어있었다.
각자 머물 곳을 정하려던 학파원들이 칼의 눈치를 봤다.
그들 역시 칼과 르믹 사이에 있었던 일은 전부 알고 있었다.
칼은 뒤쪽에 선 르믹을 힐끔 돌아봤다.
움찔 놀란 그가 뭘 보냐는 듯 칼을 노려봤다.
그때 있었던 일 이후로 더 이상의 충돌은 없었지만, 시선이 마주칠 때면 르믹은 항상 이쪽을 노려보곤 했다.
칼은 피식 웃으며 학파원들에게 말했다.
"전 옆에 붙어있는 건물에서 머물 생각이니 눈치들은 그만 보시죠."
칼이 왼쪽의 건물을 가리키자 학파원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다들 중앙의 큰 건물에서 지내고 싶었던 탓이다.
그렇게 다들 각자 고른 건물들로 걸음을 옮기려 했다.
칼은 슬쩍 자신을 뒤따라오는 샤론을 바라봤다.
굳이 허스 원로와 함께 머물지 않고 이곳까지 따라온 그녀였다.
"넌 중앙 건물로 안 가냐?"
칼이 묻자 그녀가 움찔 놀라며 멈춰섰다가, 곧 쏘아붙이듯 말했다.
"뭔 상관이야? 신경 꺼."
칼은 어깨를 으쓱이고는 다시 발걸음을 옮기려 했다.
그때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야 도착했나. 다들 여기 모여있었네."
학파원들이 모두 멈춰서서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장원의 담벼락 위에 누군가 앉아서 이쪽을 훑어보고 있었다.
"......?"
적발의 젊은 여인.
정체를 알 수 없는 그녀가 이내 장원 안에 안착하더니, 터덜터덜 발걸음을 옮겨 다가왔다.
"니들 맞지? 이번 대련하러 왔다는 마법사들이?"
< 천검성 (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