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알티우스의 소집 (5) >
허스가 잠시 눈을 깜박이다 물었다.
"천검성으로 함께 가고 싶다고?"
"예."
"이유가 뭔가?"
솔직하게 말할 수는 없었기에 칼은 그럴듯한 핑계를 댔다.
"단순한 호기심입니다. 천검성이라면 대륙의 5대 무파 중 하나니까요. 이런 기회가 아니면 또 언제 그곳에 가보겠습니까?"
그 대답에 허스가 인상을 찌푸렸다.
"이미 구성원은 다 정해졌네. 고작 호기심 때문에 그걸 어그러뜨리고 자네를 대열에 포함시키라는 건가?"
"대열을 어그러뜨리다뇨? 기껏해야 사람 한 명 더 끼는 건데, 굉장히 큰일인 것처럼 말씀하시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그거야..."
네놈이 영 마음에 들지 않으니까.
뒷말을 삼킨 채 칼을 못마땅하게 바라보는 허스였다.
칼이 넉살 좋게 웃으며 말했다.
"원하신다면 친선 대련에 저도 참여하겠습니다."
"...대련의 결과가 어떻든 마석 광산의 유통로는 이미 내어받기로 했지. 대련 때문이라면 자네를 굳이 참여시킬 이유는 없네."
"음, 그러십니까?"
칼이 여전히 넋이 나간 채 있는 샤론을 힐끗 바라봤다.
"한데 그런 것치고는 얘도 그렇고, 아까 그놈도 그렇고, 인선이 상당히 공들여서 꾸려진 것 같습니다만."
"......"
"천검성 측의 의도가 뭔지 정확히 모르니, 우선 대련은 이기고 보겠다는 게 알티우스의 입장 아닙니까?"
돌아가는 상황을 바로 꿰뚫어본 칼의 통찰력에 허스는 상당히 놀랐다.
칼이 다시금 싱긋 웃으며 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를 데리고 가서 손해 보실 건 없을 것 같습니다."
"...자네가 아니어도 대련은 우리가 승리할 걸세."
"예, 물론 그렇겠지요. 하지만 세상 만사에 언제나 만약이라는 게 있는 법 아니겠습니까."
끄응!
허스가 앓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개인적으론 썩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었지만, 칼의 말대로 그를 이번 천검성행에 포함시켜 나쁠 건 하나도 없었다.
대련이 어떤 형식으로 이뤄질지는 아직 모르지만, 어쨌든 5서클인 칼의 존재는 그 무엇이 됐든 확실한 1승을 챙길 사기적인 수단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결국 허스의 입에서 허락이 떨어졌다.
"좋네. 대열에 포함시키도록 하지."
"하하, 감사합니다."
"...능청스러운 것이 제 스승보다는 어째 세인달 원로를 더 닮은 것 같군."
재차 튀어나온 세인달의 이름에 칼은 그제야 아차 싶었다.
천검성 이야기에 정신이 팔려서 그의 안부를 묻는 걸 깜빡했던 탓이다.
"세인달 원로님께서는 잘 계십니까?"
"빨리도 물어보는군. 그러고 보니 자네가 본원에 들렀다가 간 뒤로는 연구실에 박혀서 통 모습을 안 비추는 듯하던데..."
그 말에 칼은 세인달이 제론의 연구를 이어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제 와서 좀 궁금해지긴 하네. 제론이 남긴 연구 자료가 과연 뭐에 관한 거였을지.'
메인 퀘스트와 엮였으니 분명 보통 건 아닐 텐데.
칼은 이내 그에 관한 상념을 접었다.
생각한다고 알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중요한 문제도 아니었으니까.
지금은 그저 차원의 조각들을 찾는 것에만 집중하면 될 뿐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그 두 사람은 잘 도착했으려나?'
플러랜과 배럿, 두 사제의 모습도 순간 머릿속에 스쳐지나갔다.
빠르면 아마 지금쯤 본원에 도착했을 것 같기도 한데.
'뭐, 남은 일은 알아서 잘들 하겠지.'
이후 몇 가지 이야기를 더 나눈 뒤 대화는 마무리되었다.
"칼날 산맥으로는 언제 출발합니까?"
"모레 할 예정이네. 그때까지 준비하거나 챙길 게 있으면 늦지 말고 해두게."
허스 원로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칼은 꾸벅 인사를 건내며 뒤따라 일어나는 샤론을 쳐다봤다.
[Lv.48]
[알티우스 원로의 제자]
확실히 그녀는 이전에 봤던 때에 비해서 눈에 띄게 성장하긴 했다.
이제 2레벨만 더 오르면 5서클로 오를 수 있는 수준이었으니까.
물론 그 2레벨을 올리기가 엄청 힘든 일이겠지만.
"너도 수고해. 더 열심히 수련하고."
"......!!"
그녀가 부들부들 떨며 칼을 노려봤다.
칼도 말하고서 잠깐 아차 싶었다.
그냥 평범하게 인사한다는 게 어쩐지 이게 너와 나의 수준차이라고 농락하는 것처럼 전해졌기 때문이다.
'뭐, 자극 받으면 실력 향상에 더 좋겠지.'
허스가 마지막으로 못마땅하게 칼을 노려보고선 손녀를 이끌고 떠났다.
홀로 남은 칼은 팔짱을 끼고 의자에 몸을 기댔다.
'이걸로 천검성행 문제는 해결됐고.'
남은 건 이제 천검성주를 독대해서 차원의 조각을 받아내는 것뿐이었다.
칼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대련 따위에 관심은 없었지만, 이번 판을 벌인 천검성주에게는 관심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대체 뭘까? 그가 알티우스에 친선 대련을 제안한 이유가?
* * *
칼날 산맥.
그 무시무시한 지명답게 산맥 전체에 걸쳐 삐죽삐죽 솟아난 암석들은 마치 거대한 칼날이 역으로 박힌 모습을 연상케 했고, 깎아 자른 듯한 협곡과 절벽들이 지처에 널려 험악함을 더했다.
인간의 몸으로는 도저히 등반이 불가능할 것 같은 이곳에도 그나마 평탄한 개척로는 몇몇 존재했다.
그중 하나를 따라서 오르면 우뚝 솟아난 봉우리에 세워져 있는, 거대한 성채의 모습이 드러났다.
천검성.
대륙의 5대 무파 중 하나.
성의 중앙에 위치한 성주탑 꼭대기에 한 적발의 사내가 뒷짐을 지고 서서 전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은연중에 흘러나오는 기세에선 정상에 선 자 특유의 패도적인 기운이 느껴졌다.
그가 바로 현 대륙의 천검성주인 바숀 핵서였다.
"성주님, 보고드립니다."
어느새 뒤쪽으로 다가온 무인 하나가 예를 취한 뒤 입을 열었다.
"알티우스 측에서 친선 대련 제안을 수락했다고 합니다. 다킨 남매가 남았다가 그들을 안내해서 오기로 했습니다."
"그런가? 수고했다."
고개를 끄덕인 바숀이 피식 웃었다.
"노친네들이 고민 꽤나 했겠군. 이것저것 쓸데없는 오해를 많이 샀겠어."
무인이 조심스레 말을 받았다.
"천검성이 알티우스를 꺾는 걸 시작으로 대륙에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려 한다거나... 아마 그런 식으로 여기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렇겠지. 그래야 그쪽에서도 대련에 진심을 다할 테고."
알티우스가 학파에서 최고라 일컬어지는 인재들을 데려와, 이번 친선 대련에 최선을 다하여 임하는 것.
애초에 그러길 바라고 한 제안이었다.
물론 대련에서 승리하면 광산의 유통로를 내어주겠다는 식으로 압박을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알티우스는 대륙 제일의 마법 학파 중 하나.
아무리 천검성이 속세와 폐쇄적인 집단이라도, 그렇게 대놓고 알티우스와 대립각을 세우면 조금 곤란해질 수 있었다.
이번 친선 대련의 진정한 목적.
알티우스의 추측은 틀렸다.
천검성의 출성을 위한 준비? 규모 확장?
바숀은 그딴 것들에 관심도 없었다.
전대 성주들 중에는 몇몇 그런 야망을 꿈꿨던 이들도 있었지만, 적어도 현 천검성주 바숀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그는 천성이 타고난 무인이었으니까.
이번 친선 대련을 제안한 것에는 어떠한 음흉한 의도도 없었다.
목적은 오로지 하나뿐이었다.
"아, 그리고 아가씨께서..."
이어지는 보고에 바숀의 미간이 좁아졌다.
육체만큼이나 굳건한 그의 정신을 뒤흔드는 존재가 이 세상에 딱 하나 있었다.
수하들의 입에서 이름이 언급되는 것만으로 절로 피로가 차오르는 그런 존재.
"요즘 좀 얌전하기는 했지. 또 뭐냐?"
"...혼자서 벨터 협곡을 넘어가셨다가 좀 전에 성으로 복귀하셨습니다. 트리홉스를 사냥하고 뿔을 구해오셨더군요. 무인들 보약이나 달여서 먹이라고..."
바숀이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벨터 협곡 너머는 천검성의 상급 무인들도 자칫 잘못했다간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위험 지대였다. 더군다나 트리홉스라니.
"...어디 다친 곳은 없었나?"
"흙먼지만 잔뜩 뒤집어쓰시고 멀쩡히 돌아오셨습니다."
"그럼 당장 튀어오라고 전해라."
무인이 눈치를 보다가 답했다.
"그게, 곧장 또 성 밖으로 나가셔서..."
호출당할 줄 알고 도망쳤다는 뜻이었다.
바숀이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아키온 핵서.
하나뿐인 자식, 천검성의 유일한 후계.
바로 그녀의 존재가 바숀이 요즘 골머리를 썩는 이유였다.
'그 녀석을 대체 어찌 하면 좋을까.'
단순히 제멋대로라는 표현으론 부족해도 한참 부족했다.
언제는 죽은 듯 며칠을 방에만 박혀있거나 나무 위에 누워 멍을 때리고 있는가 하면, 또 언제는 지금처럼 몰래 성 밖으로 빠져나가 산맥의 위험 지대들을 밥 먹듯 넘나들다 돌아오고 있으니.
그녀가 연무장에서 검을 잡고 있는 광경을 본 지가 대체 언제였던가?
천검성의 후계라는 자가 누구보다 수련에 힘쓰기는 커녕, 하루하루의 시간을 의미 없이 엇돌며 흘려보내고 있는 것이었다.
성주인 그를 포함해서 누구도 그녀를 제어할 수 없었다.
강제적인 억압은 전혀 해결책이 되지 않았다.
바숀은 근본적인 문제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그녀의 나태함과 무질서함이 대체 어디서부터 기인하고 있는 것인지.
"자질이 너무 뛰어나도 문제지, 후우..."
하늘이 내린 검재.
성년이 채 되기도 전에 천검성의 상급 무인조차 꺾어버린, 압도적인 재능.
그 한없이 거대한 재능이 결국 그녀의 의욕을 사그라트린 것이었다.
바숀 역시 젊은 시절에 비슷한 경험을 했었지만 딸에게 어떠한 도움을 주지는 못했다.
그녀가 지닌 자질은 자신보다도 훨씬 뛰어난 것이었으니까.
그녀에게 필요한 건 목표로 삼을 대상이었다.
물론 천검성 내에 그녀보다 강한 무인들이야 많았다.
당장 아버지이자 천검성주인 바숀도 있고, 원로를 포함한 간부급 인사들도 있고, 그 밖에도 여럿 있었다.
하지만 비슷한 나이대에는 없다.
비슷한 나이대는 커녕 좀 더 높은 연령층까지 포함해도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그것이 문제였다.
나이, 누군가를 목표로 삼는 것에 그따위 게 무슨 상관인가 싶겠냐만,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다.
특히 그녀와 같은 천재에게는 더더욱 그러했다.
지금 당장이야 자신보다 더 강하다지만, 시간만 좀 흐르면 쉽게 넘어설 이들에게 열등감을 품고 조바심을 낼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
어처구니없는 오만임과 동시에 한편으론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기도 했다.
그녀가 지닌 재능은 그만큼이나 어마무시한 것이었다.
실제로 바숀조차 그녀가 앞으로 십 년만 더 지나도 얼마나 더 높은 경지에 도달할지 감히 예측하지 못할 정도였으니까.
그렇게 고민이 깊던 차에 마침 알티우스 측에서 마석 광산 문제로 연락을 보내온 것이었다.
어쩌면, 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스쳤다.
대륙 제일의 마법 학파 중 하나인 알티우스라면, 어쩌면 그녀에 버금가는 천재가 존재할 수도 있다는 기대감이.
굳이 맞수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녀의 의욕에 다시 불을 지펴줄 수준만 되어도 충분했다.
그녀 역시 마법사를 상대하는 건 처음이니 이번 대련은 여러모로 신선한 자극이 될 터였다.
'부디 녀석을 변화시킬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군.'
그러길 바라는 한편, 바숀도 내심 확신하고는 있었다.
자식에 대한 눈먼 착각이 아니라, 천검성의 수장이자 무인으로서 내린 지극히 객관적인 판단이었다.
비슷한 나이대 중에, 그녀보다 뛰어난 이는 적어도 현 대륙에는 존재하지 않을 거라고.
< 알티우스의 소집 (5)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