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알티우스의 소집 (4) >
라판.
열다섯 개의 단으로 구성된 알티우스 전투부의 부단장 중 하나.
그중에서도 최정예라 일컬어지는 1, 6, 11단을 제외하면, 그는 학파 전체로 따져도 정예로 인정받는 전투 마법사였다.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그런데 이게 뭐란 말인가.
지금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라판은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비슷한 위치의 다른 이들이 이 자리에 있었다고 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알티우스의 전투 부단장이, 고작 스물이나 간신히 넘어보이는 애송이한테 순수한 마력만으로 짓눌리고 있는 상황.
직접 목도하지 않고서야 믿을 수 없는 이야기일 것이다.
아니, 두 눈으로 보고서도 믿기가 힘들 것이었다.
실제로 상황을 지켜보는 주변 학파원들의 눈에 깃들어있는 감정은 강력한 불신이었다.
라판은 굴욕감을 느끼며 힘겹게 고개를 들어올렸다.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는, 한없이 무심하기만 한 칼의 눈빛이 보였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비록 상황이 이렇다지만 라판 역시 알티우스의 정예였다.
쓸데없는 자존심과 고집 때문에 현실을 부정하려는 마음과 달리, 마법사로서 그의 이성은 이미 냉정한 판단을 마쳤다.
'나보다 훨씬 더 강하다, 적어도 순수한 마력은...'
대체 어디서 이런 괴물이 튀어나온 건지 모르겠지만, 이렇게 된 이상 순수한 마력만으로 계속 힘겨루기나 하고 있는 건 미련한 짓이었다.
화아악!
라판이 실드를 둘러 칼의 마력장을 차단했다.
칼은 그 모습을 보고서 피식 웃었다.
이제야 쓸데없는 자존심을 꺾고 마법을 사용한 것이었다.
"...좋아, 인정하지."
이내 안정을 되찾은 그가 칼을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술수 따위가 아니었군. 그 나이에 5서클, 심지어 마력만큼은 나보다도 높다니. 직접 보고도 믿기가 힘들 정도야."
그 말에 칼은 다시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마력만큼은? 마치 나머지 부분들은 당신이 더 뛰어나다는 것처럼 들리는데요."
"...자네는 분명 뛰어나. 천재라는 수식어조차 무색해질 만큼 말이야. 하지만."
라판이 다시금 기세를 끌어올리며 말했다.
"오로지 마력량만이 마법사들에게 있어 절대적인 요소가 아니지. 살아온 세월과 경험의 차이는, 타고난 자질만으로 메워질 수 없는 것이니까."
"......"
"나는 알티우스 전투부의 제 5부단장 라판이다. 잠시 꼴사나운 모습을 보이긴 했다만, 아무리 마력 차이가 난다고 한들 새파란 후배 마법사에게 밀릴 만큼 만만한 위치에 앉아있지 않다는 거지."
사실 지금의 대치를 더 이어갈 필요는 없었다.
르믹이 죽거나 다친 것도 아니고, 칼의 수준은 명백하게 증명되었고, 후에 일을 어떻게 처리하든 당장은 칼의 신원만 확인하여 소동을 정리하면 되는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라판은 여기서 상황을 마무리 지을 생각이 없었다.
무너진 자존심을 회복하고 싶었으니까.
어떻게든 이 어린 놈을 꺾어버리고 방금의 굴욕을 무마하고 싶었으니까.
그리고 충분히 그럴 자신도 있었다.
방금 완전히 맥을 추리지 못했던 건 그저 순수한 마력 대 마력의 대결이었기 때문이다.
마법사의 실력을 결정짓는 요소는 당연히 마력뿐만이 아니다.
익힌 마법의 종류, 그것을 적절히 활용하는 센스, 마법을 캐스팅하는 속도, 마력의 섬세한 제어 등등.
제대로 된 마법전을 펼친다면, 반평생 알티우스의 전투 마법사로서 수많은 마법전을 겪어온 자신이 유리할 건 말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물론 라판이 칼에 대해 조금도 아는 것이 없기에 할 수 있는 착각이었다.
칼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더 해보시겠다면 말리진 않겠습니다."
"...포스 마법에 제법 자신이 있는 모양인데, 어떤가? 한번 간단하게 포스전을 해보는 건?"
포스전.
명칭 그대로 포스 마법만을 이용한 마법전.
흔히 마법사들 간에 전투가 아닌 대련을 목적으로 애용되는 방식 중 하나다.
또한 마력에 대한 제어 능력이 크게 중요한 형태의 마법전이기도 했다.
라판은 그를 통해 칼을 제압하고 자존심을 회복할 생각이었다.
'방금 게 그렇게 쪽팔렸나? 하긴...'
이 많은 학파원들 앞에서 새파랗게 어린 놈한테 대놓고 밀렸으니 어떻게든 만회하고 싶을 만도 하겠지.
슬슬 상황이 귀찮게 느껴지긴 했지만, 칼은 조금만 더 어울려주기로 했다.
"저야 뭐가 됐든 상관없습니다."
칼의 무심한 대답에 라판은 속으로 이를 갈았다.
'여유를 부릴 수 있는 것도 지금이 마지막일 거다.'
라판이 곧장 마력을 끌어올리며 말했다.
"선공은 양보하..."
"그럼 사양 않고."
화아악!
순식간에 캐스팅이 끝난 칼의 포스가 라판을 노리고 쇄도했다.
라판도 기겁하며 황급히 포스를 둘러 막았지만, 조금 타이밍이 늦은 탓에 뒤로 꼴사납게 튕겨나갈 뻔했다.
"......"
라판이 황당하다는 얼굴로 칼을 노려봤다.
칼이 능청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선공은 양보하겠다고 말하시려던 거 아니었습니까?"
"...맞네. 계속하지."
캐스팅 속도도 이쪽보다 훨씬 빨랐다.
라판이 입술을 짓씹으며 본격적으로 포스를 제어하기 시작했다.
'건방진 놈. 하지만 마력 제어는 내가 위일 거다. 버릇을 제대로 고쳐주지.'
둘에서 넷, 넷에서 여덟, 여덟에서 열여섯, 열여섯에서 서른둘.
순식간에 분할하는 라판의 포스들이 칼을 향해 쏘아져나갔다.
칼도 마찬가지로 포스를 나눠서 쏘아 그것들을 명중시켰다.
라판이 속으로 비웃음을 지으며 포스 분할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걸렸구나. 차라리 둥글게 펼쳐 방어를 택했어야지!'
마력 제어에 무척이나 능한 그는 포스를 수없이 많이 분할시킬 수 있었다.
똑같이 포스를 분할시키는 식으로 대응하다간 결국엔 한계가 올 게 뻔했다.
퍼버버버벙!
"......"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창백해지는 건 라판 쪽이었다.
벌써 백 개도 넘는 포스를 분할하여 쏘아내고 있는데 상대는 여전히 여유롭기 그지없었다.
결국 다급히 포스의 형태를 바꿔 먼저 방어를 택한 쪽은 라판이었다.
칼도 포스를 쏘아내던 걸 멈추고 멀뚱히 라판을 바라봤다.
"계속 안 하고 왜 그러십니까? 아, 혹시 여기서 더 분할 못하시는 건..."
라판의 얼굴이 붉게 변했다.
그는 이를 빠득 갈며 포스를 응축하여 직선으로 곧게 쏘아냈다.
콰아앙!!
칼의 포스와 라판의 포스가 허공에서 충돌했다.
이렇게 되면 당연히 마력이 약한 쪽이 밀릴 수밖에 없으나, 라판은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이번엔 정말 진가를 보여주마!'
칼이 포스를 밀어내면, 라판은 그 힘을 그대로 이용해 포스를 비스듬히 틀어서 칼의 포스를 흘려낼 생각이었다.
어디까지나 그럴 계획이었다.
포스를 오목한 형태로 바꾸어 뒤로 기울이자, 칼의 포스는 엉뚱한 곳으로 튕겨나가지 않고 오히려 곧게 쏘아져 나가 라판의 몸을 휘감아버렸다.
"...커윽!"
잠시 뒤 칼이 포스를 풀어 그의 몸을 도로 놔주었다.
라판이 충격에 빠진 표정으로 칼을 바라봤다.
칼이 계속 해보라는 듯 고개를 까닥였다.
"이...!!"
이후로도 라판은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칼의 빈틈을 찾으려 했지만, 빈번히 막히고 오히려 역으로 당하기만 할 뿐이었다.
칼이 완전히 라판을 농락하는 듯한 모양새에, 주변에서 지켜보고 있는 지부원들도 크게 충격을 받은 기색들이었다.
"......"
라판의 표정이 패배감으로 물들었다.
이쯤 되니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단지 마력뿐만이 아니라, 다른 부분들도 칼이 자신보다 한참은 앞서있었음을.
알티우스의 전투 부단장 직위를 단 뒤로 정말 간만에 겪어보는 무력감이었다.
"더 하시겠습니까?"
칼이 묻자 잠시 멍하니 있던 라판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깊은 한숨을 내쉬며 완전히 체념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자네, 정체가 대체 뭔가?"
아까의 물음이 취조에 가까웠다면, 이번엔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듯한 기색이었다.
"이곳에 있는 걸 보면 다른 학파의 마법사는 아닌 듯하고, 본원에선 자네 같은 학파원이 있다고 들어본 적도 없네."
"......"
"아무리 본원과 멀리 떨어진 지부의 소속이라고 해도 존재조차 알려지지 않은 건 말이 안 되는 일이야. 대체 정..."
순간 라판이 말을 멈추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퍼뜩 머릿속에 무언가가 스치고 지나갔기 때문이다.
지금으로부터 몇 개월 전, 본원에서 화제가 되었던 일이 있었다.
허스 원로의 손녀이자 제자인 샤론 레이첼이, 누군가에게 원로원 직명의 정식 학파원 자리를 빼앗겼다는 믿기 힘든 사건.
대부분의 이들이 루머로 치부했지만, 후에 정말 진실이었던 것으로 밝혀져 당시에는 꽤나 큰 화제가 되었었다.
그에 대해 자세한 내막을 아는 이는 거의 없었고, 그 누군가가 세인달 원로가 직접 추천한 이라는 사실만 알려졌었다.
그래서 세인달 원로가 제자를 비밀리에 숨겨 키우고 있다는 소문도 잠시 동안 돌았었는데...
"...설마?"
라판의 흔들리는 눈빛으로 다시 칼을 바라봤다.
그때 옆에 있던 라일이 눈치를 보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선배... 아니, 이분도 본원에서 오신 정식 학파원입니다. 그것도 원로원에서 직접 임명한..."
"......!!"
완벽하게 들어맞는 퍼즐 조각.
그제야 일의 전말과 칼의 정체를 짐작한 라판이 입을 쩍 벌렸다.
"세인달 원로님의 숨겨진 제자... 그게 바로 자네였군!"
그 말에 주변에 있던 학파원들도 깜짝 놀라며 칼을 바라봤다.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진 주변에 칼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뭔 헛소문을 퍼뜨리려고 하십니까? 전 세인달 원로님의 제자가 아닙니다."
"아... 아니라고? 하지만..."
"세인달 원로가 아니라, 그 친우의 제자 되는 녀석이지."
그때 들려온 목소리.
모두의 시선이 몰렸다.
어느새 연마실 입구에 새로운 인물들이 들어와서 서있었다.
백발이 성성한 노인과, 그 옆에 서있는 손녀뻘의 여인.
"허, 허스 원로님!"
노인의 얼굴을 알아본 라판이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숙였다.
한편 허스의 옆에 있던 샤론도 칼을 알아보고 경악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너!"
칼은 이쪽을 향해 삿대질하는 그녀와 허스를 번갈아봤다.
'...저 사람이었어? 이번 천검성행 대열에 낀다는 원로가?'
미간을 찌푸린 채, 한편으론 놀란 기색으로 이쪽을 응시하는 허스를 보며, 칼은 어색하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아니, 하필이면 왜 저 사람이래.
이왕 오는 거 세인달이 왔으면 좋았을 텐데.
* * *
상황이 대충 정리된 뒤, 칼은 허스 원로를 따라서 응접실로 이동했다.
피차 지부원도 아니고 외인이면서 응접실에서 마주하는 게 왠지 우습게 느껴지긴 했으나, 어쨌든 칼도 그에게 볼일이 있었기에 불만은 없었다.
"......"
응접실에 마주 앉은 세 사람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오도독.
옆에 앉아서 오물오물 쿠키를 씹으며 이쪽을 노려보고 있는 샤론.
칼은 그녀를 무시하고 다시 허스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마찬가지로 칼을 응시하고 있던 허스가 기가 막힌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리고는, 이내 입을 열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재회군. 세인달의 연구 재료들을 모으는 건 잘 되어가고 있나?"
"예? 아..."
무슨 얘기인지 알아듣지 못해 잠시 멈칫했던 칼이,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정식 학파원 자리만 받고 본원을 쌩하니 떠날 때 그런 핑계를 대기로 했었지.
하지만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 작게 혀를 찬 허스가 말을 이었다.
"정말 어처구니가 없군. 5서클이라니... 그간 대체 뭘 하고 돌아다녔길래 이런 말도 안 되는 성취를 이룬 건지. 어디 드래곤 레어를 찾아내서 엘릭서라도 털었는가?"
그 말에 옆에서 듣고 있던 샤론이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렸다.
"5, 5서클...?"
그녀가 말도 안 된다는 듯 칼과 허스를 번갈아봤다.
그때의 패배 이후 복수를 목표로 이를 바득바득 갈며 노력했던 그녀였다.
그런데 벌써 5서클에 다다랐다니.
허스 역시 안타까웠지만 그래도 진실을 곡해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은근슬쩍 손녀의 시선을 외면했다.
"아..."
충격을 받은 샤론의 얼굴에서 점점 영혼이 빠져나갔다.
칼은 그 모습을 잠시 구경하다가 말했다.
"그냥 운이 좋았습니다."
"흥, 운이 좋아서 쑥쑥 오르는 게 서클이면 나도 진작 대마법사가 됐겠지... 여튼 이곳엔 무슨 일로 찾아온 겐가?"
연구 재료를 구한다는 핑계로 본원을 떠나놓고, 어느새 고위마법사가 되서 이곳에 다시 모습을 비춘 이유가 궁금하기는 했다.
칼은 어색하게 웃으며 본론을 꺼냈다.
"이번 천검성행에 총인솔자로 참여하신다고 들었습니다. 마석 광산 문제로 제자들 간 친선 대련을 벌이신다고."
"...뭐, 그렇네만. 어떻게 알고는 있군."
허스의 눈썹이 올라갔다.
갑자기 천검성 이야기가 튀어나올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별다른 용건은 아니고, 그에 대해서 하나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어서 그렇습니다."
"......?"
그리고 이어진 말은 더욱 의외였다.
"저도 좀 대열에 껴서 데리고 가주실 수 있겠습니까?"
< 알티우스의 소집 (4)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