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속 마법사로 살아가는 법-50화 (50/132)

< 기억 >

"아함~! 쩝..."

활활 타오르는 모닥불.

그 앞에 한 사내가 팔짱을 끼고 앉아서 졸린 눈을 꿈벅이고 있었다.

주위엔 다른 상인과 용병들이 끼리끼리 모여 자고 있었고, 사내는 불침번이었기에 쏟아지는 졸음을 참고 깨어있는 것이었다.

"어우쒸, 졸려."

곧 사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음 침번을 깨우기 위함이었다.

아직 시간이 한참 덜 됐지만 카바스는 최근 용병단에 들어온 신입이기에 만만했다.

불만을 내뱉기라도 하면 엉덩이를 걷어차버려야지. 킥킥 웃으며 걸음을 옮기려던 때였다.

번쩍!

갑작스레 등 뒤에서 터진 섬광.

한순간 초원이 환하게 변했다.

사내가 기겁하며 고개를 돌렸고, 불빛에 잠에서 깬 이들도 벌떡 일어나 비몽사몽 주변을 둘러봤다.

"뭐, 뭐야?!"

사람들의 시선이 곧 한 곳으로 모였다.

어느새 상행단의 중앙에 한 남자가 서있었다.

한 손에는 검이 들려있고, 등 뒤로는 황금빛의 둥근 고리가 번쩍이며 어둠을 밝히고 있다.

난데없이 신성한 광경에 모두가 넋이 나간 얼굴로 남자를 쳐다봤다.

"......?"

남자의 정체는 바로 칼이었다.

당황하며 주변을 둘러보던 칼도 이내 상황을 파악했다.

'도적... 은 아닌 것 같고, 상행단인가?'

상인과 용병으로 보이는 사람들.

아무래도 텔레포트 지점이 마겐 시 밖에서 야영하고 있는 이들에게로 설정된 모양이었다. 기가 막힌 우연이었다.

'아무튼 살았군. 오히려 잘 됐는걸.'

칼은 숨을 한 번 고르고서 사람들에게 말했다.

"당신들을 적대할 생각은 없으니 안심하십시오. 대화를 하고 싶은데, 여기 대표가 누구입니까?"

그러자 상인들 사이에서 한 중년이 쭈뼛쭈볏 걸어나왔다.

"저, 저입니다만..."

코까지 골며 막 자다가 깬 그로서는 지금 이게 대체 뭔 상황인가 싶었다.

"보아하니 상행단 같은데, 마겐 시로 가는 길이었습니까?"

"예, 예. 그렇습니다. 케라믹에서 출발해 밀을 팔러 가는 길이었습니다."

중년이 조심스러운 태도로 성심성의껏 대답했다.

역시 예상이 맞았다.

칼은 근처에 묶여있는 말들을 힐끗 바라보며 말했다.

"저 말들 중 당장 한 마리만 팔아주실 수 있겠습니까? 값은 충분히 지불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금화를 한 웅큼 건내주자 중년의 눈이 휘둥그레 뜨였다.

값만 두둑히 쳐준다면야 팔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어차피 마겐 시까지는 거의 다 도착했고, 말 한 마리 정도 없어도 조금 남은 거리 이동에 문제될 건 없었으니까.

'...어?'

중년에게 말을 건내받던 칼은, 문득 발밑에 떨어진 녹슨 검을 발견하고 주워들었다.

'뭐여, 이게 왜 여깄어?'

마지막에 노인이 던져서 보호막에 박혔던 게 아무래도 같이 이동된 모양이었다.

자신을 놓친 것도 모자라 칼까지 잃어버리고, 지금쯤 길길이 날뛰고 있을 노인의 모습이 그려졌다.

칼은 킥킥 웃으며 녹슨 검을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다.

정체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챙겨서 나쁠 건 없겠지.

"아, 그리고 간단한 부탁 하나만 합시다."

칼이 중년에게 금화를 한 닢 더 챙겨주며 말했다.

"마겐 시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참새 여관'을 찾아가서 자주색 머리칼에 눈동자를 가진 여인을 찾아 말을 전해주십시오. 피치 못할 사정 때문에 먼저 돌아가니까, 기다리지 말고 바로 복귀하라고."

고개를 끄덕인 중년이 반신반의한 얼굴로 조심스레 물었다.

"저, 한데 혹시... 성자님이십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등 뒤로 번쩍이고 있는 황금빛 고리.

주변의 어둠까지 대비되며, 지금 칼의 모습은 마치 현세에 강림한 신의 사자처럼 보였으니까.

칼은 싱긋 웃기만 할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성검을 인벤토리에 넣고 말에 올라타며 마지막으로 말했다.

"방금 본 건 모두 잊어주십시오. 여기저기 말하고 다니면 제가 모시는 신께 분노를 살지도 모릅니다."

떠나가는 칼의 뒷모습을 보며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뒤늦게 일어난 사람들도 상황을 전해듣고 이야기에 껴들었다.

"아, 글쎄! 불빛이 번쩍하더니 갑자기 나타났다니까!"

"허... 그래? 그것도 성자님의 능력인가?"

"그나저나 잠 다 깼네. 잘 자고 있다가 갑자기 이게 뭔 일이야."

"병신아, 앞으로 평생 없을 경험을 했는데 그깟 잠이 문제냐?"

"그건 그렇지. 술자리에서 주절거릴 얘기 하나 늘긴 했네."

"이 새끼는 방금 뭘 들은 거야? 함부로 지껄이고 다니지 말라 하셨잖아. 신께 분노를 살 거라고."

"무슨 교단의 비밀 임무 같은 거라도 수행하시던 중이었나?"

"아무튼 니들 값싼 주둥아리 놀렸다가 나한테 피해만 주지 말라고. 난 뒈진 다음에 천국 갈 거니까."

"한스, 넌 아직도 그 소리냐? 교단에 고작 동전 몇 푼 기부한 것 가지고 천국 타령은, 푸하핫..."

* * *

그 길로 케라믹으로 돌아간 칼은 곧장 플러랜의 잡화점을 찾아갔다.

"아, 칼 님!"

가게 구석에 쭈그려앉아 포션을 담고 있던 배럿이 반색하며 반겼다.

칼은 플러랜의 상태가 어떤지부터 물었다.

"평소와 다를 건 없으세요. 필요한 재료는 모두 구하신 건가요?"

칼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바로 치료약을 만들 거니까 좀 도와주셔야겠습니다."

"아, 네!"

가게 안쪽의 포션 제작실로 이동한 칼은 책상 위에 재료들을 늘어놨다.

청령초가 메인이고, 다른 약초들과 마석 가루 등, 나머지 잡다한 것들은 경매장에 가기 전에 이미 다 준비한 상태였다.

"으음..."

칼은 팔짱을 끼고 고민에 빠졌다.

일단 어떻게든 재료는 다 구했는데, 이제부터가 진짜 관문이었다.

'...비율을 어떻게 맞추지?'

약초들을 한 데 모아 빻은 다음에 솥에 넣고 끓여야 된다는 건 알고 있다.

문제는 비율이었다.

게임을 플레이했을 때는 재료 비율이 'x1', 'x2' 처럼 지극히 단순한 형태로만 표시됐었다. 심지어 그조차도 가물가물하다. 물은 또 얼마나 넣어야 되는지도 모르겠고.

'뭐, 일단 양들은 넉넉하니까.'

하다 보면 어떻게든 되겠지.

칼은 기억을 더듬으며 제작을 시작했다.

눈대중으로 대충 비율을 맞추고, 약초들을 잘게 빻은 뒤 작은 솥으로 옮겼다.

"이 정도 양이면... 아마 물은 이만큼 넣어야 배합이 제대로 될 것 같은데요."

"오호."

물 양을 맞추는 건 배럿의 도움을 받아 어떻게든 됐다.

부글부글.

이내 끓기 시작한 걸쭉한 녹물을 쉬지 않고 젓기를 한참.

곧 녹색이 서서히 하늘색으로 바뀌며 은은히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큰 기대 없이 기다리던 변화를 마주한 칼의 표정이 환하게 변했다.

"...됐다!"

운이 좋았는지 첫 번째 시도에 바로 성공했다.

이어 머릿속에도 알림이 떠올랐다.

['비약: 할라데인'을 제작하였습니다.]

<할라데인 - 비약>

육신 곳곳에 스민 잔여 마력 한 톨까지 전부, 몸 내부의 마력을 모조리 소멸시킵니다.

할라데인은 설명 그대로 몸 내부의 마력을 깔끔히 소멸시키는 비약이다.

아란헬의 노인이 사용했던 산마독과 비슷한 효과이지만, 할라데인은 단순히 서클링으로 쌓인 마력만이 아닌 오랜 시간 마력에 적응하며 그에 최적화된 몸의 성질마저 깔끔히 초기화시킨다.

한마디로 마법사의 육신을 마법을 처음 익혔던 그 순간으로 되돌리는 것과 마찬가지.

고대의 마법사들은 이 비약을 기존의 서클링을 없애고 새로운 서클링을 익히는 데에 사용했다고 한다.

그럴 생각이 없는 보통의 마법사에겐 독약이나 마찬가지지만, 골까지 치민 대마법사의 마력을 깔끔히 지워버리기 위해선 플러랜에게 이 약을 먹이는 방법밖엔 없었다.

"...서클을 처음부터 다시 만들어야 할 거라고요?"

배럿에게도 그 점에 대해 미리 설명했다.

물론 그녀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정신만 차리실 수 있다면 그까짓 서클이 뭐가 중요하겠어요. 마력이야 다시 쌓으면 되는 거죠."

그렇게 플러랜에게 제작한 할라데인을 섭취시키기 시작했다.

약효가 바로 나타나는 게 아니었기에 며칠에 걸쳐 하루에 몇 번씩 꼬박꼬박 먹여야만 했다.

그리고 나흘 째가 되던 날.

"...배럿?"

공허했던 플러랜의 눈에 생기가 돌아오며, 입에서 또렷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텅그렁.

깜짝 놀란 그녀가 약 그릇을 떨어뜨렸다.

빈 허공이 아닌 멀뚱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스승을,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마주 바라봤다.

"스, 스승님...!!"

반 년도 넘은 시간.

드디어 그가 정신을 되찾았다.

배럿이 눈물을 터뜨리며 플러랜의 품에 안겼다.

혼란스러운 얼굴이었지만 플러랜도 제자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주었다.

칼은 잠시 방에서 나가 자리를 비켜줬다.

마침 그때 스칼렛도 돌아와서 상황을 전해들었다.

"아, 잘 됐군요. 드디어 본래 찾아왔던 목적을 이루실 수 있겠습니다."

칼이 닫힌 방문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건 이제 봐야 알겠죠."

* * *

하루가 더 지나고, 칼은 드디어 온전한 상태의 플러랜과 마주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혼란스러운 머리를 정리하고 완전히 정신을 차린 듯 싶었다.

"정말 고맙네. 자네가 아니었다면 배럿, 그 아이를 앞으로 얼마나 더 고생시켰을지..."

"그동안의 기억은 완전히 없으십니까?"

"흐릿하게 드문드문 떠오르긴 한다네. 한데 뭐라고 해야 할까, 그보다는 대부분의 시간을 다른 알 수 없는 기억에 빠진 채로 있었지."

그 알 수 없는 기억이 바로 차원의 조각을 제작한 대마법사의 기억이리라.

칼은 차원의 조각을 그에게 내밀어 보여주었다.

"이 마도구를 오랫동안 연구해오셨다고 하더군요."

"아... 그래, 그랬지."

한 골동품점에서 우연히 발견하여 심상치 않은 무언가를 느끼고, 10년도 넘게 연구했었던 물건.

"그동안 플러랜 님의 정신을 어지렵혔던 것이 바로 이 마도구를 제작한 마법사의 의식입니다."

그에 대해 배럿에게 말했던 것처럼 설명해주자, 플러랜이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연구를 계속할수록 어렴풋이 느끼긴 했었네. 무언가 내 정신을 조금씩 좀먹고 있다는 걸. 그러다 어느 순간 기억이 끊기고, 다시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런 상태더군."

"혹시 대마법사의 의식에서 무엇을 보셨는지 이야기를 들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이제부터가 진짜 본론이었다.

플러랜이 미간이 좁아졌다.

잠시 기억을 더듬는 듯 싶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미안하지만... 솔직히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네. 기억이 안개가 낀 것처럼 흐릿하기만 해. 마치 꿈에서 깬 것처럼."

"흐릿해도 좋습니다. 뭐든 아주 조금이라도 기억나는 게 있다면 말해주십시오. 제게는 무척이나 중요한 일입니다."

잠시 침음을 흘리던 플러랜이 천천히 말을 이어나갔다.

"이 세계와는 완전히 동떨어진 세계의 풍경을 본 것 같기도 하군.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높은 건물들, 말들이 이끄는 것도 아닌데 바퀴를 달고 스스로 굴러다니는 철덩어리에... 행인들의 외모 또한 특이했네. 거의 대부분이 흑발에 흑안을 하고 있었지."

칼의 주먹이 꽉 쥐였다.

그가 말하고 있는 건 분명히 지구의 풍경이었다.

역시 차원의 조각을 제작한 마법사는 자신과 같은 지구인이 분명했다.

"다른 건? 다른 건 더 없습니까?"

"아, 하나가 더 있긴 하군. 다만 이건 방금처럼 배경적인 기억 같은 게 아니네."

"......?"

"그 대마법사라는 자의 감정이자 생각이었지. 방금 말한 세계에 대한 아주 강렬한 생각이었어. 그래, 이것만큼은 확실하게 떠오르는군."

그가 천장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리운 고향, 이라고."

< 기억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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