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밀 경매장 (1) >
케르믹 시의 인근에 위치한 마겐 시에서는 매월 특별한 행사가 열린다.
시민들 모두가 광장에 모여 술을 마시고 춤을 즐기는, 그런 평범한 행사는 아니었다. 그보다 훨씬 은밀하고 어두운 것이다.
비밀 경매장.
일대의 많은 부호와 귀족들이 시중에선 평범하게 구할 수 없는 물건들을 갈망하며 이곳 마겐의 비밀 경매에 참여한다.
그리고 오늘이 바로 그 날이었다.
반월이 뜬 어두운 밤, 마겐의 유흥가 뒷골목 한편에 여러 인영들이 들어섰다.
하나 공통점이 있다면 그들 모두가 가면을 착용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들이 걸음을 옮겨 향하는 목적지는 동일했다.
한 낡은 건물의 지하, 그곳에 줄지어 서서 하나둘씩 입장하고 있는 경매 참여자들.
그중에 유독 가면을 자주 매만지며 지금 상황이 어색한 듯 보이는 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칼이었다.
'답답하네.'
옆에서 고양이 가면을 쓰고 있는 스칼렛이 미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좀 더 통풍이 잘 되는 걸로 챙겨드렸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가면 때문이 아니라, 그냥 이런 분위기가 영 어색해서 그렇습니다."
사실 어색한 것보다도 썩 기분이 좋지 않았다.
단순히 물건들뿐만 아니라 사람도 사고 파는 경매가 아닌가.
여기서 사람이란 어떤 방식으로 잡아들였는지 알 수 없는 불법 노예를 뜻했다.
스칼렛에게 듣기로는 참 다양한 경우가 있다고 한다. 길거리의 거지나 고아부터 시작해서, 돈을 못 갚은 빚쟁이, 몰락한 가문의 귀족 자제, 국경까지 침범하며 잡아온 이종족 등등.
벌써부터 경매가 진행되는 광경이 훤히 그려지니 기분이 더러워질 수밖에.
"쯧."
그래도 별 수 있나?
칼이 마겐의 비밀 경매에 참여한 이유는 물론 청령초 때문이었다.
헤르란도의 조사 결과, 이번 경매에서 청령초가 경매 물품 중 하나로 나온다는 걸 확인한 것이다.
마침 시간은 딱 맞았기에 늦는 일 없이 마겐에 도착해서 경매에 참여할 수 있었다.
초대장은 헤르란도에서 따로 구해줬고, 스칼렛은 혹시 모를 일을 위해 안내원 격으로 함께 왔다.
이윽고 두 사람은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어서오십시오."
마찬가지로 가면을 쓴 관리인이 정중하게 허리를 숙이며 반겼다.
스칼렛이 칼의 것까지 관리인에게 초대장 두 장을 건내주었다.
다시 한 번 관리인에게 인사를 받은 뒤, 안쪽에 이어진 입구에 쳐진 검은 커튼을 거두고 계단을 내려갔다.
곧 넓은 공간이 두 사람을 반겼다.
이미 많은 사람들로 차있는 좌석들. 그 앞쪽으로 보이는 무대.
곳곳에는 라이트 마법으로 밝혀진 등불들이 설치되어 공간 전체를 환하게 비추고 있다.
마치 현대의 극장과도 같은 그 풍경에 칼은 살짝 놀랐다. 이건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규모가 컸다.
"위층의 좌석들은 빼고 아무 곳에나 앉으시면 됩니다."
칼과 스칼렛은 적당히 중간열의 빈 좌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심지어 관리인들이 주변을 돌아다니며 음료 같은 것들도 나눠주고 있었다.
뭐지? 불법 경매장 주제에 이 쓸데없는 서비스 정신은?
칼의 시선을 느꼈는지 스칼렛이 물었다.
"한 잔 드시겠습니까?"
"...아뇨, 괜찮습니다. 마시고 싶어서 쳐다본 게 아닙니다."
저 안에 뭐가 들었을 줄 알고 넙죽 마신단 말인가?
물론 온갖 높으신 분들도 참여하는 만큼 경매장 측에서 미쳤다고 이상한 수작을 부리진 않았겠지만, 그래도 찝찝한 건 찝찝한 거였다.
잠시 기다리고 있자니, 어느새 대부분의 좌석들이 사람들로 꽉 들어찼다.
"휘유! 다행히 안 늦었네."
칼의 오른쪽 옆에도 두 사람이 앉았다.
목소리를 들으니 바로 옆에 앉은 자는 여인이고, 그 건너편에 있는 일행은 알 수 없었다. 가면을 썼으니까.
칼은 두 사람에게 신경을 끄고 다시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시간이 다 됐는지, 무대에 진행자로 보이는 이가 나와서 세 방향으로 허리 숙여 인사하고 있었다.
"마겐의 비밀 경매에 참여해주신 여러분, 모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우선 본격적인 시작에 앞서..."
웃는 가면을 쓴 진행자가 지루한 내용의 서론을 이어나갔다.
한데 그 말투가 굉장히 독특하고 재치 있었기에 나름대로의 재미는 있었다.
그때 옆쪽에 앉은 여인이 실실 웃으며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저놈 말 웃기게 잘하네. 입을 귀밑까지 쫙 찢어놔도 계속 나불거릴 수 있을지 궁금한데."
칼은 순간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볼 뻔했다.
'뭐지... 미친년인가?'
장소가 장소라 그런지 별 종류의 인간들이 다 모인다 싶었다.
"자! 그럼 지금부터 경매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곧 잡설이 끝나고, 진행자의 시작 신호에 좌석에서 가벼운 호응이 일었다.
칼은 옆의 스칼렛에게 소곤소곤 물었다.
"순서는 노예 경매가 먼저라고 했었죠?"
"예, 그렇습니다."
경매의 순서는 노예 경매가 먼저 진행되고, 그 다음이 물건 경매라고 한다.
낙찰된 노예들을 구매자에게 건내기 전에 마지막으로 약간의 준비가 필요해서라고 하던가.
그 텀 동안 물건 경매를 진행하며 구매자가 기다리는 시간이 없도록 순서를 짠 것이다.
최대한 빠르게 청령초를 확보하고 싶은 칼에게는 썩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었다.
칼은 초조해하지 않고 차분하게 기다리기로 했다.
헤르란도에서 정확하지도 않은 정보를 줬을 리는 없었다. 청령초는 확실히 나온다.
살짝 염려되는 건 자금 문제였지만, 설마 청령초 같은 빛 좋은 개살구를 거금을 주고 구매할 사람은 없으니까.
현재 칼이 인벤토리에 가지고 있는 금화의 양은 상당했다.
지금껏 들어오는 돈은 모으기만 하고 제대로 쓴 적이 없으니 그럴 수밖에.
아무리 돈이 썩어나는 귀족이나 대부호라도 미쳤다고 그 이상의 값을 주고 청령초를 살 머저리는 없었다.
혹시나 있다고 해도, 만약 돈이 부족하면 헤르란도에서 지원해주고 나중에 칼이 갚기로 이미 이야기가 됐다.
지출이 생각보다 커져도 인벤토리에 있는 잡템들을 팔아치우면 해결될 테니 별 문제는 없었다.
'그러고 보니 인벤토리 무게 제한도 거의 다 찼는데, 언제 한 번 싹 몰아서 처리해야겠네.'
이윽고 노예들이 하나둘씩 무대에 나오기 시작했다.
야성미 넘치는 근육질의 사내, 몰락한 귀족가의 영애, 어린 소년 소녀 쌍둥이. 엘프와 수인 등의 이종족.
하나 공통점이 있다면 그들 모두의 눈에 짙은 절망과 공허함이 껴있다는 것이었다.
"10번의 신사분께서 300골드! 아, 하지만 7번분께서 곧장 500골드로 응수하십니다!"
"어이쿠, 5번 참여자분께서 무려 1000골드! 1000골드까지 나왔습니다! 다른 분들은 더 없으십니까!"
진행자가 과장되게 흥을 띄울수록 경매의 열기 또한 과열되어갔다.
조용히 피켓만 들던 참여자들도 점점 서로 목소리를 높이며 노예들의 몸값을 올리고 또 올렸다.
대충 예상은 했지만 역겨운 광경이다.
칼은 가라앉은 눈빛으로 목에 쇠줄을 단 채 가축처럼 끌려나오는 노예들을 지켜봤다.
"참 역겹지 않아요?"
돌연 옆쪽의 여인이 입을 열고 말했다.
아까 미친년이라 생각했던 그 여자였다.
칼은 설마 자신에게 말을 건 건가 싶었다.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자 여인이 이쪽을 돌아봤다.
그녀에게서 다시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런 걸 볼 때마다 그런 상상이 들더라고요. 진행자가 멍멍! 하고 짖으면 참여자들이 꿀꿀꿀! 하고 응답하는... 마치 개돼지들의 파티 같은? 흐흣! 마침 동물 가면을 쓴 사람들도 많으니 딱 어울리네요. 그쵸?"
"......"
"당신은 어때요? 저기 저 노예들을 계속 불쌍하다는 듯 쳐다보고 있었잖아요. 당신도 저랑 같은 생각인가요?"
가면 쓰고 있는데 니가 그걸 어떻게 알아?
칼은 그렇게 묻고 싶었지만 그냥 무시하기로 했다.
그녀는 칼의 반응이 어떻든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딱히 누가 들으라고 말하는 게 아니라, 그냥 혼잣말을 하는 것처럼.
"누구는 평생을 짓밟으며 살고, 반대로 누구는 평생을 짓밟히며 살고. 빌어먹게 불공평한 세상이죠. 한 번이라도 입장이 반대가 되면 이 돼지들도 무언가 깨닫는 게 있을까요? 위치가 사람을 만드는 걸까요, 아니면 사람의 본성이 타고나게 악한 걸까요?"
"귀족, 평민, 노예. 애초에 다 같은 인간이잖아요. 어째서 신분이 나뉘는 걸까요? 높으신 분들의 피는 아랫것들이랑 다르게 달콤하기라도 한가? 제가 살짝 핥아서 맛본 적 있는데 그건 아니더라구요. 똑같이 비려요. 흐핫."
"이 세상에는 더 큰 자유가 필요해요. 엉덩이 무거운 귀족하고 왕가의 돼지들을 모두 끌어내리고 완전히 새로운 질서를 확립할 필요가 있다고요."
끝없이 이어지는 그녀의 말을 들으며 칼은 슬슬 확신할 수 있었다.
옆의 여인이 단순한 미친년이 아니라, 그 이상으로 어딘가 나사가 제대로 풀린 종류의 인간이라는 것을.
지금 그녀가 내뱉는 건 반역이나 다름없는 말들이 아닌가?
만약 듣는 이가 칼이 아니라 다른 귀족이었다면 벌써 칼부림이 났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쯤 되니 여인의 정체가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살짝 고개를 돌려 그녀의 타이틀을 확인하려던 순간이었다.
"...다 꺼져! 다가오지 마!"
갑자기 무대에서 소란이 일었다.
어떻게 한 건지, 노예로 나온 청년이 수갑이 채워진 손으로 한 관리자의 목을 조인 채 검을 겨누고 있었다.
관리자가 방심하고 가까이 다가온 틈을 타서 순식간에 인질로 잡아버린 것이었다.
다른 경비들이 당황하며 노예를 둘러쌌다.
관객석의 참여자들이 흥미롭다는 듯 그 광경을 지켜봤다.
"뭘 하고 있는 거야? 어서 제압해야지!"
"푸핫, 노예한테 인질로 잡혀? 그런 머저리 놈은 그냥 죽게 두라고!"
진행자가 땀을 뻘뻘 흘리며 그들에게 다급한 눈짓을 했다.
노예는 핏발이 선 눈으로 사방을 경계했지만, 결국 틈을 노린 경비 하나에게 허리를 찔렸다.
"...아악!"
그 다음은 인질로 잡혀 있던 관리자가 재빨리 노예의 팔을 붙잡고 바닥에 엎어버렸다.
순식간에 제압당한 노예는 경비들에게 짓밟히기 시작했다.
"하, 하하! 잠시 소란이 있었군요!"
진행자가 애써 웃으며 일종의 쇼처럼 상황을 수습하려는 듯 했다.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잠깐의 재미난 구경거리에 객석의 참여자들은 왁자지껄 웃으며 떠들고 있었으니까.
물론 방금 모습을 보고도 청년을 노예로 살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완전히 곤죽이 된 노예 청년은 경비들에게 머리채를 붙잡힌 채 도로 안쪽으로 질질 끌려들어갔다.
"아, 가엾어라!"
옆의 여인에게서 다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장난인지 진심인지 구별이 힘든 조금 과장되게 슬픈 어조였다.
"저걸 보니 멍청하게 죽은 제 동생이 갑자기 떠오르네요. 뭐, 배다른 동생이라 딱히 슬프지도 않지만."
그녀가 순식간에 쾌활하게 바뀐 목소리로 콧노래까지 부르며 말했다.
방금처럼 딱히 칼에게 말하는 건 아니고, 누가 듣든 말든 혼자서 떠드는 투였다.
"듣기로는 방금이랑 비슷한 상황이었다 하더라고요. 어떤 마법사한테 인질로 잡혔다가 목이 꺾여 죽었다고 했었나?"
그리고 이어진 이야기에 칼의 사고는 순간 정지했다.
"근데 더 웃긴 게 뭔지 알아요? 그 마법사가 그런 다음에 텔레포트로 쌩 튀어버렸다네요, 흐핫! 거짓말이 아니라 진짜예요. 무슨 고대의 마도구 같은 거라도 가지고 있었나. 아무튼 그거 때문에 우리 영감님이 아주 개망신을 당했잖아. 안 그래요?"
여인이 반대편을 돌아보며 말했다.
칼의 건너편, 그러니까 여인의 오른쪽 옆에 앉아있던 일행의 입이 그제서야 열렸다.
"아가씨, 좀 경매에 집중을 해주십시오."
늙은 노인의 목소리.
분명 어디선가 한 번은 들어본 목소리.
칼은 지금 순간만큼은 자신이 가면을 쓰고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진심으로.
천천히, 아주 천천히 옆으로 고개를 돌려 두 사람을 바라봤다.
[Lv.48]
[아란헬의 후계자]
[Lv.63]
[아란헬의 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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