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적 탐사 (8) >
"역시 쉽게 통과할 수 있을 리가 없지..."
누군가가 중얼거린 말이었다.
세 개의 똑같은 원.
10분 안에 이중에 가장 큰 원을 찾아서 안으로 들어가야만 한다.
제한 시간까지 붙었기에 모두의 표정에 급박함이 떠올랐다.
"보십시오. 왼쪽의 것이 조금 더 큰 것 같지 않습니까?"
"나는 중간 게 제일 크게 보이는데?"
"관두게. 육안으로 구별할 수 있는 게 아닌 듯하니까. 음, 아무리 봐도 전부 똑같은 크기인데..."
칼도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뒤에 서서 팔짱을 끼고 고민했다.
제한 시간은 짧았지만 이럴수록 침착하게 생각해야 하는 법이었다.
'똑같은 세 개의 원, 이중에 가장 큰 원을 골라야 한다라...'
대체 어떻게?
하다못해 길이를 잴 수 있는 뭐라도 하나 던져줬으면 모를까, 이건 도저히 육안으로 구분할 만한 게 아니었다.
칼은 다시 한 번 허공의 설명을 읽었다.
1. 10분 안에 가장 큰 원을 찾아서 내부에 들어가면 시련은 통과된다.
2. 시간 안에 가장 큰 원을 찾아 들어가지 못한 자는 죽는다.
3. 중복 선택은 불가능하다.
애꿎은 설명만 반복해서 읽을수록 시간은 계속해서 흘렀다.
그러다 칼은 퍼뜩 이상한 점을 인지했다.
'통찰의 시련... 왜 이 시련의 이름이 통찰의 시련이지?'
정말 단순히 서로의 크기를 비교해서 가장 큰 원을 찾는 거였으면, 그게 과연 '통찰'이라는 수식어가 어울리는 시련인가?
무언가가 더 있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던 칼은 그 무언가가 뭔지 곧 찾아낼 수 있었다.
지금의 공간이, 이전의 두 시련들과는 다르게 사각형이 아니라 원형이라는 것을.
"......!!"
설마 그런 거였나?
생각해보니 3번의 중복 선택이라는 조건도 묘하긴 했다.
중복이라 하면 두 원에 동시에 들어간 상태로 있어야 한다는 건데, 지금 보이는 세 개의 원이 겹쳐있는 것도 아니고 그건 불가능한 일이 아니겠는가.
중복 선택 불가는 숨어있는 다른 정답을 위해 존재하는 조건이다.
칼은 거의 확신을 가졌다.
시간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도저히 모르겠군. 어쩔 수 없지만 세 원에 들어갈 사람을 나누는 게 최선인 듯하네."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그래서야 오답을 고른 나머지는 다 죽게 되지 않습니까!"
"그럼 어쩌자는 말인가? 시간도 얼마 안 남았는데 찾아낼 방법이 없..."
칼은 서로 목소리 높여 다투는 그들의 말을 끊고 소리쳤다.
"정답을 찾은 것 같습니다! 다들 주목해주십시오!"
사람들의 시선이 칼에게로 몰렸다.
"저, 정답을 찾았다고?"
이미 지혜의 시련에서도 한 번 활약한 칼이었기에 사람들의 눈빛에 기대감이 차올랐다.
칼은 주변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지금 저희가 있는 이 공간,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상? 뭐가 말인가?"
"이전의 시련들은 전부 평범하게 사각형의 형태의 공간이었단 말입니다. 그런데 이번 공동은 누가 깎기라도 한 듯 완벽한 원형이지 않습니까."
그제야 그 점을 인지한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까지 말하자 몇몇은 칼의 생각을 눈치챘다.
"잠깐, 그럼 이거 설마..."
"예. 아무래도 여기 그려진 원들뿐만 아니라 이 공간 자체도 선택지에 포함되는 것 같습니다. 누가 봐도 제일 커다란 원이죠."
"......!!"
모두의 눈이 크게 뜨였다.
"제 생각에는 어디에도 들어가지 않고 가만히 서있으면 아마 시련이 통과될 것 같습니다. 물론 확신은 못하지만... 저와 의견이 다른 분들은 알아서 다른 원을 선택하시면 됩니다."
그러나 반박하고 다른 원으로 들어가겠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칼의 말은 확실히 그럴듯했으니까.
그냥 찍어서 아무런 원이나 들어가는 것보다는 훨씬 나아보이는 선택지였다.
결국 사람들 중 누구도 세 개의 원 중 하나로 들어가지 않았다.
다들 긴장한 얼굴로 제한 시간만 끝나기를 기다렸다.
시간이 끝나고.
이번에도 역시 죽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끼기기긱...
다음 시련으로 향하는 석문이 열렸다.
정답을 맞혔다는 신호였다.
"또 자네가 맞혔군. 정말 대단하구만!"
원정대 모두가 감탄하며 칼을 돌아봤다.
지혜의 시련에서도 그렇고, 이 모험가에게는 범인을 뛰어넘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들은 환희에 차오른 채 활짝 열린 석문으로 걸음을 옮겼다.
마지막 네 번째 시련.
다음으로 이 지긋지긋한 시련도 마지막이었다.
* * *
「불신의 시련」
다음 시련으로 넘어가자 이전의 시련들보다도 훨씬 거대한 공간이 나타났다.
"......"
그리고 원정대 모두가 할 말을 잃었다.
공간의 압도적인 넓이 때문이 아니었다.
중앙에, 그 넓은 공간을 꽉 채우다시피 할 정도로 거대한 무언가가 이쪽을 노려보며 침을 질질 흘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크르륵!
붉게 번들거리는 눈, 전신에 삐죽삐죽 솟아오른 갈기, 단지 마주한 것만으로 느껴지는 흉흉한 기운.
그것은 개의 형상을 한 거대한 괴물이었다.
놈은 반투명한 검은 장막 같은 것에 갇혀있었는데, 아마 그게 없었다면 진작에 원정대에게 달려들었을 것이었다.
콰아앙!!
"...헉!"
놈이 앞다리를 들고 장막을 두드리자 깜짝 놀란 마법사 하나가 기겁하며 물러났다.
다행히 장막이 깨지거나 하진 않았다.
"뭐, 뭘까요? 이 괴물은..."
그가 무안한지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
물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단지 이번 시험의 내용이, 저런 무시무시한 괴물과 싸워야 하는 것만은 아니길 간절히 바라고 있을 뿐.
[Lv.52]
[케르스]
오직 칼만이 괴물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칼은 놈을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이제는 마수까지 튀어나오는군.'
케르스, 케르베스, 케르베로스.
이 셋 중에 케르스는 머리가 하나 달린 가장 낮은 등급의 마수다.
물론 마수 자체가 보통의 몬스터보다 훨씬 강하기에 50레벨이 넘어갈 정도였지만.
1. 하루가 지나면 시련은 통과된다.
2. 장막 앞에 있는 원으로 들어간 자에게는 안전과 시련의 통과가 보장되나, 괴물을 가둔 장막은 파괴될 것이다.
3. 원 안으로는 단 한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다.
4. 괴물을 죽여도 시련은 통과된다.
여지없이 허공에 떠오른 설명.
모두의 시선이 자연스레 장막 앞에 그려진 원으로 향했다.
그때였다.
"이런, 이건 좀 많이 예상 밖인데..."
어디선가 들려오는 목소리.
원정대 사이에서 나온 목소리가 아니라 멀찍한 곳에서 들려온 목소리였다.
그쪽으로 시선을 돌린 이들이 눈을 찢어져라 크게 뜨고 소리쳤다.
"토바즈!"
흑마법사 토바즈.
원정대를 배신하고 이런 상황에 처하게 한 장본인.
그가 멀찍이 떨어진 곳에 뒷짐을 지고 서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네놈!"
그를 발견한 몇몇 기사들이 표정을 일그러뜨린 채 검을 뽑아들고 곧장 달려들었다.
배신자에게 굳이 대화는 필요없었기에.
터엉!
그러나 권역의 결계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아직 시련이 모두 끝나지 않았으니 결계는 여전히 유지된 채였다.
토바즈가 끌끌 웃음을 흘리며 결계를 두들기는 기사들을 바라봤다.
"이건 인간의 힘으로 부술 수 있는 게 아니라네. 관두고 어서 시련이나 통과하는 게 어떻겠나?"
"이런 짓을 벌인 이유가 뭐냐! 네놈의 목적이 대체 무엇이냔 말이다!"
토바즈는 그에 대답하지 않고 딱딱하게 굳은 채 서있는 한 사람을 바라봤다.
"사, 삼촌..."
그의 조카인 아르먼이었다.
토바즈가 인자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조카야, 원 안으로 들어가거라."
"......!!"
"설마 이것들이 시련이 끝나고 너를 가만히 놔둘 것이라 생각하느냐? 내 친척인 너는 어떻게든 죄인이 될 수밖에 없다. 무사히 학파로 돌아가더라도 감시관 놈들에게 정보를 뱉어내라며 온갖 고문을 당하겠지."
모두의 시선이 아르먼에게로 쏠렸다.
기사들이 검자루에 손을 올리고, 마법사들이 마력을 끌어올렸다.
그 살벌한 기세에 아르먼이 꿀꺽 침을 삼키며 고개를 저었다.
원으로 들어가기는 개뿔, 그러기도 전에 바로 제압당하거나 죽을 것이 뻔했다.
"나, 나는 정말로 관련이 없습니다! 관련이 있으면 제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겠습니까!"
아르먼이 주변을 보며 다급히 말하다가 토바즈에게 소리쳤다.
"사, 삼촌이야말로 지금이라도 투항하십시오! 대체 왜 이런 짓을 벌이는 건지 모르겠지만, 전부 다 끝나고 나면 우리가 삼촌을 가만둘 것 같습니까! 아무리 삼촌이 고위마법사라도 이 많은 인원을 한 번에 상대할 수는 없습니다!!"
로자리엘이 이어서 말했다.
"이 중에 미쳤다고 원 안으로 들어갈 사람은 없다. 하루만 지나면 시련이 통과된다는데 왜 그딴 짓을 하겠나?"
원정대 모두가 토바즈를 노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에도 토바즈는 재밌어 죽겠다는 듯 웃음을 터뜨릴 뿐이었다.
"글쎄... 내 생각은 조금 다른데?"
"......?"
"조카야, 관심을 끌어줘서 고맙구나. 너는 예전부터 남들의 시선을 끄는 데에 재능이 있었지. 물론 항상 좋은 쪽이 아니라 나쁜 쪽이었지만."
그 의미심장한 말에 모두의 시선이 반사적으로 원으로 향했다.
그리고 어느새 원의 코앞까지 다다른 누군가를 발견하고 기겁했다.
"...저!"
베렌.
차마 누군가 저지하기도 전에, 그녀는 끝내 원 안으로 발을 내딛었다.
콰아앙!!
뒤늦게 그녀를 노리고 쏘아진 마법이 허공에 가로막혔다.
원의 테두리를 따라 솟아오른 빛의 기둥에 막혔기 때문이다.
"왜... 대체 어째서?"
다른 누구도 아닌, 가장 신뢰할 수 있었던 사제의 배신.
모두가 멍하니 원 안에 들어간 그녀를 바라봤다.
다른 동료 사제들도 그녀의 배신에 충격받은 듯 입만 쩍 벌리고 있었다.
토바즈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이 권역의 주인 되시는 신께서 내게 귀띔을 해주시더군. 자네들 중에 아주 충실한 당신의 종이 하나 껴있다고. 그런데 설마 사제 쪽에 있었을 줄이야, 하하! 이거 정말 볼 만한걸!"
베렌도 광소를 터뜨렸다.
"아, 아하하! 이 역겨운 이단 놈들!!"
"......"
"이대로 전부 그분의 양분이 되는 거다! 너희들의 하찮은 목숨이 가치 있게 될 유일한 방법이 그것 말고 또 뭐가 있겠어!"
쩌적!
누군가가 원 안으로 들어가면 장막은 파괴된다고 했다.
그 말대로 괴물을 가둔 장막에 서서히 금이 가기 시작했다.
"...다, 다들 전투 준비!!"
원정대에 혼란이 퍼졌다. 허겁지겁 진형을 갖추고 서서 괴물을 마주했다.
상황이 갑작스럽게 최악으로 치닫았지만, 어쨌든 이제는 싸울 수밖에 없었다.
와장창!
곧 완전히 무너져내린 장막.
크아아아아...!!
자유를 찾은 괴물, 케르스가 기쁘다는 듯 포효를 내질렀다.
전신이 찌릿찌릿 울리는 감각.
보통의 몬스터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그 강대한 피어에, 원정대 모두의 표정이 창백하게 질렸다.
'이건... 정말 위험하다...!!'
지금껏 수많은 몬스터들을 겪고 베어온 단테 후작가의 기사들도.
대륙 3대 학파라는 위명 아래 뛰어난 마법 실력을 쌓아온 어스문의 마법사들도.
나름대로 산전수전 다 겪으며 많은 던전과 유적에서 생존해온 모험단도.
아직 전투는 시작되지도 않았지만 모두가 죽음이 가까이 다가왔음을 느꼈다.
원정대 사이에서 거대한 마력의 유동과 함께, 한 줄기 빛의 광선이 쏘아진 건 그때였다.
번쩍!!
공간을 가득 채우는 섬광.
다시 시야가 돌아왔을 때 보인 건, 목 위가 완전히 사라져버린 케르스의 모습이었다.
쿠우웅...
머리를 잃은 놈의 몸이 휘청거리다 이내 바닥에 쓰러진다. 깔끔히 잘린 목의 절단면에서 시커먼 피가 줄줄 흘러나와 바닥에 웅덩이를 만들었다.
방금 전까지 그렇게 흉흉한 기세를 내뿜은 괴물치고는 허무한 최후였다.
「모든 시련을 통과」
허공에 알림이 떠올랐다.
괴물이 죽었으니 조건대로 시련이 통과된 것이었다.
동시에 권역을 둘러싼 결계가 사라졌으나, 당장 그것에 신경 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칼?"
파키온이 멍하니 옆을 바라봤다.
그뿐만 아니라 원정대 모두가 넋이 나간 얼굴로 칼을 바라봤다.
무심하게 괴물에게 내뻗었던 손을 거두고 있는 그의 모습이 보였다.
"어어, 어...?"
시련이 끝났기에 베렌을 둘러싸고 있던 빛의 기둥 역시 사라졌다.
그녀는 허망한 표정으로 순식간에 죽어버린 괴물을 응시하고 있었다.
퍼엉!
이어진 칼의 마법에 그녀의 머리가 터져나갔다. 괴물과 똑같은 최후였다.
"하, 이제야 끝이 보이네."
시련은 끝났고, 권역의 결계는 사라졌다. 흑마법사 놈도 모습을 드러냈다.
더 이상 인내할 필요 따윈 어디에도 없었다. 지금부터는 종막이었다.
칼은 토바즈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놈이 두 눈을 찢어져라 부릅 뜬 채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장난질은 이쯤이면 충분히 즐겼지?"
곧장 다음 마법을 캐스팅했다.
"너도 그만 죽어라."
꽈릉!!
전격이 토바즈가 서있는 자리를 강타했다.
< 유적 탐사 (8)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