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적 탐사 (6) >
"...지혜의 시련?"
뒤쪽에 선 이들도 글자를 확인하고 중얼거렸다.
칼은 조심스레 안쪽을 살폈다.
텅 빈 공간의 중앙에 사람 머리통만 한 덩어리가 두 개 보였다.
"......?"
저게 뭐지?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니 곧 덩어리들이 움직였다.
그리고 놀랍게도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뭘 쥐새끼마냥 힐끔거리고 있어! 들어올 것들은 전부 들어와! 아니면 시련은 시작되지 않는다!"
"않는다! 않는다!"
그에 눈치를 보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방 안으로 들어왔다.
쿠웅!
이내 모두가 들어오자 저절로 닫히는 문.
"캬캬캬!"
"캬캬캬캬캭!"
덩어리들이 기분 나쁜 웃음을 흘리더니 제자리에서 폴짝폴짝 뛰기 시작했다.
"키킥! 도전자다, 도전자! 이게 대체 얼마만의 도전자냐!"
"기쁘다! 기뻐!"
"꾸물거리지 말고 빨리 앞으로 와! 아니면 시련은 시작되지 않는다니까!"
원정대는 조심스레 두 덩어리들에게로 가까이 다가갔다.
가까이서 보니 놈들에게도 짧은 팔과 다리가 있었다. 눈은 하나였다.
놈들은 정체 모를 상자를 각각 하나씩 들고 있었는데, 아마 시련과 관련된 게 아닐까 몇몇은 추측했다.
"설명은 밖에 있는 돌덩이한테 들었겠지? 지금부터 첫 번째 시련, 지혜의 시련을 시작한다! 캬캭!"
덩어리들 중 왼쪽에 있는 덩어리가 설명을 시작했다.
"우리가 들고 있는 두 상자 중 하나에는 다음 시련으로 넘어가는 열쇠가 들어있다! 너희는 우리 둘에게 단 한 가지 질문만을 해서 열쇠가 들어있는 상자가 어느 쪽인지 맞히면 돼!"
오른쪽 덩어리가 이어서 설명했다.
"하지만 우리 둘 중 하나는 질문에 진실만을 답할 거고, 다른 하나는 거짓만을 답할 거다!"
"......!!"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질문의 기회는 단 한 번이야! 그리고 정답을 맞히지 못하면 시련은 그대로 실패다! 그러니 신중하게 고민하고 도전해보도록, 캬캬캭!"
"참고로 포기 같은 건 없다! 정답을 맞히기 전까지는 아무도 여기서 못 나가는 거야!"
설명을 끝낸 덩어리들은 팔짱을 끼고 상자 위에 주저앉았다.
다리를 까닥거리며 어서 도전하라는 듯 사람들을 훑었다.
"...누가 정답을 알겠습니까?"
한 마법사가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
하지만 모두가 아리송한 표정이었다.
두 개의 상자, 각각 진실과 거짓만을 답하는 두 괴물.
단 하나의 질문을 해서 열쇠가 들어있는 상자를 찾아야 한다.
와중에 몇몇은 문제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잠시 모두가 입을 다물고 정답에 대해 고민하는 시간을 가졌다.
"무슨 이런 해괴한 문제가 다 있는가..."
로자리엘이 미간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단순히 열쇠가 어느 상자에 있느냐 물으면 진실의 괴물은 열쇠가 있는 상자를 알려줄 것이고, 거짓의 괴물은 열쇠가 없는 상자를 알려줄 것이다.
두 괴물의 답이 갈리니 당연히 정답을 맞힐 수 없었다.
기사들과 모험단, 사제는 물론이고, 항상 자신들이 똑똑하다는 자부심에 차있던 마법사들도 침음만 흘리는 상황.
"뭘 이렇게 다들 고민하는 겁니까?!"
그때 아르먼이 나서서 외쳤다.
"저까짓 밤톨만 한 놈들쯤이야 그냥 죽여버리고 열쇠를 뺏으면 되지 않습니까! 아주 간단한... 헉!"
순간 왼쪽의 괴물이 시야에서 사라지더니 순식간에 아르먼의 머리 위에 나타났다.
마치 순간이동과도 같은 가공할 속도.
괴물은 그대로 아르먼을 바닥에 처박아버린 뒤 도로 머리 위에 주저앉았다.
"건방진 놈! 제대로 도전할 생각은 안 하고 같잖게 덤비면 죽는 거야!"
"병신! 머저리! 캬캭!"
그 한심한 모습에 모두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바깥의 석상도 그리 강했는데 이 괴물들이라고 다르겠나?
바닥에 엎어져 끙끙대는 아르먼을 내버려둔 채, 모두가 다시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아무리 고민해도 정답은 떠오르지 않았다. 정답은 커녕 감조차 제대로 잡히지 않았다.
"도저히 모르겠습니다. 찍어도 절반의 확률이니 그냥 찍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자네는 절반의 확률에 여기 있는 모두의 목숨을 걸 셈인가? 일단은 좀 더 고민해보세."
한편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는 사람들을 보며, 속으로 미소 짓고 있는 한 사람이 있었다.
'아아... 갈리오스이시여.'
겉으로는 신실한 사제, 그러나 그 속은 시커먼 악신 숭배자, 베런이었다.
그녀는 감격에 차서 자신의 신을 부르짖었다.
처음 원정에 참여했을 때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후작가에서 요청이 들어왔고, 사제장의 지시에 따라 반강제로 참여한 원정.
그저 빨리 끝내고 지상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이렇게 기사고 마법사 놈들이고 잔뜩 모인 굴에서는 그녀가 모시는 악신에게 기도 드릴 기회가 없었으니까.
보통 길거리에 나도는 고아들을 유혹해 산 공물로 바쳐왔던 그녀에게는 참을 수 없이 죄스러운 시간이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악신이 그간의 정성에 감격하시어, 드디어 당신의 존재를 미천한 종 앞에 내비치시기라도 한 걸까?
지금의 상황은 그녀에게 있어 시련 따위가 아니었다.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마침내 그분을 위해 모든 걸 바칠 수 있게 된 축복의 순간이었다.
하지만 자신 하나만으로는 부족했다.
'시련이 실패해야만, 이 역겨운 이단 놈들 모두가 그분을 위한 양분이 된다.'
분명 바깥의 석상이 그리 말했다.
그렇기에 그녀는 최선을 다해 원정대가 시련을 통과하지 못하도록 저지할 생각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나서서 열쇠가 들어있지 않은 상자를 고르고 시련에 실패하고 싶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녀도 이 문제의 정답을 모른다는 것.
자칫 찍어서 열쇠가 들어있는 상자를 골랐다가는 원정대에 좋은 일만 해주는 꼴이었다.
그래도 아직은 모두가 감도 못 잡고 있으니 시간은 많았다.
베런은 문제의 정답을 찾아내기 위해 지그시 두 눈을 감고 고민했다.
그때였다.
"여기 도전."
정적을 깨고 울려퍼지는 목소리.
모두가 화들짝 놀라 목소리의 주인을 쳐다봤다.
바로 칼이었다.
"오, 벌써? 캬캬캭! 기회는 한 번뿐이라고 말했을 텐데!"
"철회는 없어! 확실히 도전이라고 말했으니 어서 질문을 해라!"
두 괴물이 칼을 바라보며 웃었다.
반대로 사람들은 창백하게 질린 표정으로 칼을 쳐다봤다.
"이, 이런 미친... 자네 지금 무슨 짓을 한 겐가!"
"괜찮습니다. 확실한 답을 찾았으니 지켜보고 계시죠."
칼은 태연하게 대답하고서 괴물들의 앞으로 다가갔다.
두 괴물이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정답을 못 맞히고 시련에 실패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 여기 있는 인간들 모두가 죽을 거야! 아주 끔찍하게!"
"맞아, 맞아! 뼈와 살을 발라내기 전에 내장부터 쭉쭉 뽑아서 먹어치울 거야! 우리 둘이 전부! 캬캬캭!"
칼은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시끄럽고 질문이나 들어, 밤톨들아."
"...뭐, 뭣! 밤톨! 감히!!"
"지금 네 옆의 녀석한테 열쇠가 들어있는 상자가 어느 쪽이냐고 묻는다면, 과연 어느 쪽 상자를 가리킬까?"
우뚝.
그 질문에 길길이 날뛰려던 괴물들의 움직임이 멈췄다.
놈들의 하나뿐인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렸다.
"왜 대답이 없어? 너부터 말해봐."
칼이 왼쪽의 괴물을 바라봤다.
"이, 이이익...!!"
왼쪽의 괴물이 분하다는 듯 칼을 노려보더니, 결국 마지못해 자신의 상자를 가리켰다.
칼은 미소 지으며 오른쪽 괴물에게도 물었다.
"너는?"
이미 답은 정해져있었지만 놈들을 놀리기 위해 일부러 물었다.
오른쪽 괴물도 이를 빠드득 갈더니 왼쪽 괴물의 상자를 가리켰다.
칼은 망설임 없이 오른쪽 괴물의 상자를 선택했다.
"이쪽이 정답이었군."
상자를 열자 녹슬은 열쇠가 드러났다.
뒤쪽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이해하지 못해 멍한 표정만 짓고 있었다.
다만, 몇몇이 뒤늦게 이해하고 깨달았다는 듯 탄성을 내지를 뿐이었다.
"그, 그렇군....! 그렇게 질문을 하면 되는 거였어!"
칼의 질문대로라면, 진실과 거짓의 괴물 모두 열쇠가 없는 쪽의 상자를 가리킬 수밖에 없게 된다.
모든 사람이 이해한 건 아니었지만, 아무튼 간단하게 답을 맞혀버리고 열쇠를 얻어낸 칼의 모습에 모두가 환호했다.
"자네 정말 대단하군! 대단해!"
"대체 어떻게 그런 발상을 떠올릴 수가 있는 건가? 그것도 이렇게나 짧은 시간 안에...!!"
너무 그렇게 칭찬을 들으니 오히려 민망해진 칼이었다.
그도 그럴 게, 이건 사실 알고 있는 문제였으니까. 지구에서는 이미 유명한 천사 악마의 논리 퀴즈였다.
오히려 정답이 기억 안 나서 꽤 한참을 고민하다가 이제서야 나선 것이었는데.
'...음?'
문득 뒤통수가 따가워진 칼은 고개를 돌렸다.
[Lv.38]
[배교자, 악마 숭배자]
이쪽을 노려보고 있다가 황급히 표정을 바꾸는 여사제가 보였다.
애써 기쁘다는 듯 미소를 짓고 있는 가증스러운 모습.
칼은 피식 웃었다.
'기회를 놓쳐서 화난 건가? 꼬우면 니가 맞혔어야지.'
방금의 그 태도로 확실해졌다.
그녀는 명백히 시련을 망치고 원정대를 전멸시키려 하고 있었다.
어떻게 몰래 죽일 기회가 있으면 좋겠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마법사들이 이렇게 주변에 다닥다닥 붙어있으니 마력을 끌어올리면 바로 들킬 수밖에 없었다.
당연하지만 그녀가 악마 숭배자라는 사실은 칼밖에 모르고, 그걸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증명할 방법도 없다.
모든 걸 감수하고 대놓고 죽여버리면 이 자리에 있는 모두를 적으로 돌리게 될 것이었다.
그럼 당연히 시련은 실패하게 되겠지.
'일단은 두고 보자고.'
우선은 다음 두 번째 시련으로 넘어갈 차례였다.
"크으윽, 원통해! 원통해...!!"
원정대는 조금 사기가 오른 상태로 바닥을 치는 괴물들을 지나쳐, 다음 시련으로 이동하는 석문 앞에 섰다.
석문의 중앙에는 상자에서 얻은 열쇠에 딱 맞는 구멍이 존재했다.
철컥. 끼기긱...
석문을 열고 들어가자 이번에도 허공에 글자가 떠있었다. 그런데...
「희생의 시련」
희생.
벌써부터 불길한 그 단어에 모두의 얼굴에 불안감이 피어올랐다.
공간은 완전히 텅 비어있었다.
방금과 같이 괴물들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중앙에 영문 모를 거대한 원이 하나 그려져있을 뿐.
그때 허공에 새로운 문장이 떠올랐다.
「모든 도전자가 원 안으로 들어가면 시련이 시작된다.」
"음... 일단 다들 이동하죠."
사람들은 찜찜해하면서도 하나둘씩 원 안으로 들어섰다.
칼의 옆쪽에 선 파키온이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희생의 시련이라니... 설마 누군가 죽어야 하는 건 아니겠지?"
"야, 쓸데없이 불길한 소리 마."
에릴의 면박에 곧장 입을 다물었지만.
화아악!
이내 모든 사람이 원 안으로 들어가자 테두리에서 푸른빛이 뿜어져나왔다.
"어, 저기..."
그리고 허공에 또다시 새로운 문장이 떠올랐다.
이번에는 좀 길었다.
희생의 시련에 대한 설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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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련은 5분 뒤에 시작된다.
2. 5분 뒤 바닥의 원이 붉게 변하면, 모두가 각자 희생시킬 한 명을 머릿속에 떠올려 선택한다.
3. 모두가 동일하게 한 번의 선택만을 받으면 아무도 죽지 않고 시련은 통과된다.
4. 그러나 아닐 경우, 가장 많은 선택을 받은 자가 죽고 시련은 반복된다.
5. 누가 어떤 이를 선택했는지는 공개되지 않는다.
6. 스스로를 선택하는 것도 가능하다.
< 유적 탐사 (6)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