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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적 탐사 (3)
"주의사항들을 다시 상기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아가씨의 안전이며..."
"출발하기 전에 한 번씩들 더 점검해! 마도구 전개식이 꼬이진 않았는지..."
질서정연하게 서있는 후작가의 기사들, 원정에 사용할 물품들을 분주히 점검하는 어스문의 마법사들, 그리고 입가에 미소를 띈 채 그 사이를 돌아다니며 인사를 건내고 있는 사제들까지.
언뜻 보면 착실히 사전 준비를 마쳐가고 있는 이상적인 원정대의 모습.
하지만 그 안에 숨어있는 분란의 싹들을 볼 수 있는 칼의 마음은 심란하기 그지없었다.
'...이건 참 드물게 환장할 조합이군.'
첩자, 악신 숭배자, 흑마법사.
어쩌다 이 세 종류의 빌런들이 한 자리에 모이게 된 걸까. 일부러라도 이렇게 모으긴 어려울 텐데.
"파키온, 여기 있는가?"
[Lv.50]
[헬자르 학파의 흑마법사]
그때 갑자기 흑마법사가 이쪽을 향해서 다가왔다.
칼은 슬그머니 뒤로 물러섰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에릴과 대화를 나누고 있던 파키온이 후다닥 달려왔다.
"토바즈 님, 무슨 일이십니까?"
이름이 토바즈로군. 이놈이 고용주였나?
그가 껄껄 웃으며 말했다.
"출발하기 전에 잠깐 이야기나 나누려 온 거지. 준비에 별 문제는 없나?"
"하하, 걱정 마십시오. 한두 번도 아니고 완벽합니다."
"그거 다행이군. 그나저나 자네 쪽 인원이 한 명 늘은 것 같은데...?"
토바즈가 묘한 눈빛으로 뒤에 선 칼을 응시했다.
칼은 어색하게 웃으며 서클의 마력을 최대한 억눌러 숨겼다.
토바즈의 레벨은 50, 칼은 53.
50레벨대쯤 되면 단 몇 레벨의 차이라도 상당한 수준 차이가 난다. 경지를 작정하고 감추려면 감출 수는 있었다.
칼의 마력 제어에 다행히도 토바즈는 칼이 마법사라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듯 보였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걸 보니 약간의 이질감을 느낀 것 같긴 했지만.
"아, 이 친구는 예전 동료입니다. 얼마 전에 우연히 만나게 되서 급하게 원정에 꼈는데, 실력 하나는 확실하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런가? 알겠네. 자네 쪽 구성이야 내가 간섭할 일은 아니지."
토바즈가 그만 칼에게 신경을 끄고 몇 마디 더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삼촌! 마도구 점검 다 끝났어요!"
갑자기 웬 젊은 마법사가 뒷짐을 지고 건들건들 다가왔다.
토바즈의 조카이자 이번 원정의 참여자인 아르먼이었다.
토바즈가 귀찮은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다른 것들도 더 살펴보고 있거라."
"에이, 다 확실히 했다니까요. 그나저나 이 사람들은 누구예요? 아, 이번에 길잡이 한다던 그 모험가들인가?"
아르먼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말했다.
"솔직히 전 이해가 안 돼요, 삼촌. 왜 굳이 이런 사람들을 거금까지 줘가면서 데려가요? 저희하고 후작가의 기사들이면 그까짓 유적 탐사하는 데야 충분히 차고 넘치겠구만."
귓속말도 아니고, 면전에서 대놓고 시비를 거는 꼴에 파키온의 표정이 황당하게 변했다.
토바즈도 인상을 찌푸리며 손을 휘저었다.
"쓸데없이 입 놀리지 말고 가라. 무례하게 그게 무슨 말이냐?"
"제가 뭐 틀린 말 했나요, 쳇."
그리곤 돌아서면서 하는 말이 가관이었다.
"모험가는 개뿔, 이럴 때나 한탕 크게 벌어보겠다고 달려드는 사기꾼들이..."
대놓고 들으라는 듯 중얼거리는 말이었기에 전부 다 들렸다.
토바즈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미안하군. 보시다시피 조카 놈이 좀 많이 철이 없다네."
"...괜찮습니다, 하하."
파키온은 어색하게 웃고 말았다.
잠시 뒤 토바즈가 자리를 떠나고,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에릴이 걸쭉한 욕을 뱉었다.
"씨발, 좆같은 새끼가... 뭐? 한탕 벌겠다고 달려드는 사기꾼?"
"야야, 아직 가깝다. 들리겠어. 한두 번도 아닌데 좀 참아."
칼은 멀어지는 토바즈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조카라는 놈은 좀 머저리여도 그는 나름대로 정상적인 인물로 보였다.
하지만 저게 다 가증스러운 연기라는 거겠지. 진짜 정체는 흑마법사니까.
칼은 에릴을 진정시키고 있는 파키온에게 물었다.
"이번에 모험단을 고용한 사람이 저 사람입니까?"
파키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엉, 어스문의 켈롭스 지부장인 토바즈 님이시다. 무려 5서클의 고위마법사 되시는 대단한 분이지. 예전에 자그마한 인연이 좀 있었는데 그거 때문인지 이번 원정에 길잡이로 고용된 거야."
"아하..."
"그리고 이번 원정의 총지휘자이시기도 하고. 유적을 최초로 발견한 게 저분이라고 하니까."
"존칭을 계속 붙이는 걸 보니 대금을 엄청 많이 받으셨나 보네요."
"...응? 하핫!"
파키온이 찔렸다는 듯 민망한 웃음을 터뜨렸다.
"날카로운데? 맞아, 상당히 많이 받았지. 거대 마법 학파면 다른 건 몰라도 자금력 하나는 어마무시하니까."
이것저것 더 떠들기 시작한 그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흘리며, 칼은 생각에 잠겼다.
'흑마법사가 최초 발견자에, 이렇게 원정대까지 본격적으로 꾸렸단 말이지...'
대체 뭔 개수작이지?
어떻게 봐도 대놓고 수상했다.
그때 머릿속에 퀘스트가 떠올랐다.
[돌발 퀘스트가 발생하였습니다.]
<돌발 퀘스트: 흑막 저지>
흑마법사의 존재를 인지했습니다. 이번 원정에서의 그의 목적을 파악한 뒤 저지하십시오.
메인 퀘스트와 관련이 있을 수 있습니다.
퀘스트 보상: 100000SP, 5서클 랜덤 마법서 1개
"...음."
뿔사슴 숲에서 키메라를 마주했을 때와 같은 상황이었다.
흑마법사 놈들은 마주칠 때마다 조지라고 이렇게 퀘스트가 뜨는 건가?
칼은 한숨을 내쉬며 다시 한 번 주변을 둘러봤다.
기사들 사이의 첩자.
그리고 사제들 사이의 악마 숭배자.
이번 원정의 문제는 비단 흑마법사뿐이 아니었다.
유적은 위험한 장소다.
한 명만 마음 먹고 트롤링을 해도 순식간에 파티가 개판이 날 수 있는 곳.
그런데 그런 이들이 셋이 모였다.
순조로울 것이라 생각했던 원정이 이젠 한 치 앞도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냥 지금이라도 빠질까.'
이대로 유적에 들어가면 분명 굉장히 성가신 일에 휘말릴 터.
지금이라도 관둘까 고민이 되었다.
하지만 양심에 찔려 곧 생각을 접었다.
퀘스트 내용을 보면, 적어도 흑마법사는 이번 원정에 무언가 구린 의도를 품고 있다는 게 확실하니까.
뻔히 아수라장이 될 걸 알면서 이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외면하고 혼자만 쏙 빠지기는 좀 그랬다.
칼은 저멀리 있는 토바즈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놈의 목적을 파악하고 저지하라고?
뭣하면 퀘스트고 뭐고 어떻게든 몰래 죽여버리지, 뭐. 유적 안에서 기회는 많을 테니까.
문득 상황이 우스워진 칼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도 그럴 게, 지금 자신도 알티우스 소속인 걸 속이고 원정대에 낀 마당이었으니까.
단지 차이가 있다면 이쪽은 순수하게 유적을 구경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는 것.
하지만 상황이 이렇게 됐으니 여유를 부리지는 못하리라.
'속이고 참여한 건 미안하지만, 그래도 다른 것들이 개수작은 못 부리게 막아줄 테니까...'
그 정도면 이번 원정에 참여한 값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싶었다.
"이제 출발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점검들 하십시오!"
이내 준비가 모두 마쳐졌다.
투두두두...!!
선두에는 길을 안내할 어스문의 마법사들이, 중간에는 후작가가, 그리고 맨 뒤에는 칼을 포함한 모험단과 짐꾼들이.
말에 올라탄 원정대가 길게 줄을 지어 성문을 빠져나갔다. 유적이 위치한 산맥을 향하여.
원정의 시작이었다.
* * *
며칠 이어지는 평야를 꼬박 달린 원정대는 산맥에 도착했다.
험악한 산길을 하루 정도 더 오르고, 그들은 마침내 유적의 입구에 도달할 수 있었다.
"도착했습니다."
무성한 수풀을 헤치고 나가자 바닥에 드러난 자그마한 통로.
대충 두 사람이 한 번에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크기다.
안쪽으로는 지하를 향해 계단이 까마득히 이어진 게 보였다.
마법사와 기사들이 통로를 둥그렇게 둘러싸고 선 채 이야기를 나눴다.
"안쪽으로 쭉 내려가면 통로가 굉장히 거대해지는데, 일단 거기까지는 별다른 함정이 없는 걸 확인했었소."
"음, 그래도 최대한 조심하는 편이 좋을 것 같은데."
"물론이오. 일단은 바깥과 줄부터 연결해두고 마도구도 몇 개 활성화를..."
잠깐의 의논 뒤, 지상에 몇 명만 남겨둔 채 원정대는 줄을 지어 하나둘씩 내려가기 시작했다.
마법사의 말대로 완전히 지하에 도달하기까지 별다른 함정은 없었다.
그리고 예고대로 나타난 거대한 통로.
"허..."
모두가 짧게 탄성을 터뜨렸다.
칼도 눈을 빛내며 석벽으로 깔끔히 다듬어진 통로를 응시했다.
'이거 분위기 제대로네.'
벽면 곳곳에는 야광석이 반짝이며 은은하게 빛나고, 안쪽으로는 이질적인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다.
컴퓨터 모니터 너머로나 보곤 했었던 던전과 유적의 입구가 바로 현실에서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여기서부터가 본격적인 입로인 모양이군. 그럼..."
기사와 마법사들이 뒤쪽을 돌아봤다.
그에 파키온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료들과 함께 나섰다.
이제부터는 모험가들의 차례였다.
"천천히 평소대로만 하자고, 다들."
파키온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이고는 선두에 서서 전진을 시작했다.
지면과 벽면을 꼼꼼히 살피고, 계속해서 정지하며 신중히 함정과 흔적을 찾는다.
칼도 적당히 뒤에 따라붙어서 걸으며 주변을 살폈다.
물론 뒤쪽에 있는 토바즈나, 나머지 두 분란 종자들은 항상 의식한 채였다.
'딱히 눈에 띄는 건 없군. 별 특색 없는 일자형 통로인 것 같은데.'
멈췄다 걷고, 또 멈췄다가 걷고.
그런 따분한 이동이 꽤 긴 시간 이어졌다.
긴장을 계속 유지하며 걷던 기사와 마법사들의 표정에 약간의 지루함이 떠올랐다.
그래도 유적이 굉장히 위험한 장소라는 건 다들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기에 아무도 불만을 표하지 않고 묵묵히 따르고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 입을 열었다.
"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찔끔찔끔 가야 되는 거야?"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토바즈의 조카, 아르먼이 짜증난다는 얼굴로 파키온에게 말했다.
"당신들 모험가 중에서도 실력이 좋은 편에 속한다며. 근데 뭐가 이리 느리냐고."
저 새끼 또 지랄이네, 저거.
모두가 가만히 있는데 혼자서 저럴 수 있는 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이었다.
칼은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다.
에릴의 이마에 힘줄이 솟아난 게 보였다.
이번에도 역시 아무렇지 않게 받아넘기는 건 파키온이었다.
"저희도 좀 더 속도를 내고 싶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이런 유적에서는 함정 하나하나가 치명적이기 때문에..."
"말은 번지르르하네. 혹시 돈 받은 값은 해야 되니까 뭐라도 있는 척 흉내내는 건 아니고?"
그 말에는 파키온의 표정도 잠시 굳었다.
다른 기사와 마법사들의 얼굴도 좋지 않게 변했다. 아르먼이 대놓고 분위기를 망치고 있었으니까.
"언행을 상황과 맞추어 할 줄 모르는군. 참으로 철없는 자로다."
그때 잠깐 이어진 정적을 깨고 누군가 또 입을 열었다.
기사들 사이에 있던 후작 영애, 로자리엘 단테였다.
아르먼을 대놓고 욕하는 말이었다.
"뭐, 뭣..."
자신이 한 짓을 그대로 돌려받자 아르먼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녀는 아르먼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고 언제 그랬냐는 듯 입을 꾹 다물었다.
"......"
한편 그런 와중 이상한 걸 느끼고 통로의 천장을 훑고 있던 칼은, 이내 하나의 흔적을 발견했다.
'찾았다.'
벽면에 이어진 미세한 실선들이 겹치는 지점.
함정의 흔적이었다.
대주술사 가르두카를 잡을 때 그러했듯, 글로리어스 소울은 스킬 하나하나에도 자세한 공략 설정이 존재할 정도로 섬세한 게임이다.
그건 던전이나 유적도 마찬가지였다.
게임을 플레이하는 유저들은 그곳에 존재하는 온갖 함정들을 하나하나 자세히 파악하고 공략해야만 했다.
그리고 4개의 직업 엔딩을 본 칼은 그런 것들쯤이야 이미 질리도록 경험하고 졸업한 고인물.
비록 게임이 현실로 바뀌었어도 여전히 머릿속에 들어있는 방대한 게임 지식과, 마법사가 되며 날카로워진 감각은 유적의 숨겨진 장치들을 놓치지 않고 파악하는 걸 가능케 해주었다.
"파키온 씨."
칼은 파키온과 다른 동료들을 불렀다.
"저기 저거 보입니까?"
"...응?"
모두가 눈매를 좁히고 칼이 가리킨 곳을 바라봤다. 그러다 곧 탄성을 터뜨렸다.
"함정 맞는 것 같죠?"
"어, 맞아... 그런 것 같네."
그들의 감탄한 시선을 받으며, 칼은 주변의 돌멩이를 하나 주워들었다.
그리고 실선이 이어진 중앙으로 던졌다.
철컹! 파바바박!!
굉음과 함께 앞쪽의 천장에서 순식간에 쏟아지는 쇠뇌들.
기사와 마법사들이 화들짝 놀라며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칼은 별 거 아니라는 듯 손을 툭툭 털며 말했다.
"함정이 있길래 발동시켜 없앴습니다."
"......"
"이제 좀 천천히 이동해도 이해해주실 거라고 믿겠습니다?"
그 말에 모두의 시선이 다시 아르먼에게로 모였다.
안 그래도 붉었던 그의 얼굴이 더욱 수치심으로 붉어졌다.
칼은 그 모습을 보고 피식 웃었다.
"자, 그럼 계속 이동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