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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길드 (3)
지부를 침입한 습격자들을 모두 처리하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칼은 감지 마법을 퍼뜨려 곳곳에 있는 블러드 스컬의 조직원들을 순식간에 처리하고, 제압당한 채 있던 헤르란도의 지부원들을 구해주었다.
대륙적으로 악명 높은 범죄 조직의 일원들인 만큼 자비를 베풀어줄 이유는 없었다.
스칼렛의 부탁으로 단 몇 명만 살려서 제압해놓았다. 그들을 심문하고 처리하는 건 칼이 신경 쓸 일이 아니었다.
"...음."
지부 안을 전부 정리하고 지상으로 나온 칼은 짧은 침음을 흘렸다.
그를 안내해줬던 노인이 가게 바닥에 처참히 살해당한 채 널부러져 있는 모습부터 보였기에.
뒤따라온 스칼렛도 그걸 발견하고는 말없이 노인의 시체를 들어올렸다.
"시체들은 어쩔 셈입니까?"
"...우선 지부 안으로 옮겨서 한 데 모으고, 나중에 따로 처리할 겁니다."
냉정한 말이었지만 칼은 그녀의 목소리에 껴있는 음울한 감정을 느꼈다.
아까 보니 그 부지부장이라는 자를 상당히 신뢰했던 모양인데, 아주 제대로 배신을 당하고 그 때문에 지부원들 상당수가 죽고 다쳤으니 마음이 괴로울 터였다.
뭣하면 시체 처리도 도와줄 수 있었지만, 칼은 거기까지 쓸데없는 오지랖은 부리지 않기로 했다.
시체들을 치우고, 습격 사실을 알리기 위해 몇몇 지부원들이 지부를 빠져나가고, 그렇게 상황이 얼추 정리된 뒤.
칼은 처음 대화를 나눴던 방에서 스칼렛과 다시 마주보고 앉게 되었다.
하나 달라진 점이 있다면 더 이상 목에 겨눠진 칼이 없고, 테이블에 마실 차까지 대령되었다는 것이다.
"지부원들을 구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처음의 경계 가득했던 기색 없이 그녀가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지부 하나가 그대로 전멸당할 뻔할 걸 막아줬으니 당연한 태도였다.
또 가면을 벗고서 얼굴도 드러낸 채였는데, 눈과 머리의 색깔이 모두 자줏빛이었기에 상당히 인상적인 외모였다.
"정식으로 다시 소개드리겠습니다. 헤르란도 길드, 오르만티스 지부의 지부장인 스칼렛이라 합니다. 혹시 존함이..."
"칼이라고 부르면 됩니다. 알티우스 학파 소속의 마법사입니다."
이제 와서는 굳이 신분을 밝힐 필요가 없긴 했다.
스칼렛은 칼에게 아주 큰 빚을 진 입장이고, 더 이상 무언가를 캐물을 자격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칼은 그냥 말해주었다.
설마 그럴 것 같진 않지만, 만약에 그녀가 약속을 지키지 않을 경우를 대비해서 알티우스의 이름이 큰 압박이 되리란 의도에서였다.
또 애초에 숨기는 게 별 의미 없기도 했다.
나중에 이쪽의 뒷조사를 하면 어차피 다 드러날 게 뻔한 일.
방금 보여준 무력, 그리고 제국의 변경에서 했던 일이 있으니 이런 거대 길드에게 정체쯤이야 금방 좁혀질 터였다.
알티우스라는 말에 스칼렛은 살짝 놀란 얼굴이었다.
"알티우스 학파의 마법사셨군요. 아무튼 칼 님,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다시 한 번 정중히 고개를 숙인 그녀가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그리고 큰 은혜를 입은 입장에 죄송하지만... 하나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칼은 대충 짐작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네들 일에는 관심 없습니다. 그 대머리 놈이 말했던 정보가 뭐인지도 전혀 관심 없어요. 어디 가서 떠들고 다닐 일은 없으니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이해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지금 내게 중요한 건 딱 하나입니다. 당신이 거래를 잊지 않고 지키는 것.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내가 찾아달라는 사람을 찾아주기만 하면 됩니다. 설마 몰라라 할 생각은 아니겠죠?"
그녀가 당황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말씀하셨던 대로 최선을 다할 생각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덧붙였다.
"본부와 접촉을 시도하기 위해 지부원들이 나섰습니다. 얼마 내로 본부 쪽의 인원이 올 테니, 우선은 그때까지만 기다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 *
칼은 그동안 근처 여관에서 머물렀다.
대략 일주일 정도가 지난 후에야 찾아온 지부원을 따라서 지부로 재차 이동했다.
"어서 오십시오, 칼 님."
스칼렛이 인사를 건냈고, 그 옆에 지부원들과는 분위기가 다른 일련의 무리가 서있었다.
칼은 그들이 본부 쪽에서 나왔다는 이들임을 바로 눈치챌 수 있었다.
중심에는 스칼렛과 똑같이 자줏빛 머리칼을 지닌 사내가 있었다.
[Lv.46]
[헤르란도 본부의 조장]
"루돈이라고 합니다. 이 아이의 오빠 되는 사람인데, 이야기는 모두 들었습니다. 여동생과 이곳 지부를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그가 칼을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꽤 오랜 시간을 기다린 칼은 마음이 급했기에 바로 본론부터 꺼냈다.
"제가 찾아야 할 사람에 대해서도 전해들었겠죠? 혹시 뭐라도 나온 게 있습니까?"
"아, 예. 물론 찾아봤습니다."
루돈이 고개를 힐끔 돌렸다.
이미 탁자 위에는 여러 종이 서류들이 한가득 쌓여있었다.
"이름은 플러랜, 성은 애시드. 그리고 직업이 마법사. 사실 이 정도 정보만으로 사람을 찾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입니다."
"......"
"하지만 운이 좋게도 마법과 관련이 있는 '애시드'라는 성에 대해선 제가 몇 가지 기억하고 있는 게 있었습니다. 관련 자료들을 뒤져보니, 경께서 찾고 있는 사람이 아닌가 싶은 인물이 나오더군요."
탁자로 칼을 안내한 그가 종이 한 장을 보여주었다.
"뮬턴 왕국의 변경에 세이온이라는 마법 학파가 하나 있었습니다. 수장들이 대대로 애시드라는 성을 계승하며, 규모가 작긴 해도 상당히 유서가 깊은 학파였는데..."
그 말에 칼의 마음속에 기대가 솟아올랐지만, 이내 이상함을 느꼈다.
루돈의 말이 과거형이었기 때문이다.
"...이미 5년 전에 몰락해버린 학파입니다. 거의 대부분의 학파원들이 떠나고 몇몇 학파원만이 남아 수장과 함께 행적을 감췄다는 것까지 길드 내에 정보가 존재하더군요."
"......"
칼은 실망감을 느끼다가 말했다.
"그곳의 몰락하기 전 마지막 수장이었던 자가 플러랜 애시드라는 말이군요."
"그렇습니다. 공께서 이 자의 행방을 원하시는 거라면 저희가 최선을 다해서 찾아낼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말하는 걸 들어보니 쉽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만, 시간이 얼마나 걸리겠습니까?"
그에 루돈이 잠시 가늠해보는 듯 말이 없더니, 곧 다시 입을 열었다.
"당연히 확실한 기간은 장담드릴 수 없습니다. 뮬턴 왕국이 이곳에서 가까운 거리가 아니기도 하니까요... 적어도 두 달 이상은 소요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었다.
'역시 당장 찾아내기는 힘든 거겠지.'
그래도 벌써 신원을 파악했다는 것부터가 굉장히 고무적인 일이었다.
정말 이름과 마법사라는 사실만 가지고 어떻게 해볼 수 있을 거라고는 칼로서도 큰 기대가 없었으니까.
지금껏 몇 년을 이 세계에서 떠돌며 살아왔는데, 두 달쯤이야 기다리라면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부디 최선을 다해서 그 자를 찾아주시길."
그 말에 루돈이 빙긋 웃었다.
"저희와 같은 정보 길드는 신뢰에 살고 신뢰에 죽는 집단입니다. 누구보다 계산이 철저하기도 하죠. 공께 큰 빚을 졌으니 그걸 하루빨리 갚기 위해서라도 플러랜 애시드라는 자를 신속하게 찾아낼 겁니다."
그렇게 대화가 끝나고, 스칼렛과 루돈의 배웅 속에 칼은 지부를 나섰다.
"아, 그런데 공. 혹시나 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루돈이 입구에서 칼을 붙잡고 말했다.
"혹시 다른 정보 길드들을 찾아가서 같은 의뢰를 맡기실 생각이십니까?"
"예? 예, 뭐..."
정확히 그럴 생각이었던 칼은 순간 찔려서 말끝을 흐렸다.
이들이 플러랜 애시드를 찾아낼 거라는 확신도 없고, 또 찾는 사람이야 많을수록 시간도 단축될 테니까.
하지만 이어지는 루돈의 말에 그게 별로 좋지 않은 생각이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러기는 별로 추천드리지 않습니다."
"어째서입니까?"
"저희야 공께 은혜를 갚는 입장이니 상관이 없습니다만... 같은 의뢰를 여러 길드에 한 번에 맡기는 건 이쪽에서 암묵적으로 금지된 행동입니다. 이득적인 문제도 있고, 같은 건을 조사하다 보면 정보원들끼리 충돌이 빚어질 수도 있으니까요."
"아..."
다른 정보 길드들에서 몹시 안 좋게 볼 것이 뻔하다는 이야기였다.
칼은 바로 계획을 접었다.
찾는 시간 좀 줄이자고 그들 모두와 척을 지는 건 멍청한 짓이었으니까.
아무튼 그렇게 지부를 나선 칼은 주점 밖으로 나왔다.
대낮에 와서 이것저것 대화를 나누다 보니 벌써 날은 저물어가고 있었다.
다시 여관으로 돌아간 칼은, 바로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 홀에 적당히 자리를 잡고 앉았다.
"......"
이제 뭘 하지?
칼은 점점 사람들로 붐비는 여관 홀을 보며 상념에 잠겼다.
'적어도 두 달이라...'
플러랜을 찾아내길 기다리는 동안 딱히 할 일이 없었다.
이제 메인 퀘스트를 깨러 힐로렌으로 이동할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렇다고 또 언제 헤르란도에서 소식을 전해올지 모르니 도시를 떠나 이곳저곳 돌아다닐 수도 없었다.
이 게임 세계에 떨어진 이래, 적어도 두 달이라는 긴 시간 동안 완벽하게 할 일이 없게 된 것이었다.
"이런 여유는 영 적응이 안 되는데."
칼은 피식 웃었다.
처음에는 살기 바빠서, 그럭저럭 제 한 몸 지킬 수준이 된 후로는 퀘스트를 깨느라.
지금껏 쉬지 않고 달려왔으니 몇 달을 한 곳에서 얌전히 쉬고 있어야 하는 상황이 어색하게 느껴지는 건 당연했다.
어색함을 넘어서 벌써부터 좀 답답하게 느껴질 지경. 칼은 자각하지 못했지만 일 중독과 비슷한 증상이었다.
'뭐라도 적당히 할 만한 게 없나?'
빵을 수프에 적셔 먹으며, 어느새 여관 홀을 가득 채운 사람들을 구경했다.
"흐하핫! 마셔, 마셔! 큰 건수도 하나 마쳤는데 오늘은 마시고 죽어야지!"
"야, 너 그거 봤냐? 아까 본관 가서 보니까 웨어울프 퇴치 의뢰가 걸렸던데?"
"그래서 그때 내가 팍! 날아오는 화살을 귀신 같이 잡아챈 다음에..."
술을 마시며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사내들.
대부분이 용병들이었다.
용병의 유동이 유독 많은 도시인 만큼 여관에도 용병들이 들어차는 건 평범한 일이었다.
급 높은 용병은 길드 건물에 숙소가 따로 마련되어 있다고 하기도 들었지만, 대부분은 그게 아니니까.
레벨을 봐도 대다수가 10 언저리고 20을 넘는 자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별 생각 없이 사람들의 정보를 이리저리 관찰하던 칼은 이내 관두었다.
'이러는 것도 썩 좋지는 않겠지.'
레벨을 보고, 타이틀을 보고.
계속 이렇게 NPC 정보를 보는 것마냥 타인을 관찰하면 현실을 게임처럼 여기게 될 터.
앞으로는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인물 정보 관찰은 자제하는 게 좋을 듯했다.
칼은 다시 식사에 집중했다.
'그나저나 내 정보는 어떻게 표시되어 있을까.'
레벨은 53이고, 타이틀은 과연 어떻게 되어있을지 궁금했다.
알티우스의 마법사? 설마 지구인 타이틀도 있는 건 아니겠지?
시답잖은 상념을 이어가고 있자니 누군가 이쪽으로 다가오는 게 보였다.
가죽 갑옷과 허리춤의 검, 가벼운 무장으로 주변과 다를 것 없이 용병으로 보이는 사내들.
그냥 지나치는 거다 싶어 칼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사내들 중 하나가 테이블에 툭 부딪히더니 멋대로 넘어지며 바닥을 굴렀다.
"...어이쿠!"
꽤나 요란스럽게 넘어졌기에 주변의 시선이 몰렸다.
칼도 황당해서 넘어진 사내를 쳐다봤다.
"이런 썅, 어느 새끼가 지나가는데 다리를 걸고 지랄이야!"
사내가 거칠게 자리를 털고 일어나더니, 갑자기 호들갑을 떨며 품을 뒤졌다.
꺼내든 건 검자루가 쪼개진 단검이었다.
동료들이 옆에서 그걸 보고는 과장스럽게 탄식을 뱉었다.
"허, 이거 다 망가졌네!"
"비싼 값 주고 샀다더니 벌써부터 수리비만 나가게 생겼구만!"
짜기라도 한듯 사내와 동료들의 시선이 일제히 칼에게 향했다.
사내가 칼에게 눈을 부라리며 외쳤다.
"이런 씨팔! 이거 어쩔 거야, 엉?! 어쩔 거냐고! 네놈 때문에 다 부셔졌잖냐!"
"......"
웃기지도 않는 자해 공갈.
칼은 어처구니가 없어 그들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뭐야, 이 병신들은 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