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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마법사로 살아가는 법-30화 (30/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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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검

"...누굽니까?"

정적을 깨고 칼이 먼저 물었다.

아무리 봐도 백작성에서 보낸 추적자로 보이진 않았기에.

왜인지 묘한 엄숙한마저 느껴지는 게, 행색과 썩 어울리진 않지만 혹시 사제가 아닌가 싶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머릿속에 하나의 가정이 스쳐지나갔다.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은 아주 불길한 가정이.

'...설마?'

등골을 타고 올라오는 미약한 소름.

아니, 아니겠지.

칼은 그 최악의 경우를 부정하며 천천히 뒤로 물러섰다.

반사적으로 인벤토리에서 마력 회복 포션을 꺼내들고서.

"......"

여인은 그런 칼의 모습을 말없이 빤히 바라보다가, 훌쩍 말에서 내려섰다.

칼은 이내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이쪽을 향해 무겁게 억눌린, 진득하고도 맹렬한 살의를.

여인의 반쪽짜리 표정은 무심하기 그지없었지만, 가면에 가려진 나머지 반쪽은 악마처럼 일그러진 게 아닌가 생각이 들 정도였다.

곧 그녀의 다물어진 입이 열렸다.

"그람 학파의 흑마법사."

"......!!"

듣기 좋은 미성이었지만, 칼은 순간 심장이 쿵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불길한 예감은 언제나 빗나가질 않는다.

들켰다.

정말로 흑마법을 들켜버린 것이다.

칼은 양손에 땀이 차오르는 걸 느끼며 선 채로 굳었다.

'대체... 어떻게?'

제일 먼저 떠오른 생각이었다.

그동안 흑마법을 사용한 건 고작 2번.

언데드로 사용한 시체도 전부 불태우거나 없애버렸다.

그런데도 그 흔적을 찾아서 쫓아왔다고?

"게로드 영지에 위치한 마을의 숲에서 키메라를 언데드로 만들었고, 카디악 학파의 흑마법사를 살해."

여인이 손을 검자루로 옮겼다.

"케리 시에서 또다시 언데드를 부리며 사람들을 무분별하게 학살."

주변을 널부러진 시체들을 둘러본 그녀가 다시 칼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지금 여기서도 많은 이들을 죽였군."

"......"

할 말이 있으면 해보라는 듯한 그 눈빛에, 칼은 속으로 욕을 뇌까렸다.

'아, 씨발...'

키메라 흑마법사 놈을 쫓는다던 그 추적자였나?

'베하스 교단의 심판자구나.'

어떻게 쫓아왔는지는 당장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어찌 됐든 그녀는 이쪽이 흑마법사라는 걸 이미 확신한 상태였고, 앞으로의 전개는 물 보듯 뻔했다.

칼은 어떤 해명을 하더라도 여인에게 통하지 않으리란 걸 알았다.

흑마법사를 쫓는 집단들은 하나같이 광적이며, 맹목적이다. 교단 쪽의 세력들은 특히 더.

그나마 다행인 건 다른 전투 사제들을 우르르 끌고 오진 않았다는 점일까.

일단은 대화를 시도해보기로 했다.

말이라도 안 하면 이 답답함을 토로할 길이 없었다.

"오해다."

"......"

"난 결코 무고한 자를 죽인 적이 없어. 카디악의 흑마법사 놈이나 키메라는 말할 것도 없고, 케리에서 죽인 놈들은 어둠에 숨어서 사는 암조직이었지. 그쪽에서 먼저 날 건드리고 민간인들도 죽였기에 그대로 되갚아준 것뿐이다. 그리고 여기 있는 놈들은..."

여인이 말을 끊어버렸다.

"같잖은 변명들이군."

"...변명이 아니라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진실이다."

"설령 그렇다고 해도 상관없다. 흑마법은 절대악."

스르릉.

그녀가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들었다.

"그리고 네놈은 흑마법을 익힌 흑마법사지. 어느 경우라도 죽음으로밖에 갚을 수 없는 죄악이다."

나무가 모조리 날아가 황폐해진 일대에서, 은빛 검날이 직사되는 햇빛에 눈부시게 번쩍이며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가 뽑아든 검으로부터, 칼은 알 수 없는 이질적인 기운을 느꼈다.

일종의 신성함 같기도 하고, 범접하기 힘든 거룩함 같기도 하고.

뭐가 됐든 보통의 검이 아니라는 건 확실했다.

문제는 그 보통이 아닌 검이 곧 이쪽의 몸을 찢어갈기기 위해 휘둘러질 거라는 것.

"피치 못할 사정으로 어쩔 수 없이 익힌 거였다. 단지 그 이유만으로 날 죽이겠다는 거냐? 내가 어떤 인간인지와는 관계없이?"

"흑마법을 처단함에 있어 예외는 없다. 노인도, 아이도, 병자도, 만인의 존경을 받는 숭고한 현자라도."

그것이 한 치도 의심할 필요가 없는 진리라는 듯, 그녀의 표정은 무덤덤했다.

그야말로 맹목적인 광신.

칼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씨발, 진짜 정신 나간 사고방식이군. 머리가 어떻게 되어버린 거 아니냐? 니들이야말로 어떤 의미론 흑마법사보다 더한데?"

"......"

그 말에 여인의 표정에 처음으로 미약한 분노가 드러났다.

"더러운 혀를 놀리지 마라. 위대하신 베하스의 뜻에 따르는 우리가 곧 절대적인 선이며, 정의다."

"그럼 그 베하스라는 신도 어지간히 미쳤군."

여인은 더 이상의 대화가 필요없다는 듯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성호를 그은 뒤, 칼을 향해 검날을 치켜세웠다.

"자비로운 베하스께서는 당신을 욕보이는 자가 있더라도 용서하신다. 지금이라도 진심으로 죄를 뉘우치고 반성하면..."

"하면?"

"고통 없이 단번에 목을 베어주마. 또한 죽어서도 베하스의 자비 아래, 영혼이 지옥 밑자락까지 떨어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칼은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또라이 같은 년, 자비가 무슨 뜻인지는 제대로 아는 거 맞냐?"

후욱!

땅을 박차고 날아드는 여인을 향해, 칼은 전격 마법을 캐스팅했다.

몰아치는 전기 줄기를 가볍게 회피하고 순식간에 접근해오는 그녀.

생각보다도 훨씬 빠른 몸놀림에 칼은 당황하며 충격파를 날렸다.

일단 떨어뜨린 뒤 마력 포션부터 마실 생각이었다. 그런데...

촤아악!

"......!!"

충격파를 그대로 베어낸 그녀가 연달아 검을 찔러왔다. 목을 노렸으나 실드에 막히는 검격.

퍼엉!

칼은 다시 한 번 충격파를 쏘아내 그녀를 멀찍이 떨어뜨렸다.

그 틈에 포션을 마시고, 대충 빈 병을 바닥에 던져버린다.

그리고 저멀리 튕겨나가 몸을 일으키는 여인을 바라보며 혀를 내둘렀다.

'이걸 반응해서 베어버리네.'

에페와 갈리온 둘을 동시에 상대할 때도 막힌 적 없는 연계였는데.

칼은 저 광신도의 무력 수준을 머릿속에서 수정했다.

그가 보통의 5서클보다 훨씬 강하듯, 그녀 역시 고위기사의 평균을 훌쩍 넘어선 수준이었다. 심판자 중에서도 정예인가?

'뭐, 그렇다고 감당 못할 수준은 아닌 것 같지만...'

칼은 긴장감을 더 끌어올렸다.

이제 본격적이라는 듯, 그녀의 검에 핏빛 검기가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것이 보였다.

보통 교단의 전투 사제들은 신성력을 이용해 검기를 빚어낸다.

그렇기에 오러로 형성된 그녀의 검기에 의문이 들었지만, 당장 신경을 써야 할 건 아니었다.

콰과과광!!

칼은 본격적으로 마법을 연사했다.

불과 전기를 뿜어내고, 지면에 가시를 솟아올리고, 무형의 힘을 교묘하게 사각에서 쏴내고.

그러나 에페와 갈리온보다도 훨씬 기민하고 날렵한 그녀를 몰아붙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콰앙!!

두 번째 충돌.

검날이 칼의 실드를 반쯤 관통하여 꽂혔다.

그대로 꿰뚫어버리려는지 그녀는 더욱 검기를 강하게 불어넣었다.

하지만 전부 칼의 노림수였다.

빠직!

이내 실드를 완전히 꿰뚫어버린 그녀의 검이 칼의 심장을 노렸지만, 마도구를 통한 2차 실드에 다시 막혔다.

완전히 가까이 붙은 상태. 그 잠깐의 주춤거림은 치명적이었다.

【윈드 클로】

콰과곽!

허공에 튀어오르는 선혈.

재빨리 몸을 틀었지만 완벽히 피하지 못했다.

그녀가 한쪽 팔이 너덜너덜 넝마가 된 채 뒤로 물러났다.

칼은 아쉬움에 혀를 찼다.

'아깝네. 몸통을 노렸는데.'

하지만 저것만 해도 상당히 치명적인 부상일 터.

이제부터 시간이 지날수록 유리해지는 건 이쪽이었다.

칼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그녀를 몰아붙이기로 했다.

"......"

그때 물끄러미 넝마가 된 팔을 내려다보던 그녀가, 갑자기 검을 똑바로 치켜세웠다.

화아악!

그러자 검에서 갑자기 황금빛이 일렁거리더니, 그녀의 등 뒤쪽으로 둥그런 광휘의 고리가 생성됐다.

동시에 팔의 부상도 검에서 흘러나온 기운에 순식간에 치유되기 시작했다.

칼은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봤다.

'미친...? 저건 또 뭐야?'

고위사제 몇 명이 신성력을 쏟아부어도 불가능할 수준의 급속 치유.

보통 검이 아닐 거라곤 생각했지만 저런 사기적인 능력이 있었다니.

기껏 허를 찌른 공격이 아무런 의미도 없게 됐다.

더군다나 검의 능력은 치유 말고도 뭔가가 더 있는 것처럼 보였다.

화륵!

검날에 불꽃처럼 넘실거리던 황금빛 검기가 순식간에 크기를 불렸다.

그녀는 그 거대한 기운을 칼을 향해 그대로 휘둘러 날려보냈다.

지면을 다 뒤엎으며 몰아쳐오는 신성의 파도에 칼은 다급히 실드를 둘렀다.

콰과과과!!

쩌적 금이 간 실드.

아까 전 검기에 뚫렸던 건 일부러 실드의 위력을 낮춰 의도한 거였지만, 이번엔 전력으로 막은 거다.

칼은 식은땀을 삐질 흘리며 물었다.

"야... 그거 무슨 성검이라도 되냐?"

설마 싶어 물은 거였는데, 놀랍게도 그녀는 부정하지 않았다.

"드류단테. 위대하신 베하스의 은총을 내려받은 자만이 사용할 수 있는 신성한 검이다."

"......!!"

진짜였어?

칼은 드류단테에 대해 알지 못했다. 다른 직업군들의 플레이 배경에는 등장하지 않았던 아이템이니까.

하지만 성물이라는 것들이 하나같이 사기적인 권능을 지니고 있다는 건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이제 그만 죽어라, 흑마법사."

화아악!!

다시금 몰아치는 거대한 기운.

【레이 버스터】

칼은 자신이 가진 최고 위력의 마법으로 맞대응했다.

광선은 신성의 파도를 산산히 부숴버리고 나아갔으나, 그 너머 있는 여인에게까지 타격을 주지 못했다.

어느새 그녀의 주위를 반투명한 황금빛 장막이 둘러싸고 있었기 때문이다.

칼은 속으로 욕을 뇌까렸다.

'급속 치유에, 이만한 원거리 타격과 방어막에, 씨발 대체 능력이 몇 개야? 템빨 차이 오지는...'

순간 머릿속에 알림이 떠올랐다.

[돌발 퀘스트가 발생하였습니다.]

<돌발 퀘스트: 성물 수집>

성검 드류단테를 발견했습니다. 베하스 심판자의 손에 들린 드류단테를 빼앗으십시오.

성물은 메인 퀘스트들의 해결에 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퀘스트 완료 보상: 드류단테의 소유권 강탈

"......"

칼은 멈칫하고 퀘스트를 읽었다.

'뺏으라고? 저걸?'

뭘 어떻게?

뺏기는 커녕 이제 튀어야 할 판인데?

더 생각할 틈은 없었다.

그녀가 이쪽을 향해 다시금 돌진해왔으니까.

성검의 권능을 안 사용할 때도 몰아붙이기가 쉽지 않았다.

마법을 난사해 저지하려고 해도 이제는 통하지 않았다.

콰아앙!!

칼은 매직 부스터를 통해 간신히 몸을 뒤로 날려 피하며 생각했다.

'이런 사기적인 능력을 계속 유지할 수 있을 리는 없는데...'

그게 가능하다면 진작부터 능력을 사용했을 터였다.

하지만 이대로면 이쪽도 과연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

콰앙! 콰아앙!!

결국 쉴 새 없이 이어지는 맹공에 한계에 다다른 실드.

돌연 그녀가 이쪽을 향해 검을 가공할 속도로 던졌다.

콰앙!!

그 공격을 마지막으로 실드는 산산히 부서져버렸다.

충격에 칼은 바닥에 몸을 뒹굴었다.

그녀가 손을 내뻗자 성검은 도로 그녀의 손에 자석이 붙듯 빨려들어갔다.

곧바로 달려든 그녀가 목을 노리고 검을 내리쳤다.

칼은 죽음을 직감하며 마지막 발악으로 포스 마법을 아무렇게나 쏴냈다.

방어막을 거둔 상태였는지, 포스가 그녀의 얼굴을 툭 스치고 지나갔다.

"......"

시간이 지나도 내리쳐지지 않는 검.

칼은 슬며시 눈을 뜨고 그녀를 올려다봤다. 그리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가 반쯤 벗겨진 가면을 붙잡고 극심히 당황하며 물러서고 있었기에.

'......!!'

전투 중 그깟 가면 좀 벗겨지는 게 뭐가 중요하다고?

뭔진 몰라도 칼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다시 한 번 전력으로 포스를 날려 그녀의 손에 들린 성검을 붙잡아 끌어당겼다.

그녀는 예상보다 순순히 검을 놓쳤다.

끝내 성검을 뺏어든 칼은 매직 부스터로 재빨리 몸을 뒤로 빼냈다.

"......"

그녀는 그런 칼을 쫓지도 않고 흐뜨러진 가면을 마저 바로 고쳐 썼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칼을 노려봤다.

검을 뺏겼지만 썩 당황한 기색은 아니었다.

오히려 비웃음 담긴 목소리로 같잖다는 듯 말할 뿐이었다.

"어리석은 놈, 검을 뺏으면 뭐가 달라질 줄 알았더냐?"

"......"

"오직 베하스의 정의를 누구보다 충실히 받들고 행한 자만이, 그분의 은총을 받아 행할 수 있는 권능이다. 네놈 같은 흑마법사 따위가 사용할 수 있는 힘이 아니란 말이다."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성검을 향해 손을 뻗었다.

방금 전처럼 검을 끌어당기려고 한 행동일 터였다 그런데...

"......?"

끌려오기는 커녕 칼의 손에서 미동도 하지 않는 검.

그녀의 표정에 처음으로 당황이 차올랐다.

그 순간 칼의 머릿속에는 퀘스트 완료 알림이 떠오르고 있었다.

['돌발 퀘스트: 성물 수집'을 완료하였습니다.]

[퀘스트 완료 보상으로 본 주인에게서 성검 드류단테의 소유권을 강탈합니다.]

<성검 드류단테 - 성물>

심판의 신 베하스의 권능이 일부 담겨있는 검입니다.

권능의 지속 시간은 10분이며, 재사용 대시 시간은 24시간입니다.

급속 치유: 전신의 부상을 급속도로 치유합니다.

광휘 불꽃: 신성한 힘이 넘치는 광휘의 불꽃을 자유자재로 사용합니다.

광휘 방어막: 신성한 힘이 넘치는 방어막을 자유자재로 펼칩니다.

칼은 고민할 것 없이 즉시 성검의 권능을 사용했다.

그러자 등 뒤로 둥그런 광휘 고리가 생겨나더니 온몸에 신성한 기운이 넘쳐났다.

'이야...'

그야말로 압도적인 고양감.

방금 전 충격에 튕겨나가며 찢어졌던 상처들도 순식간에 치유되었다.

칼은 다시 고개를 들었다.

여인이 찢어져라 눈을 크게 뜨고, 입만 뻐끔거리며 이쪽을 보고 있었다.

"어, 어떻게... 네가 그 힘을..."

칼은 히죽 웃으며 말했다.

"위대한 베하스 신도 너 같은 미친년보단 내가 더 마음에 들으셨나 보네."

"아, 아니. 아니야. 그럴 리가... 어째서 흑마법사가..."

그녀의 목소리가 심하게 떨렸다. 불신과 절망의 감정이 가득 느껴졌다.

어미에게 버림받은 새끼 양처럼, 그녀는 난데없이 자신의 손을 떠나버린 성검만 처량히 바라보고 있었다.

"야, 멍하니 있지 말고 대답해봐."

칼은 조소를 지으며 광휘의 불꽃을 피워냈다.

한 번쯤 써먹어보고 싶던 대사가 있었다.

"이제 누가 정의지?"

콰아아앙!!

거대한 신성의 파도가 그녀가 서있는 자리를 휩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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