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 ###
오크 대침공 (5)
세 명의 고위기사.
그리고 한 명의 고위마법사.
"세르덤 학파의 마이어라고 하네."
함께 남쪽 성문으로 이동하는 중 고위마법사 쪽에서 말을 건냈다.
칼도 고개를 끄덕이며 간결하게 답했다.
"알티우스 학파의 칼입니다."
"백작 각하께 들어서 알고 있다네. 알티우스 학파라, 과연 대륙 3대 학파라는 위명이 허명은 아니구만."
마이어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그 나이에 4서클이라니... 우리 학파에도 천재라 치켜주니 콧대가 높아져서 다니는 젊은 놈들이 꽤 있지. 하지만 자네만큼 뛰어난 놈은 한 명도 없다네. 그놈들이 자네 같은 진짜 천재를 만나봐야 하는데 말이야."
"하하..."
"거기다 주술에 대해서도 상당히 박식하다고 했지? 허허! 정말 뛰어난 탐구 정신이야. 내 기회만 된다면 자네와 함께 마법과 세상의 이치에 대해 이것저것 토의를 나누고 싶지만, 상황이 그럴 상황이 아니라 아쉬울 뿐이라네."
마법사치고는 꽤 넉살 좋은 성격이군.
마이어가 고위기사들을 훑어보며 말했다.
"어쨌든 이제부터 함께 사지로 뛰어들 동료 아닌가? 경들도 이름 정도는 나누는 게 좋지 않겠소?"
그 말에 기사들도 한마디씩 입을 열였다.
각각의 이름은 론테와 폰, 그리고 제라프였다.
그중 붉은 머리칼과 눈가를 쭉 찢은 칼자국이 특히 인상적이었던 기사, 제라프가 칼을 보며 말했다.
"각하께 이야기는 전해들었습니다. 아가씨와 유리를 공께서 어렵게 구해주셨다고."
"아, 예."
"나는 유리의 스승입니다. 늦었지만 그에 대해 경의와 감사를 표합니다."
그녀의 어투는 사나운 인상과 다르게 굉장히 절제되고 격식이 있었다.
"이번의 작전도 성공한다면 공께서 전쟁을 승리로 이끈 것이나 다름없는 일입니다."
그야 당연하지.
이쪽이 주술사의 존재를 알려주지 않았으면 속절없이 대패했을 전쟁이다.
물론 속마음과 달리 칼은 겸손히 고개를 저었다.
"모두가 죽음을 불사하고 최선을 다해 싸운 덕분이겠죠. 물론 작전이 성공한다면 말입니다."
그렇게 주술사가 있는 반대편, 남쪽 성문으로 이동한 다섯 사람.
"여, 여기 있습니다."
명령대로 성벽 위까지 말을 끌고 올라온 병사가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대체 말들은 왜..."
"수고했네. 자네는 어서 자리로 되돌아가게."
다섯 사람은 성벽 위에서 바로 말 위에 올라탔다.
빠져나갈 인원은 고작 다섯.
굳이 위험을 감수하고 성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갈 이유는 없었다.
마이어가 칼을 보며 씩 웃었다.
"아까 보니 포스 마법을 상당히 잘 다루는 듯하던데, 자네가 하겠나?"
칼은 고개를 끄덕였다.
"실드는 마이어 님께서 펼쳐주시죠. 오크 워리어들이 눈치채고 바로 창을 날려올 겁니다."
"맡겨만 두게나."
지금부터 할 일은 간단했다.
포스 마법으로 다섯 사람을 끌어안은 뒤 천천히 성벽 아래에 착지하는 것.
사람뿐만 아니라 말까지 포함되기에 상당한 집중력이 필요한 일이었다.
"이쪽이 제일 덜 몰렸군요. 여기로 내려가는 게 좋겠습니다."
주변의 사수와 마법사들에게 화력을 집중시키라고 명령한 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말들이 날뛰지 않게 잘 제어해주십시오."
칼은 포스 마법을 캐스팅했다.
무형의 힘이 다섯 사람과 말들을 끌어안고, 천천히 성벽 아래로 내려서기 시작했다.
크어어어...!!
허공에서 서서히 내려오는 다섯 사람.
당연히 눈에 띌 수밖에 없었기에 아래 있던 오크들이 바로 반응을 보였다.
콰앙! 쾅!!
그리고 날아드는 공격들.
오크 워리어가 날린 창들은 마이어가 펼친 실드에 의해 전부 막혔다.
사수와 마법사들이 화력을 지원하고는 있지만, 또 대부분의 오크들이 북쪽과 동쪽 성문에 몰렸다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워낙 많은 머릿수였기에 착지할 장소로 금세 오크들이 몰려들었다.
강력한 화력이 한 번 필요한 순간이었다.
"마이어 님."
"다 됐네."
이내 마이어가 마법 캐스팅을 끝냈다.
푸화아아악!!
오크들이 몰린 장소에 몰아치는 거대한 청색 화염의 회오리.
특히 중심에 있던 오크들은 재조차 남기지 못하고 흔적도 없이 소멸해버렸다.
그 엄청난 위력에 칼은 대충 5서클 마법이겠구나 예상했다.
한순간 깔끔한 공백이 생겼고, 곧바로 새카맣게 탄 지면 위에 다섯 사람이 내려앉았다.
더 이상의 대화는 필요없었다.
계획은 이미 세웠고, 이제부터는 시간을 지체할 것 없이 그대로 행동하면 될 일이었다.
다시 오크들이 몰리기 전에 다섯 사람은 곧장 말을 몰고 질주를 시작했다.
크어어!!
그리고 그걸 막아서는 오크 워리어들.
애초부터 뒤에서 창만 던지던 놈들이라 마이어의 마법에 휩쓸리지 않았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지금 여기 있는 이들 중 고작 오크 따위한테 발목이 잡힐 이는 없었으니.
선두에 서서 달리던 고위기사들이 검을 뽑아들었다.
검날을 둘러싸고 나타나는 선명한 핏빛.
평기사들과는 비교가 불가할 정도로 짙게 압축된 강력한 검기였다.
푸화악!!
이어지는 건 도륙의 시간이었다.
앞길을 가로막는 오크 워리어들을 짚단이라도 썰듯 모조리 베어넘기며 돌진하는 고위기사들.
흩날리는 선혈과 함께, 오크 워리어들의 목과 사지가 분해되며 바닥에 투두둑 널부러진다.
마법으로 지원하며 뒤따르던 칼은 혀를 내둘렀다.
'역시 엄청나구만.'
웬만한 기사들도 압도적인 완력과 생명력을 지닌 오크 워리어들을 상대하는 데는 애를 먹는다.
그런데 저들은 무슨 허수아비라도 상대하는 마냥 손쉽게 찢어갈기고 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고위기사는 정예 중의 정예, 백작급 이상의 대귀족가에도 얼마 존재하지 않는 괴물들이니까.
사실 이 구성이면 다르칸이 칼의 말을 믿고, 반드시 주술사를 죽이기 위해 가문의 최고급 전력들을 동원한 것이었다.
아무튼 고위기사들의 활약으로 길은 금세 뚫렸다.
뒤따라오는 몇몇 오크와 호크 라이더들을 바라보며 칼이 외쳤다.
"따라오게 두면 안 됩니다! 조금 더 성벽에서 떨어진 다음에 처리하죠!"
몰래 평야를 돌아가서 주술사를 쳐야 하는 만큼, 오크들을 꼬리에 달았다간 들킬 게 뻔한 일이었다.
따라붙은 오크와 호크들을 마저 처리한 뒤 도시에서 멀찍이 떨어진 곳에 잠시 멈춰선 다섯 사람.
"음, 대충 절반 정도는 성공한 건가?"
마이어의 말에 칼이 가볍게 대꾸했다.
"이제 시작인데 절반이나요?"
"시작이 반이라고 하지 않던가, 하하!"
하긴 뭐, 진행도로 따지면 대충 절반 정도로 쳐도 무방하긴 했다.
이제 남은 일이라곤 평야를 빙 돌아서 주술사를 죽이는 것뿐이니까. 물론 그게 제일 어려운 일이었지만.
"텅 빈 평야라서 아무래도 기습은 힘들 것 같더군. 주변에 수풀이라도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말이야."
"오크들의 방해가 없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죠. 그리고 일단..."
칼은 네 사람을 둘러보며 잠시 고민했다.
'공격 패턴을 최대한 알려주고 시작해야 되는데... 이거 말하기가 좀 그렇네.'
주술사 직업을 플레이했던 만큼, 또 엔딩을 봤던 만큼, 칼은 대주술사 가르두카의 공격 패턴과 파해법 역시 알고 있다.
꽤나 까다로웠던 보스라 온갖 시도를 하며 공략했었기에 그 기억은 지금도 선명했다.
물론 그건 게임에서의 가르두카고 지금은 현실이 된 만큼 여러 변수가 많겠지만, 어쨌든 참고하면 굉장한 도움이 될 터.
문제는 이들에게 그걸 알려주면, 어떻게 그렇게까지 잘 알고 있나 의심을 받을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뭐, 의심하면 어쩔 거야? 어쨌든 전쟁만 끝내버리면 장땡인데.'
이상하다고 해도 신경을 써봐야 얼마나 신경을 쓸까.
칼은 그냥 뻔뻔해지기로 하고서 입을 열었다.
"이건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이니 다들 참고하십시오."
그렇게 줄줄이 시작된 설명에 모두가 묘한 표정이 되었다.
주술사의 존재를 알아챈 건 그렇다 치더라도, 이건 그냥 책만 봤다고 해서 알 수 있는 수준이 아닌 것 같았으니까.
"어떻게 그렇게까지 잘 알고 있는..."
"책에서 봤습니다. 제가 주술에 보통 관심이 많은 게 아니라서."
"아니, 그냥 책만 봤다고 알 수 있는 수준이 아닌 것 같은데...?"
"마이어 님, 지금 그게 중요합니까? 병사들이 필사적으로 싸우고 있습니다. 한시라도 빨리 서둘러서 주술사를 죽여야죠."
"그, 그건 그렇지."
이후 한 번 더 계획을 점검한 뒤.
"다들 확실히 기억하셨습니까? 제가 말한 걸 절대 잊어버려선 안 됩니다."
고위기사들과 마이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섯 사람은 오크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성벽을 멀찍이 돌아 주술사에게로 이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