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속 마법사로 살아가는 법-18화 (18/132)

### 18 ###

오크 대침공 (3)

다르칸 루브덤.

철혈의 변경백, 제국 남서쪽 변경의 지배자이자 수호자.

가문의 선조들이 그러했듯, 그는 수십 년의 세월간 수많은 전투들을 지휘하고 광림의 침략을 막아내왔다.

세간은 그를 철인이라고 불렀다.

아무리 절박한 전투에서도 그는 결코 꺾이는 법이 없었다. 이제는 주름진 피부와 희끗희끗해진 머리칼이지만, 표정에는 언제나 변함없이 불굴의 의지와 굳건함이 서려있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그 철인조차 흔들리는 눈빛을 감출 수 없었다.

"......"

점점 평야를 뒤덮어오는 녹색 물결.

도시의 성벽 위에 선 다르칸은 침묵한 채 그 전경을 바라봤다.

뒤쪽으로 기립한 기사와 군장들이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침음을 흘렸다.

"각하, 명령을..."

광림에서 겨우 생환해 돌아온 레인저로부터 대침공의 보고를 받은 게 불과 1시간 전.

시간은 짧고 침공은 순식간이었다.

심상치 않은 징조들에 대비야 진작부터 하고 있었지만, 이 압도적인 군세를 직접 코앞에 마주하는 건 또 다른 일이었다.

"호크 라이더들입니다. 총공에 앞서 치고 나와 외벽을 들이받으려는 모양입니다."

시야 확장 마법을 통해 적진을 살피던 마법사가 말했다.

호크 라이더.

외피가 강철보다도 단단한 거대 코뿔소 호크를 타고 미친 듯이 돌진해오는, 오크 진영의 최정예 돌격수들.

어마무시한 육중함으로 빠르게 돌진해오는 놈들을 막을 방법은 집중 공세를 퍼부어 최대한 빠르게 죽이는 것뿐이다.

위에 탄 라이더를 죽여도 호크들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성벽을 향해 돌진하니까.

선공으로 호크 라이더들이 혼란을 야기한 뒤 본진이 치고 나오는 건 놈들이 자주 애용하는 계책이었다. 단순하지만, 그만큼 이쪽의 대응책도 한정되있기 때문이었다.

거기다 지금은 머릿수까지 여태까지와 비교도 안 되게 많다.

다르칸이 입을 열었다.

"즉시 최고 경계 태세로 수성열을 배치하라. 그리고 도시 전방향의 성문을..."

차가운 음성으로 명령을 내리던 그가 돌연 말을 멈췄다.

머뭇거림의 이유를 알아챈 부관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지금쯤이면 레테 아가씨께서 거의 도착하셨을지도 모릅니다."

"......"

그 말에 모두가 침묵했다.

무기 공급을 위해 인근의 상회들과 계약을 맺고 귀환하고 있을 그녀.

젊은 기사 하나가 나서서 정적을 깨고 다르칸에게 외쳤다.

"제가 당장 말을 타고 달려가서 아가씨께 전보를 전하겠습니다! 이곳으로 오시지 못하도록..."

"배, 백작 각하."

그때 평야를 살피던 마법사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말을 더듬었다.

모두의 시선이 마법사가 보고 있는 쪽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창백한 얼굴이 되었다.

저 멀리서 평야를 가로질러 다가오는 작은 점. 루브덤의 문양이 그려진 마차.

"...레테 아가씨입니다."

시선은 다시 다르칸에게로 모였다.

다르칸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그 모습에 자리에 있는 이들 중 누구도 입을 열고 말하지 못했다.

성문을 닫고 어서 방어 마법진을 활성화해야 한다고.

마차가 도착할 즈음이면 호크 라이더들도 성문 코앞까지 다다라있을 거라고.

"아버지..."

양옆에 서있던 아들들이 떨리는 목소리로 그를 부른다.

다르칸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아버지이기 전에, 도시 안의 수많은 목숨들을 책임져야 하는 통치자로서.

"...성문을 닫고 마법진을 활성화해라."

그는 결국 최선의 선택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 * *

덜컹!

급격히 방향을 튼 마차가 전속력으로 질주를 시작했다.

소식을 전하러 나온 기사는 그 옆에 따라붙어서 달렸다.

왼쪽 평야를 전부 뒤덮은 오크 군세.

칼은 착잡한 표정으로 점점 가까워지는 녹빛을 바라봤다.

'...진짜 타이밍 한 번 지랄맞네.'

곧 일어날 일이란 건 알고 있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도시에 도착하기 바로 직전에 시작될 게 뭐란 말인가?

<돌발 퀘스트: 생존>

오크 대군이 몰려왔습니다. 어떻게든 해당 장소에서 탈출하여 생존하십시오.

퀘스트 완료 보상: 50000SP, 마력 회복 포션 10개.

아란헬의 괴물 노인네에 이어 또다시 생존 퀘스트다.

이쯤 되면 일부러 유도를 당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칼은 속으로 욕을 뇌까리면서 고개를 돌렸다.

레테와 유리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있는 것이 보였다.

"벌써 침공이 시작된 건가, 저 많은 오크들이 전부..."

레테가 중얼거렸다.

지금 당장 목숨이 위험한 것보다도 도시를 더 걱정하는 듯한 말투.

어이가 없어진 칼은 속으로 헛웃음을 터뜨렸다.

'아무렇지도 않나? 아버지가 자기를 버린 거나 마찬가지인데?'

물론 도시를 지켜야 하는 입장에서 성문을 닫은 건 어쩔 수 없는 결단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언제 감정이 이성을 따라가던가?

부모에게 버려지고 완전히 사지로 몰린 거나 마찬가지인 상황인데, 그녀는 나름대로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굳이 이렇게 빨리 성문을 닫았어야 했나 칼은 여전히 이해되지 않았다.

'바로 코앞까지 몰려오긴 했어도 아직 거리가 꽤 있다. 마차가 성문을 통과하고 닫아도 시간은 충분했을 텐데...'

그러나 그런 생각이 틀렸다는 건 얼마 지나지 않아 깨달을 수 있었다.

곧 시야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거대한 녹색 파도가 본격적으로 몰아치기 앞서, 먼저 선두로 치고 나오고 있는 일련의 무리들이.

"...이런 미친."

칼은 앞에 있는 레테와 유리도 잊고 욕을 중얼거렸다.

호크 라이더.

지구로 따지면 전차와도 같은 놈들이 성벽을 향해, 그리고 이쪽의 마차를 향해 미친 듯이 돌진해오고 있었다.

그리고 전차는 느리기라도 하지, 저놈들은 덩치와 맞지 않게 빠르다.

"호크 라이더...!!"

기겁한 유리가 다급히 말했다.

"이대로는 따라잡힙니다! 마차를 버리고 말에 올라타서 달려야 합니다!"

시간이 지체되겠지만 그 방법밖에 없었다.

마차를 끄는 말은 두 마리.

마침 사람 수와 말의 수가 정확하게 맞은 건 그나마 다행인 일이었다.

황급히 마차를 멈추고 말을 분리한 뒤, 여섯 사람은 둘씩 짝을 지어 말에 올랐다.

마부석의 두 기사가 함께 타고, 칼은 소식을 전하러 온 기사와 함께 타려고 했으나, 유리가 말렸다.

"너는 아가씨와 함께 올라타라."

"...예? 왜?"

"설명할 시간 없으니 어서!"

그 다급함에서, 칼은 그녀의 생각을 어렴풋이 눈치챘다.

'이 여자 설마...'

레테도 눈치챘는지 유리를 말리려 했으나, 그녀는 홱 다른 기사의 말에 올라타버렸다.

결국 칼은 레테와 함께 올라타는 수밖에 없었다.

세 마리의 말.

그 위에 올라탄 여섯 사람이 전속력으로 평야를 가로질러 달렸다.

뒤쪽으로 수많은 호크 라이더들을 달고.

'젠장, 너무 가까워졌어.'

칼은 뒤를 돌아봤다.

속도가 빨라지긴 했지만, 말로 갈아타는 틈에 어느새 훨씬 가까이 접근한 놈들.

호크가 말보다 느린 것도 아니었기에 거리는 잘 벌어지지 않았다. 거기다...

"...이런 빌어먹을."

말을 타고 달리던 모두가 앞으로 펼쳐진 전경에 탄식을 흘렀다.

지나온 길을 그대로 되돌아가며 도주하고 있었으나, 그쪽 방향에서도 어느새 녹색 파도가 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돌진해오는 수많은 호크 라이더들.

'미친 오크 놈들, 도시 전체를 둘러싸기라도 하려는 건가? 대체 규모가 얼마나...'

놈들의 속셈이야 아무래도 좋았다.

뒤쪽에 이어, 이젠 오른쪽과 앞쪽까지.

중요한 건 퇴로가 모조리 막혔고, 그만큼 탈출에 성공할 가능성도 아득히 떨어졌다는 것뿐이었다.

상황을 빠르게 직시한 유리가 입술을 짓씹었다.

그리고 다른 기사들을 향해 외쳤다.

"우리는 아가씨를 지켜야 한다! 말 머리를 오른쪽으로 돌려라!"

"......!!"

그에 기사들이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칼의 뒤에 탄 레테가 살벌한 목소리로 유리를 향해 소리쳤다.

"닥쳐, 유리! 그랬다간 가만 안 둬!"

"아가씨, 제발 말 들으십시오! 이대로면 전부 다 죽습니다!"

그녀가 레테를 칼과 함께 태운 이유였다.

그러나 사실 기사들이 희생한다고 해도 달라질 건 없었다.

고작 4명, 그것도 말도 둘씩 탄 상태에서 저 많은 호크 라이더들의 시선을 끌 수나 있을까. 바로 짓밟혀 죽을 게 뻔했다.

그러나 그 의미 없을 행위에라도 기사들은 목숨을 불사를 준비를 마쳤다.

아주 잠깐의 시간이라도 벌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서.

"칼! 무조건 앞으로만 달려라! 아가씨께서 말려도 절대로 멈추지 마!"

"유리, 너...!!"

달리는 말, 점점 몰리는 호크들, 레테와 기사들의 말다툼.

홀로 동떨어진 칼은 힐끗 왼쪽 옆을 바라봤다.

높고 거대한 도시의 성벽.

사방에서 호크들이 몰려온다. 성문이 굳게 닫혔지만, 그럼에도 탈출구는 이제 저곳밖에 없었다.

칼은 숨을 크게 들이쉬고서 외쳤다.

"입들 다물고 도시로 말 머리 돌려요! 성벽을 뛰어넘을 겁니다!"

"......?!"

모두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칼을 바라봤다.

칼은 시선들을 무시한 채 마법을 캐스팅했다. 열흘 만에 끌어올린 서클의 마력이 심장에서부터 흐르며 격동했다.

곧 전기의 성질로 뒤바껴 뒤쪽의 호크 라이더들을 향해 몰아쳤다.

【체인 라이트닝】

빠지지직!!

비틀거리다 쓰러지는 선두의 호크들.

뒤에 있던 호크들도 미처 피하지 못하고 진형이 우루루 무너졌다. 라이더만 죽은 호크들이 날뛰며 혼란은 더욱 격화됐다.

레테와 유리, 기사들이 경악한 표정으로 그 광경을 바라봤다.

"너, 너 어떻게...?"

"도시로 달리라고! 성벽을 넘을 방법이 있으니까!"

긴박한 상황. 한마디 한마디가 아깝다.

칼은 도시로 방향을 틀어 달렸다.

유리와 기사들도 결국 그 뒤를 따라서 달리는 수밖에 없었다.

【플래시 봄】

【프로스트 필드】

【에어 프레셔】

번쩍! 콰과과광!!

칼은 온갖 마법들을 난사하며 뒤쪽으로 따라붙는 호크들을 저지했다.

하지만 숫자가 숫자이다 보니 한계는 금세 찾아왔다.

진열이 무너져도 끝도 없이 돌진해오는 호크들이 점점 사방을 둘러싸고 탈출로를 옥죄였다.

'젠장...'

코앞까지 다다른 성벽.

하지만 이대로면 도착하기도 전에 호크들에게 압사당할 것이었다.

"......!!"

순간 칼의 머릿속에 잊고 있던 퀘스트 보상이 떠올랐다.

아란헬의 괴물 노인에게서 살아남고 받았던 랜덤 마도구.

<어스퀘이크 주문서 - 소모성 마도구>

원하는 범위에 강력한 소규모 지진을 발생시킵니다.

캐스팅까지 15초의 시간이 소요됩니다.

"...진짜 기가 막히네."

인벤토리를 확인한 칼은 헛웃음을 흘렸다.

하필 이런 상황에 나온 마도구가 이건가?

6서클의 대마법, 어스퀘이크.

아무리 생각해도 작위적이기 그지없었지만, 아무튼 기적처럼 생명줄이 내려왔다.

칼은 곧바로 주문서를 사용했다.

[어스퀘이크 주문서를 사용합니다.]

[15, 14, 13...]

[캐스팅이 완료되었습니다.]

쿠구구구!!

원뿔 범위로 순식간에 격변하는 지반.

개미 떼처럼 징글징글하게 몰려 뒤쫓아오던 호크들은 모조리 그 지진에 휩쓸렸다.

"세, 세상에..."

뒤를 돌아본 레테와 유리, 기사들이 경악했다.

[레벨이 상승하였습니다.]

[레벨이 상승하였습니다.]

와중에 떠오르는 레벨업 알림을 무시하고서 칼은 계속 달렸다.

이윽고 성벽 바로 앞까지 도착했다.

성벽 위에서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다들 가까이로!"

그 말에 모두가 말에서 내려 칼에게로 모였다.

칼은 마력을 끌어올려 마법을 캐스팅했다.

【매직 부스터】

바닥에 펼쳐지는 마법진.

아래에서 위로 솟구치는 추진력에 여섯 사람의 몸이 순식간에 허공 높이 솟아올랐다.

하지만 부족하다.

'젠장...!!'

칼은 남은 마력을 모조리 끌어올려 포스로 추진력을 붙였다.

그제야 겨우 성벽의 높이를 뛰어넘을 수 있었다.

나머지는 방향을 틀어 성벽 위에 내려앉는 것뿐이었다.

풀썩!

그렇게 성벽 위에 안착한 여섯 사람.

"후우..."

고개를 든 칼은 수많은 사람들을 마주할 수 있었다.

성벽 위에서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던 이들이었다.

수많은 기사와 병사들, 그리고 그 가운데 서서 눈을 부릅 뜨고 있는 중년.

"아버지...!!"

살아나온 게 믿기지 않는 듯, 성벽 아래만 멍하니 쳐다보고 있던 레테가 중년에게 달려든다.

다르칸은 붉게 충혈된 눈으로 그녀를 안아들었다.

그 광경을 보며 주변에 있던 이들이 하나둘씩 함성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벌써 전쟁에서 승리하기라도 한 듯이.

와아아아아...!!

모두가 칼을 향한 것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