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속 마법사로 살아가는 법-15화 (15/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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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상, 엘프, 테러리스트 (4)

끝없이 풀밭만 펼쳐진 초원.

그 한가운데 갑자기 빛이 번쩍이더니, 이윽고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바로 칼이었다.

"...커흑!!"

칼은 울컥울컥 피를 토해내는 가슴팍을 부여잡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정말로 아슬아슬했다.

조금만 더 텔레포트가 늦었어도 심장을 완전히 관통당할 뻔했다.

['돌발 퀘스트: 생존'을 완료하였습니다.]

[퀘스트 완료 보상으로 80000SP를 획득하였습니다.]

[퀘스트 완료 보상으로 마도구...]

머릿속에 떠오르는 알림을 무시하고, 인벤토리에서 다급히 회복 포션 두 병을 꺼내든다.

한 병은 상처들에 되는 대로 들이붓고 한 병은 꿀꺽꿀꺽 마셨다.

"썩을, 피가 멎지도 않네..."

상처가 너무 심각한 건지, 아니면 마력을 흐트러뜨리는 그 산마독이라는 거 때문인지.

회복 포션은 별 효과도 없었다.

아주 조금만 나아진 느낌을 받으며 칼은 비틀비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긴 어디...'

그제야 고개를 돌려 주변을 둘러봤다.

일단 숲은 벗어난 것 같은데, 위치를 알 수 없는 장소였다.

100KM 밖의 거리로 아무렇게나 텔레포트 됐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야 뭐가 나오는지 전혀 모르는 상황.

당장 목숨은 건졌으나, 완벽히 길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말도 잃었고.

무엇보다 현재 몸이 멀쩡한 것도 아니고 치명상까지 입은 상태다.

"하..."

완전히 답도 없군.

칼은 암담한 심정을 느끼며 도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치솟는 고통으로 흐릿한 정신 속에 상념들이 떠올랐다.

'너무 감정적이었다. 그 후계라는 놈을 죽인 건 멍청한 행동이었어.'

참혹히 몰살당한 엘프들 때문일까.

방금 전까진 감정이 조금 격해진 상태였었다.

만약 청년을 죽이지 않고 그냥 얌전히 튀었다면.

그렇다면 노인의 마지막 일격에 이렇게까지 치명상을 입지는 않았을 텐데.

'그래도 속은 시원하네, 킥...'

마지막 순간, 여유롭기만 하던 노인의 표정이 격노로 일그러졌던 게 선명하다.

무려 아란헬의 간부라는 양반을 상대로 살아남은 것도 모자라 한 방 제대로 먹인 셈.

그러나 그런 쾌감도 잠시, 기분은 도로 급격히 가라앉았다.

'...남은 노예들은 전부 죽었겠지.'

노예상 놈들이야 아무래도 좋지만, 아직 성년도 되지 않았던 어린 소년 소녀 노예들.

지금쯤 전부 죽었을 것이다.

어차피 죽을 운명이었겠지만, 자신 때문에 노인이 화풀이를 하며 아주 잔인하고 고통스럽게 죽였을 수도 있다.

자유 없는 절망 속에 마지막까지 비참하게 끝나버린 삶.

마음 한편에 죄책감이 차올랐다.

동시에 스스로에 대한 한심함도 들었다.

'잠시 잊고 있었구나.'

이 세계에 얼마나 그 노인 같은 괴물들이 넘쳐나는지.

그에 비하면 자신이 얼마나 보잘것없이 약한 존재인지.

요즘 들어 위기 다운 위기를 겪은 적이 없으니 잠시 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와서 자아성찰이나 해봐야 무슨 소용일까.

칼은 풀린 눈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마지막 일격 때문에 더 심하게 퍼진 독. 이제 마력은 완전히 바닥난 상태다.

이대로 굶주린 맹수나 도적들이라도 나타나면 그대로 뒈지는 것이었다.

죽음이 가깝다.

회복 포션도 소용없고, 애써 다시 일어나보려 해도 몸도 더 이상 말을 듣지 않았다.

칼은 그냥 풀밭에 드러누웠다.

곧 끊어질 듯 미약한 숨을 내쉬며, 끝없이 펼쳐진 푸른 하늘을 올려다봤다.

"아, 이건 진짜로 죽겠네..."

그래도 여태껏 잘 살아남았는데.

꽤나 허무한 끝이 아닌가 싶었다.

주마등처럼 지금까지의 일들이 스쳐지나갔다. 게임 속에 들어온 뒤 한동안의 현실 부정, 도적들과의 조우, 첫 살인의 충격, 몬스터 사냥, 인연, 동료, 배신, 위기, 복수, 메인 퀘스트를 위한 방랑...

그 끝에 떠오르는 건 언제나 그랬듯 원래 세계에 대한 하염없는 그리움뿐.

칼은 천천히 두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좁고 낡은 원룸 방 천장이 보이기를 간절히 소망했다. 이 모든 게 한바탕 꿈이었던 것처럼.

* * *

"아가씨, 조금 쉬었다 갈까요?"

호위기사 유리는 반대편에 앉아있는 주인을 걱정스레 바라보며 물었다.

여인이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표정이 계속 안 좋으신데..."

"유리."

"예, 아가씨."

"괜찮으니까 좀 조용히."

"...예, 알겠습니다."

그 말에 유리는 입을 꾹 다물었다.

여인의 심정이 지금 여러모로 복잡하리란 건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여인의 이름은 레테 루브덤.

루브덤 변경백 가문의 독녀.

그녀는 현재 가주인 아버지의 뜻에 따라 인근 도시에 있는 상단들과 계약을 마치고 가문으로 복귀하는 길이었다.

계약은 모두 별 탈 없이 성사되었으나, 문제는 황급히 상단들의 힘을 빌려야 할 만큼 급박하게 돌아가는 현 기류였다.

'오크들의 도발만 벌써 3번째... 정말 전쟁이 일어나려는 거겠지.'

남서쪽 전체를 넓게 뒤덮은 광림.

그곳에서 몰려오는 온갖 몬스터와 이종족, 특히 서쪽 숲의 지배자인 오크들.

루브덤 가문은 그런 침략자들로부터 대대로 제국 남서쪽 국경을 지켜온 방패였다.

하지만 최근 숲을 탐색한 레인저들의 연달은 실종도 그렇고, 오크 부족들의 대규모 연합과 도발도 그렇고, 상황이 여러모로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었다.

여러 상단들과 급히 계악을 맺은 것도 보다 안정적인 병기 공급을 위함이었다.

어디까지나 모두가 전쟁을 위한 대비에 불과했기에, 가문의 일원으로서 그녀의 마음은 심란하기 그지없었다.

"유리."

"예, 아가씨."

"전쟁이 일어나면 너도 전선에 나가서 싸우게 되겠지. 아버지와 오라버니들도 마찬가지고."

"......"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게 될까?"

유리는 침묵했다.

아직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최근 광림에서 간신히 생환한 레인저의 보고를 떠올려보면, 그건 대놓고 무책임한 말에 불과했다.

전쟁은 이미 절반쯤 확정이었다.

남은 문제는 시기와, 오크들의 침공 규모가 얼마나 크냐일 뿐.

"황실에서 곧 병력을 지원해올 겁니다. 게로드 백작가도 그렇고, 퓰립 공작가에서도 고위기사들이..."

"나도 알아."

레테가 턱을 괴고 마차 밖을 바라봤다.

"그냥 느낌이 안 좋을 뿐이야. 지원이 너무 늦지만 말아야 할 텐데."

끝없이 이어지는 평야를 멍하니 지켜보고 있을 때였다.

"......?"

그녀의 자줏빛 눈동자가 의문으로 깜박였다.

시야에 뭔가 이상한 게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유리, 저게 뭐지?"

유리도 마차 밖을 바라봤다.

오러를 연마한 초인인 그녀는 레테보다 훨씬 시력이 뛰어나다.

그리고 레테와는 달리, 곧 그녀의 얼굴에는 의문 대신 경계가 떠올랐다.

"사람... 인 것 같습니다."

"사람?"

"예, 쓰러진 사람입니다. 아무래도 죽은 것 같은데..."

레테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마차 저쪽으로 돌리라고 해."

"...위험합니다, 아가씨. 주변부터 확실히 경계해야..."

"아직 살아있을 수도 있잖아. 서둘러 가서 살펴봐야지. 가문의 땅에서 도움이 필요한 이를 어찌 그냥 지나칠까."

그녀의 성격을 잘 알고 있던 유리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마부에게 마차를 돌리라고 말했다.

마부석에도 기사들이 타고 있으니 별 문제야 없겠지만, 그녀는 한층 더 경계를 끌어올린 채 마차 바깥을 살폈다.

"제가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이윽고 마차에서 내린 그녀는 동료 기사들과 함께 쓰러진 이를 살폈다.

정체는 젊은 남성.

옆구리와 심장부에 자상이 있었고, 특히나 심장부의 상처가 위급하기 그지없었다.

목에 손을 가져다 대니 느리지만 아직은 맥이 뛰고 있었다.

"어때? 살아있어?"

뒤로 다가온 레테의 물음에 유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상태가 위급해서 이대로 두면 죽을 겁니다."

"치료는 불가능해?"

"그건... 해봐야 알 것 같습니다."

"그럼 어서 마차 안으로 옮겨."

그 말에 유리는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경이로울 정도로 깔끔한 상처.

이 남자의 정체가 뭔지는 모르지만, 아무리 봐도 도적들 따위한테 당한 걸로 보이진 않았으니까.

하지만 눈앞에서 죽어가는 사람을 그대로 죽게 놔둘 수도 없는 노릇.

유리는 순순히 남자를 들어 마차 안으로 옮겼다.

"내가 회복 마법을..."

"아가씨, 우선 간단한 처치부터 하는 게 좋겠습니다."

검투가 일상인 기사들에게 검상만큼 익숙한 상처도 없다.

의자 아래칸에서 약초와 비상약들을 꺼내든 유리가 상처 부위들을 매만졌다.

대충 처치를 끝낸 뒤 그녀가 레테에게 말했다.

"심장의 상처가 더 심각하니 그곳부터 치유해주십시오."

"알겠어."

어릴 적부터 마르셰 학파의 마법사에게 마법을 배워온 그녀는 어엿한 2서클의 마법사였다.

그녀의 손에서 백색 빛이 아른거리더니 곧 남자의 상처 부위를 뒤덮었다.

잠깐 동안 그러고 있자니 레테가 인상을 찌푸렸다.

"유리."

"예, 아가씨."

"허리 숙이면서 하기 불편해. 그냥 이쪽 자리로 옮겨."

"......"

침묵하던 유리가 입을 열었다.

"아가씨, 눕힌 채로 치료해야 출혈이 덜 합니다. 그건 조금..."

"상관없어. 무릎에 눕히고 하면 되잖아."

그러니까 그게 문제라는 건데.

레테는 담요를 올리고 기어코 남자를 자신의 무릎으로 옮겨서, 손에 피까지 묻혀가며 회복 마법을 쏟아부었다.

유리는 못마땅한 눈빛으로 정신을 잃은 남자를 바라봤다.

'아가씨께서 이런 수고를 다 하시게 하다니...'

깨어나서 조금이라도 허튼 짓을 한다면 가만두지 않으리라 다짐하는 그녀였다.

"주변 경계를 더 확실히 해. 습격자들이 아직 인근에 있을 수도 있다."

유리는 창밖으로 몸을 내밀어 마부석에 있는 기사들에게 말했다.

그렇게 중상자 한 명을 태운 채, 마차는 다시 평야를 가로질러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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