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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상, 엘프, 테러리스트 (3)
별 특색 없는 외모, 그리고 복장.
하지만 무인 특유의 단련된 체구만큼은 옷 안으로 숨겨지지 않는다.
칼은 침을 꿀꺽 삼키며 노인을 바라봤다.
'...감지 마법에 전혀 걸리지가 않는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눈으로 보고 있는 지금도 노인의 기척은 전혀 느껴지지가 않았다.
마치 유령이라도 마주하고 있는 기분.
"거기 마법사 청년, 자네 덕분에 구경하고 있자니 썩 심심하진 않았네."
"......"
"각자 갈 길이나 가자니, 꽤 재밌는 해결 방식이야. 보통은 둘 중 하나 아닌가? 같잖은 정의감에 저 노예상인 놈들을 전부 죽이거나, 아니면 동족의 편을 들어 귀쟁이 놈들을 처죽이거나..."
귀쟁이라는 말에 엘프들이 발끈한 표정으로 노인을 노려봤다.
반대로 칼은 침음만 흘렸다.
격의 차이가 여실히 느껴졌기 때문이다.
마치 알티우스 본원에서 원로들을 마주했을 때와 같은 그 흐릿함.
'고위기사 수준도 아니다. 그보다 훨씬 이상...'
손에 땀이 차오르는 걸 느끼며, 칼은 노인에게 물었다.
"누구신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그 물음에 노인이 씩 미소를 지었다.
"그걸 알면 자네는 죽어야 되는데? 그래도 좋다면 알려주지."
"...제가 감이 꽤 좋습니다. 상황을 보니 모른다고 딱히 살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아서."
어느새 칼의 머릿속에는 퀘스트가 떠오른 상태였다.
<돌발 퀘스트: 생존>
감당할 수 없는 적입니다. 어떻게든 적의 마수에서 벗어나 생존하십시오.
퀘스트 완료 보상: 80000SP, 랜덤 마도구 1개
돌발 퀘스트치고는 엄청난 퀘스트 보상이었으나, 전혀 기뻐할 수가 없는 상황.
"하하! 그런가? 그거 꽤 쓸만한 감이구만."
노인이 껄껄 웃으며 주변을 훑어봤다.
"우선 귀쟁이 놈들부터 싹 치워볼까."
마실이라도 나가듯 훌쩍 나무 아래로 내려서더니, 근처의 엘프들에게 장난처럼 팔을 휘젓는다.
그러나 그 결과는 결코 장난 같지 않았다.
투두둑.
허공을 나는 엘프들의 목.
흩뿌려지는 선혈.
"...허억!"
한 박자 늦게 사태를 파악한 엘프들이 기겁하며 반격하려고 했으나, 학살의 시간은 순식간이었다.
단 몇 초.
푸르른 풀밭이 엘프의 시뻘건 피와 살점들로 뒤덮이기까지 걸린 시간이었다.
노인의 움직임은 눈으로 쫓는 것조차 힘겨울 정도로 신속했다.
활을 쏘던 엘프들도, 정령술사 엘프도, 구해진 소녀 엘프도, 반격 한 번 하지 못한 채 그렇게 전부 허무하게 죽었다.
"아, 아아..."
칼과 가까이 있던 대장 엘프만 홀로 살아남아 그 광경을 모두 지켜봤을 뿐.
그녀가 넋이 나간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검을 처들고, 핏발이 선 눈으로 괴성과 내지르며 노인에게 돌진했다.
서걱!
허공에 그려지는 붉은 실선.
마지막 남은 엘프의 목이 땅바닥에 떨어졌다.
칼은 이를 까득 갈며 데구르르 굴러온 그녀의 머리통을 내려다봤다.
'씨발...'
애초에 도와줘도 아무 의미 없었겠지만, 무자비한 학살을 지켜보며 차마 손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뭐라도 하려 하는 순간 즉시 온몸이 꿰뚫릴 것 같은 감각.
머릿속에는 가스터를 떠나기 전 주술사에게서 들었던 점괘가 떠올라 맴돌고 있었다.
'목숨이 위험하다는 게 이거였나.'
아주 제대로 들어맞았군, 빌어먹을.
이럴 줄 알았으면 더 끈질기게 매달려서 어떻게든 조언을 들었어야 했는데. 전부 부질없는 후회였다.
칼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퀘스트는 지금껏 역량 밖의 요구를 한 적이 없다.
물론 어쩌면 지금이 역량 밖의 요구를 한 최초의 순간이 될 수도 있는 거지만, 그렇다고 희망을 버리고 이대로 허무하게 뒈질 순 없었다.
'어떻게든 살아남으라고 했으면, 분명 어떻게든 살아남을 방법이 있을 거다.'
그게 대체 뭐지?
"그러게 왜 인간의 땅까지 몰려왔다가 험한 꼴을 당하나? 고작 어린 동족 하나 구하겠다고, 쯔쯧..."
칼은 노인을 힐끗 바라봤다.
노인은 안타깝다는 듯 죽인 엘프들을 바라보며 검에 묻은 피를 털고 있었다.
그때 머릿속에 퍼뜩 무언가가 떠올랐다.
'...목적, 그러고 보니 목적이 뭐지?'
저 정도의 괴물이 지금 여기서 이러고 있는 목적이 뭘까?
그저 노예상인들의 행렬일 뿐인데, 여기에 무슨 특별한 점이 있다고?
[우선 귀쟁이 놈들부터 싹 치워볼까.]
'말하는 투를 보면 단순히 누굴 죽이는 게 목적은 아닐 거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무리는 3종류다.
엘프, 노예상, 그리고 노예.
일단 엘프들은 모두 죽였으니 제외, 그럼 노예상과 노예들 중 노인이 노리는 목표가 있다는 뜻이었다.
대체 누구지?
"으, 으어..."
패닉에 빠진 채 벌벌 떨고만 있는 노예상들.
저놈들은 왠지 아닐 것 같고.
칼의 시선이 반사적으로 철장 안의 노예들에게 향했다.
그리고 곧바로 이질적인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었다.
"......!!"
철장에 몸을 기댄 채 하품을 하고 있는 한 노예 청년.
현재 상황과 맞지 않게 여유롭기 그지없는 태도였다.
'저놈이다.'
어떤 의식의 흐름이었는지는 모른다.
그저 본능.
기회는 노인이 잠시 한눈을 팔고 있는 지금밖에 없었다.
칼은 청년을 향해 몸을 던짐과 동시에, 전력으로 포스 마법을 쏘아냈다.
순간 앞쪽에서 소름 끼치는 살기와 함께 가공할 속도로 무언가가 날아들었다.
쩡! 푸확!
유리처럼 가볍게 박살난 실드.
이어서 방어 마도구로 활성화되어 있는 2차 실드까지 찢겨나가고, 단검이 칼의 옆구리를 깊게 스쳤다.
'끄윽...!!'
이 씨발 괴물 같은 영감탱이.
머리가 핑 돌 정도의 아찔한 격통이 덮쳐왔다.
콰악!
그러나 간신히 마법을 유지한 칼은 끝내 포스로 청년의 목을 움켜쥐었다.
"...허, 이런."
어느새 지척까지 다가온 노인의 입에서 당황성이 흘러나왔다.
칼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그런 노인을 보고 웃었다.
"이거... 제가 정답을 고른 모양입니다?"
"......"
"거기서 더 다가오지 마십시오. 이놈 목이 부러지기 전에... 절 죽일 자신이 있으시면 그러셔도 되고."
칼은 힘겹게 걸음을 옮겨 청년의 바로 곁까지 다가갔다.
노인이 그 모습을 바라보며 혀를 찼다.
"대체 어떻게 알았나? 내 시선이 이쪽으로 향했던 적은 없는데."
"당신이 아니라... 이놈 태도가 상황과 안 맞게 너무 태평해서."
노인이 대충 알았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거 너무 여유를 부렸군.'
설마 이쪽의 목적을 눈치채고 이렇게 틈을 찌를 줄이야.
청년이 인질로 잡힌 이상 이제는 함부로 행동할 수 없었다.
아무리 빠르게 움직인다고 해도, 저 포스 마법이 청년의 목뼈를 비틀기 전에 상대를 제압하긴 어려웠으니까.
노인은 자신이 이 젊은 마법사를 너무 과소평가했다는 걸 인정했다.
'뭐, 잠깐의 발악에 불과하지만...'
노인이 입꼬리를 올리며 칼에게 물었다.
"그래서 이제 어쩔 텐가?"
"......"
"이대로 시간을 끌어봤자 자네가 여기서 살아나갈 방법은 없네. 거기다 부상까지 당했으니 말할 것도 없지. 지금도 꽤나 고통스러울 텐데, 어떤가? 점점 몸에 뭔가 이상이 느껴지진 않나?"
과연 노인의 말대로 뭔가 묘한 감각이 차오르고 있었다.
대체 뭔 짓을 했나 했더니, 머릿속에 알림이 떠올랐다.
['산마독'에 중독되었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몸 내부의 마력이 점점 흩어집니다.]
산마독?
'씨발, 이건 또 뭐야.'
방금 맞은 단검에 독이 묻어있었나?
그나저나 마력이 흩어진다니, 큰일이었다.
지금 포스 마법으로 청년을 인질 삼고 있을 수 있는 것도 오래는 못한다는 뜻.
"얌전히 포기하게. 그러면 최소한 고통 없이는 보내줄 테니."
잠시 침묵하던 칼은 입을 열었다.
"대체 당신들... 이놈의 정체가 뭡니까?"
그 질문에 대답한 건 인질로 잡고 있던 청년이었다.
"아란헬."
"......!!"
칼은 상당히 놀랐다.
심상치 않은 곳의 소속일 거라고는 예상했지만, 설마 아란헬이었다니.
대륙 최악의 테러 집단, 범죄 집단, 반역도 등 불리는 이름은 많지만, 중요한 건 앞의 수식어였다.
대륙 최악.
칼은 문득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씨발, 내가 대체 어쩌다 왕성까지 테러하는 미친놈들이랑 이 지랄을...'
청년이 무덤덤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저 영감님은 거기 간부들 중 하나고, 나는 뭐... 널리고 널린 후계들 중 능력도 뭣도 없어서 내버려진 놈이지. 그러다 보니 이렇게 노예 신세도 다 돼보고. 크큭! 그래도 자식이라고 구하러 와주긴 했네."
"공자님, 그냥 얌전히 입 다물고 계시는 게 좋겠습니다."
"뭐 어때요? 이제 곧 죽을 텐데 궁금증이라도 풀어줘야죠. 불쌍하잖아."
청년이 히죽 웃으며 칼을 쳐다봤다.
"이봐, 나 목 아픈데 슬슬 포기하지 그래? 어차피 네가 살 방법은 없다고. 뭐 그리 힘들게 애쓰고 있어."
"......"
당장 숨이 끊어질 수 있음에도 여유롭기 그지없는 태도.
그만큼 노인의 실력에 대한 믿음이 큰 것이리라.
이런 애송이 따윈 금방 처리하고 자신을 구하리라는 믿음이.
어쩌면 당연한 믿음이었다. 아란헬의 간부 정도 되는 자라면, 대륙 전체로 따져야 되는 급의 실력자일 테니까.
칼은 입술을 짓씹었다.
'좀 더 틈을 보이면 하려고 했는데...'
독성이 얼마나 강한 건지, 내부의 마력이 벌써 절반 가까이 흩어졌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렸는지 정신도 어질어질하다.
더는 시간이 없었다.
칼은 인벤토리에서 양피지 한 장을 꺼내들었다.
"...흠."
갑작스레 허공에서 나타난 물건에 노인이 경게의 눈빛을 띄었다.
"그런 마법은 처음 보는데, 공간계 마법의 일종인가? 이거 갑자기 자네의 학파가 궁금해지는군."
칼은 무시하고 양피지의 효과를 읽었다.
<텔레포트 주문서 - 소모성 마도구>
100KM 밖의 무작위 지점으로 텔레포트합니다.
시전까지 30초의 캐스팅 시간이 소요됩니다.
지금까지 완료한 많고 많은 퀘스트 보상들 중 하나로 얻었던 물건.
7서클 대마법인 텔레포트를, 도착 지점 무작위라는 패널티를 안고 한 번 사용할 수 있다.
'캐스팅 시간은 30초.'
주문서의 마력이 활성화되기 시작하면 노인이 곧바로 반응할 건 뻔한 일이었다.
과연 30초의 시간을 벌 수 있을까?
어찌 되든 이제는 하는 수밖에 없었다.
우우웅.
[텔레포트 주문서를 사용합니다.]
[30, 29, 28...]
주문서의 마력이 활성화된다.
거대한 마력의 유동에 노인이 흠칫 놀라며 걸음을 뗐다.
"지금 무슨 짓을 하려는 거냐?"
"더 접근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뭘 하든 헛수고라고 했을 텐데!"
"...접근하지 말라고, 씨발! 이 새끼부터 죽이고 나도 그냥 뒈져버리기 전에!"
마치 영겹과도 같은 몇십 초.
아주 자그마한 틈이라도 보이면 죽는다.
칼은 노인에게 온 신경을 집중한 채 시간을 살폈다.
[6, 5, 4, 3...]
"미친놈, 자폭이라도 하려는 거냐? 그래봤자 저 괴물 영감은 못 죽여."
질렸다는 듯한 청년의 목소리.
칼이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자폭 같은 걸로 보여?"
"?"
"죽는 건 너뿐이다. 잘 가라."
우두둑!
칼은 그대로 청년의 목을 비틀어버렸다.
"이런...!!"
그 짧은 순간, 노인이 얼굴을 흉신악살처럼 일그러뜨리고 섬전 같이 쇄도했다.
칼의 예상보다도 훨씬 빠르게.
[캐스팅이 완료되었습니다.]
번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