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 ###
숲의 괴물 (3)
날이 밝고, 칼은 여관 방에서 나왔다.
계단을 내려가자 주방에서 식사를 준비하고 있는 카밀라가 보였다.
"어... 일어나셨어요?"
그녀도 칼을 보고는 흠칫 놀라더니 말을 건냈다.
고개를 끄덕인 뒤 어제 앉았던 구석 탁자에 앉으니, 그녀가 후다닥 음식들을 가져왔다.
칼은 황당해서 물었다.
"아직 주문 안 했는데요?"
"아, 아버지가 최대한 정성스럽게 차려드리랬어요."
"왜?"
"그야... 어제 일도 감사하고, 오늘 괴물도 처치해주신다고 했으니..."
칼은 침음을 흘리며 탁자 위에 푸짐히 차려진, 아침으로 먹기엔 과한 메뉴들을 바라봤다.
'그냥 빵 쪼가리나 몇 개 뜯고 나서려 했는데.'
그래도 아침 일찍부터 차려준 정성이 있으니 먹어야지.
막 식사를 시작하려는데 카밀라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저기."
"......?"
"감사해요, 정말로. 다른 주민들도 다들 감사하고 있어요. 마법사님 덕분에 다시 마을에 활기가 돌아올 거예요."
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말은 괴물을 처리하고 나서 들어도 안 늦습니다."
이윽고 식사를 마친 뒤 여관을 나서자, 촌장과 몇몇 주민들이 앞에서 모여 기다리고 있었다.
"아, 나오셨습니까. 마법사님."
촌장이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어젯밤에 좀 더 편안한 잠자리를 마련해드리고 싶었는데, 바로 주무시는 듯 싶어서 그러지 못 했습니다."
"......"
처음 만났을 때와는 완전히 달라진 태도.
물론 그에 대해서 칼이 느끼는 감정이라고는 불편함뿐이었다.
편하게 대하라고 해봤자 이제 와서는 전혀 소용이 없을 거라는 것 역시도 잘 알았고.
"무슨 일입니까?"
"아, 배웅을 해드리려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괜찮으니까 할 일들 하시죠. 그나저나 지프 씨는 어디에..."
헤매지 않고 괴물을 찾아가려면 숲에서 그의 안내가 필요하다.
마침 말이 끝나자마자 저편에서 지프가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복장을 보니 뭐라고 할까. 나름대로 철저히 준비를 마친 모습이었다.
"컨디션은 어떻소?"
지프가 언제나 그랬듯 무덤덤한 어투로 물어왔다.
칼은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나쁠 일이 뭐가 있을까요. 최상이죠."
"그렇다면 다행인데... 하필 재수도 없게 오늘 날씨는 이 모양이군."
지프가 하늘을 올려다봤다.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듯, 먹구름이 잔뜩 낀 흐린 하늘.
칼도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전 오히려 좋은데요."
"음, 흐린 날을 좋아하는 성격인가?"
"그런 건 아닌데..."
잠깐 더 이야기를 나누고 있자니, 마지막으로 기사 울턴도 도착했다.
어제처럼 갑주로 완전히 중무장한 모습.
"칼 공! 먼저 나오셨군."
"경의 컨디션은 굳이 안 물어도 되겠군요. 아침부터 힘이 이렇게 넘치니."
"하하! 아침 훈련에 너무 심취했다가 조금 늦었소이다. 이만 출발합시다."
셋은 주민들의 배웅을 받으며, 바로 숲을 향해 떠났다.
* * *
사방이 나무들로 무성한 숲.
"그런데 하나만 물어도 되겠소?"
묵묵히 앞장서서 길을 안내하던 지프가 입을 열었다.
"그 괴물 놈의 이름이 크루크라고 했었잖소."
"그랬죠."
"나도 옛날엔 대륙 이곳저곳을 제법 돌아다녔었는데, 그런 몬스터는 들어본 적초자 없었소. 대체 어느 지역에서 서식하는 놈이기에 이곳까지 흘러들어온 건지 궁금한데."
"음, 그건 확실히 궁금하군. 그런 대형 몬스터가 이렇게 사람 사는 곳까지 나타나는 경우는 드문 일이니."
옆에 있던 울턴까지 껴들어서 궁금증을 표했다.
말해줄까 말까 고민하던 칼은, 별로 상관없겠다 싶어 대답했다.
"대륙의 서쪽 끝에 있는 헬람 평야를 알고 있습니까?"
"...헬람? 얼핏 들어본 것 같소만. 사람이 살 수 없는 마경이라고."
"크루크는 그곳의 먹이사슬 최하위 몬스터 중 하나입니다. 그러니 몰랐던 것도 무리는 아니죠."
울턴보다는 잘 아는지, 그 말에 특히 지프가 놀랐다.
"헬람? 어찌 그런 곳의 생물이 여기까지 흘러들어왔단 말이오?"
사실 칼도 그게 의문이었다.
이곳이 아무리 서대륙이라고 해도, 헬람 평야와는 아득히 거리가 떨어진 곳이다.
생존 경쟁에서 밀려난 놈들이 이곳저곳 떠돌다 왔다고 하기에도 무리가 있는 거리.
"그것까지는 나도 잘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아무튼?"
"아닙니다. 계속 가기나 하죠."
그나마 크루크인 게 다행이지.
칼은 뒷말을 삼켰다.
'거기에 있는 몬스터들은 개체 하나하나가 재앙이니까.'
벌레들조차도 사람만 한 크기의 것들이 널린 곳이다.
그리고 크루크가 그런 벌레들만 잡아먹고 사는 피식자에 불과한 미친 땅이고.
"공께선 정말로 아는 게 많군. 본인은 헬람에 서식하는 몬스터에 대해서는 처음 들어봤소. 설마 직접 그곳에 가본 것이오?"
"그럴 리가요. 책에서 본 겁니다."
"쉿."
얼마 지나지 않아 지프가 멈춰섰다.
주변을 경계하는 듯 싶더니 손가락으로 한쪽 바닥을 가리켰다.
"왜 그럽니까?"
"놈의 흔적이오."
과연 그곳에는 거대한 발자국이 찍혀있었다.
주변 나무들에 거친 무언가가 이리저리 쓸린 흔적도.
울턴도 그걸 보더니 한층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내 생각보다도 훨씬 큰 것 같은데... 그래도 칼 공이 있으니 걱정하지는 않소."
"나를 너무 믿는 것 아닙니까?"
"하하, 무려 그 알티우스의 마법사 아니오. 공도 나를 믿어줬으면 좋겠군. 적어도 한몫은 충분히 할..."
그때였다.
끼에에에엑...!!
멀리서 들려오는 괴성.
이어서 미약하게 쿵쿵 울리는 대지.
소리가 점점 가까워진다.
"지금... 이쪽으로 오고 있는 것 같은데?"
"전투 준비합시다. 지프 씨는 왔던 길 그대로 멀찍이 물러나세요."
지프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재빨리 길을 되돌아갔다.
그의 역할은 이걸로 끝이었다.
지금부터 있어봐야 방해만 된다는 건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쿵쿵쿵...!!
칼과 울턴, 둘의 시야에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거체가 서서히 들어왔다.
울턴이 한껏 각오진 얼굴로 검을 뽑아들었다.
반면, 칼은 얼굴은 점점 굳고 있었다.
'...뭐야, 이거?'
왜 놈에게서 마력이 느껴지는 거지?
뭔가 일이 잘못됐다.
그런 생각이 떠오를 즈음에는 이미 놈이 나무들을 쓰러뜨리며 지척까지 다가온 뒤였다.
비로소 완전히 드러난 외형에, 칼과 울턴은 모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칼 공."
"......"
"저게 정말 어제 봤던 그 도마뱀 놈과 같은 종이 맞소?"
그런 말을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저건 도마뱀이라기에... 너무나 난잡했으니까.
생물에게 난잡하다는 말이 과연 어울릴까 싶지만, 놀랍게도 바로 여기에 어울리는 존재가 있었다.
끄갸갸갹...!!
앞이 보이기는 하는지, 안면에 돋아난 자잘한 가시들.
등의 중심을 따라서 길게 뻗은 수십 가닥의 촉수들.
오죽하면 다리가 6개인 건 정상으로 보일 지경이었다.
잠시 멍하니 있던 칼이 중얼거렸다.
"키메라..."
생물을 융합하는 흑마법.
그것을 통해 탄생되는 끔찍한 괴물.
놈은 키메라가 분명했다.
단지 외형뿐만 아니라, 놈에게서 느껴지는 마력이 그것을 확실히 증명하고 있었다.
'계산이 제대로 틀렸군.'
충분히 처리할 수 있기는 지랄.
저걸 상대하려면 목숨을 걸어야 한다.
칼은 입술을 짓씹으며 즉시 마법을 캐스팅했다.
【라이트닝 웨이브】
빠지지직!!
뿌리처럼 뻗어나가는 전기 줄기.
직격당한 키메라는 잠깐 동안은 감전으로 굳어버린 듯 싶었다.
...끼에에엑!!
그러나 이내 포효를 터뜨리며 전격을 털어내고 만다.
연기가 피어오르며 타들어간 상처들도 순식간에 재생되었다.
"이런 미친."
그야말로 어마무시한 마법 저항력과 회복력.
칼은 다음 마법도 잠시 잊고 당황했다.
설마 이렇게까지 타격이 없을 줄은 몰랐기에.
"흐아아아압!!"
그때 울턴이 이어서 키메라를 향해 뛰어들었다.
그의 검에는 어느새 붉은색 기운이 희미하게 일렁리고 있었다.
오러 연공과 검술이 경지에 다다른 무인들만이 사용할 수 있는 기술, 검기.
카가각!
그러나 그런 검기조차 외피를 뚫지 못하고 생채기만 낼 뿐이었다.
키메라의 촉수가 움직였다.
울턴은 황급히 검을 거두고 몸을 비틀어 공격들을 피했다.
쾅! 콰앙!!
촉수가 강타할 때마다 쩍쩍 갈라지며 무너지는 지반.
경이로운 파괴력이었다.
칼은 그 광경을 노려보며 다음 마법을 캐스팅했다.
마법진에서 빛으로 이루어진 줄기들이 뻗어나오더니, 빠르게 쇄도하여 키메라의 전신을 옭아맸다.
"옆으로!"
【블레이즈】
키메라가 주춤한 틈을 타서 옆으로 몸을 던지는 울턴.
푸화아악!!
그와 동시에 눈부신 불꽃이 키메라의 전신을 휩쓸었다.
화끈한 열기가 일대에 퍼져나가는 가운데.
마법이 그치고 다시 모습을 드러낸 키메라는... 생각보다도 훨씬 멀쩡했다.
꺼르르륵!
아까보다는 확실히 더 타격을 입은 듯 보였으나, 그조차도 빠르게 재생돤다.
이내 다시 쌩쌩하게 움직이기 시작한 놈이 쭉 찢어진 동공으로 칼을 노려봤다.
콰앙!!
섬전처럼 날아든 촉수가 실드를 산산히 부서뜨린다.
충격에 뒤로 튕겨져나간 칼은, 속으로 욕을 뇌까리며 간신히 몸을 멈추었다.
"...칼 공!"
공격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키메라가 다시금 촉수를 움직여 칼을 뭉개버리려던 떄였다.
티잉!
어디선가 날아든 화살.
전혀 타격도 없는 공격이었으나, 키메라는 동작을 멈추고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지프였다.
"도망치시오, 다들!"
도망?
그건 불가능하다. 저 괴물에게서 무슨 수로 도망친다는 말인가.
하지만 지프가 벌어준 잠깐의 틈은 확실히 기회가 되었다.
칼은 이를 까득 깨물며, 쓰러진 채로 자신이 지닌 가장 강력한 빙결 마법을 캐스팅했다.
【프로스트 필드】
쩌저정!!
뼛속까지 시린 냉기. 순식간에 얼어붙은 키메라의 전신.
그 광경을 멍하니 지켜보던 지프와 울턴이 외쳤다.
"어서 도망갑시다!"
"칼 공, 어서! 우리가 어떻게 해볼 수 있는 놈이 아니오!"
칼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며 말했다.
"저것도 잠시뿐입니다. 금방 따라잡혀요."
"그래도 일단은...!!"
"만약 도망칠 수 있다고 해도 어디로 갈 겁니까? 마을로 저 괴물을 끌어들일 수는 없잖습니까."
지프와 울턴의 입이 다물린다.
칼이 먹구름 낀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방법이 있습니다. 울턴 경, 거기서 멀찍이 물러나기나 해요."
"방법? 무슨...?"
"설명할 시간 없으니까 어서!"
울턴이 머뭇거리며 키메라에게서 멀리 물러났다.
칼은 곧바로 인벤토리에서 마력 회복 포션을 꺼내들었다.
마력이 풀충전된 상태에서나 겨우 한 번 쓸 수 있는 마법이다.
방금 큰 마법들을 연달아 사용한 지금으로는 부족했다.
꿀꺽!
단숨에 들이킨 뒤 정신을 집중한다.
비전 마법.
그것은 공용으로 떠도는 일반적인 마법들보다 훨씬 강력하고, 경이로운 마법들의 총칭이다.
적어도 하나의 마법 류를 창시한 마스터들이 자신의 역량을 총동원하여 탄생시키는 마법.
칼에게도 그런 마법이 하나 있다.
캐스팅 시간이 길고, 마력 소모도 어마무시하고, 무엇보다 시전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조건이 있었지만.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듯 먹구름 가득한 하늘.
조건은 충분히 충족되었다.
쿠르릉...
캐스팅이 끝나갈수록 하늘에 조금씩 천둥 소리가 일더니, 종래에는 구름들 사이에 스파크가 튀겨댔다.
"뭐, 뭐야...?"
지프와 울턴이 넋을 놓고 그 광경을 지켜봤다.
전격 마법의 극치.
4서클 마법임에도 불구하고, 마력에 자연의 힘이 더해지니만큼 그 위력은 한 단계 위 서클의 살상 마법조차 뛰어넘는 마법.
쩌적!
금방이라도 얼음을 깨고 튀어나올 듯 키메라의 몸체가 진동한다.
"...이 잡종 도마뱀 새끼야."
그 광경을 보며 칼이 입꼬리를 비틀었다.
"이거 맞고도 재생할 수 있으면 해봐."
【콜링 썬더】
꽈릉!!!
일대를 뒤덮는 눈부신 섬광과 함께, 하늘에서부터 내리꽂히는 한 줄기 벼락.
시야가 다시 돌아왔을 때 보인 건 충격으로 깊게 패인 땅바닥과.
파지직...
알아볼 수도 없이 시커멓게 타서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키메라였다.
"......맙소사."
한동안의 정적 뒤, 혼이 나간 울턴의 목소리만 작게 울려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