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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티우스 (4)
그로써 칼에게로 돌아간 정식 학파원의 자리.
패배한 것이 그렇게 충격이었는지 난데없이 샤론이 눈물을 뚝뚝 흘리고, 허스 원로가 살기 가득한 눈빛으로 노려보긴 했지만.
또 다른 원로들이 쓸데없이 관심을 가져 이것저것 피곤하게 물어오긴 했지만 어쨌든 이후의 일은 일사천리였다.
정식 학파원으로의 가입은 즉시 완료됐고, 신분증이 나오기까지는 세인달이 말했던 대로 며칠이 더 걸린다고 했다.
그동안 칼은 예정대로 도서관에만 박힌 채 마법서들을 뒤졌다.
그리고 이틀이 지난 뒤에야 최종적으로 익힐 마법을 2개 택할 수 있었다.
'아쉽네. 마음만 같아서는 여기 있는 것들 죄다 익혀버리고 싶은데.'
물론 몇백 만 SP가 있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일이었다.
새로운 마법 2개를 익히고 이제 남은 SP는 3만 정도.
만약을 대비해서 항상 아껴두는 게 좋다.
정말 필요한 것들만 익혀야지, 뭐 보이는 것마다 충동적으로 지르고 다녀서야 답도 없는 일이었다.
"음."
괜한 아쉬움에 주변을 한번 둘러본 뒤, 그만 도서관을 나서려던 때였다.
[돌발 퀘스트가 발생하였습니다.]
<돌발 퀘스트: 숨은 마법서 찾기>
해당 공간에 숨겨진 마법서를 찾으십시오. 22번째 열 책꽂이를 잘 살펴보면 무언가가 나올 것 같기도?
퀘스트 완료 보상: 없음
"......?"
숨겨진 마법서라고?
칼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이내 22번째 열로 이동했다.
넓은 공간, 그만큼 책꽂이도 사이즈가 컸기에 뒤지려면 한 세월은 걸릴 듯 보였다.
"그냥 자세히 좀 알려줄 것이지."
번거롭지만 별 수 있나.
이렇게 퀘스트가 발생한 걸 보니, 정말 뭔가 굉장한 게 숨어있을 수도 있었다.
칼은 입을 다물고 묵묵히 책꽂이 사이사이를 뒤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꽤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음."
칼은 슬쩍 주변을 둘러보고는 침음을 흘렸다.
뭔가 수상한 게 나오기는 했다.
맨 안쪽 가장 아래칸의 책들을 치우자, 책꽂이 벽면에 직사각형 형태로 미세한 갈라짐이 있었던 것이다.
드드득...
슬쩍 당겨보자 나무 갈라지는 소리와 함께 뜯어지는 벽면.
주변엔 아무도 없었지만, 괜히 눈치를 더 보며 최대한 약하게 벽면을 뜯어냈다.
"콜록."
순간 솟구치는 먼지와 함께, 그 안에 드러난 것은 무척이나 낡아보이는 책.
['돌발 퀘스트: 숨은 마법서 찾기'를 완료하였습니다!]
아무래도 찾은 듯 싶었다.
그것을 꺼낸 뒤 앞뒷면의 먼지를 털고 이리저리 살폈다.
'제목도 없네. 뭔 마법서지?'
설마 고대의 마법서 같은 건가?
칼은 한가득 기대감을 품고 정체 모를 마법서의 정보를 활성화했다.
그러나 그 기대와 반대로, 내용을 살핀 그의 표정은 빠른 속도로 굳기 시작했다.
"...이게 뭐야, 씨발."
결국 욕까지 튀어나왔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건 고대의 마법서 따위가 아니라, 바로 흑마법서였으니까.
<터닝 투 언데드(20000SP) - 4서클>
망자의 육신을 언데드로 부활시켜 조종합니다.
언데드는 생전의 이지를 잃고 시전자의 명령만을 따릅니다.
시전자보다 격이 월등히 높거나, 시체가 심하게 훼손된 대상에게는 스킬이 발동되지 않습니다.
지배 가능한 최대 언데드 수: 10
이 미친 퀘스트가 지금 이걸 익히라고 준 건가?
이 세계에서 흑마법이 지니는 위상이란, 보통 흑마법의 통상적인 이미지랑 별로 다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심했다.
금단의 마법, 역천의 마법, 마왕의 유산, 대륙 공적 등등.
한마디로 걸리면 좆된다는 뜻이다.
반드시 끝까지 살아남아 지구로 돌아가고자 하는 칼의 소망을 한순간에 망쳐버릴 수 있는 물건이었다.
물론 그만큼 구하는 게 몹시 힘든 물건이기도 했다.
예부터 대대적인 토벌로 싸그리 소멸되어, 지금 시대에서야 흑마법은 거의 전설과도 같은 것이었으니까.
'...어찌 보면 이것도 고대 마법은 맞네.'
아니, 그보다 도대체 왜 알티우스 본원 도서관에 이런 게 숨겨져있는 거지?
잠시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던 칼은 침착하게 상황을 정리했다.
'일단 인벤토리에 넣자.'
일반적인 4서클보다도 요구 SP가 몇 배는 더 많다.
지금 당장 익힐지 말지를 결정할 순 없으니 일단은 챙겨둬야 했다.
음, 근데 이게 인벤토리에 들어가려나?
[인벤토리에 보관되었습니다.]
다행히도 됐다.
인벤토리는 완전히 자신의 소유로 인정된 물건이 아니고서야 보관이 불가능하다.
이 흑마법서야 주인도 없는 물건이고, 직접 찾아냈으니 소유주로 인정되어 보관이 가능한 모양이었다.
한숨을 돌린 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책장을 돌아서 나오려는데 바로 누군가를 마주쳐서 흠칫 놀랐다.
"...뭐냐, 너?"
샤론이었다.
그녀도 이렇게 마주칠 줄은 몰랐는지 약간 당황한 얼굴이었다.
"......"
"......"
"간다?"
딱히 나눌 이야기도 없었기에 지나쳐서 가려고 했다.
그녀가 칼의 소매를 붙잡었다.
"결과 달랐을 거야."
"......?"
"마법 사용에 제한 없었으면 분명 내가 이겼어. 내 고유 마법은 하나도 사용 못했으니까."
아, 그러세요.
칼은 히죽 웃으며 말했다.
"졌다고 질질 짠 사람이 하는 말이라 그런지 전혀 설득력이 없는데. 아, 혹시 울면 마력이 증폭되는 서클링이라도 익혔니?"
샤론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다, 닥쳐..."
"어, 그래. 닥치고 갈 테니까 이거 좀 놔주라."
붙잡힌 소매를 떼내고 걸음을 옮기는데 그녀가 다시 뒤에서 외쳤다.
"조만간 다시 붙어! 다른 마법들로!"
칼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대충 손을 흔들었다.
이제 곧 떠날 텐데 다시 붙기는 무슨.
* * *
"자, 여기 있네."
하루가 더 지난 뒤 드디어 신분증이 발급되었다.
세인달에게 건내받은 신분증을 칼은 이리저리 훑어봤다.
"마법 처리가 되어있군요?"
"물론이지. 학파 지부들에 가서 그걸 보여주면 필요한 도움은 얼마든지 받을 수 있을 거네. 자넨 이제 정식 학파원이니까."
"아, 그런데 그거에 관해서 말입니다..."
칼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제가 여기에 남을 것도 아니고 이제 떠날 거잖습니까."
"그렇지."
"그런데 이렇게 정식 직위만 얻고 홀랑 떠나버리면, 다른 원로님들이 뭐라고 하시지 않겠습니까? 저야 그렇다고 치지만 세인달 원로님은 괜찮으신 건지..."
그에 세인달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자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예?"
"자네는 내 개인적인 부탁으로 연구 재료들을 모으러 떠나는 것뿐이지 않나. 그것 가지고 다른 원로들이 간섭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지."
잠시 멍하니 서있던 칼이 이내 마주 웃었다.
"아, 그렇죠. 전 원로님의 부탁으로 연구 재료들을 모으러 떠나는 것뿐이죠."
"그렇지. 돌아오는 데 꽤 오랜 시간이 걸리긴 하겠지만, 본래 마법 연구의 길은 멀고도 험한 법이니까."
세인달이 칼의 어깨를 두드렸다.
"가능하면 학파 지부에 들를 때마다 연락이나 하게. 필요하면 도움을 받고, 그쪽에 어려운 일이 있으면 자네도 도움을 주고. 그거면 충분하다네."
"예, 물론 그러겠습니다."
"그리고 언제든 돌아오고 싶으면 본원으로 돌아오게나. 제론의 연구는 내가 계속 이어서 하고 있겠네. 자네가 도와준다면 훨씬 진전이 빠를 거야."
절대로 돌아오면 안 되겠군.
단호한 속마음과 다르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칼이었다.
[메인 퀘스트가 발생하였습니다.]
[두 번째 시나리오가 시작됩니다.]
<메인 퀘스트: 뼈의 현자 찾기>
힐로렌 어딘가의 깊은 숲에 숨어있는 뼈의 현자를 찾으십시오.
퀘스트 완료 보상: 200000SP
멈칫한 칼.
그를 바라보며 세인달이 물었다.
"갑자기 왜 그러나?"
"아무것도 아닙니다."
마침 타이밍 좋게 떠오른 새 퀘스트.
'뼈의 현자라.'
이번 퀘스트도 썩 정상은 아닌 듯 싶다.
아무튼 이제 정말로 떠날 때가 왔다.
* * *
세인달의 배웅 속에 칼은 본원을 떠났다.
말 한 필을 얻어서 손에 끌고 나오며.
'언제까지 뒤로 미룰 수는 없지. 고작 말 하나 탈 줄 몰라서야 되겠나.'
처음에는 약해서 혼자 다니는 걸 꺼렸고, 중간에는 귀찮아서 자꾸 나중으로 미루었지만, 앞으로도 편하게 다니려면 말을 탈 줄 아는 건 필수적인 덕목이었다.
자만하는 건 아니지만, 제 한 몸 지킬 힘이야 이제 충분히 되니까.
더군다나 다음 목적지는 힐로렌.
중간에 국가 몇 개는 거쳐가야 하는 먼 길이다.
여태껏 그랬듯 다른 행렬들에 이리저리 갈아타면서 가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까.
혼자서 말을 끌고 다니면 그보다 적어도 몇 배는 더 빨리 도착할 수 있을 것이었다.
푸르륵!
"...뭐, 어떻게든 되겠지?"
누구에게나 처음은 어색한 법이다.
떠나기 전 잠깐 시간을 내서 연습하기는 했지만, 이걸 타고 달려 먼 길을 가려니 역시 좀 긴장됐다.
승마도 스킬처럼 익힐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아.
도시 성문 앞에서 말에 올라 잠깐 제자리만 빙글빙글 돌고 있자니,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말을 처음 타시오?"
칼은 고개를 돌렸다.
바로 옆에서 말을 타고 떠날 채비를 하고 있던 사내였다.
빤히 바라보자 그가 말을 이었다.
"쓸데없는 오지랖이면 관두겠소. 그렇게 타고 달렸다간 엉덩이가 남아나질 않을 것 같아서 물은 거요."
"아."
그 말에 칼은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타는 거 맞습니다. 제 자세가 그렇게 이상합니까?"
사내가 대답 없이 말에서 내려 다가오더니 손을 뻗었다.
"하체를 더 뒤로 하고, 허벅지를 여기 붙인 다음에... 그렇지. 이대로만 달리시오."
그리고 자세를 교정해주더니 다시 자신의 말로 돌아갔다.
훨씬 편해진 느낌에 감탄하던 칼은 문득 사내의 정체가 궁금해져서 물었다.
"사냥꾼입니까?"
복장, 무엇보다 등에 활이 걸려있었기에 추측한 것이었다.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 가죽을 팔려고 들렀지. 이제 마을로 돌아가려던 참이오."
그러고는 무뚝뚝하게 떠나는데, 마침 잘 됐다 싶어 칼은 옆으로 따라붙었다.
"이쪽 방향이면 가스터 시 인근에 있는 마을 주민인 것 같은데."
"그렇소."
"괜찮으면 함께 가도 되겠습니까? 나도 그쪽으로 향하려던 참입니다."
사내는 칼을 빤히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좀 빠르게 달릴 건데, 따라붙을 수만 있으면 상관없소."
칼은 씩 웃으며 대답했다.
"노력해보도록 하죠."
말은 저렇게 하지만, 방금도 도와준 걸 보면 중간에 버리고 갈 성격은 아닐 듯 싶었다.
그렇게 가스터 시로 가는 동안 꾸준히 자세를 교정해줄 선생을 얻었다.
* * *
사흘.
함께 달리는 사흘 동안 칼은 완전히 말타기에 익숙해졌고, 이 무뚝뚝한 사내에 대해서도 제법 알게 되었다.
사내의 이름은 지프.
가스터 시 인근에 위치한 뿔사슴 마을이란 곳의 사냥꾼이었다.
무엇보다 활솜씨가 정말로 제법이었다.
중간중간 쉬어갈 때마다 어디론가 사라져서는 화살이 박혀 축 늘어진 동물을 들고 왔으니까.
"이거 계속 얻어먹기만 하는 것 같아서 미안하네요."
칼은 노릇노릇 익은 토끼 뒷다리살을 뜯으며 물었다.
"이제 내일 저녁이면 도착한다고 했죠."
"그렇소."
"혹시 주민들이 외부인을 경계합니까? 하룻밤만 머물렀다 떠나고 싶은데."
지프가 고개를 저었다.
"괜찮소. 여관도 있고, 상인들도 가끔씩 들르고 폐쇄적인 마을은 아니니까."
"그거 다행입니다."
마을에 관한 대화를 더 나누다가, 문득 칼은 말을 멈췄다.
어째 지프의 얼굴에 미묘하게 그늘이 졌기 때문이었다.
"근데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습니까?"
"......?"
"아니, 안색이 마을 이야기를 할 때마다 자꾸 어두워지는 것 같아서."
"...별 일 아니오."
그렇게 대답한 지프가 잠시 침음을 흘리고는 다시 말했다.
"아니, 별 일이 아니라고 하면 안 되겠군. 많이 좋지 않은 일이 있기는 하니."
"그게 뭡니까?"
지프가 침울한 투로 답했다.
"마을 근처 숲에 괴물이 나타났거든. 그거 때문에 몇 주 전부터 주민들이 계속 죽어나가고 있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