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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티우스 (2)
그 후로는 세인달과 제론에 대한 이야기를 이것저것 더 나누었다.
제론을 어떻게 만났는지, 또 얼마나 곁에서 마법을 배웠는지 등등.
피 빨리는 시간이었지만, 여기까지 오며 대충 머릿속에서 구상해둔 스토리가 있었기에 칼은 간신히 대화를 잘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그럼 앞으로 자네는 어쩔 생각인가?"
"저는..."
아직 다음 퀘스트가 떠오르지 않았기에 정해지지 않은 부분이었다.
그때 세인달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알티우스에 들어오는 건 어떻겠는가?"
"......"
"친우의 제자라서 꺼내는 이야기가 아니라네. 4서클, 자네 나이에 그 실력이라면 천재와 다름없지. 분명 이곳에서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을 거야. 오래전 자네의 스승이 그러했듯이."
칼은 잠시 입을 다물고 생각했다.
고민하는 척 표정을 연기하곤 있지만, 사실 이미 답은 내려진 상태였다.
'...절대로 안 되지. 이곳에 머물라니.'
퀘스트 문제는 둘째였다.
실상은 0에 가까운 그의 마법 실력으로 이곳에 머물렀다간, 순식간에 밑천이 드러날 게 뻔한 일.
칼은 머리를 굴려 적당히 거절할 방법을 생각해냈다.
"감사한 말씀이지만 안 될 것 같습니다."
당연히 수락할 줄 알았던 세인달이 살짝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음, 어째서인가?"
"스승님께서 남기신 유언 때문입니다. 일단은 대륙 이곳저곳을 떠돌며 모험을 해볼 생각입니다."
유언.
그것을 붙여서 애매하게 말하면 계속 제안하지는 못할 것이었다. 돌아가신 스승님 말씀이라는데 어쩌겠나.
세인달도 다행히 알아서 납득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허허, 그렇군. 과연 제론 그 친구다워."
"......"
"마력, 술식, 그리고 연구를 통해 깨닫는 갖가지 지식들, 전부 중요하지만 사실 마법의 본질은 의념이지. 이곳저곳 떠돌며 많은 경험들을 쌓으면 그 역시 마법의 진전에 큰 도움이 될 테니 말이야. 그건 골방에만 박혀있어선 얻을 수 없는 것이지. 늙어서야 이곳저곳 떠돌기도 힘들 테니 나쁘지 않은 선택이라고 생각하네."
뭔 소리인지 모르겠다.
일단 같이 고개나 끄덕이고 보자.
흐뭇한 얼굴로 칼을 바라보던 세인달이 말을 이었다.
"그러면 이건 어떻겠나?"
"......?"
"이곳에 머무를 필요는 없으니 알티우스의 소속만이라도 되게. 대륙 어디를 여행하든 확실한 신분이 될 테니 자네에게 도움이 되면 됐지, 결코 해가 되지는 않을 거네."
칼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지금 그가 하는 말은 권익만 받고, 학파원으로서의 책임은 다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과 같았으니까.
"그, 그래도 되는 겁니까?"
"별 문제는 없다네. 내 이름으로 자네를 보증할 테니 말이야."
하긴.
원로가 직접 나선다면야, 고작 소속 마법사 하나 터치하지 않는 일로 그 누가 태클을 걸겠는가.
'이래서 인맥이 좋긴 좋구나.'
칼은 속으로 감탄했다.
아무튼 거절할 이유가 없는 제안이었다.
칼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자, 세인달이 미소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그럼 이만 일어나지. 정식 절차 없이 학파원으로 등록하려면 간단한 심사가 필요하기는 하니 그건 내일로 하고, 오늘 하루는 이곳에서 머물도록 하게. 여기저기 구경하고 다니면 심심할 틈은 없을 거야."
* * *
그렇게 잠깐 머물 넓고 고풍스런 방을 하나 내어받고, 식사도 마친 뒤.
칼은 곧바로 예정한 곳으로 향했다.
중앙도서관.
일반적으로 도서관이라 하면 당연히 책들이 한가득 쌓여있는 곳이다.
근데 그 도서관이 마법 학파 내부에 위치해있다면, 그리고 그 학파가 무려 알티우스라면.
그건 더 이상 도서관이 아니라 마법의 보고라고 불려도 별 손색이 없을 것이었다.
특히나 칼에게 있어서는 더더욱 그랬다.
다른 이들과 다르게, 그에게 마법서란 '스킬북'으로 설정되는 일종의 아이템이었으니까.
원리를 이해하고, 술식을 암기하고, 마력 운용법을 결합하고, 남들은 머리를 쥐어짜내며 익히는 데 한참이 걸릴 마법들도 그저 SP만 지불하면 즉시 익힐 수 있는 것이었다.
"이야, 이것도 엄청 높네."
본원의 건물들은 대부분이 탑 형태로 지어져있다.
그건 도서관도 마찬가지였다.
칼은 세인달에게 들었던 설명을 상기하며, 앞쪽에 보이는 중앙도서관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1층부터 서클 순서대로 서적들이 정리되어 있다고 했지.'
1층은 1서클 마법서.
2층은 2서클 마법서.
이런 식으로 배치되어 마법사들이 각자 수준에 맞게 찾아갈 수 있도록 편이한 구조였다.
"신분증을 보여주십시오."
1층의 입구로 다가가자 신분 증명을 요구하는 경비원.
칼은 아직 신분증이 없지만, 세인달에게 따로 받은 허가서가 있었다.
그것을 내밀어 보여주자 경비원이 깜짝 놀라며 서둘러 비켜섰다.
향하는 곳은 4층.
층마다 각각 경비원이 있었기에, 비슷한 일을 3번 더 겪고 나서야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오."
주변에 한가득 널린 마법서들.
전부 4서클 관련 마법서다.
마침 메인 퀘스트를 해결하면서 SP도 두둑하게 쌓았겠다.
칼은 이곳에 머물 동안 쓸만한 마법들을 최대한 건져서 나갈 생각이었다.
물론 이런 공공 마법서에 비전 마법 같은 귀한 건 없겠지만, 그것을 감안하고도 쓸만한 건 넘쳐날 터였다.
다른 곳도 아니고 알티우스 본원의 도서관이니까.
칼은 씩 웃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리안포싱 프레셔(6000SP)]
[어스 스피어(8000SP)]
[포이즌 미스트(7000SP)]
[프로즌 붐(7000SP)]
그렇게 한창 행복한 고민에 빠져 마법서들을 이것저것 둘러보고 있을 때였다.
"......?"
문득 느껴지는 시선.
칼은 고개를 돌렸다.
누군가 저편에서 이쪽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긴 흑발에 자색 눈동자를 가진 여인.
그녀가 이쪽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물었다.
"너 누구야?"
뜬금없는 물음.
칼은 침묵했다.
다짜고짜 누구냐니, 의도를 알 수가 없는 질문이었으니까.
"너 누구냐고."
그러자 약간 짜증이 난 투로 그녀가 다시 물어왔다.
하는 일을 방해하고 영문 모를 소리만 해대니, 칼도 똑같이 퉁명스레 되물었다.
"그러는 넌 누군데?"
"내가 먼저 물었어. 너가 대답해."
"...남이 누군지 알려면 자기가 누군지부터 밝혀야지. 무슨 선착순 게임하냐?"
그 말에 그녀가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이내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샤론 레이첼. 허스 원로님의 제자."
"......"
"이제 말해. 너 누구인지."
원로의 제자라고?
칼은 약간 놀란 심정을 감추고서 답했다.
"칼이다."
"......"
"...세인달 원로님과 친분이 있지. 근데 너처럼 제자는 아니야."
그녀의 눈에 이채가 띄었다.
"처음 봤어."
"......?"
"내 또래에 4서클, 나 말고 처음 봤어. 그래서 그냥 궁금했어."
그 말을 끝으로 그녀는 홱 다른 곳으로 떠나버렸다.
칼은 황당한 얼굴로 뒷모습을 바라봤다.
"뭐 저런 게 다 있냐."
곧 신경을 끄고 다시 마법서들을 뒤적이는 그였다.
* * *
알티우스 본원의 원로회 건물.
"그래서... 회의를 소집한 이유가 뭔가? 세인달?"
거대한 원탁에 둘러앉은 원로들 중 한 사람이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세인달은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개인적으로 학파원으로 추천하고 싶은 인재가 한 명 있다네."
그에 다른 원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거야 자네가 알아서 하면 되는 일 아닌가. 견습 학파원이야 얼마든지 원로 권한으로 임명할 수 있..."
원로가 멈칫하며 말을 끊었다.
그리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선 물었다.
"...설마 정식 학파원으로 추천하겠다는 뜻인가?"
세인달이 고개를 끄덕이자 원로 몇몇이 짧은 탄성을 터뜨렸다.
정식 학파원.
그것은 견습 학파원과는 완전히 다른 의미를 지니는 위치였다.
학파에 가입한 뒤에도 보통 몇 년 동안 실력과 자질을 증명해야만 얻을 수 있는 자격.
때문에 원로회의 권한으로도 누군가를 정식 학파원으로 올리는 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 자네가 말하는 걸 보면 외부인을 바로 정식 학파원으로 가입시키겠다는 것 같은데, 맞나?"
"그렇네."
원로들은 다시 한 번 놀랐다.
세인달이 권한을 이용해 개인적으로 누군가를 추천하는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었기에.
또 그게 무려 정식 학파원 추천이었기에 모두가 놀라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세인달, 자네가 괜한 소리를 할 사람이 아니란 건 다들 잘 알고 있지만..."
원로회장이 힐끔 시선을 던졌다.
이야기를 듣자마자 굉장히 못마땅하다는 얼굴로 팔짱을 끼고 있는 원로, 허스에게로.
"지금 남은 자리가 하나밖에 없다는 건 자네도 잘 알고 있지 않나?"
"그렇지."
"그리고 그 자리가 허스, 저 친구의 손녀에게 돌아가기로 한 것도 잘 알 테고."
"물론 잘 알고 있네."
원로회에서 정식 학파원을 등록시킬 수 있는 권한은 1년에 10자리.
9자리는 이미 다 썼고, 남은 한 자리는 이제 곧 허스의 손녀이자 제자인 샤론에게 돌아가기로 암묵적으로 결정되어 있었다.
한데 뜬금없이 세인달이 나서서 새로운 후보자를 내세우고 있으니, 다들 놀라는 한편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이런 갈등을 일으킬 만큼, 자네가 추천하고자 하는 이가 대체 누군가? 나는 도저히 모르겠군. 세인달, 자네한테는 제자도 없지 않은가."
잠시 침묵하는 세인달.
원로들의 시선이 모두 쏠렸다.
곧 그가 덤덤하게 말했다.
"제론이 세상을 떠났네."
"......!!"
"그리고 오늘 낮에 그 친구의 제자가 내게 찾아왔지. 내가 추천하고 싶은 건 바로 그 아이야."
술렁거리는 원로들.
그들은 이 알티우스에서, 전부 비슷한 시대를 살아온 이들이다.
제론이 누구인지 모르는 이는 적어도 이 자리에는 없었다.
천재 중의 천재.
그리고 괴짜 중의 괴짜.
원로 자리조차 마다하고, 개인적인 연구를 위해 오래전 학파를 떠나버렸던 인간.
"...제론 그 친구가 죽은 건가."
"참, 연락도 싹 끊고 잠적하다가 결국 인사 한 번 없이..."
오랜만에 듣는 이름에, 그와 조금이나마 친분이 있었던 몇몇 원로들이 탄식을 터뜨렸다.
"정말 그 녀석이 제자를 키웠다고?"
"그래."
"자네가 확실히 확인을 안 했을 리는 없고, 그놈 성격에 그게 가능한 일인가? 하긴, 늙으면서 변했을 수도 있으니..."
"아무튼 제론의 제자를 정식 학파원으로 들이겠다는 말이지. 자격은 되는가?"
3서클.
타 학파들과 비교하면 터무니없이 높은 그것이, 바로 알티우스 정식 학파원의 최소 자격이었다.
세인달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오히려 한 단계 위지."
"4서클이라고? 흠, 나이가 생각보다 젊지는 않나보군?"
"놀라지 말게. 고작 스물이라네."
"......!!"
원로들의 눈이 경악으로 커졌다.
"스물...? 허! 고작 스물밖에 안 됐는데 4서클이라고?"
"샤론, 그 아이와 똑같은 천재지. 이제 내 추천에 별다른 문제가 없다는 걸 다들 인정하겠나?"
세인달의 친우인 제론의 제자.
그리고 스물의 나이에 4서클.
외부인이라는 점만 빼면 샤론과 비교해서 뒤떨어지는 부분은 없었다.
그리고 알티우스는, 연차와 혈연은 배제하고 오로지 실력과 실적만을 중시하여 학파원들의 직위를 정하는 단체였다.
"그런데 아무리 그래도 좀 그렇지 않나? 샤론은 지금까지 본원에서 학파원으로서 지냈는데..."
"...학파원으로서? 솔직히 말만 학파원이지, 다른 견습들이 하는 일을 그 아이가 한 적은 없지 않나."
"아니, 그래도 외부인인데..."
"제론의 제자이니 완전히 외부인이라고 할 수도 없지. 그 친구 이름이 아직 학파에서 제명된 것도 아니고."
잠시 원로들 사이에 가벼운 논쟁이 일어났다.
세인달과 가까운 이들, 그리고 샤론의 행보를 평소 좋지 않게 봤던 원로들이 세인달의 편을 들자 분위기는 점점 과열되었다.
원로회장이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후, 세인달. 자네가 마음을 바꿀 일은 없겠지?"
"허스에겐 미안하지만 그렇다네. 말도 없이 떠나버린 친구에게 그나마 해줄 수 있는 게 이것밖에 없군."
"그러면 이젠 원칙에 따르는 수밖에."
원로회장이 상황을 종결시키려는 듯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론의 제자와 샤론, 둘 모두 정식 학파원으로서의 자격에 충족되며, 그 수준 또한 비슷하다. 따라서 원칙대로 원로들의 관전 아래, 두 사람이 적절한 종목으로 서로의 마법 실력을 겨루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