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 위대한 별(4) >
발칸이 죽었다.
아르하임이 죽었다.
세 개의 파벌 중 하나가 무너졌다.
그 여파는 결코 적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커서 문제가 될 정도였으니.
“위대한 별이 눈을 뜨는구나.”
천상의 세계.
위그드라실의 중심부에서 흐레스벨그가 웃었다.
그는 항상 지켜보고 있다. 지상을 굽어보며, 균열을 일으키는 게 그가 할 일.
그리고 이변을 눈치 챘다.
‘오한성.’
흐레스벨그는 저주에 걸리지 않았다. 망각. 그런 것들은 지상의 존재에게나 통용되는 저주다. 위그드라실의 주인인 그에겐 통하지 않는다.
‘하지만 결국 탑을 모두 오르진 못했지.’
위대한 별로 통하는 탑. 10개로 이루어진 그 탑은 인간이 오르기 불가능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8층에서 운명의 여신들과 만난 건 칭찬해 마땅한 일이나, 그래봤자 거기까지가 한계.
그리고 아르하임을 죽이며 위대한 별에 본격적인 시동이 걸렸다.
“세계를 먹어치워라. 모든 걸 먹어치운 다음 나의 균열로 말미암아 새로운 세계가 태동하리라. 그리고 나는 그 세계의 주인이 되겠다.”
흐레스벨그가 양 손을 뻗었다.
연주가의 그것처럼. 그의 음을 따라 세계가 움직이고 있었다.
위대한 별이 움직이기 시작하면 세계의 모든 것들은 파멸한다. 지구의 각성자와 최후의 승자마저도 위대한 별은 먹어치울 것이다.
그리고 ‘없던 것’이 되겠지.
암흑인들처럼.
오한성. 저 남자가 아무리 발악해도 결말은 정해져 있었다. 오히려 그는 결말로 향하는 길을 더욱 빠르게 만들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 것도 모르고 그들은 좋아하고 있었다.
흐레스벨그가 웃었다.
정해진 승리를 자축하며.
하지만······ 그도 눈치 채지 못한 것이 있었으니.
알레테이아의 반쪽, 크로노스. 시간 그 자체인 그녀가 오한성의 옆에 있다는 점이었다.
-우리는 약속을 했죠.
크로노스. 천마는 그녀를 숨겨뒀다. 나찰산의 가장 깊은 곳, 현계에.
그리고 오한성이 찾았을 때도, 그녀는 계속해서 숨어있었다.
오로지 흐레스벨그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요르문간드, 라이라. 우리의 약속을 이행할 때인 것 같군요.
오한성이 탑에 올라 힘을 얻은 뒤에도 그녀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철두철미하게 숨었다. 흐레스벨그의 시선이 그에게 닿아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르하임이 쓰러지고 오한성이 힘을 다해 기절한 직후, 그녀는 더 이상 숨지 않았다.
숨을 수 없었다.
약속을 지켜야 했으니까.
-아이들에겐 힘든 일이 될 수도 있겠지만······.
크로노스가 나타나자 세계가 멈췄다.
시간이 더 이상 흐르지 않았다.
기적과 같은 일. 하지만 그녀에게 있어선 자연스러운 일.
그녀는 전장의 한복판에 선 그람과 엘리스의 앞으로 다가갔다.
-맹점. 흐레스벨그는 이 아이들을 너무 얕봤어요. 우리의 축복이 깃든 이 아이들을. 위대한 별의 ‘열쇠’가 이 아이들에게 있는 걸 그는 몰랐죠.
철저하게 숨긴 덕이다.
들키는 순간 흐레스벨그는 어떻게든 이 아이들을 죽이려고 할 터.
‘열쇠’는 성장하여 마침내 결실을 맺었다.
쉬이이이.
동시에 그녀의 옆으로 형상 하나가 더 생성되었다.
요르문간드. 그녀였다.
-정말 괜찮겠습니까?
-짐의 아이다. 믿어야지.
요르문간드가 그람의 머리를 매만졌다.
낳을 때를 제외하고 그녀는 그람을 처음 만나보는 것이었다.
-항상 보고 있었다. 알레테이아와 함께. 그람. 너는 짐을 모르겠지만, 짐은 항상 너와 함께 있었노라.
자애가 가득담긴 눈빛.
요르문간드는 이제야 비로소 사랑을 알았다.
-라이라가 이 순간을 함께하지 못하는 게 아쉽군요.
-하지만 라이라도 동의한 일이다.
오로지 셋만 알고 있는 작전이었다.
위대한 별과 흐레스벨그를 상대하려면 오한성, 그 혼자만으로는 역부족이다.
모두가 힘을 합쳐야 했다. 무슨 수라도 써야 했다.
설령 그것이 자신을, 자신의 아이들을 힘겹게 하는 일일지라도.
요르문간드가 그람과 엘리스를 껴안았다.
-이겨내어라. 그리고 기다리어라. 그가 너희를 구하러 갈 것이니.
이후 요르문간드는 몸을 돌려 오한성에게 다가갔다.
오한성. 처음에는 그저 계약자로 시작한 남자. 아무런 감정도 없었고, 나중에는 잡아먹을 생각까지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시련을 이겨내는 모습을 보며 마음이 움직였다.
절망 속에 피어난 꽃보다 아름다운 게 없듯이. 어느 순간 요르문간드는 오한성이라는 인간에게 시선을 빼앗기고 있었다.
처음이었다.
그녀는 오만한 뱀이었으니까.
미드가르드를 집어삼킨 거신이었으니까.
고작 이런 작은 존재에게 시선을 빼앗길 줄은······ 몰랐다.
-믿고 있노라.
쪽!
이마에 입을 맞춘 요르문간드가 천천히 얼굴을 아래로 내리더니, 입에 한 번 더 입맞춤을 하였다.
-믿고······ 있노라.
돌아갈 시간이었다.
이 시간이 더 길어지면 흐레스벨그가 눈치 챈다.
요르문간드가 고개를 끄덕이자, 크로노스가 다가왔다.
-헤어질 시간이군요.
이어 그녀가 손을 높게 뻗었다.
그 순간.
휘아아아아아악!
그람과 엘리스의 가슴에서 거대한 빛이 번져 나왔다.
그 빛은 둘의 영혼. 이어 둘의 영혼이 천천히 거신에게로 향했다.
크로노스도 마찬가지였다.
그람과 엘리스, 그리고 크로노스는 거신을 부수는 열쇠.
세 영혼이 거신의 심장에 도착하자.
고오오오오오오오-
멈춰있던 시간이 풀리고, 거신이 포효하며 괴로워하기 시작했다.
* * * * *
세계의 모든 이들이 위대한 별이 변화하기 시작했음을 느꼈다.
그중엔 안달톤 브뤼시엘도 있었다.
오로지 위대한 별을 얻고자 움직이는 남자. 위대한 별에 대한 집착이라면 모든 데몬로드 중에 최선두를 달리는 존재!
‘아르하임이 죽었군.’
이 변화의 중심에 아르하임의 죽음이 있다는 걸 그는 눈치 챘다.
하지만, 안달톤 브뤼시엘은 누구보다 위대한 별에 관심이 있는 자다. 지금의 변화가 심상치 않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폭주. 그릇이 흘러넘치고 있다.’
때문에 그는 알 수 있었다.
거신의 그릇이 넘쳐흐르고 있다는 걸.
이상한 일이었다.
거신의 그릇은 무한한 우주와 같아서, 모든 데몬로드와 지구의 모든 각성자들을 빨아들여야만 겨우 그 구실을 할 수가 있었다.
그런데 무한한 우주와 같은 그릇이 흘러넘치다니?
‘그릇의 내용물들이 부풀고 있다.’
무슨 일일까.
고작 아르하임 정도로는 그릇을 흐르게 만들 수 없었다.
하물며 내용물에 영향을 끼칠 수도 없었다.
변수가 나타났다. 그것도 아주 큰 변수가.
‘아무래도 승부의 시간을 당겨야겠군.’
이대로 시간이 지나면 위대한 별은 폭사한다. 혹은 폭주하여 모든 것을 쓸어버릴 것이다.
그 전에, 저 그릇을 갖는다.
안달톤 브뤼시엘의 욕망은 끝나지 않았다. 그릇이 부푸는 만큼 그의 욕망 역시 부풀어 있는 상태였다.
‘그 고결함에 더 이상 손상이 가지 않도록.’
위대한 별은 고결한 것이다.
완전무결. 아름답고 고혹적인 것이었다.
당연히 자격이 있는 자들끼리만 경쟁을 해야 한다.
그래야 아름다운 결실을 맺을 수 있을 테니.
또한, 그는 다른 자들이 알지 못하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오한성. 네가 우리엘 디아블로였다는 걸 나는 안다.’
망각의 저주로 인해 자신의 기억은 사라졌지만, 안달톤 브뤼시엘은 악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악신은 안달톤 브뤼시엘에게 속삭였다.
그가 잊은 것, 잊지 말아야할 것, 숨겨진 진실조차도.
그리하여 인정했다.
네가, 나의 마지막 적수라는 걸.
오한성. 오로지 너만이 자신과 ‘위대한 별’을 걸고 쟁탈하는데 어울린다는 걸.
‘네가 아르하임을 처리했으니······.’
안달톤 브뤼시엘이 권좌에서 일어났다.
얼음으로 빛나는 새하얀 검 한 자루를 들고서.
‘내가 제로를 죽이마.’
둘의 온전하고 아름다운 대결을 위하여 말이다.
* * * * *
‘천마신공’이라 일컬어지는 그 기술은 상상을 초월하는 마력을 요구한다.
마력의 소모가 끝난 직후, 나는 기절했고 꿈을 꿨다.
라이라와 요르문간드, 그리고 내 아이들과 함께 공원을 노니는 꿈.
그러나 이내 그녀는 사라졌다.
그람도, 엘리스도.
-아이들을 부탁해요. 우리 아이들을······ 구해주세요.
구해달라니?
무슨 큰 일이라도 닥쳤다는 건지.
꿈은 거기서 끝났다.
“정신이 드세요?”
눈을 뜨자 가장 먼저 유서희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이쿠, 머리 새하얘진 거 봐. 그래도 꽤 어울리네요.”
“시간이 얼마나 흘렀지?”
병실이었다.
상체를 들어 올리고 즉시 묻자 유서희가 쯧쯧 혀를 찼다.
“이틀 지났어요. 잘 자던데요?”
이틀이라. 생각보다 길지 않다. 다행이었다.
‘아르하임은 죽었다.’
확신할 수 있었다. 아르하임을 암흑인들이, 나의 날개가 먹어치웠으니까.
“좋은 소식이 있고, 나쁜 소식이 있어요. 뭐가 먼저 듣고 싶으세요?”
유서희가 손가락 두 개를 펼쳤다.
즉시 답했다.
“나쁜 소식.”
“라이라님이 사라졌어요. 그람과 엘리스를 데리고.”
“······ 찾은 건가?”
유서희는 고개를 저었다. 하기야 알았다면 사라졌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디로 간 걸까?
“찾고 있어요. 하지만 그녀가 마음먹고 숨었다면 찾지 못하겠죠.”
누군가는 도망쳤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아서라. 라이라는 도망치지 않는다. 언제나 정면으로 받아치던 게 그녀였다.
하지만 꿈의 내용이 걸린다.
아이들을 구해달라는 말.
결코 평범한 꿈은 아니었을진대.
“다행히 편지는 한 장 두고 가셨더군요. 전쟁을 끝내야만 아이들을 되찾을 수 있으니, 전쟁을 끝내겠노라고 했어요.”
“아이들을 되찾는다?”
“아르하임이 쓰러지고, 위대한 별이 표효하자 왜인지 모르겠지만······ 그람과 엘리스가 생명활동을 멈췄어요. 라이라님은 그 이유를 알고 계신 거 같은데. 말은 안 해주셨죠.”
아르하임이 죽고 거신이 포효하자 그람과 엘리스의 생명활동이 멈췄다니.
아르하임은 상관없다. 상관이 있다면 거신일 것이다.
‘크로노스도 사라졌다.’
나는 그녀가 항상 내 주변에 숨어있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사라졌다. 거짓말처럼.
즉시 바깥으로 나왔다.
고오오오오오-
거신은 세상의 중심에서 더욱 붉게 작열하는 중이었다. 마치 신음을 흘리는 것만 같았다.
특히 가슴부근이 붉었다.
무언가가 그 안에 들어있는 듯했다.
그리고······ 내가 가진 ‘운명의 선’이 거신의 중심으로 이어져 있었다.
‘그람, 엘리스.’
나와 둘에게만 부여된 인연의 선. 그 선이 왜 저기로 이어져있단 말인가?
‘전쟁을 끝내야만 아이들을 구할 수 있다. 라이라는 그렇게 말했지.’
고개를 주억거렸다.
처음에는 식겁했지만,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다.
‘희망’은 분명히 있었다.
“좋은 소식은?”
“안달톤 브뤼시엘과 그의 수하들이 제로와 전쟁을 벌이기 시작했어요. 정확히 아르하임이 죽는 날 동시에.”
허······.
잠시 침음을 삼켰다.
나를 노리는 게 아니라 제로를 노릴 줄이야.
‘라이라가 그곳에 있다.’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라이라.
그녀는 거기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바로 움직여선 안 된다.
내가 섣불리 움직이면 모두가 위험해진다.
나는 아직 마력을 전부 회복하지 못했다.
그러나 방법이 아예 없진 않았다.
‘루의 창.’
그 빛의 창에 형상을 부여하는 작업이 남아있었다.
과연 월천은 그 ‘빛의 창’을 집어삼킬 수 있을까?
가공스러울 정도의 힘을 지닌 무기를 말이다.
‘해봐야겠지.’
몸을 풀었다.
급할수록 되돌아가라고 하였다.
라이라는 결코 섣불리 실수를 저지르지 않을 것이었다. 그녀라면, 내가 아는 라이라 디아블로라면, 신중히 고민하고 선택하며 최적의 길을 따라가겠지.
나도 가만히 있을 순 없었다.
다만 확신 된 승리를 위해, 나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 52. 위대한 별(4)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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