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 위대한 별(3) >
파벌의 수장, 아르하임.
나는 그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하지만 절대 얕봐선 안 될 상대라는 건 안다.
괴물의 정점에 군림하는 데몬로드. 그 데몬로드를 총괄하는 데몬로드. 여태껏 상대한 어느 괴물들보다 까다롭고 강력할 것이었기에.
스으으읍.
마력의 냄새를 맡는다.
내 신체가 나에게 경고를 보내오고 있었다.
자만하지 말라고. 최선을 다하라고. 죽을 각오로 싸우라고.
하아아아아아.
하지만 질 것 같지가 않았다.
오만인가? 스스로에게 취한 걸까.
나는 월천을 들었다. 더욱 손에 감기는 느낌. 진정한 합일(合一)이라더니. 검과 내가 공명하며 마치 검에도 내 눈이 달린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지금의 나는 시야가 자유롭지 못하다. 청각을 제외하면 아직도 혼란 속이었다.
하지만 월천을 쥔 순간, 나는 월천 그 자체가 되었다.
월천이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을 알 수 있게 됐다.
‘이런 세상이었군.’
검의 세상. 아무런 감정조차 없는 차가운 눈빛.
검은 있는 그대로를 본다. 있는 그대로를 느낀다.
“아아아!”
“사, 살려줘! 제발!”
“내, 내 다리! 내 다리!!”
재차 주변을 둘러봤을 때의 지상은 아수라장이었다. 성역으로 변한 대지는 아르하임의 호흡에 따라 움직였다. 이 주변 모든 공간이 그의 ‘성’이었으니.
그는 움직이는 성이었다.
그리고 성에 갇힌 병사들은 처참하게 뭉개진다.
-구하고 싶느냐? 구해라. 필요한 자들만을. 나머지는 먹이가 되도록 놔두어라.
-구하지 마세요. 어차피 저들은 더 이상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미끼로 아르하임의 목을 치는 게 더욱 현명합니다.
펜리르, 그리고 헬.
월천을 쥔 채 눈을 뜨자 둘은 서로 다른 이야기를 했다.
펜리르는 실용성이 있는 자들만 선별하여 구하라고 하였고, 헬은 자신 외엔 어차피 필요가 없으니 버리라는 말이었다.
‘요르문간드. 너라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짐에게 그런 것까지 묻는 게냐?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라. 짐은 그저 지켜볼 뿐이니.
그녀는 자신의 선택을 내게 강요하지 않았다.
내 자신의 의견을 존중했으며, 필요하다면 행동으로 보여주는 게 그녀였다.
그래서일까. 그녀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린 것만 같았다.
결정을 내렸다.
‘모두 구하겠다.’
영웅이 되지 않겠다고 하지 않았던가?
돌고 돌아 다시 영웅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라도 든 건지.
하지만 내가 구하지 않으면 누가 구한단 말인가. 내가 나서지 않으면 누가 저 괴물을 죽인단 말인가.
최후의 영웅이었을 때와는 다르다.
그때와 달리, 내겐 힘이 있었다.
그때와 달리, 내겐 희망이 있었다.
그때와 달리······ 내겐 더욱 지키고 싶은 것들이 생겼다.
내 모든 것을 걸어서라도. 설혹 그들이 나를 기억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나는 영웅 따위가 아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영웅이 아니었다.
내겐 그와 같은 숭고한 마음이 없었다.
지독히 이기적이었으며, 지독히 변덕이 심했다.
그런 내가 영웅이라고?
[선 성향이 크게 상승합니다.]
[선성향이 50에 도달했습니다.]
[‘펜리르의 힘’을 빌릴 수 있습니다.]
[‘펜리르의 힘’을 빌리시겠습니까?]
펜리르. 헬. 둘의 존재력은 막강했다. 그들의 힘을 빌린다면, 어쩌면 지금 눈앞에있는 아르하임조차 쉽게 제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후 나는 그 힘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 유혹을 쉽게 떨쳐낼 수 없겠지.
점차 나는 인간이 아니게 되어갈 것이다.
감각을 잃고, 감정을 상실하며, 꼭두각시가 될 테지.
‘거부한다.’
그래서 거부했다.
나는 인간이었다. 인간이고 싶었다.
가끔은 아프고, 가끔은 행복하며, 가끔은 슬픈 인간이.
-멍청한 놈! 너는 후회할 것이다. 땅을 치며 통곡하겠지. 인간성은 나약함의 상징! 신이 될 기회를 스스로 차버리다니!
-악해지세요. 그런 마음가짐으론 아무 것도 지킬 수 없습니다. 저 헬의 말을 믿으세요.
보지 않는다. 듣지 않는다.
나는 그저 앞으로 나아갈 뿐이었다.
초월한 인간과 초월한 악마.
누가 더 강할까?
“붙어보면 알겠지.”
부르르르!
월천이 울었다. 월천은 피를 바라고 있었다.
그 안에 내재된 흉포성.
천마신공!
[‘월천’을 쥐고 있을 때에만 효과가 발휘됩니다.]
[‘천마신공’은 막대한 마력을 소모합니다.]
한 발자국.
앞으로 내딛었다.
-‘천마군림보’, 천마의 한 발자국에 세계가 흔들리니.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월천도, 현장도 아닌 다른 존재.
천마.
그가 사용하던 무공. 그가 평생 체득한 공부.
신이 된 이후 완성시킨 하나의 신공을.
쿠르르르르르릉!
지면이 파열되었다. 내 발을 시작으로 가뭄이라도 난 듯 지상이 파열되며 거대한 울림을 낳았다. 이윽고 그 울림이 아르하임에게 도착했고, 순식간에 바닥에서 솟아난 거대한 돌 무리 따위가 아르하임을 가두었다.
평범한 돌덩이라면, 아르하임의 손짓 한 번에 가루가 되어야 정상이다.
하지만 그가 자신만의 ‘성역’을 선포했듯, 나 역시 이곳이 나의 땅임을 ‘선포’하고 있었다.
천마군림보는 그런 무공이다.
한 발자국을 내딛는 것만으로 하늘과 땅, 모두를 지배하는!
‘아르하임의 성역선포보다 강력하다.’
아르하임이 내놓은 ‘성역선포’를 그대로 씹어버리고 있었다. 그가 가진 권능보다 천마군림보로 남겨둔 나의 발자국이 더욱 위대하다는 말이었다.
이어서 나는 허공에 발을 디뎠다.
마치 허공에 계단이라도 생긴 듯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다.
쏜살처럼 달려 나가 아르하임에게 도달하여, 나는 단 한 번의 참격을 남겼다.
스아아아아아앙!
-‘천마참’, 천마가 휘두르는 검은 세계를 가른다.
단순한 공간만이 아니다.
차원 째로 으깨버리는 참격이었다.
앞에 있는 모든 것을 꿰뚫어버리며 그대로 나아간 참격이 허공에 커다란 상처를 남겼다. 밝은 날임에도 참격이 훑고 지나간 자리는 마치 불에라도 탄 듯 거무스름하게 남겨져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 아르하임이 있었다.
왼쪽 팔이 날아간 채.
크게 충격이라도 받은 듯.
“네놈······ 천상의 신은 아닐진대?”
진짜 신은 모두 사라졌다. 이 세상에 남은 것은 가짜들뿐.
모두가 가짜였다. 암흑인들도, 어쩌면 나도.
하지만, 동시에 깨달은 게 있다.
‘가짜와 진짜의 구분은 필요한가?’
나는 항상 가짜와 진짜를 구분해왔다.
가짜는 결코 진짜를 이길 수 없다. 진짜가 될 수 없다고 여겨왔던 것이다.
하지만, 그럴까?
암흑인들은 진짜가 되고자 발악했다. 내가 과거에서 돌아옴으로 인해 사라진 존재들. 그들은 다시금 ‘존재력’을 얻고자 지구를 멸망시키려고 하였다.
그러나······ 존재력이란 무엇인가.
‘이곳에 내가 있다.’
어려운 문제가 아니다.
자신의 자리에서 스스로를 인지할 수만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존재한다고 할 수 있으니, 그 이상을 바라는 건 어디까지나 욕심에 불과하다.
욕심. 욕망.
인간이라면 갖고 있는 지극히 당연한 감정.
나 역시 인간이었다. 그래서 가짜와 진짜를 구분해왔다. 하지만 지금, 나는 그런 구분에 의미가 없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내가 인지한 요르문간드는 진짜였다. 마찬가지로 내가 인지한 암흑인들도 가짜라할 수는 없었다. 그들 모두 존재했으며, 아직도 내 머릿속에 생생히 살아가니까.
‘내가 그렇게 믿는 한.’
진짜와 가짜의 구분은 의미가 없어진다.
그저 믿음의 문제였을 뿐이다. 마찬가지로 내가 나를 진짜라고 생각한다면 그렇게 될 것이다.
큰 깨달음은 아니었지만, 내 모든 인식을 송두리째 바꿀 만한 일은.
동시에.
화아아아아악!
-천마(天魔). 모든 하늘과 마귀의 주인.
악령으로 이루어진 검은 날개가 다시금 돋아났다.
암흑인!
그들을 기억하는 내가 만들어낸 진짜 잔재다. 위대한 별을 덮쳤던 그 거대한 악령의 날개들이 내 뒤에 돋아났다.
형체는 없으나 이 검은색의 날개는 하늘을 모두 덮어버릴 것만 같았다. 크고, 강력했으며, 모두의 눈에 새겨질 만큼 또렷했다.
-우리의 왕이 강림하였도다!
-잊힌 자들의 왕!
-망각의 왕!
암흑인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들은 더 이상 헤매지 않았다. 내가 헤매지 않기시작하자 그들 역시 헤매지 않게 된 것이다.
그들은 더 이상 가짜가 아니다. 내 등 뒤에서 비로소 진짜가 되었다.
“무슨 수작을 부린 것 같으나 소용없다! 이곳이 나의 성역인 이상, 너는 절대로 나를 죽일 수 없으니! 이곳에서의 나는 불멸!”
불멸. 결코 죽지 않는다는 말.
이윽고 아르하임의 신체가 재생되기 시작했다.
불멸인 그는 성역을 벗어나지 않는 한 무한하게 재생할 수 있었다.
잘려나간 왼팔에 힘줄과 살이 돋으며 다시 원래의 형상을 되찾았다.
아니, 되찾아가는 듯했다.
“재, 재생이······?”
하지만, 재생은 되지 않았다. 천마참. 차원 자체를 썰어버릴 정도의 위력을 지닌 검기가 그의 왼팔을 스치고 지나간 것이다. 그대로 형태가 고정되어 더 이상의 재생은 불가능했다.
“허나 너도 그 상태를 오래 유지하진 못할 터! 너의 생명이 고갈되어가는 게 나의눈에는 보인다!”
아르하임이 인상을 구겼다.
버티면 자신의 승리.
버티지 못하면 패배라는 걸 스스로도 인지하고 있었다.
스릉.
나는 월천을 들었다.
극심한 마력의 소모. 오랜 시간 천마신공을 사용할 순 없다.
하지만, 내 뒤에 늘어선 암흑인들은 아르하임의 심장을 원했다. 수백만에 달하는 욕망이 나를 움직였다.
* * * * *
그날, 기적을 보았다.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다.
현실이 아니라고. 현실이라면, 기적이라고.
김민식. 그는 고개를 치켜들고 그 광경을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었다.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이게······ 신의 전쟁인가?’
격렬했다. 세계가 삼켜질 듯이.
이윽고 오한성. 대라선이라 칭해지는 자.
그가 검은 날개를 꺼내자, 동시에 머리가 하얗게 물들었다.
이후의 공방은 신의 전쟁을 보는 듯했다. 아르하임은 오한성의 참격을 막아내지 못했다. 그저 꾸역꾸역 버티고, 또 버티며 한 방 역전을 꾀하고만 있었다.
하지만 신은 분노하고 있었다. 신의 분노는 세계를 들썩이게 만들었다.
꽈아아아아아앙!
“이건 거짓말이다! 이 세상에 이만한 신성이 남아있을 리가······!”
아르하임은 비명을 내질렀다.
창과 방패의 싸움.
창이 이긴 것이다.
이윽고 거대한 악령의 날개가 아르하임을 감싸버렸다.
게걸스럽게 악령들은 아르하임을 먹어치웠다. 살 한 점 남기지 않고.
동시에 날개가 사라지며, 오한성이 지상으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툭. 한 발자국을 내딛으려는 순간, 김민식의 앞을 추월하여 나가는 인영이 있었다.
‘라이라 디아블로.’
그녀가 높이 뛰어올라 추락하는 오한성을 받아냈다.
오한성은 그대로 눈을 감은 채 기절해있었다. 하지만 하얗게 새어버린 머리카락만은 그대로였다.
‘승리.’
승리······ 했다.
그제야 김민식은 현실로 돌아올 수 있었다.
손을 뻗어, 승리를 외치려고 하였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고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
위대한 별, 세계의 중심에 자리 잡은 거신이 더욱 환한 빛을 내뿜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 52. 위대한 별(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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