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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신사냥꾼-242화 (243/251)

< 51. 루의 창(7) >

돌아온 직후부터 든 의문이었다.

야차가 없다. 나찰이 없다. 왜?

대라선인 나는 분명히 우리엘 디아블로를 나와 같이 여기라고 했다. 비록 우리엘 디아블로가 죽었어도 라이라가 그 조약을 계승했어야 옳다.

라이라는 당연히 그들 또한 지구로 데려가려고 했을 것이다. 그람과 엘리스, 이그닐과 이타콰까지 데려갔으니 반드시 승리할 목적이었을 터인데.

승리를 목적으로 했다면 야차와 나찰도 지구에 있어야 했다.

‘하지만 없었지.’

오룡을 제외하면, 전무했다.

그들이 의도적으로 라이라를 따르지 않은 것이다.

아니면 자기합리화적인 변명을 내놓았던가.

그 이유가 궁금했고, 그래서 내가 찾아왔다.

“너는 누구냐.”

가장 먼저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낸 건 십이나찰 중 하나인 염마천이다. 이 목소리, 이 마력. 본 적이 있다. 두 개의 뿔에서 뿜어내는 독기는 제법 인상적인 것이었다.

“어째서 지구로 향하지 않은 거지?”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군. 문을 부수고 무사히 돌아갈 수 있을 거란 생각은 마라.”

염마천이 투기를 발산한다. 싸우고자 하는 의지.

투백(鬪魄)이라 해야 할까. 약자였다면 저 의지를 느낀 것만으로도 졸도했을 것이나 나는 가볍게 조롱해보였다.

“격의 차이도 느끼지 못하다니, 너는 야차도 나찰도 아니로구나.”

야차와 나찰. 그들은 전사다. 전사는 기본적으로 적과 자신을 재단할 줄 알아야 한다. 그리하여 필승법을 고민해야 하는 법이었다.

하지만 염마천은 그러지 않았다. 그러지 못했다. 전사의 소양이 죽어버렸기 때문이다. 이 얼마나 같잖은 일인지.

안락에 취해서인가? 이곳 던전은 나찰산과 달리 대아귀와 같은 천적이 없으니 찌들어버린 것일까.

“그 입, 찢어주지.”

염마천이 두 개의 뿔에서 독기를 뿜었다. 뿜어낸 독기로 전신을 감싸곤 그대로 돌진하여 내게 주먹을 뻗었다.

쿵!

독의 파장.

“······!!”

염마천의 이맛살이 구겨졌다.

내가 지그시 염마천의 주먹을 맞잡은 탓이다. 한 치도 밀리지 않고, 그의 독기에도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격의 차이.’

탑을 오르며 나는 강해졌다.

인류도 강해졌다. 3년간 무수히 많은 전쟁을 치러서.

하지만 야차는? 나찰은?

그들은 그냥 던전에 있었을 뿐이다.

꽈득!

그대로 팔을 꺾었다.

그리고 옆으로 엎어지기 직전에 염마천의 뿔 한쪽을 쥐고는.

빠각!

부러트렸다.

“크아아아아아악!”

염마천이 비명을 내질렀다. 뿔은 마력을 담는 저장소. 그것이 없어지는 충격은 처음 느껴봤을 것이었다.

그야 압도적인 능력치의 차이가 나니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3년간 스스로를 갈고 닦았다면 몇 수는 더 버텼을 터였다.

그대로 염마천을 바닥에 내던졌다.

쿵! 쿵! 쿠르르릉!

전각 몇 개가 박살이 나며 염마천의 몸뚱이가 벌레처럼 나뒹굴었다.

나는 가만히 팔짱을 꼈다.

반응으로 보건대 과연 그들도 나를 잊은 듯했다.

하지만 그라디아가 내게 남은 체취나 마력 따위로 나를 찾은 걸 보면, 저들에게도내가 대라선임을 증명할 만한 무언가를 보여주면 될 것이었다.

어디까지나 ‘대라선’임을 증명하는 거다. 내가 ‘오한성’인 걸 알리는 게 아니라.

‘증명하는 방법이 어렵진 않지.’

이전 대라선이 사용했던 부채가 있다. ‘파초선’이라 칭해지는 물건인데 오로지 대라선에게만 반응하는 물건이다.

그걸 한 번 휘둘러도 됐고, 내 귀 뒤에 새겨진 ‘인장’만 보여줘도 해결될 일이었다.

하지만.

‘내키지 않아.’

이들이 알아서 찾아온 게 아니라, 내 발로 걸어왔다.

원래는 반대여야 했다.

그러나 내가 왔으니, 벌을 줘야 한다.

애당초 그러기 위해 찾아온 것이었으니.

“이게 전부인가?”

“무슨 짓이냐!”

염마천을 제외한 십이나찰들이 나를 둘러쌌다.

그 밑에서 우르르 야차들이 몰려나왔다.

과연, 이 정도 숫자면 힘을 ‘소모’하기엔 적합하다.

“부디 나를 실망시키지 않기를 바라마.”

그래도 3년간 발전을 아예 안하진 않았을 것이다.

부디 그러길 바란다.

* * * * *

“쿨럭!”

구화랑은 무너진 잔해에 엎드려 피를 토했다.

뭐가 뭔지 모르겠다. 빛이 지나가면 느끼지 못하듯이 그가 옆을 지나가면 아무도 반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꾸, 꿈인가?’

둠이라고 했던가.

그 빌어먹을 데몬로드도 이처럼 자신들을 유린하진 못했다.

주먹을 뻗으면 건물이 무너지고, 발을 디디면 지면이 움푹 파인다.

모기나 파리처럼 그의 파동에 쓸려나갔다.

하지만 이보다 놀라운 건.

‘우리를 가지고 놀고 있다.’

야차와 나찰이 한데 모였다. 이 전력이라면 능히 데몬로드도 칠 수 있다. 하지만, 저 남자의 움직임만은 잡지를 못하겠다.

무엇보다 저 용.

저 암흑룡이 그에게로 향하는 모든 길을 차단했다.

야차나 나찰을 죽이진 않았지만, 불구로 만드는 정도는 간단하게 해버려서 도무지 답이 나오질 않았다.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거지?’

구화랑은 기절해 있었다. 다시 눈을 뜨니 십이나찰과 야차 대부분이 바닥에 드러누운 상태였다.

그리고 남자의 움직임도 눈에 띄게 느려져 있었다.

힘의 한계에 다다른 걸까?

“감히······ 억!”

“놈도 지쳤을······ 커헉!”

“물러나지······ 악!”

모두가 말을 끝맺기도 전에 쓰러졌다. 주먹만이 아니라 그는 병장술에도 조예가 깊은 듯 보였다. 야차나 나찰의 무기를 빼앗아 쓰기도 했던 것이다.

‘집이 난장판이 됐군.’

한 번 엎어지길 바랐지만, 말이 씨가 되어 바로 시행이 될 줄은 상상조차 못했다.

이윽고 절반을 한참 넘는 숫자가 바닥에 눕자, 그에 대한 공격도 멈췄다.

모두가 느낀 것이다.

제대로 했으면 모두 작살이 났을 것이란 걸.

남자가 분명히 봐주고 있다는 걸······.

뚜벅! 뚜벅!

남자는 구화랑의 앞으로 걸어왔다.

구화랑은 전신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 대체, 당신은 누구입니까? 누군데 우리를 이렇게 내모는 겁니까?”

“어째서 조약을 어겼지?”

“무슨 조약 말입니까?”

“우리엘 디아블로와 내가 맺은 조약을.”

우리엘 디아블로와 맺은 조약?

그것은 그를 대라선처럼 여기며 따르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엘 디아블로는 죽었다. 자연스럽게 조약도 해제되었다는 게 대부분 나찰들이 내뱉는 정설이다.

“그는 죽었습니다.”

“라이라 디아블로는 살아있을 텐데.”

“그건······ 그녀에게 ‘월천’을 주었습니다. 그녀가 저희들의 임시 대라선입니다.”

“그런데 왜 너희는 지구가 아닌 이곳 던전에 있는 거지?”

나찰들은 우리엘 디아블로가 생을 달리했던 장소를 샅샅이 뒤졌다.

그리하여 ‘월천’을 찾았고, 그것을 라이라에게 주었다.

그럼에도 왜 던전에 있는 것인가.

간단하다. 따라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우리가 선택하도록 했습니다. 나찰들 중 과반수의 표에 따라 우리는 이곳에 남기로 결정했습니다. 하지만, 조약을 잊은 건······ 그런데 그게 당신이랑 관계가 있습니까?”

“관계가 없어 보이나?”

없어 보인다.

하지만, 구화랑은 묘한 향수를 느꼈다.

왜일까. 왜 이렇게 익숙해 보이는 걸까.

남자가 손을 뻗어 자신의 귀를 젖혔다.

그러자 귀 뒤에 새겨진 검은 인장에서 빛이 발하기 시작했다.

빛이 발하자, 모든 야차와 나찰들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전사의 보석’이라 칭해지는 그들의 심장이 말이다.

이런 경우는 한 가지 뿐이었다.

있을 수 없고, 있어선 안 되는 일.

“대······ 라······ 선?”

“내가 너희들의 대라선이다.”

구화랑을 비롯한 모두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하지만, 그들도 이상하다 생각하곤 있었다.

왜 대라선의 얼굴이나 이름이 떠오르지 않는 건지.

그래서 모두가 두려움에 떨었다. 누군가가 자신의 머릿속을 건드린 줄 알고 더욱 소극적으로 대처할 수밖에 없었다.

헌데······ 나타난 것이다.

진짜 대라선이!

“대라선을 뵙습니다.”

가장 먼저 상황을 파악한 구화랑이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그들의 조약을 알고 있으면서 이만한 무력을 가진 자. 하물며 대라선의 인장까지 빛을 발했으니 의심할 여지가 없다.

“대라선을 뵙습니다.”

하나, 둘, 무릎을 꿇기 시작하는 야차들이 나타났다.

마치 파도의 물결처럼 조금씩 번져가면서 그들이 예를 다했다.

이윽고 모두가 무릎을 꿇자······ 그의 전신에서 피어난 불길이 모두에게 전해졌다.

“이름을 알려주십시오. 저희는 모두 대라선에 대한 걸 잊었습니다. 백 번 죽어 마땅한 일입니다. 하지만 부디,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시길 바랍니다.”

구화랑은 필사적이었다. 대라선에 대한 걸 잊다니. 미쳐도 단단히 미쳤다.

하지만 알아야 한다. 이 집안을 제대로 엎어버릴 마지막 기회였다.

그가 잠시 주저했다. 의아함을 느꼈으나, 이내 그가 무언가를 다짐한 듯 입을 열었다.

“오한성.”

오한성. 이번에는 잊지 말기를.

구화랑은 두고두고 다짐했다.

* * * * *

힘의 ‘소모’를 끝낸 뒤 나는 계속해서 허기진 상태를 유지했다. 마력을 단절시키고 육체를 한계까지 몰아붙여 극한의 상황으로 몰아넣었다.

자연스럽게 ‘폭식’이 발동되자, 나는 야차와 나찰들의 곳간을 모조리 털어먹었다.먹고, 먹고, 또 먹으며 게걸스럽게 식욕을 뽐낸 것이다.

한 번 발동한 식욕을 이겨내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곳간을 비운 뒤에는 나는 홀로 동굴에 들어가 명상에 잠겼다.

입에서 침이 질질 흐르고 정신이 까마득해졌지만 폭식에 굴하진 않았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을까.

[‘폭식’을 이겨냈습니다.]

[체력이 1 올랐습니다.]

[잠재력 한계치가 10 증가합니다.]

내가 가진 ‘문’을 통해 각성자들의 괴로움이 전해져왔다. 그들의 성장도 함께 느끼게 되었다.

동굴에서 나온 나는 모든 야차와 나찰들을 이끌고 다시금 지구로 향했다.

그리고 고민했다.

나태와 색욕.

이 중에 무엇을 먼저 달성할지.

‘색욕.’

고민은 짧았다.

모두가 날 잊었다.

잊었다는 건, 다시 말해 나는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영웅도, 악당도, 지나가는 소시민조차도.

마음만 먹으면 모든 걸 할 수 있다. 야차와 나찰들을 데려온 뒤 가장 먼저 반응한 건 라이라였다.

“너희는 던전에 남아있는다고 하지 않았느냐?”

“대라선께서 저희를 이끌고 이곳으로 오셨습니다.”

“대라선?”

“이분이 저희의 대라선이십니다. 라이라께서도 잊고 계셨습니까?”

화친은 구화랑이 담당했다.

구화랑이 나를 소개하자, 라이라는 잠시 당황한 기색을 흩뿌렸다.

하지만 잠시뿐이었다.

이내 그녀가 나를 향해 검을 넘겼다.

“······ 월천이다. 본래 대라선의 것이었으니 넘겨주는 게 당연한 거겠지.”

월천을 넘겨받자 검신이 미미하게 떨렸다.

웃기는 일이지만, 월천만은 나를 기억하고 있던 모양이다.

라이라. 그녀는 여전히 나를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곤란한 일이었다.

지금부터 칠대죄악 ‘색욕’을 전파하려면 나 역시 그와 비슷한 상태가 되어야만 했다. 색욕의 화신이라도 되지 않는 한 발동하지 않을 걸 알기 때문이다.

‘색욕의 화신이라니.’

막상 그 단어를 떠올리고도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색욕. 그야 나도 남자다. 없다면 거짓이다.

과거 최후의 영웅이었을 땐, 실제로 오는 여자 마다하지 않았던 적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상한 일이로군. 대라선에 관한 기억이 없다니. 헌데 유서희가 데려왔다고 한 남자가 대라선이었을 줄이야······.”

“재차 인사하지.”

심호흡을 한다.

그래도, 그럼에도, 이 악수는 나와 라이라의 재접점이었다.

돌아온 이후 나는 라이라 앞에 다가간 적이 없었다.

의도적으로 그녀를 피했다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마주할 자신이 없어서.

나를 정면에서 기억하지 못하면 숨이 멎을까봐.

하지만······ 언제까지 피할 수는 없는 법.

과감하게 손을 내밀었다.

“함께 싸워준다면 나로서도 환영하는······ 음?”

라이라가 내 손을 맞잡았다.

그러자.

[강렬한 ‘색욕’이 생성되었습니다.]

[천지인(天地人)은 모든 것과 통하는 길과 같습니다. 강제적으로 ‘색욕상태’에 돌입합니다.]

미친!

< 51. 루의 창(7) > 끝

ⓒ 온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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