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신사냥꾼-241화 (242/251)

< 51. 루의 창(6) >

마지막 경매에서 나는 지저의 용 한 마리를 구매했다.

그라디아.

‘수호자’라 불리는 용이며, 모든 용을 통틀어 최강으로 손꼽아지는 존재!

초월자이며 데몬로드조차 발 아래에 두는 막강한 용이다.

그리고 그라디아의 자식, 암흑룡은 멸제의 카르페디엠을 죽인 뒤 심장 등을 섭취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일까.

안 그래도 그라디아가 어디에 있는지 궁금했는데, 직접 나를 찾아올 줄이야.

쿠아아아아앙!

암흑의 불길을 쏟아내며 지상을 위협하는 그라디아는 누구에게도 범접치 못할 위엄을 뽐내고 있었다.

그라디아의 눈이 새빨갛게 변한 상태였는데 누가 봐도 정상은 아니었다. 폭주기관차처럼 폭주하며 모든 걸 숯으로 만들어버릴 작정인 것 같았다.

-오······ 내 아들······!

하지만, 그러한 상태도 나를 보자 달라졌다.

눈은 여전히 붉었다. 한 마디로 광란상태. 극에 다다른 분노와 애착이 그라디아의정신을 좀먹은 것이다.

그라디아는 사뿐히 나의 옆으로 내려앉았다.

“워어!”

“피해!”

커다란 빌딩만 한 몸체인 탓에 지상에서 경계하던 사람들이 급히 물러났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라디아를 바라봤다.

-살아있었구나. 살아 있었어! 암흑인들을 모조리 쓸어버릴 작정이었다만, 그들이 보이지 않아 걱정했다.

착각.

완연한 착각이다.

하지만 이러한 착각이 나쁜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이런 식으로라도 나를 ‘기억’하고 있다는 게 더욱 놀라웠다.

‘나는 완전히 지워진 게 아니었던가?’

그저 내 몸에서 풍기는 마력이나 냄새 따위로 알아본 것이겠지만, 그래도 믿기지 않았다. 게다가······.

퉁! 퉁! 퉁!

‘분노가······.’

7대 죄악.

그중 검은 꽃의 형태를 한 반지, ‘분노’가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내가 가지고 있는 7대 죄악은 4개. 폭식, 나태, 색욕, 분노다.

분노는 마지막 경매에서 구한 것이며 나의 ‘순수마력’을 이용해 나를 ‘분노상태’로만들었다. 나머지 죄악들도 이름에 걸맞은 쓰임새가 있었다.

헌데, 이러한 현상은 처음 보았다.

‘내가 아닌 그라디아에게 반응하고 있다.’

그라디아는 극도의 분노상태였다. 자식을 잃고 암흑인들에게 잡혀갔기 때문일까. 심지어 자식이라 착각한 나를 본 지금도 그 상태가 풀리지 않았다.

이윽고 반지에서 붉은 기류가 흘러나와 나를, 그리고 그라디아를 동시에 감싸 안았다.

[강대한 존재의 강렬한 ‘분노’를 읽었습니다.]

[천지인(天地人)은 모든 것과 통하는 길과 같습니다. 강제적으로 ‘분노상태’에 돌입합니다.]

‘아······.’

순간 나는 ‘길’이 되었다.

동시에 이것들이 왜 ‘7대 죄악’이라 일컬어지는지 알게 됐다.

절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누구도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성질이 내가가진 직업, ‘천지인’과 합쳐지며 극대화 되었다.

왜 여태껏 이런 현상이 일어나지 않았었는가.

‘탑을 오르며 변한 건 능력치만이 아니다.’

무언가가 더 변했다. ‘위대한 별’에게서 내가 무언가를 더 가져온 것 같다. 위대한별 역시 ‘모든 걸 담는 방주’의 역할을 했으니, 나의 성질과 잘 맞는다.

또한 내가 탑에 가지고 간 이 죄악들이 내 성질에 변화를 더한 게 분명했다.

“뭐, 뭐야?”

“아아아아!”

“화가 나! 화가······!”

“씨발! 안 그래도 너 마음에 안 들었어!”

하지만 나와 그라디에게서 비롯된 변화는 모두에게 영향을 끼쳤다.

인간진영의 모든 사람들이 서로를 쳐다봤다. 1%의 이성과 99%의 분노. 주먹을 쥐고, 무기를 꺼내며, 이윽고 서로 싸우기 시작했다.

-내 아들! 살아있어서 기쁘기 그지없구나!

그라디아를 쳐다봤다.

한계에 다다른 분노가 뇌를 통째로 태워버린 모양이었다.

하기야 처음 봤을 때도 정상적인 상태는 아니었지만.

“나는 네 아들이 아니다.”

진실은 때론 잔혹한 것이다.

주먹을 쥐고, 선빵을 날렸다.

러시아에서 시작된 ‘이상 현상’이 점차 퍼져나가며 세계전역에 전염병처럼 번졌다. 정확하게는 민간인을 제외한 모든 ‘각성자’에 한정하여 말이다.

그리고 나는 그들 모두의 분노를 느꼈다. 느낄 수 있었다. 설명하기 어렵지만 지구에 남은 모든 각성자들의 분노와 내가 통한 느낌이었다.

더욱 놀라운 건 내가 분노를 가라앉히자 모든 각성자들의 분노도 점차 낮아졌다는 점이다.

나와 각성자들이 통한다.

그것도 세계적으로.

‘위대한 별은 본래 모든 각성자들과 이어져있지.’

그래서 최후의 전쟁이 끝나면 모든 각성자들은 허물을 남긴 채 ‘위대한 별’로 영혼을 헌납하게 되어있었다. 이것이 세계의 진실이었고, 그것을 타파하고자 고군분투하고 있었는데.

내가 그 통로를 공유하게 된 모양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하. 내가 모든 각성자들에게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고?’

단순히 감정만이 아니다.

내 ‘분노’가 각성자들에게 통하자, 각성자들도 변화를 맞이했다.

나라는 ‘통로’를 거치며 그들의 영혼이 조금 더 성숙해지게 된 것이다. 영혼의 성숙함은 잠재력으로도 직결된다. 잠재력이 늘어나고, 특히 분노가 관여하는 ‘힘’이 크게 늘었다.

“힘이 6이나 올랐어.”

“난 9······ 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

“갑자기 화가 나더니 힘이랑 잠재력이 올랐다고!”

사상 초유의 현상.

희생이 없지는 않았지만, 다행이 분노를 빠르게 가라앉힐 수 있어서 피해가 막대하진 않았다. 남은 사람들은 갑작스럽게 늘어난 능력치와 잠재력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그럼 나머지 죄악들도?’

폭식, 나태, 색욕.

내겐 남은 죄악이 세 개나 있었다.

문제는 발동조건이다. 분노는 그라디아의 분노에 의해 발현되었다.

그렇다면 나머지도 비슷할 것이다.

‘이런 식으로 인류의 성장에 기여하게 될 줄이야.’

나 혼자 모든 로드와 괴물들을 처리할 순 없다. 혼자서 다 죽일 수 있었다면 왜 데몬로드들이 수많은 부하들을 둬가며 자신의 성을 만들겠는가.

인류의 성장은 곧 그들과의 경쟁력에서 우위를 가져갈 수 있다는 것을 뜻했다. 내게도 나쁜 일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바라 마지않던 일이다.

지금 인류와 로드들의 균형은 겨우 맞춰지고 있었다.

하지만 인류는 한 번만 실수해도 끝장이다. 아슬아슬한 외줄타기.

내가 지구 모든 곳을 커버할 순 없으니 인류의 성장을 이끌어내야 한다.

‘내 힘도 미미하지만 올랐고.’

1.

적다면 적은 수치지만, 이미 146에 다다르던 수치가 147이 된 것이다.

무엇보다 잠재력이 올랐다.

잠재력!

560이 내게 주어진 한계치였다. 그마저도 탑을 오르며 모두 채웠다. 더 이상 순수능력치만 가지고 성장할 길이 없었는데, 그 길이 열린 셈이다.

‘잠재력은 10이 올랐다.’

부르르!

더 강해질 수 있다. 더, 더, 더 위를 볼 수 있다.

7개의 모든 숙제를 끝내면 70이 오른다는 말.

그 정도면······ 이 전쟁을 끝낼 수 있을 것이다.

‘폭식.’

다음차례로 그나마 내게 익숙한 죄악을 골랐다.

폭식은 내가 가장 많이 사용한 죄악. 장갑형태로 만들어졌으나 그 안엔 광활한 공간이 있었다.

수많은 것을 먹고 다시 뱉어낼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었는데, 이러한 폭식의 특성이 ‘문’을 통해 모든 각성자들에게 전해지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

‘그라디아의 분노에 반응했다지만, 그것이 굳이 제 3자일 필요는 없을 터.’

요는 내가 분노하고, 내가 폭식을 행하면 되는 일이다.

문제는 ‘극에 달한 폭식’의 상황을 만들어야 한다는 건데.

너무나도 허기가 져서 나는 나 자신을 잡아먹을 뻔한 적이 있었다. 그때 한 번 폭식의 상태가 발현됐다. 말인 즉, ‘극도의 허기’상태를 만들 필요가 있다는 거다.

‘힘이 부족한 상태를 만들려면 소모를 해야 하지.’

위험하지만, 할만하다. 가장 중요한 건 어디까지나 ‘나의 상태’이므로. 내가 극복한다면 모두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자······ 그렇다면 내가 가진 힘을 어디서 ‘소모’할 것인가.

내 몸은 일 년 내내 굶어도 물만 있으면 허기짐을 느끼지 않는 수준이었다. 억지로 쥐어짜낼 필요가 있었다.

‘다음 적이 쳐들어오기 전까지.’

내가 가진 모든 죄악들. 그 감정을 ‘문’을 통해 각성자에게 전하겠다.

“그라디아.”

가만히 그라디아를 불렀다.

본래라면 이타콰나 이그닐을 불렀을 테지만······ 지금은 참아야할 때.

-오오, 내 아들아. 나를 부르느냐?

지저의, 지고의 용이 이 정도로 맛이 갔을 줄은 몰랐다.

한참을 얻어맞고도 이 모양이다. 도리어 “내 아들이 이 정도로 성장했구나!”하며좋아했다. 덕분에 일은 더 편해졌지만.

나는 그라디아의 위에 올라타, 하늘을 가르며 ‘문’을 넘었다.

심연.

그곳에 길이 있을 지어니.

* * * * *

십이나찰.

그들은 현재 이곳 ‘야차국’의 결정권자다.

야차들은 던전을 모두 궤멸시키고, 그곳의 생태계에 뿌리를 내리며 던전을 자신의 나라로 만들었다.

하지만 ‘대라선’이 사라져서 그들을 이끌 지도자가 없었다. 하여, 십이나찰은 모든 문을 틀어막고 온전히 내실을 다지는 데에만 힘썼다.

“오룡의 소식은 들려오지 않는가?”

거대한 목조로 이루어진 회의실.

열 두 명의 나찰들이 모여앉아 있었다.

그중에는 이제 막 나찰의 자리에 오른 자도 있었다.

본래라면 ‘오룡’들이 차지했어야할 자리지만, 오룡들은 그 자리를 마다하고 지구로 갔다.

염마천(閻魔天)이 말하자 수천(水天)이 받았다.

“그 배신자들에 대해선 별로 듣고 싶지 않군.”

“배신자라니. 말이 너무 심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새로운 화천(火天)에 등극한 구화랑이 인상을 찌푸렸다.

구화린의 오빠인 구화랑은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아이들이 지구로 향한 건 우리가 우리엘 디아블로와 맺은 ‘조약’ 때문입니다. 그 아이들 덕분에 우리는 우리의 터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모두 잊은 건 아니겠죠?”

“하지만 우리엘 디아블로는 죽었다! 그가 죽으며 조약은 사라졌어!”

“맞아. 우리까지 그 ‘최후의 전쟁’에 끼어들 필요는 없어.”

“애당초 그들이 시작한 전쟁이다. 우리도 그 괴물들······ 둠으로 인해 터를 잃었다.”

십이나찰들 대다수가 반발했다.

우리엘 디아블로가 죽었으니 그와 맺은 조약은 사라졌다는 거다.

하지만 엄연히 그의 자식인 라이라 디아블로가 살아있었다. 본래라면 그녀를 따라 모두 지구로 향했어야 했다. 화천, 구화랑은 상을 내려치며 버럭 화를 냈다.

“오룡은 우리의 마지막 자존심입니다! 그 아이들이 나찰의 자격을 포기하자 더 좋아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이제 와서 배신자라니!”

“그러는 그대도 화천의 자리를 잇지 않았는가?”

“저라도 여기 없으면 누가 그 아이들을 돌봅니까! 저라도 표를 던져야 얼토당토않은 일들을 막을 수 있는 데요!”

“화천도 고집이 세군.”

“구화린 때문이겠지. 유일한 여동생이니.”

애당초 십이나찰은 의견을 내는 자들이 아니다.

하지만 대라선이 없어져서 평생 하지도 않던 일들을 하고 있는 것이다.

대라선. 대라선이 필요하다.

대체 어디로 간 걸까?

두 개의 뿔을 가진 염마천이 말했다.

“어차피 살아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그들이 말하는 ‘최후의 전쟁’은 우리와 상관 없는 것이야. 우리는 우리끼리 살아가면 된다. 여태까지 그래왔지 않나?”

“그래. 이곳 던전에 있으면 입고, 먹고, 머무는 모든 게 해결된다. 굳이 위험을 자처할 필요는······.”

“야차의 혼이 모두 죽었군요. 죽었어요. 통탄할 노릇입니다!”

화천이 대놓고 혀를 찼다.

야차. 불굴의 전사들. 그들이 주저하고 있었다.

그 두려운 대아귀들을 상대로도 잘만 싸우던 그들이, 왜 이런 상태가 된 걸까.

대라선이 없어서. 그리고 ‘둠’의 여파가 남아있어서다.

구화랑이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본래라면 ‘둠’을 죽여야 하는 것도 우리였습니다! 하지만 우리엘 디아블로가 죽였죠! 그와 함께 죽었다고요! 우리의 복수를 대신해준 자가 죽었다고 약속마저 내팽개치다니, 창피하지 않습니까? 저는 창피해 죽겠습니다!”

“크흠······.”

“말이 너무 심하군.”

그래도 고칠 생각을 안 한다.

하지만 뜻에 동조해줄 나찰이 몇 없다. 모두가 저들과 같은 의견인 건 아니지만 대세와 거리가 멀었다. 과반수의 표를 얻지 못하면 아무 것도 못한다.

‘이 망할 집구석, 확 엎어버려야······.’

구화랑이 이를 갈며 주먹을 부들부들 떨 때였다.

꽈아아아아아아앙-!

거대한 폭음.

십이나찰 모두가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동시에, 성의 외곽을 부숴버린 거대한 용을 보았다.

그 용 위에 탄 남자를 보았다.

남자는 말했다. 그의 목소리가, 성의 내부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용언. 용의 말이라 칭해지는 절대적인 언어로!

“너희, 왜 이곳에 처박혀 있는 것이냐.”

그는 무척이나 화가 나 보였다.

< 51. 루의 창(6) > 끝

ⓒ 온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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