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신사냥꾼-238화 (239/251)

< 51. 루의 창(3) >

도시가 파괴됐다.

폭룡의 바하무트가 내뱉은 숨결은 모든 걸 녹이고 없앴다.

어비스의 샤라카는 어깨를 으쓱했다.

“쉽군.”

인간들의 반격?

그러할 시간도 주지 않았다.

압도적인 살육. ‘격’이 다름을 보여주려면 무릇 이래야 한다.

‘고작 이 정도의 인간들에게 당하다니, 아넬로우. 너는 우리의 수치다.’

샤라카는 비웃음을 흩뿌리며 고개를 돌렸다.

몇 개의 도시와 인간들을 뿌리 뽑았으니 임무는 달성한 셈이다.

“가자.”

카아아아아아아아아악-!

폭룡의 바하무트가 괴성을 내질렀다. 듣는 이로 하여금 본능적으로 전율이 일게 만드는 포효. 샤카라조차 오금이 떨릴 정도였다.

이후 샤라카와 바하무트가 빛과 같은 속도로 지상에서 멀어졌다. 귀환하여 성공적인 임무의 달성을 제로에게 알리려는 것이다.

“······ 갔지?”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지하 깊숙한 곳에서 사람들이 하나, 둘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정말 속았네.”

“푸하! 홀로그램이 진짜 통하는구나.”

그들의 중심으로 김민식 총사령관이 걸어 나왔다.

그는 아예 궤멸된 지상 도시의 모습을 보곤, 고개를 끄덕였다.

‘성공했군.’

유사도시 계획!

지하 깊숙한 곳에 만들어둔 도시를 숨겨두고, 그대로 기계를 통해 지하의 도시를 지상으로 표출시킨 뒤, 홀로그램 등을 이용해 진짜 사람이 살고 있는 도시인 것처럼보이게 하는계획이었다.

적들은 도시와 가짜 사람들을 보고 공격하거나 혼란해하며 착각하게 만드는 게 계획의 주요 내용인데, 샤라카가 거기에 낚여버린 것이다.

이제 샤라카와 제로는 한국이 쑥대밭이 되었다 믿어 의심치 않으리라.

‘거기서 시작한다.’

우리 모두가 죽었다고 생각할 때.

더 이상 저항할 인류가 남아있지 않다고 생각할 때.

인류는 천천히 그들의 목을 조여 갈 것이었다.

“총사령관님. 바로 다음 계획으로 넘어가시겠습니까?”

“그래. 아넬로우의 사망소식을 세계에 알려라. 더불어 남은 모든 인류의 힘을 이곳에 집결시킨다. ······ 반격의 순간이다.”

갑자기 나타난 데몬로드와 수많은 괴물들로 인해, 인류는 아직 힘을 제대로 합치지 못했다. 인류가 뭉치는 걸 괴물들도 달갑게 생각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이 그들의 ‘눈 밖’에 나게 되었으니, 이보다 좋은 집결지는 없으리라.

‘지켜봐라. 이번 계획은 온전히 나와 인류의 힘만으로 이뤄 보일 테니.’

아넬로우를 압살한 이후 ‘그’로 보이던 빛의 잔영은 이내 사라졌다. 아마도 다시금 거신의 품으로 돌아간 것이겠지.

하지만 녀석이 자신들의 위험에 반응을 했다. 그렇다는 건 다시 녀석이 나타날 가능성이 있다는 거다.

그러다가, 김민식은 이내 당혹함이 가득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런데 녀석의 이름이······ 뭐였지? 아니, 잠깐······.’

무언가 이상했다.

‘그’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

이름뿐만이 아니다.

과거 ‘그’의 행적들이, 머릿속에서 조금씩 사라지고 있었다.

‘뭔가가, 틀어졌다.’

김민식의 본능이 외치고 있었다.

잊어선 안 될 것들이 잊히고 있다고.

평범한 현상은 아니다.

“사령관님? 어딜 가십니까?”

부하의 말을 무시하고 김민식은 다시금 지하로 향했다.

라이라에게, 그람에게, 엘리스에게 물었지만, ‘그’를 제대로 기억하는 자가 없엇다.

‘잊히고 있다.’

‘그’에 관한 기억들이, 잊히는 중이었다.

김민식은 자신의 보금자리에서 종이와 펜을 꺼냈다.

‘잊어선 안 되는 것들. 녀석에 관한 기억들······ 남겨둬야 해.’

기억이 사라지고 있었다. 김민식은 시간을 돌아 회귀했기에 이와 같은 느낌을 잘 안다.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사라지는 것 말이다.

그러니 남겨야 한다. 녀석이 있었다는 걸. 존재했다는 걸.

펜을 움직였다. 종이에 글자를 적었다.

「이것은 무엇보다 중요한 기록이다.」

「나의 절친한 친구에 관한 기억들.」

「결코 잊지 말기를.」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만은 잊어선 안 되었기에.

* * * * *

6층에선 하늘까지 닿는 거인들과 힘을 겨뤘다.

7층에선 토르와 망치를 주고받았으며, 8층에선 운명의 여신들에게 나에게 걸린 ‘망각의 저주’에 관해 들었다.

-그 망각은 결코 풀리지 않습니다.

-모두에게 잊히고, 스러지는.

-가장 혹독한 형벌.

그것이 ‘별’을 얻는 방법이라고 했다. ‘위대한 별’을 얻으려면 스스로 망각의 늪에 발을 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그러하겠다고 했다. 그리하여 내 소중한 것들을 지키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9층과 10층.

비로소 ‘그들’과 만났다.

“현장.”

그리고.

“천마.”

그들의 눈이 내게로 닿는 순간.

쿵! 쿵! 쿵! 쿵!

심장이 크게 울었다.

* * * * *

“공격- 하라!!”

김민식의 전두지휘 아래, 전투가 시작됐다.

북한을 시작으로 중국의 길림과 하얼빈까지 단번에 뚫어내는 대전투.

이곳에 로드들은 없지만 각 지역마다 그곳을 강력한 괴물이 존재했다.

쿠에에에엑!

레비아탄이라 불리는 거대한 지저의 괴물이 땅을 뚫고 튀어나와 사람들을 습격했다. 그 길이만 수백m에 다다를 정도로 어지간한 용보다 커다란 뱀.

그 레비아탄을 필두로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괴물들이 물밀 듯이 밀려들고 있었다.

“싸워라! 멈추지 마라! 앞만 보고 돌격하라! 승리는 우리의 것이다!”

하지만 인간진영의 기세도 만만치 않았다.

저 괴물들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던 건 아넬로우다.

그리고 지금, 흡혈왕 아넬로우는 죽었다.

사령부가 없으니 숫자만 많은 오합지졸과 같았다.

아넬로우를 죽이고 인류의 기세는 하늘을 찌를 정도였다.

“으아아아아!!!”

“죽어! 죽어어어어-!”

“개새끼들! 개 같은 새끼들!”

하늘에선 마법이 빗발치고,

지상에선 피가 난무했다.

인류연합군은 모두 피부의 색깔도, 성별도 달랐지만 마음만은 하나가 되어 적들을 밀어붙이고 있었다.

전투, 전투, 전투.

그야말로 끊임없는 전투의 향연.

죽어야만 멈추는 핏빛 축제였다.

파죽지세.

인간연합군은 순식간에 하얼빈까지의 국토를 확보했다.

이 위는 이제 러시아다.

러시아. 최강군부, 진정한 실세라 일컬어지는 시리아가 그곳에 있었다.

“오랜만이군요.”

시리아는 무척이나 피로가 가득한 안색으로 그들을 맞이해주었다.

러시아도 쑥대밭이 되었지만 아직도 ‘로드’를 견제하며 전쟁을 벌이고 있는 나라 중 하나였다.

“오랜만이군.”

김민식이 대답했다.

불과 2주일 정도의 시간 만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강력한 적들이 알아차리기 전에, 최대한 속도를 올린 것이다.

시리아는 김민식과 그의 뒤에 선 전사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시겠지만, 제대로 된 보급을 기대하진 마세요. 로드 ‘진격의 라우페’와의 전쟁통에 저희도 비축한 것들이 별로 없답니다.”

“알고 있다. 우리가 이곳에 온 것도 그 라우페를 죽이기 위해서니깐.”

“······ 가능할까요?”

시리아는 부정적이었다. 하지만 김민식은 자신의 가슴을 두드렸다.

“우리는 흡혈왕 아넬로우를 죽였다. 놈들도 심장이 터지면 죽는다.”

“정확히는 누가, 아넬로우를 죽였죠?”

“우리 모두가 힘을 합쳐서 죽인 거다. 원한다면 놈의 시체를 보여주지.”

아넬로우의 죽음은 세계의 지도부들이라면 이제 모두 안다.

한국에서 김민식 총사령관의 지휘 아래, 그가 죽었다는 걸 말이다.

그거면 됐다. 어쨌거나 아넬로우가 죽은 건 사실이니까.

“그럴 필요 없어요.”

시리아는 고개를 젓고는 손을 뻗었다.

“우리 러시아는 그대들을 환영합니다.”

잠시의 휴식.

사람들은 자리에 주저앉아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시름을 지웠다.

“캬-! 진짜 대단하다니깐, 이 녀석?”

“맞아.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휙휙 날아다녀?”

“오우거 목을 무슨 무처럼 썰어버리는데. 휘유~”

모닥불을 피우고 그 주변에 모여 앉은 사람들이 한 청년을 바라보며 득달같이 칭찬을 쏟아부었다.

청년은 조용히 눈을 감고 있을 뿐이었다.

그때 반쯤 탈모가 온 남자가 청년에게 다가갔다.

“얼굴도 이 정도면 반반하고. 능력도 좋으니, 어때? 전쟁 끝나면 내 딸이랑 결혼해보는 게?”

“예끼, 이 사람아. 결혼이 무슨 애들 장난이야? 차라리 내 친척 조카 중에 진짜 예쁜 애가 한 명 있는데······.”

“워워! 결혼이 얼굴 파먹고 하는 겁니까? 중요한 건 이 속이지, 속. 현모양처! 내 사위는 손에 물 한 방울 묻힐 필요가 없어. 그러니까 내 여동생이 나이가 좀 있기는 한데 정말 애는 착하거든?”

사람들이 앞 다투어 청년 앞으로 모여들어 중매쟁이가 되었다.

하지만 청년은 가만히 고개를 저어보였다.

“이미 결혼했습니다.”

“······ 했어? 결혼을?”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모두가 벙 찐 표정이 되었을 때, 청년은 계속해서 말했다.

“애도 둘 있어요.”

“그렇게 나이가 많아보이진 않는데?”

“그 사이에 애가 둘이나 있다고? 워메······.”

“사진 같은 게 있는가?”

청년은 고개를 저었다.

그제야 사람들이 피식 웃어보였다.

“저거 순 구라 아니여? 그러지 말고 우리 애들 사진이나 한 번 봐봐.”

“맞아. 전자계집 말고 현실을 봐야지 않겠어?”

“눈 뜨면 정말 잘 생겼을 거 같은데. 안타깝구먼.”

청년은 여태껏 한 번도 눈을 뜬 적이 없었다.

전쟁 중에도 말이다.

“그런데 청년, 이름이 뭐였더라?”

청년은 눈을 감은 상태 그대로 말했다.

“오한성입니다.”

* * * * *

돌아왔다.

현장과 천마를 만나고, 나는 다시금 돌아올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내가 아는 현장과 천마가 아니었다.

그들은 폭주하고 있었다. 나는 마지막 층을 돌파하지 못했다.

8층, 운명의 여신들은 그들을 돌리려면 한 가지 방법밖에 없다고 말했다.

-모든 로드들을 죽이세요.

-그러면 ‘별’이 가득 차 그들이 깨어날 겁니다.

-그리고 그 때에 그대가 원하는 바를 이룰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운명의 세 여신이 내놓은 대답.

모든 로드들을 죽이라는 것.

원래 그럴 생각이었다. 그들을 깨우고 ‘위대한 별’을 탈취하는 게 나의 목표였다.

-하지만 명심하시길.

-그대에게 걸린 ‘금제’는 생각보다 강력한 것.

-망각과 혼란. 누구도 그대를 알아볼 수 없으며, 그대 또한 상대를 쉬이 특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반드시 아는 척을 해선 안 될 것이다. 그 순간 그대는 다시 떨어질 터이니.

탑을 오르는 자에게 부여된 금제.

사람들은 나를 기억 못하고, 나 역시 사람들을 특정하지 못한다.

그렇다. 나는 지금 누가 말을 걸어도 그들을 특정할 수 없다. 그 사람이 그 사람 같고, 그 목소리가 그 목소리 같다.

착각하기 쉬운 상태라는 것이다.

적조차 쉬이 구분이 가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인류연합군에 일단 합류하기로 했다.

실수해서 내가 지켜야할 것들을 없애면 안 되니까.

“아! xxx가 오셨다!”

“뭐? xxx가 여길 왜?”

“우리를 격려하러 오셨나봐! 뒤에 고기가 가득해!”

“저 차가운 분이 웬일이래?”

주변 사람들이 환호를 내질렀다.

누구지?

누가 온 거지?

답답했다. 갈증이 났다.

하지만 나는 상대의 이름도, 제대로 된 목소리도 들을 수가 없다.

눈을 감고 다니는 이유는 시력이 가장 큰 착각을 주기 때문이다.

“모두 고생 많았다. 많이 먹고 많이 싸우도록.”

“······.”

딱히 격려를 하는 말은 아닌 듯싶었다.

하지만 누구도 뭐라 하지 못했다. 겁에 질린 듯. 약간 두려워하는 느낌이었다.

뚜벅. 뚜벅.

그는 주변을 돌다가, 잠시 내 앞에 섰다.

“잘 싸우더군.”

단 한 마디.

그리고 그는 다시 떠나갔다.

“와, xxx님이 남 칭찬하는 거 처음 들어.”

“너 대단한데?”

가슴이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방금 그분, 누굽니까?”

“그걸 몰라서 물어?”

“xxx님이잖아.”

“히야. 어디 시골에 박혀 있다가 나온 거야?”

젠장. 구분이 가지 않는다.

하지만 왜인지 그리운 느낌이 들었다.

적어도 내 앞에 맴돈 향기는 매우 익숙한 것이었다.

‘라이라.’

라이라.

분명히, 방금 내 앞에 섰던 자는 라이라였다.

다른 사람은 착각해도 라이라만은 착각할 리가 없었다.

금제든, 저주이든, 그 무엇에 걸렸더라도.

하지만, 라이라는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망각의 저주.’

현기증이 돌았다. 말을 하고, 껴안고 싶었다.

눈을 떠서 확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그녀를 확인한 순간 나 스스로를 절제할 수 없을 것 같아서.

그러면 안 되는 거니깐.

‘너를 지키마.’

주먹이 으스러지도록 꽉, 쥐었다.

반드시. 반드시 그럴 것이다.

* * * * *

라이라가 잠시 멈춰섰다.

방금 그 남자.

전쟁의 중간부터 갑자기 보이기 시작한 그 남자.

그 남자가 계속 눈에 밟힌다.

‘누구지?’

하지만, 누군지 알 수가 없다.

이런 느낌은 처음이었다.

‘이름이라도 물어볼 걸 그랬나.’

라이라는 고개를 저었다. 인간 중에 자신에게 이런 느낌을 주는 자는 없었다. 그저 필요에 의해 인간들을 돕고 있을 뿐이었으므로.

‘나는 왜 인간들을 돕고 있는 거지?’

어느 순간부터 들었던 의문.

하지만 일단 접어두었다.

그보단 이 전쟁에서 승리해야 한다는 생각이 더욱 강하게 들었기에.

라이라는 다시금 전선으로 나아갔다.

이제, 뒤를 돌아볼 시간 따윈 없었다.

< 51. 루의 창(3) > 끝

ⓒ 온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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