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신사냥꾼-234화 (235/251)

< 50. 달의 소녀, 태양의 소년(6) >

그람은 ‘태양’을 올려다보았다.

아침. 자신이 가장 강할 시간.

-이 고통이 억울하진 않더냐? 왜 자신만 고통스러워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이 있었을진대. 억울하고 원망스럽지 않더냐?

‘재생’의 횟수가 회복될 때마다 들리는 환청이다. 달의 아이라 불리는 엘리스도 자신과 비슷한 소리를 듣고 있었다.

다만, 그람은 엘리스와 달리 여태껏 그 목소리를 무시하고 있었다. 자신이 약해져서 듣는 환청이라고만 치부했다.

-너는 ‘인간’이 아니다. 그런데도 태어나자마자 인간을 지켜야하는 운명을 부여받았다. 정작 그들은 너를 ‘인간’으로 여기지 않는데 말이야.

그람도 안다. 그람은 특별했다. 태어날 때부터 힘이 셌고, 다쳐도 순식간에 회복이 되고는 하였다. 심지어 육체가 조각나도 어떻게든 복원하는 능력을 지녔다.

그것을 바라보던 사람들의 눈빛······ 흥미와 혐오와 각종 재미를 포함한, 같은 인간으로 그람을 대하지 않는 그 눈빛들을 어찌 그람이라고 모르겠나.

-인간은 간사하다. 다른 것을 배척하려고 하지. 네가 그들을 구원한대도 결국 버림받을 것이다. 봐라, 이번에도 너의 ‘희생’이 전제되고 있으니.

그람은 고개를 저었다.

필요한 일이었다. 어머니가 직접 자신에게 부탁해야 할 만큼. 그녀의 괴로움을 그람도 잘 알았다. 말하는 내내 그녀는 뼈가 으스러지도록 주먹을 꽉 쥐고 있었으니까.

‘나의 아버지.’

그람은 고개를 들었다.

저곳. 태양 대신 서 있는 거신. 그 거신을 언제부터인가 그람은 아버지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언제나 아버지가 자신을 바라보고, 지켜주고 있노라고 여겼다.

엘리스와 달리 그람의 정신이 망가지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

“너의 ‘불’은 확실히 녀석의 것과 닮았구나.”

“녀석? 그게 누구에요?”

크투가. 그는 용암보다 뜨거운 화염덩어리 같았다. 가까이 있는 것만으로도 피부가 타 버릴 듯싶었다.

본래는 아버지와 계약했다고 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자신과 엘리스에게 그 계약이 이어졌다고 했다. 그리고 지금, 크투가는 그람을 먹을 준비를 하는 중이었다.

“오한성. 생물학적인 너의 아버지 말이다.”

“아버지를 잘 알아요?”

“세상에서 가장 멍청한 불을 가진 녀석이었다. 기름이라도 부은 것처럼 항상 타올라서 언제 꺼질지 몰랐지. 그래도 나는 영원히 타오르리라 여겼다만······.”

크투가는 고개를 저었다.

“‘태초의 불’이라 불리던 내가 처음으로 인정한 녀석이다. 너는 자부심을 가져도 좋다. 녀석의 것과 비슷한, 아주 멍청한 불꽃을 지니고 있으니.”

칭찬······ 맞는 건가?

그람이 모호한 표정을 지었다.

순간.

콰앙!

저 멀리서, 굉음과 함께 거대한 황금색의 용이 지상에 떨어져 내렸다.

“이그닐 누나!”

그람의 눈동자가 확대됐다. 제법 거리가 멀지만, 저런 빛을 뿜어내는 용은 이그닐뿐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전투담당이 아닐 텐데, 왜 적의 함선에서 떨어지는 지 알 수가 없었다.

“크아아아아아! 빌어먹을 년! 네년의 피 한 방울까지 모조리 빨아먹어주마!”

그리고 함선에서 떨어지는 또 하나의 괴물이 있었다.

거대한 송곳니를 지닌 흡혈왕 아넬로우!

그의 몸엔 채 아물지 못한 상처가 전신에 가득했다. 내장이 통째로 튀어나오고, 얼굴은 반이 사라져 뇌수가 다 보일 지경이었다.

쿠우우우웅!

거대한 운석이 아넬로우의 머리 위에 떨어졌다. 별을 움직이는 엘리스의 능력이다.

투쾅!

운석이 정확히 반으로 쪼개졌다.

아넬로우의 가장 강한 권속 중 하나인 기사가 검을 휘둘러 거대한 파동의 힘으로 운석을 잘라낸 것이다.

“흠, 엄청난 권속이로군. 저 정도면 어지간한 데몬로드에 필적하는 힘을 지녔겠어.”

한가롭게 크투가가 품평의 한 마디를 내놓았다.

검은 기사. 그리고 그 기사를 따라 수많은 권속들이 함대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비가 내리듯이.

크롸아앙!

이타콰가 출격하고,

“우리의 땅을 지키자!”

“우리에겐 총사령관이 계신다!”

사람들이 벌떼처럼 몰려와 농성을 시작했다.

그 사이 아넬로우의 몸이 거의 재생이 되었다. 용의 상태로 변해 바닥에 처박힌 이그닐의 몸뚱이 위에 아넬로우가 내려앉았다.

이그닐은 지칠 대로 지쳐있었다. 아넬로우에게 타격을 줄 수는 있었지만, 이대로 있으면 그녀는 죽는다.

또한 전황이 좋지 않았다. 아무리 힘을 합쳐도 적이 너무 많다.

“크투가. 나를 먹으세요.”

“너의 그 ‘재생’능력이란 것도 내가 먹으면 사라질 수 있다. 내 불이 너의 불보다 강하니.”

강한 불은 약한 불을 삼킨다.

크투가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람은 고개를 저었다.

“제가 가진 불은 ‘멍청한 불’이라면서요? 아버지의 것과 같다면 절대로 꺼지지 않겠죠.”

“그런 말도 안 되는 궤변을 늘어놓는 것도 녀석과 똑같군.”

크투가가 피식 웃었다.

그리고······.

화아아아악!

크투가의 전신에서 거대한 불길이 솟아올랐다.

그 불길이, 순식간에 그람의 전신을 덮었다.

꿈틀!

그람의 전신이 타오른다. 살갗이 벗겨지고, 뼈마저 녹으며, 그 안에 들어있던 ‘정수’에 크투가가 손을 뻗쳤다.

두근!

동시에.

크투가는 자신의 심장이 뛰는 걸 느꼈다.

‘뭐지?’

크투가는 당황했다.

크투가의 생각보다 더한 ‘근원’을 그람이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한성의 것만이 아니다. 요르문간드······ 설마 이런 것을 남기고 갔을 줄이야.

‘힘이 넘치는군.’

심연에 있을 때보다 더 힘이 넘치는 것 같았다.

크투가는 흡족하게 미소 지었다.

이 정도 힘이면 데몬로드 하나쯤은 문제가 아니다.

“너의 소망을 들어주마.”

크투가가 발을 박찼다.

아넬로우가 손톱을 들어 이그닐의 날개를 찢어발기려는 그 찰나······.

쿠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웅!

아넬로우의 몸이 그대로 허공에 뜨더니, 크투가의 힘에 눌려 끝도 없이 날아가기 시작했다.

쾅! 쾅! 콰르릉!

어느 지점에 도달한 순간, 크투가가 주먹을 쥐고 그대로 아넬로우의 몸뚱이를 때렸다. 음속을 아득히 초월한 속도로 내리치자 아넬로우의 몸이 수백m 지하 아래로 처박혔다.

화르르르륵!

크투가는 그 거대한 구멍에 자신의 불을 가득 채웠다.

뜨거운 불길은 땅을 녹일 수준이었다. 닿는 모든 것을 녹이는 그 불꽃은 이내 아넬로우에게도 닿았다.

“끄아아아악!”

아넬로우가 비명을 질렀다. 전신이 타들어가고, 재생이 멈췄다.

“넌······ 넌······ 누구냐······!”

미라처럼 쭈글쭈글해진 아넬로우가 겨우 날개를 펼쳐 지상 위로 올라왔다. 아넬로우의 모습은 눈으로 봐주기 처참한 정도였다.

‘피······ 피가 필요하다.’

아넬로우는 다급함을 느꼈다. 누군지 모르겠지만, 눈앞의 상대가 가진 ‘격’은 상상을 초월했다. 이만한 격이라니, 제로님과도 겨룰 수 있을 것 같지 않은가.

피가 필요했다. 피가 있어야 재생할 수 있다. 더 강한 힘을 가질 수 있다. 헌데 현안의 용 이그닐의 피를 마시려고 한 순간 눈앞의 상대가 달려든 것이다.

퉁! 퉁! 퉁! 투우웅!

크투가는 답하지 않았다.

인지한 순간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단지, 공기를 치는 소리만이 뒤늦게 들릴 뿐이었다.

“끄아아아악······.”

이미 내장이란 내장은 모조리 가루가 났다. 뼈는 본래 쓰임새를 잃고 조각난 채 내부를 돌아다닐 뿐이다.

생명체라 할 수 없는 기이한 각도. 흡혈왕이라 불리는 자신이 아니었다면 벌써 수백 번은 죽었을 상처다.

“생각보다 생명력이 질기군.”

크투가는 작게 한 마디를 내뱉었다.

“사, 사려, 사려주······.”

너무 강했다. 이런 놈을 이길 수 있을 리 없었다. 제로와 필적하는 존재를 어찌 자신이 감당할 수 있겠는가.

반응할 시간조차 없다. 마법을 사용하기도 전에 주먹이 날아왔다. 한 방, 한 방이 권능에 필적하는 힘을 지녔다.

아넬로우가 바닥을 기었다.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했다. 이런 정체 모를 놈에게 죽는다면 죽어서도 억울할 것이었다.

크투가가 주먹을 흔들었다.

생각보다 생명력이 질기지만, 그것도 이제 끝이다.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다.

그런데······.

“음?”

크투가가 고개를 갸웃했다.

힘이, 줄어들고 있다.

그람을 먹고 미칠 것 같이 넘치던 그 힘이 빠른 속도로 없어지고 있었다.

머지않아 크투가는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지 깨달았다.

‘재생이 아니라 시간 역행이었군.’

이런 말도 안 되는 능력을 보았나.

시간 역행이라니. 신들도 가지지 못한 권한이다. 요르문간드는 시간의 능력과 거리가 멀다. 그렇다는 건······ 오한성 쪽이 ‘시간’과 관련된 권능을 가지고 있었던 걸까?

하여간 시간을 역행시키니 자신이 먹은 것도 ‘없던’일이 되는 셈이었다. 그래도 설마 이렇게 빠를 거란 생각은 하지 못했는데.

촤아악!

크투가의 왼쪽 팔이 잘렸다.

고개를 돌리자, 처음 운석을 잘랐던 검은색의 기사가 그곳에 있었다.

“지켜드리겠습니다.”

“······ 놈의 권속이로군.”

아넬로우가 지닌 최강의 권속.

힘이 빠르게 사라지고 있었다. 아넬로우를 죽여야 하건만, 방해꾼이 들어온 것이다.

크투가가 낭패에 찬 표정을 지었다.

* * * * *

꿈틀! 꿈틀!

바닥에 얼굴을 처박은 강찬이 몸을 꿈틀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강찬. 칠대 죄악 중 하나인 ‘나태’와 함께 봉인되어 있었던 남자.

“아, 이번에는 진짜 죽을 뻔했네. 일기에는 이런 내용이 없었는데. 대체 이번 미션을 어떻게 해결하란 말이야?”

시체더미 사이에서 얼굴을 쭉 빼든 강찬이 한숨을 내쉬었다.

본래, 그는 이 지구의 사람이 아니다. 타차원에서 ‘나태’를 찾았고, 그 순간 봉인되어 여기까지 딸려온 것이다.

하지만 도무지 이 상황을 타파할 가능성이 보이지 않았다.

강자들이 즐비하고, 자신보다 강한 존재도 많지만, 적은 더 많고 강했다.

“뭘 지을 시간도 없고. 분명히 ‘계약’은 되어 있는데. 아무래도 저 ‘위대한 별’인지뭔지가 키 포인트 같단 말이지······.”

그리고 누구에게도 알려주지 않은 사실.

바로 오한성이 칠대죄악, 그중 ‘나태’와 계약하며 강찬과도 그 계약이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살아있어. 하지만 곧 죽을 거야. 그를 깨워야해. 방법이 없을까? 무슨 방법이.”

강찬은 턱을 쓸었다.

‘나태’의 주인은 살아있었다. 자신 역시 함께 묶여서 계약됐으니 알 수 있다. 다만, 그 생명력이 거의 다하고 있다는 게 문제다.

위대한 별의 안에서 무언가 일이 생긴 게 분명했다.

“크하하하하! 힘이 넘친다! 넘쳐흐른다!”

그때였다. 사라진 줄 알았던 아넬로우가 나타났다.

입가에 잔뜩 피를 묻힌 채로. 아무래도 누군가 강력한 존재의 피를 먹은 모양이다.

그는 등장한 즉시 무작정 ‘섬광포’를 지상에 떨어트렸다. 그의 날개에서 거대한 레이저가 마구잡이로 지상을 강타한 것이다.

“미친놈! 자기 아군도 다 죽일 셈이냐?”

강찬은 시체더미에서 급히 일어났다. 저 섬광포에 맞은 생명체는 가루 하나 남기지 못하고 그대로 증발해버렸다.

퍼어어어엉!

하늘 높이 뛰어오른 여인이 검을 휘둘러 아넬로우의 날개 한쪽을 잘라냈다. 라이라. 라이라 디아블로였다.

“이 세계는 제정신이 아니야. 저런 괴물들이 뭐 저렇게 많아?”

강찬이 입을 헤 벌렸다.

적이나 아군이나 강찬의 눈에는 괴물로 보였다.

하지만 아넬로우는 진짜 미친놈이었다. 순식간에 재생하더니 그 라이라 디아블로마저 압도하기 시작한 것이다.

‘창?’

이내 라이라의 가슴팍이 길게 베였을 때, 강찬은 보았다. 그녀가 가진 빛나는 창을 말이다.

다시 고개를 돌려 위대한 별을 바라봤다.

위대한 별. 정말 대단한 구조물이다. 저런 걸 만든 놈도 제정신은 아닐 거다. 하지만 저 구조물도 완전하진 않다.

틈, 틈이 있다. 강찬. 그만이 알 수 있고, 오한성과 연결된 그만이 느낄 수 있는 틈이.

‘저 창이 필요해.’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강찬이 달렸다.

그리고 떨어지는 라이라 디아블로를 양 손으로 받았다.

“넌······?”

라이라가 죽어가는 목소리로 강찬을 올려다봤다.

상처가 너무 많았다. 이대로 있으면 머지않아 죽을 거다.

그럼에도 강찬은 매몰차게 말했다.

“지금은 죽지 말아요. 지금 죽으면 그를 살릴 수 없으니까.”

“그······?”

“오한성. 지금이 아니면 늦어요. 저 위대한 별인지 뭔지가 분열하고 있는 지금이 아니면. 그러니까 조금만 더 숨 좀 쉬고 있어 봐요.”

“······!”

< 50. 달의 소녀, 태양의 소년(6) > 끝

ⓒ 온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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