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 달의 소녀, 태양의 소년(5) >
“······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는군.”
김민식이 인상을 팍 구겼다. 태양의 아이를 먹는다고? 김민식이, 인류가 그 아이를 위해 모든 걸 투자한 게 3년이다. 3년 동안 VIP도 받지 못할 굳건한 수호를 받으며 자라온 게 바로 그 아이였다.
단순히 오한성의 아이이기 때문인 것만은 아니다.
달의 소녀와 태양의 소년. 두 아이에게서 인류의 미래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그 미래를 크투가는 ‘먹는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큰 기대를 말거라. 지금의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이라곤 고작해야 시간을 끄는 것 정도니까.”
“그 아이는 오한성의 자식이기도 하다. 그 녀석이 본래 너의 계약자이지 않았나?”
“현실적인 대안을 내어준 것뿐이다. 게다가 나는 정령이지. 너희 생명체들처럼 대를 잇지 않는다. 당연히 너희들이 말하는 ‘자식과 부모’의 관계도 이해할 수 없다.”
크투가에게 있어서 그러한 것들은 매우 합리적이지 못한 사항일 따름이었다. 모성애나 부성애와 같은 것들이 자연에서 잉태되는 정령인 크투가에겐 없었다.
김민식이 입술을 깨물었다.
조금만, 조금만 시간이 있었다면, 완벽하게 방어해냈을 것이다.
‘본래의 계획은 알버츠를 처리하고 장벽을 세우는 것이었지.’
강찬이라 불리는 알 수 없는 존재. 그는 엄청난 건축가이자 대장장이였다. 그와 백원후들의 힘을 빌려 거대한 장벽을 세우려고 했다. 이미 기초 작업은 지하에서 끝내놓았기에, 정확히 30일만 있으면 완공시킬 수 있다는 계산이 있었다.
‘아넬로우와 그의 본대는 3일이면 한국에 도달한다.’
머리가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하지만 결단을 내려야 한다.
그는 영웅. 지금 이곳에 남은 최후의 영웅이었으니까.
“알겠다. 너의 말을 고려해보도록 하지.”
모든 가능성을 고려한다.
대를 위한 소의 희생. 영웅이란 항상 ‘희생’하는 존재였으니.
* * * * *
달의 소녀, 엘리스.
태양의 소년, 그람.
둘은 완벽하지만 완벽하지 않다.
엘리스에겐 정신적인 결함이 있었고, 그람도 완전한 불사자가 아니었다.
“끄아아아아아아악!!”
그람이 비명을 내질렀다.
벌써 이틀째.
알버츠에 의해 6번이 죽은 이후 재생하며 생긴 고통이었다.
“아파! 아프다고! 아아아악!”
세계수와 각종 약재들로 가득 찬 욕조. 야차들의 치료방식을 응용한 치료실이었다.
거대한 벽과 유리로 막혀있는 그 공간을, 라이라가 안타까운 눈동자로 바라봤다.
“앞으로 사흘······.”
“예. 사흘 후면 ‘일곱 번의 재생’이 다시 완성될 겁니다.”
그 안을 라이라 디아블로와와 리치 구르망디가 안타까운 눈동자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람은 하루에 최대 일곱 번 재생할 수 있다.
하지만 재생 횟수는 하루에 하나씩 회복된다.
그리고 그 회복되는 기간 동안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을 동반했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건······.”
“없습니다. 매번 그래왔지만 말입니다.”
구르망디가 매정하게 끊었다.
라이라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람은 요르문간드의 자식이었다.
자신이 낳은 자식이 아니라고 해도, 그 씨앗은 그분의 것이다. 당연히 애착이 가지 않을 리 없었다.
“김민식 총사령관이 말하더군. ‘크투가’를 활용하려면 저 아이를 먹어야할 필요가 있다고.”
“나쁜 소식은 아니군요. 어찌되었건 그람은 일곱 번 재생하니까요. 재생할 때마다 모든 걸 회복한 상태로.”
맞다. 그람은 전신이 가루가 나도 재생한다.
그건 마치 재생이라기보다 ‘시간을 되돌리는’ 장면과도 같았다.
기적. 마법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그람만이 가진 특별한 권능.
“라이라님. 아넬로우는 강합니다. 크투가의 도움 없이는 막지 못할 겁니다.”
“안다. 그리고 이 이야기를 저 아이에게 하면······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겠지. 그것을 알기에, 저 아이의 희생을 너무 당연하게 생각하게 될까봐, 나는······ 두렵다.”
그람은 그런 아이였다. 정확히 오한성과 요르문간드를 절반씩 빼닮았다. 저돌적이고, 긍정적이며, 매사에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저런 고통조차 끝이 나면 웃으며 넘기는 게 그람이었다.
아마도 저와 같은 성격이 된 건 엘리스 때문이리라. 엘리스의 결함을 자신이 받쳐줘야 한다고 생각해서 더욱 열심히 연기하고 있는 것이리라.
“구르망디. 나는 부모가 될 자격이 없는 모양이다. 아니면 나도 어쩔 수 없는 마족인 것이겠지.”
“라이라님은 충분히 잘 하고 계십니다. 선택의 여지가 없지 않습니까. 우리는······ 이겨야만 하니까요.”
구르망디가 무겁게 내뱉었다.
그랬다. 이겨야했다. 패배하는 순간 모든 게 ‘무(無)’가 되어버린다.
모든 죽음이, 그의 희생이.
그렇게 놔둘 수는 없었다.
‘차라리 내가 대신해서 죽을 수 있다면.’
그리할 수만 있다면 백 번이고, 천 번이고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걸 알기에 너무나도 무력했다. 한심했다. 이럴 때 ‘그’라면어떤 선택을 내렸을까.
“내가 직접 말하겠다. 내가 직접······.”
그게 최소한의 도리라고 보았다.
* * * * *
하늘에 헬기가 뜨고, 모든 조명이 김민식에게 집중되었다.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이었으나 그는 웃었다.
“인류는 ‘불가능’을 뛰어넘었습니다. 고모라의 알버츠, 그 죽여도 죽지 않을 것만같았던 데몬로드를 마침내 격퇴했기 때문에!”
마력이 담긴 우렁찬 목소리가 한국 전역을 울렸다. 생존자들은 선망과 기대를 가지고서 총사령관, 김민식을 바라봤다.
3년 전까지 그는 범죄자였다. 현상금이 걸리고 수많은 사람들을 학살했다고 전해졌다.
하지만 3년 전, 그가 출소하며 그 모든 것들이 ‘알레테이아 교단의 속임수’였다는게 밝혀졌다. 억울한 옥살이. 그러나 인류를 위해 헌신하겠다는 소명을 밝히자, 순식간에 ‘영웅’으로 자리매김했다.
성공적인 이미지메이킹이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그는 ‘문’을 열어 수많은 이종족을 회합의 장으로 끌어들였으며, 세계정부를 세우고 그곳의 ‘총사령관’이 되었다.
작금에 이르러선 최후의 영웅.
이 난세를 해결해줄 마지막 영웅이라 불리고 있었으니.
‘아이러니.’
본래 이 자리엔 오한성이 있어야 했다.
과거, 녀석은 이 자리에서 아주 오랜 시간 세계를 수호했었다.
자신은 어떤가. 그 기나긴 가시밭길을 걸을 준비가 되어있나?
‘안 되도 되게 해야 해.’
심호흡을 한다.
현재의 상황은 최악이었다.
하지만 그는 결코 최악을 말해선 안 된다.
오로지 희망만을. 그들에게 빛만을 보여줘야 하는 자리에 서 있었다.
‘이런 무게였더냐.’
녀석도 이렇게 무거웠을까.
양쪽 어깨가, 전신이, 압사해버릴 것만 같은 무게감이.
“우리는 승리했습니다!”
“김민식 총사령관 만세!”
“만세!!!”
군중심리란 참으로 무서운 것이다.
나쁘게 작용할 때에도, 좋게 작용할 때에도, 밀물과 썰물처럼 한 번에 빠지고 나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되는 게 바로 저 군중심리라는 것이었다.
김민식은 입가에 미소를 잃지 않았다.
“결코 이길 수 없으리라 여긴 10명의 악마들. 그중 하나를 우리가 힘을 합쳐 이겨낸 겁니다! 나머지 아홉의 악마들 역시 우리의 손으로 정의의 철퇴를 내릴 수 있습니다.”
“옳소!”
“악마들은 우리의 상대가 안 돼!”
자. 본론은 지금부터다.
“그리고 지금, 멀지 않은 곳에서 ‘흡혈왕 아넬로우’가 그의 본대와 함께 이곳을 침공하려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걱정 마십시오. 제가 살아있는 이상, 또한 우리가 힘을 합치면 감히 악마왕이라 한들 우리를 어찌할 수 없을 겁니다!”
콰아아아앙!
날아오는 불덩이를 김민식이 검을 뻗어 잘라냈다.
김민식이 고개를 들었다.
본대가 아닌 분대. 아마도 본대가 도착하기 직전에 자리를 정리하려는 용도의 부대인 것 같았다.
“우리는 승리합니다.”
김민식이 허공을 날았다.
그리고 가장 앞에서 날아오던 마족의 목을 베었다.
“김민식 총사령관을 따르라!”
“아넬로우를 죽이자!”
“으아아아아아-!”
* * * * *
아넬로우는 혀를 찼다.
‘알버츠는 뭘 하고 있었던 거지?’
인간이 생각보다 많았다.
그들의 결집력이, 그들의 힘이 생각했던 것을 훨씬 추월하고 있었다.
알버츠가 제대로 했다면 지금쯤 이곳의 인간은 모두 몰살되었어야 했다. 하지만 알버츠의 그 느긋한 심성이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게 분명했다.
그러나 그뿐이다. 예상 외.
‘하루면 충분하겠군.’
아넬로우는 자신의 본대를 총동원했다. 그 숫자가 무려 2천만에 달한다. 무력과 양적인 측면에서 압도적인 차이. 지려야 질 수가 없다.
쉬이잉.
그때였다.
아넬로우의 눈앞에, 균열이 생기며 문이 나타났다.
문을 열고 나타난 인형은 하나.
“현안의 용. 설마 이곳까지 침범할 수 있으리라곤 생각도 못했군.”
아넬로우가 피식 웃었다.
현안의 용, 이그닐. 이 용에 대해서도 제법 빠삭하게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동안은 활동을 거의 안했다고 했는데.
“항복 선언이라도 하러 온 거냐?”
현안의 용은 답하지 않았다.
완벽한 황금안. 황금의 머릿결. 전해져오는 마력은 질적으로 꽤나 우수했다.
이런 용은 본 적이 없다. 그래서 탐이 났다.
그대로 박제를 시켜야겠다고 생각한 순간.
퍼석!
눈 깜빡할 사이에 아넬로우의 귀가 잘려나갔다.
“······ 마법의 공간전이?”
아넬로우는 약간 당황하고 말았다.
단순한 공간전이가 아니다. 마법의 살상력을 그대로 담은 채로 공간을 전이시켰다. 굉장히 고난이도의 수법. 마법에 특출한 로드라고 할지라도 사용하려면 시간이 꽤 걸릴 터였다.
그런데 순식간이었다. 아무런 낌새도 느끼지 못했다.
퍼서서석!
쿵!
아넬로우를 받치던 바닥이 뚫렸다.
그대로 그의 위에 균열이 생기며 공간 자체가 찌부러지기 시작했다.
아넬로우는 순수한 의미로 감탄했다.
설마 이 정도로 공간마법을 사용할 줄이야.
“인간들을 몰살시키기 전에······ 몸 풀기로는 적당하겠구나.”
그래봤자 용이다. 현안의 용이라고 칭송받으나 이제 겨우 성체가 될까 말까한 용.
그런 용 하나를 자신이 이기지 못할 리가 없지 않은가.
오히려 자살을 하러 왔다고 봐도 좋은 정도다.
아넬로우가 웃었다.
동시에 이그닐의 황금안이 더욱 찬란하게 빛났다.
* * * * *
-암흑상회! 상회! 아아아악!
-별, 위대한 별!
-살려줘! 살려줘!
-오딘······ 토르······ 로키······ 천마······ 현장······ 오한성······!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인도의 작은 마을.
특정 시간만 되면 되살아나는 망자, 암흑인들.
같은 말만 반복하던 그들에게 변화가 생겼다.
“······ 지금 내가 제대로 들은 거 맞지?”
“우리 모두 들었다, 구화린.”
오룡이 침을 꿀꺽 삼켰다.
잘못 들은 게 아니다.
수많은 신의 이름이 언급되며, 그중 익숙한 이름이 나왔다.
동시에 암흑인들은 평소보다 더욱 괴로워했다. 괴로워하며, 하나로 합쳐지기 시작했다.
여태껏 처음 보는 현상.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한 가지 확실한 건.
변화가 생겼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변화가 자신의 상상을 훨씬 초월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고.
구화린이 눈살을 찌푸렸다.
< 50. 달의 소녀, 태양의 소년(5)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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