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신사냥꾼-232화 (233/251)

< 50. 달의 소녀, 태양의 소년(4) >

제로가 어둡게 물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쿠르릉!

그의 눈이 닿자, 거대한 검은색 탑의 중심에 천둥이 휘몰아쳤다. 탑의 꼭대기 부분에 달린 거대한 ‘악마의 눈’이 지상을 쏘아보며 모든 것을 감시하고 있었다.

악마의 탑.

본래라면 자유의 여신상이 있었어야 할 장소.

하지만 지금은 그 여신상 대신 제로의 탑이 있다.

주변의 바다가 모두 진흙처럼 변하고 탑의 주위를 몇 마리의 용들이 돌아다니며 지키고 있었다.

이 탑으로 말미암아 미국 전역의 모든 ‘생명체’는 마력을 뺏겼다. 제로는 무한에 가까운 힘을 얻었고 그 공포를 모든 데몬로드와 인류에게 뻗치고 있는 중이었다.

“고모라의 알버츠가 죽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그에게 반항하는 자가 남아있었다.

검은색의 투구와 망토를 착용한 제로가, 시선을 옮겼다.

그 시선을 받은 데몬로드가 급히 부복했다. 몸을 부들부들 떨고 식은땀을 흘렸다.지구에 온 이후 제로는 공포 그 자체가 되었다. 과거의 둠조차도 지금의 제로를 막진 못하리라.

‘무서우신 분.’

하지만 그 아래에 있어서 다행이었다.

안달톤 브뤼시엘? 아르하임?

누구도 제로의 상대가 될 순 없다. 그는 절대자였다. 신이라고 답이 있을까?

“······ ‘놈’의 아이들이 죽인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놈. 우리엘 디아블로.

놈은 죽었다. 둠과 함께 사라졌다. 하지만 놈의 주변에 잔류해있던 자들은 인류를돕기 시작했다. 놈의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우리엘 디아블로의 평소 행실을 생각해보면 이해는 됐다. 미치광이 밑에 미친 종자들이 있는 거다.

“하지만 걱정 마시길. ‘태양성’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고 있습니다. 물론, 그들이 움직인다 하더라도 이미 이 기류를 바꿀 수는 없겠지만 말입니다.”

우리엘 디아블로는 태양왕이었다.

안달톤 브뤼시엘이 사자왕이 되어 그의 군단 모두를 지구에 끌고 온 것처럼, 태양왕의 휘하들이 한꺼번에 몰려오면 골치가 아플 가능성이 농후했다.

하지만 우리엘 디아블로가 죽자, 태양성의 병력들은 마치 얼은 듯이 조용해졌다. 군단장들이 남아서 차기 왕이 되고자 전쟁을 치루고 있다고.

“문제는 알버츠를 죽인 자들입니다. ‘놈’의 아이들과 인간들이 힘을 합쳐 알버츠의 말살에 성공한 듯싶습니다만, 가만히 놔둬야 할지요?”

이게 제일 큰 문제였다.

제로의 파벌이 4명, 아르하임이 3명, 그리고 안달톤 브뤼시엘이 3명이었다.

그런데 그 균형이 무너졌다. 미묘하던 우위가 사라진 셈이다.

이미 다른 로드들도 이 사실을 알아차렸으리라. 그렇다면 후속조치의 문제가 남아있었다. 이대로 인간들을 방치하느냐? 아니면 확실하게 보복하느냐.

보복을 한다면 그곳엔 개미 한 마리 남지 않을 것이다. 제로는 무서운 존재였다. 그의 적이 된다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끼칠 지경이니까.

“······.”

제로의 시선이 닿았다.

그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는 머릿속으로 ‘명령’을 내릴 뿐이었다.

부복하고 있던 데몬로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러도록 하겠습니다.”

* * * * *

사방에서 태극기가 올라왔다.

고모라의 알버츠가 가둬두었던 인질들을 해방하고, 지상으로 올라온 그들은 드디어 목 놓아 울 수 있게 되었다.

“아아······!”

“살아있었구나, 살아있었어!”

“한국은 우리 땅이다, 이 개 같은 놈들!”

김민식 총사령관의 인도 아래, 천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밀집했다.

혹시나 문제가 생길 때를 대비하여 곳곳에 지하벙커를 만들어 놓고 괴물들과 항쟁한 덕분에 이만큼이나 생존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다른 나라에 비해서도 압도적인 생존률.

김민식과 유서희가 한국의 정, 재계를 휘어잡아 만들어낸 결과였다.

하지만 아무리 많이 살아남았다고 하더라도 전쟁의 여파는 컸다. 그 슬픔과 울분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3년.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

하지만 그 시간 동안 새겨진 상처가 너무 많았다.

“고모라의 알버츠를 죽였습니다! 인류가 처음으로 데몬로드 사냥에 성공한 겁니다! 여러분! 희망은 있습니다! 인류는, 놈들을 이길 수 있어요!”

“옳소! 우리에겐 김민식 총사령관이 계시지 않은가! 세계 최강의 검희 유서희도,태양과 달의 아이들도, 그리고 ‘수호의 용’도 있지! 연합군 또한 우리를 돕고 말이야!”

“우리가 힘을 합치면 놈들은 아무 것도 아니야!”

사람들은 노래를 불렀다. 폐허가 되어버린 도시의 안에서. 술을 마시고, 고기를 뜯고, 축제를 지냈다.

열기가 데일 듯이 뜨거웠다. 본래, 데몬로드는 ‘불가해’의 적이었다. 대적불가. 살기 위해선 도망쳐야 하는 천적 중의 천적.

그런데 처음으로 그 규칙이 깨졌다.

이 변화는 한국을 시작으로 전세계에 뻗어나갈 것이다.

아직 살아남은 사람은 많다. 남은 적은 아홉. 그들만 죽이면 된다.

“인간들이 요란스럽군.”

“데몬로드 따위에 벌벌 떠는 꼴이라니.”

“어차피 저들은 할 수 있는 게 없어.”

하지만 모든 ‘종족’이 그런 것은 아니었다.

연합군. 각각의 종족들이 ‘문’을 넘어와 인간들에게 협력했다. 하지만 공짜로 도와주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지구의 자원들을 약속하거나, 몇 가지 대가를 치러 용병처럼 데려온 이들도 있었다.

반용족. 이들이 그러한 경우였다.

용과 괴수의 피를 이어받은 그들은 태생적인 전사였다. 그들은 직접 용을 사냥할 정도로 강력했고, 마족들을 몇 번이나 격퇴시킨 전적이 있었다.

그런 그들의 시선에서 보자면 지금 인간들의 행동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말을 들은 사람들이 있었다.

“뭐라고? 고모라의 알버츠를 잡을 때, 정작 한 것도 없는 반용족이 말만 많군!”

“뒤에서 구경이나 한 주제에. ‘마력장’을 부순 것도 검희 유서희잖아?”

반발이 생겼다. 반용족들이 이맛살을 구겼다.

“우린 불필요한 싸움을 하지 않는다. 알버츠를 죽여 봤자 전쟁이 끝나는 건 아니지 않나?”

“오히려 기름에 불만 부은 꼴이지. 인간들이여, 너희들은 그들의 보복을 대비해야 한다. 지금처럼 축제나 지내고 있을 때가 아닐 텐데.”

사람들이 더욱 야유를 보냈다.

“겁쟁이들. 이번 싸움에 패배할 가능성이 높으니까 참전하지 않은 거겠지.”

“졌으면 가장 먼저 도망치지 않았겠어?”

분위기가 순식간에 험악해졌다.

반용족의 숫자는 일천여. 하지만 사람들 역시 모두가 각성자다. 지난 3년간 끊임없는 전쟁을 통해 어느 정도 수준 이상으로 강해져있는 상태였다.

“우리 반용족을 모욕하는 건가?”

“가만히 듣고 있을 수 없군. 너희들의 의견을 우리에게 관철하고 싶다면, 검을 뽑아라. 전사의 대결을 하자.”

반용족의 전사들이 무기를 들었다.

그러자 섣불리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이번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다 뿐이지, 반용족이 강력한 종족이라는 걸 모두가 알기 때문이다.

“워워. 저기요. 지금 서로 싸울 때가 아니거든요?”

그때, 한 청년이 머리를 긁적이며 앞으로 나왔다.

무언가를 만들고 있었던 듯 먼지자국이 전신에 자욱했고 망치 한 자루를 들고 있었는데, 어딘지 모르게 이질적인 느낌이 드는 남자였다.

“강찬님?”

“아아······ 그 전설적인 건축가!”

강찬.

그는 심연에서 나타났다.

심연의 경매장에서, 칠대 죄악 중 하나인 ‘나태’에 봉인된 채로 말이다.

강찬은 엄청난 건축술과 대장장이 기술을 가지고 있었는데, 덕분에 지난 3년간 한국의 사람들이 데몬로드를 피해 안전히 숨어있을 수 있었던 것이다.

“놈들이 우리들을 모욕했다. 가만히 듣고만 있으란 말인가?”

반용족의 우두머리가 앞서나왔다.

강찬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일단 나중에 해결하라는 겁니다. 눈이 있으면 하늘을 좀 봐요. 지금 서로 싸우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반용족의 우두머리가 고개를 들었다.

“······!!”

그리고 크게 기겁했다.

그 뒤를 따라 많은 사람들이 하늘을 바라봤지만, 고개만 갸우뚱할 뿐이었다.

“뭐가 보여?”

“왜? 왜 그러는데?”

그때. 반용족의 우두머리가 급히 검을 뽑아들었다.

“전장에 임하라! 검을 뽑고 날개를 펼쳐라! 적이······ 적이 나타났다!”

강찬이라 불린 남자도 고개를 끄덕였다.

“적들의 대처가 엄청나게 빠르군요. 흠······ 일단 저도 가세하겠습니다.”

그가 거대한 망치를 들었다.

투박하기 그지없지만, 망치를 든 그의 전신에서 푸른빛이 마구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그날. 경매의 마지막 날, 심연에 남아있던 유일한 존재.

무슨 이유에서인지 ‘나태’의 옆에 봉인되어 있었지만, 무언가의 비밀을 안고 그는현재 인류를 돕고 있었다.

강찬이 망치를 휘둘렀다.

그러자.

콰아아아아앙!

허공에 거대한 충격파가 생기며, 저 멀리서 날아오던 마족들이 후두두둑 떨어져내렸다.

* * * * *

기뻐할 틈이 없었다.

이제 막 해방감을 느끼고 있었건만, 적들의 공격이 시작된 것이다.

이만한 대처 속도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김민식도, 유서희도, 그 누구조차도.

“그나마 다행인 점이라면 본대가 아니라는 것 정도인가.”

김민식이 손톱을 깨물었다.

1차 접전. 대략 10만 마리 정도의 마족들이 침공해왔다.

하지만 그들은 주변을 배회하던 잔여물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본대가 이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누구지? 누가 본대를 이끌고 오고 있는가.”

“흡혈왕 아넬로우. 그가 오고 있는 게 확인됐습니다.”

김민식이 이마를 꾹 눌렀다.

아넬로우. 설마 이렇게 빠른 시기에 제로가 결단을 내리고 그를 보낼 줄은 몰랐다.

알버츠와는 차원이 다른 로드다. 서열 6위. 알버츠보다 서열이 하나 낮지만, 그 하나의 차이는 상상을 불허했다.

“언제 도달하지?”

“앞으로 3일 정도면······ 문제는 그 시간 동안 계속해서 마족들이 이곳을 침공할 것이라는 점입니다.”

놈은 쉬지 않는다. 발이 빠른 마족들로만 구성해서 계속 한국을 노리고 있었다.

쉴 새 없이 몰아칠 작정이었다. 가만히 받아주기만 해선 답이 없다. 죽음을 기다리는 것과 같았다.

‘하지만 우리에겐 크투가가 있다.’

불의 화신 크투가.

그리고 이그닐이 있었다.

그 둘이 전력을 다해 돕는다면, 천하의 아넬로우라도 상대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얄팍한 희망을 담아봤다.

“불가.”

아넬로우의 침략 소식을 들은 크투가가 못을 박았다.

단언하며 말하자 도리어 인상이 찌푸려졌다.

“······ 왜지?”

“지금 정도의 마력으로는 싸우는데 한계가 있다. 최대 5분 정도 버텨주는 게 전부겠지.”

“어떻게 해야 제대로 싸울 수 있나?”

“오한성이 나타난다면 나는 놈이 가진 ‘불의 힘’으로 싸울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은놈이 없지.”

“태양의 아이가 있지 않느냐.”

크투가가 고개를 저었다.

“너무 어리고 약해. 그 정도 불꽃으로는 내 아바타르조차 이길 수 없을 거다. 물론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만······.”

“방법이 뭐지?”

김민식이 눈에 힘을 꽉 줬다.

크투가가 협력해줘야 방법이 생긴다. 적의 대처가 그의 생각을 아득히 뛰어넘고 있었다.

급습이 있을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설마 이렇게 빠를 줄이야.

알버츠와의 싸움에서 아이들과 이타콰의 상처가 너무 심하게 남았다. 회복되려면시간이 필요하다.

크투가가 턱을 쓸며 말했다.

정말 별 거 아니라는 듯이.

“그 태양의 아이라는 녀석, 그 녀석을 내가 먹으면 가능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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