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 달의 소녀, 태양의 소년(3) >
분명히 그렇게 불렸던 녀석이다.
김민식이 실제로 크투가를 본 건 한 번뿐이었다. 먼발치에서 힐끗 흘겨봤을 뿐임에도 그 광활한 마력에 압도되지 않았던가.
왜 그가 지구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발견한 이상 깨워야 한다. 물론 위험한 일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만약 그가 지구를, 인류를 적대한다면 데몬로드가 하나 더 늘어난다고 봐도 무방했으니.
‘뒤가 없다.’
하지만, 김민식은 확신했다.
이 전쟁은 지구의 모든 걸 갉아먹고 있었다. 설혹 승리하더라도 인류가 받은 피해를 수복하는데 수십, 수백 년이 걸릴 터였다.
이겨도, 져도 뒤가 없다면, 도박을 할 수밖에 없다.
조금이라도 사용할 수 있는 패를 늘리는 거다.
그리고 제발 이 패가 조커가 아니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시작하라. 의식을 개시한다.”
동시에 김민식의 뒤에 있던 마법병단 백여 명이 앞으로 튀어나와 합장을 하고 마력을 전개했다. 생겨난 불꽃들은 모조리 ‘크투가’에게 흡수되기 시작했다.
‘더 많은 불이 필요하다.’
지난 몇 년 동안, 크투가를 찾아다녔다.
당연히 그에 대한 문헌도 심연에서 찾을 수 있었다.
크투가. 무척이나 오래 된 고대의 존재. 진화의 불이라 불리던 절대적인 불꽃!
일정 이상의 불이 존재하지 않으면 크투가는 깨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아무리 불의 마력을 쏟아 부어도 크투가의 신체는 일어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마력을 끌어올려라. ‘진원’을 사용히는 걸 허락하겠다.”
진원. 생명의 원천을 사용하여 마력을 더욱 불태운다. 본래라면 금지된 방법이지만 지금은 물불을 가릴 때가 아니었다.
그리고 이곳에 있는 모두는 인류의 승리를 위해서라면 마땅히 목숨바쳐 자신을 희생할 준비가 되어있었다.
그건 김민식이라고 다르지 않다.
‘알레테이아.’
-불이 필요하느냐?
‘압도적인 불이 필요하다.’
가짜 알레테이아. 어느 순간부터 김민식의 몸 안에 들어온 의식. 이 의식은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고자 김민식에게 협조하고 있었다.
덕분에 김민식은 ‘인류 최강’ 타이틀을 손에 거머쥘 수 있었다.
‘많이 따라잡았어.’
3년 전, 오한성. 녀석의 수준에는 미치지 못해도 상당히 좁은 간격으로 따라잡았다고 자신한다.
김민식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 없는 녀석과 비교해봤자 무의미하다.
일단은······.
‘상태창.’
이름: 김민식
직업: 마검사
칭호:
● 절세의 모험가(9Lv, 모든 능력치+6)● 왕 학살자(8Lv, 힘+13)● 알 수 없는 신의 사도(9Lv, 모든 능력치+5)능력치:
힘 115(91+24) 민첩 109(91+18) 체력 105(91+14)지능 102(91+11) 마력 112(91+21)s 잠재력(455+88/485)스킬: 월광(8lv), 궁극마법(9lv), 심판자(8lv), 불굴(9lv)착용한 장비: 만년검(마력+5) 팔라딘의 망토(민첩+3), 군림의 반지(마력+5), 바람정령의 신발(민첩+4), 가호의 목걸이(체력+3)순수능력치가 450을 넘어서부터 거의 오르지 않고 있었다. 이를 보완하고자 온갖 칭호와 장비를 쏟아 부었지만, 로드나 초월적인 괴물을 상대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현재 남은 로드들은 자신의 수준을 아득히 넘고 있다.
놈들을 따라잡으려면,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그래서 만들었다.
궁극마법. 그리고 알레테이아와의 변환마법.
[모든 마력의 형질이 ‘불’로 변환되었습니다.]
[다른 순수능력치들을 변환해 잠시 마력수치를 올릴 수 있습니다.]
‘최저한의 능력치를 제외한 모든 것을 마력 수치로 변화하겠다.’
[마력이 ‘24’상승했습니다.]
[힘, 민첩, 체력의 순수신체능력치가 10에 수렴합니다.]
[주의. 지능이 낮아지며 항마력이 극도로 약해집니다.]
후우우우!
전신을 불이 감쌌다.
심호흡을 한다. 김민식이 마검사의 끝에 다다르며 스스로 만든 비기. 성장한계를 뚫고자 모든 것을 집대성한 스킬.
하지만 양날의 검이다. 지금 김민식의 신체는 일반인보다 조금 강한 정도. 어지간한 공격에도 즉사할 수준이었다.
‘모든 불을 크투가에게.’
자신의 모든 불을 넘긴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품에서 붉은 보석 하나를 꺼냈다.
‘불의 정수.’
심연. 태양왕의 성에 다시 잠입하여 구해낸 정수.
분명히 크투가의 것이었다.
목숨을 걸고 구해왔으니 제가치를 해주길 바란다.
당시 자신에게 해주었던 오한성의 말이 사실이라면, 크투가는 인류를 도와줄 것이었다.
‘제발, 제발······.’
김민식은 간절했다. 그런 그의 간절함이 통한 것일까.
화아아아아아아악!
크투가의 전신이 빛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번쩍!
크투가가 눈을 뜨자, 빛의 무리로 이루어진 안광이 동굴 전체를 가득 채웠다.
* * * * *
크투가가 눈을 떴다.
“으음, 여긴 어디지?”
“지구.”
작은 불꽃들이 주변에 넘실거렸다. 시선을 돌리자, 백을 넘는 인간들이 잔뜩 지친상태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크투가. 오랜 시간 잠들어 있어서 지금의 상황을 모를 거라고 생각한다. 네가 아직도 오한성을 따르고 있다면, 우리를 도와다오.”
“내가 오랜 시간 잠들어 있었다고?”
“3년 정도. 심연의 시간은 알 수가 없으니 정확하진 않지만······.”
김민식의 말에, 크투가가 인상을 찌푸렸다.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왜 자신이 잠들었는지도 말이다.
그리고 왜 자신이 지구에 있는 것인지는 더더욱 알 수가 없었다.
“오한성은 어디 있느냐.”
“그는······ 죽었다.”
“죽었다?”
이건 또 무슨 씨나락까먹는 소리인가.
“‘위대한 별’이 지구로 이동됨과 동시에 녀석은 사라졌다. 아마도 죽었겠지. 3년이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으니까.”
“위대한 별이 지구로······ 그렇군.”
크투가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 경매에서의 전쟁. 크투가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상을 느끼고 움직였지만, ‘위대한 별’이 폭발하며 정신을 잃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뜨자 지금이다. 3년.
‘위대한 별, 천마의 육체.’
아마도 그 때문일 것이다.
위대한 별의 모체가 된 천마. 그 천마의 육체가 자신의 것이기 때문이다. 위대한 별이 지구로 떨어지자 이 육체도 자석에 끌리듯 지구로 향한 게 분명하다.
“라이라 디아블로는?”
“그녀는 우리를 도와 데몬로드들을 상대하고 있다. 덕분에 멸망이 3년은 늦춰졌지.”
“우리엘 디아블로도, 오한성만 없다?”
“하지만 그의 자식들은 남아있다.”
“자식? 아아······ 무사히 낳은 건가.”
크투가는 인상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3년이 지난 게 사실인 듯싶었다.
“그런데 놈이 죽었다는 게 믿기지 않는군.”
오한성은 불사신이었다. 우리엘 디아블로도 마찬가지다. 죽여도 죽지 않을 것 같은 놈이 죽었다고?
질 나쁜 농담이리라.
하지만 김민식의 얼굴엔 변화가 없었다.
“크투가. 우리를 도와다오. 너의 힘이 필요하다.”
“흐으으음······ 내가 따르기로 한 건 오한성, 그 빌어먹을 놈이지 너희들이 아니야.”
애당초 내기와 계약을 통해서 갑과 을의 관계가 되었을 뿐이다. 지금 오한성이 없다면, 굳이 그들을 도와줄 이유도 의무도 없었다.
김민식의 표정이 굳었다.
어렵게 찾아서 깨웠는데 도와주지 않는다면 말짱 도루묵이다.
“헌데 이상하군. 계약이 풀리지 않은 것 같은데······.”
“무슨 소리지?”
“아무 것도 아니다. 너희들이 신경쓸 게 아니야. 하여간 나는 자유의 몸이다. 방해하지 않는다면 놈과의 연을 생각해서 살려두겠다만, 방해한다면 모조리 타버릴 각오를 하는 게 좋을 거다.”
크투가는 여유가 넘쳤다.
실제로 그를 앞에 두니 그 여유의 의미를 알 것 같았다.
‘강하다.’
이길 수 없다. 여기 있는 모두가 원래의 상태로 덤벼도.
‘제기랄. 너무 안일했던가?’
처음부터 반반이었다.
만에 하나의 가능성만을 가지고 건 도박수.
인류를 적대하지 않는 것에 그나마 감사함을 느껴야 하는 걸까?
쩌어어억!
순간.
공간에 균열이 생겼다.
그리고 그 균열을 통해, 눈이 휘둥그레지도록 아름다운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호오······ 이 마력. 너는, 이그닐이냐?”
“간만이에요. 크투가.”
이그닐!
소녀였던 그 황금의 용은 이제 어엿한 숙녀가 되어있었다. 하지만 과거와 달라진 점이라면, 더 이상 이그닐의 얼굴과 눈빛에서 천진난만함을 찾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무표정. 무감정. 권태로운 눈빛.
“내가 깨어나는 걸 용케 알아냈구나.”
“애당초 제가 찾아냈으니까요.”
김민식은 입을 가만히 다물고 있었다. 위치를 특정해준 게 이그닐이 맞긴 했다. 워낙에 애매모호하게 표현해서 찾는데 시간이 걸린 거다.
하지만 동시에 화가 나기도 했다.
“이그닐. 왜 ‘아이들’을 도와주지 않은 것이냐? 이타콰도 큰 중상을 입었다. 네가 도와줬으면······.”
“그 정도도 이기지 못하면, 희망이 없으니까.”
“뭐?”
이그닐은 답하지 않았다.
항상 이런식이었다.
원래부터 이러지 않았다고는 들었지만, 라이라 디아블로도 그저 슬픈 눈빛만 지어보일 따름이었다.
그나마 이그닐을 통제할 수 있는 건 라이라 디아블로뿐. 나머지와는 대화다운 대화를 나누는 것조차 기피하는 모습이었다.
극도의 마이웨이. 무엇을 생각하는지 누구도 모른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그녀의 눈에 약간의 열망이 깃들었다.
“크투가. 당신이 필요해요.”
“흥, 나는 이제 누구의 말도 듣지 않는다. 나는 자유야!”
“아니요. 아직 ‘계약’은 끊기지 않았을 거예요.”
“······ 그걸 네가 어떻게?”
크투가가 멈칫했다.
맞다. 아직 오한성과 맺은 계약이 끊기지 않아서 의아해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걸 이그닐이 알고 있는 것이다.
‘정말 같은 존재가 맞는 건지 의심부터 들 정도군. 이그닐······ 그 동안 무슨 일이있었던 거지? 전혀 다른 존재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은가.’
크투가는 근원을 본다. 그 생명력을 직시할 수 있다.
그런 크투가조차 이그닐의 현격함에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이 정도면, 이 정도 힘이면······.
하지만 힘을 숨겨놓고 있다. 왜일까?
이그닐이 말했다.
“아빠의 아이들이 그 계약을 이었어요. 당신은 그 아이들의 말을 들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이그닐이 마지막 말을 힘겹게 삼켰다.
조금은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뭔가를 알고 있는 게 분명하다.
여태껏 말하지 않았던 진실들.
이윽고, 입술을 깨문 이그닐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그래야만 아빠를 부를 수 있어요.”
“······ 오한성이, 안 죽었다고?”
먼저 반응한 건 김민식이었다.
여태껏 그는 이런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그닐은 서글퍼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죽었습니다. 그래도 의식만은 분명히, 남아있을 거예요. 거신의 안에 섞인 채로.”
“방금 전엔 분명히 다시 부른다고······.”
“아이들의 힘이 커지면 분명히 불러낼 수 있을 거예요. 분리할 순 없겠지만 거신을 부술 계기는 마련되겠죠. 그럼······ 아빠의 고향을 지킬 수는 있을 거예요.”
이그닐이 주먹을 꽉 쥐었다.
어쩌면 지난 3년은, 이그닐이 오한성의 죽음을 받아들이는데 필요한 시간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네 그림자가 이토록 컸구나.’
김민식은 이를 악물었다.
오한성, 이 빌어먹을 녀석 같으니.
이렇게 많은 이들이 너를 바라는데. 너를 기다리는데.
대체 왜 죽은 거냐? 대체 왜······.
< 50. 달의 소녀, 태양의 소년(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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