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 세계(3) >
보석을 쥔 주먹을 굳세게 쥐어보였다.
내 마음대로 행하리라. 그것이 악이든, 선이든, 내 마음이 행한다면 닿을 것이고,행하지 않는다면 닿지 않을 것이다.
-서(Sir). 저곳이 알레테이아 교단의 성지입니다.
인연. 인연이란 참으로 묘하다.
크리퀴가 녹으며 나타낸 형상. 그 형상의 마지막 목소리가 기억난다.
젊은 녀석이었다. 어렸을 때 괴물들에게 부모님을 여의고 길거리에 버려진 어린 녀석을, 내가 데려왔으니까.
하지만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거기까지. 이후로 나는 녀석을 잊고 있었다. 최후의 영웅이 된 뒤에야 나는 녀석을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오랫동안 이 순간만을 기다려왔습니다. 오늘 부러 창공기사단에 입단하게 된 ‘김민영’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서!
나는 기억하지 못했지만 녀석은 나를 기억하고 있었다.
십대 후반의 나이. 그러나 각성자들 중에서 견줄 자가 없을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가지고 있었던 녀석.
평단원으로 입단했지만 불과 3년 만에 부단장의 위치까지 올라왔다.
하지만 최후의 영웅일 때의 나는, 정을 주지 않았다. 모든 영웅들이 죽고 나만 남았을 때 그 고독감을 떨쳐내지 못했다.
유일하게 남은 인연이라곤 김민식. 놈뿐이었으니까.
알레테이아의 교단을 습격하고, 하늘까지 솟아오른 뱀의 형상 안다니우스를 죽이며 내 휘하 기사단은 전멸했다. 나를 포함해, 모두 죽었다.
그리고 그때 김민영도 죽었다. 끝까지 나를 지키다가, 그렇게 가버렸다.
‘너란 녀석은 끝까지······.’
내가 돌아오며 김민영 역시 없어진 거다. 그런 존재가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없던 것’으로 되어버렸다.
암흑인이 되어, 크리퀴가 되어 내 옆에 있었으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인연. 이게 인연이라는 건가?
운명은 피할 수 없다는 걸까.
녀석은 이번에도 나를 지키려고 했다. 루의 심장의 건네며 나만큼은 살리려고 하고 있었다.
바보 같은 녀석.
하지만, 덕분에 깨달았다.
‘원죄’라 칭했지만, 이들에겐 죄가 없다는 걸.
루의 심장을 본체의 내가 쥐었다.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루의 심장(value-???)>
● 신성 ‘루’의 심장을 표현한 보석.
● ‘루’의 파편이 잠들어 있다.
● 파편에 담긴 힘을 사용해 사용자를 보호하는 절대적인 보호막 생성(1회 사용 가능).
<루가 부서지며 그 힘이 차원 곳곳으로 퍼져나갈 때 남아있던 파편이 담겨 있습니다.>
말 그대로 ‘사용자’만을 보호해주는 절대적인 방어막을 생성해준다.
크리퀴는 이것을 자신이 사용하는 대신, 나에게 주었다.
내가 무사히 귀환하길 바라며.
“무모한 생각은 버려라. 지금 상태의 둠은 막을 수 없으니. 확실하게 죽을 거다.”
안달톤 브뤼시엘이 내게 말했다. 나를 말리듯, 타이르듯 그렇게 말이다.
신기한 일이었다. 안달톤 브뤼시엘. 그처럼 자존감이 높은 로드를 나는 본 적이 없다. 누가 뭘 하든 자신만의 길을 가던 게 안달톤 브뤼시엘 아니었던가.
그런 그가 지금, 나를 말리고 있다.
“어차피 가만히 두면 자멸할 녀석이다. 로드들이 죽고, 암흑인들이 죽어나가겠지만, 너와는 관계없는 일 아닌가?”
“날 말리는 건가?”
“너는 다른 멍청한 로드들과는 다르지 않느냐. 너라면 ‘위대한 별’을 얻기 위한 선의의 경쟁자로 인정할 수 있지.”
위대한 별, 위대한 별, 위대한 별!
안달톤 브뤼시엘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그것만이 들어있었다.
이제는 존경심까지 생길 정도다. 그만큼 외길만을 걷고 있다는 뜻이므로.
나쁘다는 건 아니다. 궁극적인 결과를 위해 달려가는 건 칭찬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나는 역시 인간인 모양이었다.
하고 싶은 것, 갖고 싶은 것, 해내고 싶은 것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그리고 지금, 나는 해내고 싶다.
둠을 죽이고 싶었다.
“도우지 않을 거면 방해나 하지 마라.”
다시금 ‘검은 별’을 연성했다. 모든 마력을 전개하여 ‘칠흑의 손길’을 피어 올렸다. 그리고 본체는 ‘월천’을 들었다.
월천으로 둠을 두드렸을 때 느낌이 있었다. 녀석의 정신을, 혼을 흔들 수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버닝 둠’을 사용해 모든 효과를 없앴다지만 그뿐이다. 다시 새로 두드리면 흔들림이 생길 것이다.
‘때로는 불처럼, 때로는 물처럼, 때로는 바람처럼.’
흘러가리라.
탈혼무정검. 그리고 태을무극심법.
지금 나는 불이 되었다.
불이 되었을 때, 나는 모든 것을 집어삼킬 기세로 타올랐다.
어느 때보다 심장이 뜨겁게 뛰었다. 격렬하게. 더욱 격렬하게!
[7대 죄악, ‘분노’가 사용자의 상태에 응합니다.]
[계약이 완료되었습니다.]
[순수능력치 중 ‘마력’을 태워 ‘분노의 화신’이 됩니다.]
[89의 순수한 마력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순수능력치가 ‘분노의 화신’ 상태에 못 미쳐 제대로 된 효과를 발휘할 수 없습니다.]
부족하다고?
그렇다면 채워주마.
‘모든 잠재능력치를 마력에.’
[10의 잠재능력치가 마력에 추가됩니다.]
[99의 순수한 마력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순수능력치가 ‘분노의 화신’ 상태에 어느 정도 적합함을 가집니다.]
[‘분노의 화신’ 상태로 돌입합니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악!
타오른다. 둠. 녀석만 타오르는 게 아니다.
나 역시 내 분노로 타올랐다.
하지만, 녀석과 다른 점이라면.
녀석은 자아를 상실했다는 것이다. 스스로가 왜 싸우고 있는지조차 모르는 상태라는 점이었다.
나는 다르다.
나는 안다.
밉다. 증오스럽다.
둠, 녀석을 죽이고 싶다.
잘근잘근 씹어서 내던지지 않으면 직성이 풀릴 것 같지가 않았다.
‘죽이고 싶다.’
내 모든 분노는 둠에게로 향했다.
이 모든 사단의 원흉은 둠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니까······ 죽인다. 죽여야 한다.
콰칭!
둠의 낫이 월천에 닿았다.
하지만 둠은 월천을 잘라내지 못했다.
다른 로드의 무기들조차 무 베듯 잘라내었지만, 분노 상태의 내가 월천을 휘두르자 경쾌한 소리를 냈다.
화륵!
화마가 나를 덮친다. 머리가 타오르고, 전신의 피부가 벗겨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는 월천을 뻗는 걸 멈추지 않았다. 아무런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세계가 점차 붉게 물들어갔다. 그리고 둠의 ‘영혼’이 내 눈에 비춰졌다. 오로지 내가 분노를 느끼는 대상에 한하여.
월천이 닿을 때마다 둠의 ‘영혼’이 위태롭게 휘청거렸다.
-크아아아아아아!
녀석은 보이지 않는 비명을 내질렀다.
통한다. 그렇다면, 가능성은 있다.
-검은 별.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저주.
분노는 저주와 닮았다. 우리엘 디아블로가 가진 권능의 힘이 더욱 강해졌다. 하늘이 어둡게 물들고, 수많은 별들이 떨어지며 ‘검은 별’과 합쳐졌다.
더욱 커진 검은 별은 둠의 발목을 잡았다. 둠을 약화시키고, 둠의 정신을 헤집어놓기 시작했다.
하지만 부족하다.
단순한 저주만을 걸고 있어서는 안 된다.
‘내게 한계는 없으니.’
우리엘 디아블로. 또 다른 내가 움직였다.
조금씩 커져가던 ‘검은 별’이 지상에 낙하하더니, 우리엘 디아블로의 손에 쥐어졌다.
그리고 검이 되었다.
[저주의 총아. 타락의 형상이 완성되었습니다.]
[우리엘 디아블로의 권능이 한 단계 진화합니다.]
[검은 별(10Lv) -> 타락의 형상(11Lv)]
나와 우리엘 디아블로는 연결되어 있다.
내가 분노하면, 우리엘 디아블로도 분노한다.
내가 진화하면, 우리엘 디아블로도 진화한다.
하나면서 둘, 둘이면서 하나.
서로가 부족한 점을 보완해줄 수 있는 그러한 존재.
-한계가 깨졌다.
우리엘 디아블로는 단언했다. 자기는 멈춰있노라고. 새로운 마법을 익힐 수 없다고.
하지만, 익히지 않아도 좋다. 가지고 있는 것을 발전시키면 되는 것이다.
타락의 형상을 쥐고서 달려 나갔다.
11레벨. 단일 스킬로는 처음 보는 권능. 사천왕이 지닌 불사성, ‘심연’이라 불리는 마법만이 11레벨이라 불렸다.
그에 버금가지만, 타락의 형상은 그러한 불사조차 죽일 수 있는 극한의 권능이었다.
스아아아아아아아!
월천과 타락의 형상이 둠을 때렸다. 둠을 베었다.
월천은 둠의 영혼에 고통을 새기고, 타락의 형상은 둠의 신체에 저주를 남겼다.
타락이야말로 가장 강렬한 저주. 타락의 형상이 닿은 곳엔 불신이 시작됐다. 신체가, 근육이, 세포가, 서로를 불신하게 만들며 스스로 자멸의 길을 걷도록 하는 것이다.
“크아아아아아악!”
둠이 고통에 몸부림쳤다.
타락한 둠의 왼손이 오른손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스스로를 불신하게 만드는 것이야말로 어떠한 저주조차 따라오지 못할 강렬한 힘이다.
“‘침략’!”
“‘침략’을 재개하라!”
무언가를 느낀 암흑인들이 정신을 다잡고 침략을 재개했다. 벌써 삼분의 일가량이 녹아내렸지만, 남은 암흑인이 아직도 많은 상황.
혼의 균열은 더욱 빨라졌다. 하지만 둠의 공격은 여전히 매서웠다.
‘피하지 못한다.’
아무리 ‘분노의 화신’이 되고, ‘타락의 형상’을 손에 넣었대도, 압도적인 능력치의차이는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다.
하여 나는 일정부분 피하는 것을 그만뒀다. 완벽하게 놈을 처리하는 건 불가능하다. 나 역시도 양보를 해야 함이었다.
가령 한쪽 팔과 같은 것들을.
눈을, 귀를.
그러나 마냥 공짜로 주진 않을 것이다.
내가 포기한 만큼, 둠도 포기해야 한다.
가령 마력의 원천인 심장과 같은 것들을.
영혼을, 스스로의 성취를.
“너는······ 결코······ 나를······ 막지······ 못 한다······!”
둠의 불꽃이 약해졌다.
영혼의 절반에 금이 간 둠이, 쥐어짜내듯 말했다.
그리고 천천히 둠의 몸이 파열되기 시작했다.
균열을 일으켰다. 나무가 재가 되어가는 과정처럼.
그러나 그것은 소멸이 아니었다.
‘자폭.’
내가 얻지 못하면 남도 얻을 수 없다는 거냐.
녀석이 자폭하면 모두 죽는다. 오로지 위대한 별만이 남을 것이다. 그리하여 흐레스벨그는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룰 것이었다.
그리 둘 순 없다. 그렇게 두진 않을 것이다.
‘루의 심장.’
나는 루의 심장을 발동시켰다.
나는 하나이자 둘이다.
하나만 남으면. 남을 수만 있다면······ 기회는 생긴다.
둠을 죽일 수 있다면, 남는 장사다.
[‘루의 절대적인 보호막’이 생성되었습니다.]
[사용자-우리엘 디아블로]
[모든 공격을 막고, 모든 공격의 유출을 막는 이 보호막은 감히 상위의 신성조차 쉬이 건들지 못하는 것입니다.]
잠깐.
어째서 우리엘 디아블로가······?
순간, 나는 튕겨져 나갔다.
어느새 우리엘 디아블로의 신체가 나를 멀리 던져버리곤, ‘루의 심장’을 쥔 채 발동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때만큼은 그 몸이 내 말을 듣지 않았다.
[‘전이’가 끊겼습니다.]
[일방적으로 계약이 해지되었습니다.]
[‘우리엘 디아블로’와 ‘오한성’의 동화율이 0%로 수렴합니다.]
눈을 부릅떴다.
없어진 게 아니었던가. 그는 분명히 사라졌을 텐데, 어떻게?
보호막으로 부족하다 여긴 걸까. 타락의 형상이 둠과 우리엘 디아블로를 감쌌다.
쿠아아아아아아앙!
동시에 보호막 안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이윽고 보호막이 팽창하고 수축하며, 한없이 줄어들더니 0이 되었다.
완전한 소멸.
사라져버린 것이다.
팅. 팅. 팅구르르······.
사용된 보석 하나만을 남기고서.
원래 없었던 것처럼······ 그렇게.
< 49. 세계(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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