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 세계(2) >
둠은 이를 갈았다. 몇 번이나, 계속해서 자신을 방해하는 버러지 같은 놈들.
소용없다는 걸 알면서도 달려드는 건 부나방과도 같았다. 활활 타오르는 자신의 작염에 이끌려 죽을 지도 모로는 다가오는 것이다.
‘버러지 같은 놈들······!’
최강자. 자신은 최강자였다.
만약 암흑인들이 자신의 정신에 ‘침략’을 행하지만 않았어도, 안달톤 브뤼시엘과 우리엘 디아블로쯤은 혼자서 충분히 정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암흑인들의 ‘침략’은 진짜였다. 저들의 저주파는 숫자가 늘어날수록 기하급수적으로 강렬해진다. 흔히 말하는 ‘세뇌’와도 같으며, 잠시라도 정신방어를 늦추는 순간 자신은 더 이상 둠이되 둠이 아니게 될 것이다.
‘오로지 정신만이 남은 벌레 같은 혼들. 잊힌 영혼에게 주어진 마지막 권한이자 발악이렷다.’
하지만 그다지 문제될 건 없었다.
이런 일도 벌어질 것이라고 생각해서 대비를 마쳐뒀으니까. 둠을 침식하며 이미 몇 차례나 확인해본 바다.
별 다른 변수가 없다면, 자신은 위대한 별과 접선하게 될 터였다.
위대한 별과 ‘원죄’가 만나면 모든 암흑인은 진실과 마주하며 사라진다. 본래 없던 자들이니 다시금 무로 돌아가는 것이다.
‘우리엘. 디아블로.’
뚝, 뚝, 그 증오스러운 이름을 끊어서 되뇌어본다.
녀석이 경매의 필수적인 물품들을 가져갔다. 축복받은 성서, 최초의 발자국. 그 두 개가 없음으로 인해 위대한 별의 방어벽을 완전하게 무너트릴 수가 없게 됐다.
하지만······ 어쨌건 ‘원죄’만 있으면 위대한 별을 옮길 수는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암흑상회’와 ‘암흑인’만 없으면 자신이 ‘위대한 별의 관리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 역할을 전해 받는 것에 지나지 않지만, 압도적인 우위를 점할 수 있다는 점에선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우리엘 디아블로······!’
날개가 잘렸다.
파멸의 마력으로 이루어진데다 자신의 ‘권능’이 접합되어 만들어진, 절대로 잘릴 리 없는 날개가 잘려버렸다.
왜?
우리엘 디아블로. 그리고 저 인간놈 때문이다.
평범한 인간은 아니었다. 평범할 리 없었다. 하지만, 본 순간 알게 됐다. 자신이 들여다 본 ‘지식의 샘’에서 시공간을 되돌린 존재가 있다는 걸 알게 된 것처럼.
‘격이 다르다.’
인간이되 인간이 아니었다.
자신이 둠이되 둠이 아닌 것처럼.
아니, 그와는 조금 다르다.
인간이지만 상위종의 격을 지니고 있었다. 말하자면 데몬로드와 같은 존재가 인간의 몸으로 돌아다니고 있는 거다.
저런 경우를 둠은 알고 있었다.
“수호자냐?”
검격이 날아들었다. 둠은 파멸의 마력을 양 손에 둘러 검격을 막았다. 한 번, 두 번, 세 번······ 반복 될 때마다 검격은 더욱 더 매서워졌다.
수호자. 인간의 수호자가 분명하다.
인간이되 그 격을 초월하여 수호자가 된 것이다.
문제는 왜 수호자가 이곳 심연에 있느냐는 거다.
‘모든 수호자는 니드호그에게 잡아먹힌 게 아니었던가?’
그렇다. 모든 신들은 ‘공허’로 끌려갔고, 남은 찌꺼기들은 모두 ‘니드호그’가 먹어치웠다. 그 포악한 포식자가 수호자 하나만을 남겨둘 리가 만무했다.
더욱이 이해가 안 되는 건 수호자가 우리엘 디아블로와 손을 잡은 것이었다. 이는결코 말이 안 되고,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수호자가 아닌 걸까?
“그래봤자 찌꺼기에 불과하다. 너는 나를 이길 수 없다!”
둠이 입을 크게 벌렸다. 동시에 파멸의 기운이 입 안을 맴돌며, 거칠게 뱉어졌다.
쿠아아아아아아아아앙!
용의 숨결과 비슷하지만, 궤를 달리했다. 닿은 모든 것들이 ‘변형’을 일으켰다.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모든 것들이 ‘둠’을 돕기 시작했다.
그 공간 안에 들어선 것은 마력이 저하되며 그것이 평평한 길이라면 적이 들어섰을 때 마찰력을 0으로 만든다.
생명체라면 언데드로 변화해 싸우고, 공간 전체가 적에게 한정하여 ‘지옥’처럼 변한다. 지옥도. 둠이 가진, 일방적인 싸움을 위한 패였다.
“잔꾀를 부리는군.”
하지만 자신을 노리는 게 인간만 있는 건 아니었다.
안달톤 브뤼시엘.
사자왕 또한 있었다.
1:1이라면 절대로 자신의 상대가 되지 못하겠으나, 모든 저주와 침략을 받고 있는 상태였다. 게다가 왜인지 모르겠지만 저 인간놈의 검은 묘하게 상대하기가 벅찼다.
검을 부딪칠 때마다 정신과 혼이 뒤틀리는 느낌.
까딱 잘못했다간 암흑인들의 ‘침략’에 당할 수도 있겠다싶어서 최대한 부딪히는 건 피하고 있었는데, 안달톤 브뤼시엘이 재차 합류한 것이다.
“둠. 저 ‘위대한 별’은 나의 것이다. 허튼 자가 손을 대기에 저 별은 너무나도 아름답지.”
그르르릉!
안달톤 브뤼시엘의 몸이 ‘진동’했다. 눈에 보이지 않을 속도로 진동하며 둠의 모든 ‘파멸’을 지워버리고 있었다.
오로지 안달톤 브뤼시엘이 서 있는 영역만을 한정하는 것이었지만, 저 ‘진동’은 무척이나 까다롭다.
“어차피 네놈도 오래 싸우지 못한다는 걸 안다. 안달톤 브뤼시엘!”
그래도 괜찮다.
저 ‘진동’은 무한하지 않다.
한계가 있다.
그만큼 많은 마력을 잡아먹는 탓이다.
녀석이 ‘대악’을 깨웠다면 이야기가 다르겠지만, 보아하니 원하던 걸 손에 넣지 못한 듯싶었다.
“그 전에 죽이면 그만이지.”
안달톤 브뤼시엘이 거대한 대검, 대악(大惡)을 꺼내 펼쳐냈다. 순간 검이 수십 갈레로 분산된 듯이 보이더니 그대로 둠의 몸을 찌르고, 베어냈다.
허상이 아닌 진짜다. 엄청난 속도로 진동을 해서 검도 잔상이 남는 것이었다.
콰르르르르!
둠이 스스로 파멸의 마력에 자신의 몸을 구겨 넣었다. 어두운 뭉게구름처럼 둠을 감싼 마력이 안달톤 브뤼시엘의 검을 쳐냈다.
안달톤의 검은 실존하는 모든 것들을 베어내지만, 한순간 둠은 자신의 몸을 일시적으로 ‘유체화’할 수 있었다.
유체화 하는 동안에는 어떠한 물리적인 공격도 통하지 않는다.
마법적인 공격이라 할지라도 어지간한 ‘준권능’ 정도가 아닌 이상에야 자신의 항마력을 뚫어낼 수 없다.
문제는 자신도 공격을 할 수 없다는 것이지만.
“별을 취한 후 네놈들 모두를 죽이리라.”
상관 없었다.
자신의 목적은 오로지 ‘위대한 별’뿐.
재애애애앵-!
그런데.
순간 두개골이 울렸다.
머릿속이 펑! 하고 터지는 느낌이었다.
‘뭐냐.’
고개를 돌리자, 유체화한 자신의 몸에 인간놈이 검격을 때려 넣고 있었다.
통하지 않는다. 그냥 스쳐지나가야 정상이다.
헌데 놈의 검은, 자신의 몸을 마치 몽둥이마냥 툭툭 때려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검이 한 번씩 튕겨나갈 때마다, 극심한 두통과 함께 정신이 날아가버릴 것만 같은 충격이 찾아왔다.
그럴수록 정신의 틈이 넓어지고 암흑인들의 ‘침략’이 들어왔다.
‘대체 어떻게······!’
검으로는 절대 자신을 베지 못한다.
때릴 수조차 없다.
그래야 정상이다. 그래야 정상인데······.
인간놈은 때리고 있었다. 눈을 감고서, 혼자 무언가를 중얼거리며.
“일망무제(一望無際)의 끝없는 사막조차도 나를 막진 못하였다······.”
마치 귀기가 어린 듯했다. 인간의 양쪽 어깨 부분에서 푸르른 마력이 솟아나고 있었다. 강림. 아니, 강신인가?
인간이 검을 휘두를 때마다, 저 푸른 마력이 함께 자신을 때린다.
푸른 마력은 형상을 갖춰갔다. 누구지? 누가 저 수호자의 뒤에 있는 거지?
‘위대한 별······?’
그리고 둠은 놀랐다.
놀랄 수밖에 없었다.
푸른 마력이 그려낸 형상은, 위대한 별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닮아있었으니까.
저 거신의 형상이 왜 저 인간놈의 뒤에 그려진 것인지, 둠은 알 수 없었다. ‘지식의 샘’을 보고 수없이 많은 지식을 깨우쳤대도, 저 현상만큼은 알아낼 수가 없었다.
투웅! 투우우웅!
“끄아아아아악!”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인간놈의 검이 유체화한 자신의 몸에 닿을 때마다, ‘침략’은 더욱 거세졌다. 틈이 열리자 물밀 듯이 밀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대로는 당한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되는데. 조금만 더 가면 ‘위대한 별’을 거머쥘 수 있건만!
우리엘 디아블로의 저주도 성가시기 그지없다.
“오냐. 더 이상 피하지 않겠다. 싹 다 죽여주마!”
둠이 유체화를 풀었다.
‘버닝 둠.’
그리고 파멸의 마력을 전부 개방했다.
스스로를 태우고, 주변 모든 것을 태워버리는 둠의 마지막 한 수!
쿠르르르르르르르르!
둠의 전신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지옥의 사자와 같은 얼굴로 인간을, 우리엘 디아블로를, 안달톤 브뤼시엘을 바라봤다.
버닝 둠은 단순히 신체를 태워 마력을 불사 지르는 마법이 아니다.
신체를 태우고, 모든 마력을 공물로 바쳐, 스스로 진짜 ‘사신’이 되는 마법이었다.일순간이지만 진짜 ‘신’이 될 수 있는 최후의 권능.
곧 거대한 불로 이뤄진 낫이 둠의 손에 들렸다. 이 순간, 둠의 정신은 온전히 스스로의 ‘신’에게 감응됐다. 더 이상 암흑인들의 정신공격도, 우리엘 디아블로의 저주도 통하지 않는다.
다만······.
이 상태가 되면, 오로지 스스로의 ‘신’의 의지에 따라 움직이게 된다.
적군과 아군을 가리지 않고, 모든 것을 파멸시키지 않으면 끝나지 않는 또 다른 저주.
“그아아아악!”
그것은 짐승의 울부짖음이었다.
조금의 지성도, 지능도 남아있지 않았다.
오로지 부술 뿐이다. 오로지 파괴할 뿐이었다.
콰아아아아아앙!
모든 게 사라진다. 타오르고, 재가 된다.
낫이 닿자 안달톤 브뤼시엘이 형편없이 튕겨져 나갔다.
아무도 둠을, 사신을 막을 수 없었다.
* * * * *
절로 욕이 나왔다.
설마 자신을 태워가며 대처할 줄이야.
‘모든 저주와 정신침략을 없애는 대신, 스스로를 태우는 권능이라.’
스스로를 태우고, 이지를 상실하지만 막강한 힘을 얻는다.
둠은 보이는 모든 것을 파멸시켰다. 아군과 적군을 구분하지 않았다. 그를 위해 싸우던 로드도, 암흑인들도 그의 낫을 피하진 못했다.
순식간에 회장 전체가 불바다가 됐다.
지옥이 있다면 바로 이곳이리라.
“지금 상태의 둠은 죽일 수 없다.”
“스스로 죽기를 기다리면 되겠군.”
안달톤이 말하고, 내가 답했다.
하지만 그가 고개를 저었다.
“이곳에 있는 자들 중 대다수가 죽을 것이다.”
“피하면 그만 아닌가?”
“주변을 둘러봐라. 이미 모든 게 그의 영역 안이다. 피할 수 없다.”
둠에게서 피어난 불길은 주변 모든 걸 집어삼키고, ‘자신의 편’으로 만들었다. 지옥도. 적에게 지옥이 되는 저 스킬이 이미 주변 전역에 발동되고 있는 셈이었다.
“이 영역은 놈을 죽여야 사라진다. 그리고 점차 영역이 줄어들고 있지.”
맞다. 상회 전체가 쪼그라들고 있었다.
둠을 중심으로, 마치 흡수되듯이 말이다.
괜히 파멸의 전조가 아니다. 모든 걸 파멸시켜야 끝나는 스킬이라니.
“힘을 합쳐 놈을 죽여야 한단 말이냐?”
“별로 좋은 생각은 아니지만, 맞는 말이긴 하군.”
버닝 둠. 아무리 녀석이 스스로를 태워 신격화 되었대도 이곳에 모인 괴물들은 모두가 ‘괴물 중의 괴물’이었다.
신 몇쯤은 간단하게 해치워버릴 수 있는 전력.
“하지만 나는 도울 생각이 없다.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저 많은 로드 중 절반은 둠에게 죽겠지. 내가 ‘위대한 별’을 얻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래. 안달톤 브뤼시엘은 이런 놈이었다.
짜고 치는 ‘전쟁’을 치룰 때조차도 틈이 나면 나를 잡아먹으려고 했던 놈.
아마 다른 로드들도 비슷한 입장일 것이다.
이들을 규합한다는 어리석은 생각 따윈 하지도 않았다.
“우, 우리엘 디아블로님! 살아계셨군요!”
그때, 한 암흑인 하나가 헐레벌떡 나를 향해 달려왔다.
“크리퀴.”
내가 암흑상회에 심어놓은 세작.
하지만 크리퀴의 몸은 이미 반쯤 녹아있었다.
나를 위해 상회를 세우고, 경매에 도움이 되는 정보들을 흘리며, 스스로의 목적을 달성하고자 굳건하게 달려가던 노력파의 암흑인.
‘지배’한 상태지만 그럼에도 나를 보고자 달려온 것이다.
아마도 자신의 죽음을 인지한 것이리라.
“바, 받아주십시오. 허억! 허억! 적어도 한 명은······ 살 수 있을 겁니다.”
그러곤 크리퀴가 품에서 목걸이 하나를 꺼냈다.
목걸이에 달린 보석이 영롱한 하얀색 빛을 내고 있었다.
“······ 루의 심장?”
“제가 배, 백작이 되었을 때 받은 겁니다. 모, 모두 우리엘 디아블로님 덕이죠. 헤헤.”
난 별로 크리퀴를 챙겨준 적이 없다.
크리퀴는 내가 지배한 ‘대상’이었으니까.
정작 크리퀴는 그렇게 생각고 있지 않은 모양이었다.
크리퀴의 몸은 점차 녹아나고 있었다. 둠이 가진 원죄가 위대한 별과 가까워졌을 때, 영향을 받은 게 분명했다.
이윽고 크리퀴의 몸에서 어둠이 걷혔다.
“······.”
이윽고.
나는 크리퀴의 ‘본체’를 보곤 할 말을 잃었다.
내가 아는 사람이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형체가 찌그러졌지만, 그렇지만, 내가 모를 수 없는 사람이었다.
‘아아.’
주변을 둘러봤다.
‘원죄’를 지닌 둠의 공격에 암흑인들 모두가 녹아버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무에서무로.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는 거라지만, 그렇다지만.
‘내 마음대로 행하리라.’
보석을 쥔 주먹을 굳세게 쥐어보였다.
< 49. 세계(2) > 끝
ⓒ 온후
작가의 말
늦어서 죄송합니다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