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 대립자(5) >
쿠르르르릉!
그라디아의 억제되어있던 마력이 폭주하기 시작했다. 철창과 제어구가 격려하게 흔들리며 공명음을 낳았다.
하지만 그라디아의 눈은 내게 고정되어 있었다.
‘뭐지?’
짐짓 당황했으나, 착각은 아니리라.
“제어구의 강도를 높여라!”
콰득! 콰득! 콰드득!
경매진행자의 입에서 그 말이 튀어나오기 무섭게, 그라디아의 신체가 파열되는 소리가 곳곳에 울려 퍼졌다. 강제로 살을 짓이기고 뼈를 바를 정도의 압박을 가하고있는 것이다.
허나 그라디아는 신음 한 번 내지 않았다. 이빨을 보이며 철창을 물어뜯고, 죽음조차 불사한다는 듯 광란하고 있었다.
“대단하군. 암흑상회의 말을 따르자면 저 철창은 로드조차 봉인할 수 있는 ‘절대방벽’아니던가?”
“게다가 지금 그라디아의 상태는 상당히 약해져있지.”
“괜히 최강의 용종이라 불리는 게 아니로군.”
로드들은 감탄했다. 그들은 일말의 위기의식조차 없었다. 저 상태로 발악해봤자,결국 철창을 뚫고 나올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렇다.
그라디아의 발악은 발악일 뿐이었다. 죽기 직전까지 약화 된 상태로는 저 철창을 부술 수 없다. 동물원 원숭이마냥 구경을 당할 수밖에.
절대다수의 로드들이 눈독을 들였다. 군침을 삼켰다. 그라디아. 이미 완성 된 용.즉시 전력으로 사용할 수 있으며, 전장의 공포로 군림하기에 이보다 좋은 소재는 없다.
‘확실히······ 내가 봐왔던 용들은 상대도 안 되어 보이는군.’
과거, 나 역시 몇 마리의 용을 사냥한 바가 있었다. 알레테이아 교단의 교주가 기르는 암혹룡도 그중 하나였다.
하지만, 그 모든 용들을 합쳐도 그라디아 하나만 못하다.
그건 ‘심안’으로 살피자 더욱 일목요연해졌다.
이름: 그라디아(value-2,977,770)종족: 암흑거룡(暗黑巨龍)능력치:
힘 120 민첩 120 체력 130
지능 140 마력 150
잠재력(660/660)
특이사항:
- 지저의 수호룡 중 하나.
- 각종 봉인과 제어구에 의해 상당히 약화 된 상태입니다.
스킬: 거룡의 포효(10Lv), 고대 용의 지식(10Lv), 거룡의 피부(10Lv)총합능력치 660!
압도적이다. 황홀할 수준이었다. 어지간한 데몬로드가 아니라, 수장의 파벌과 맞벌을 정도의 무력을 보유하고 있었으니.
물론 데몬로드는 그 특성상 무한하게 강해질 수 있고, 절대다수를 거느리며 여러 가지 방식으로 성장할 수 있는데 반해 그라디아의 성장은 끝이 나 있는 상태이긴 하지만, 그걸 감안해도 무시하지 못할 괴물이었다.
‘피가 튀기겠군.’
특별한 물건으로 스스로를 치장해도, 능력치가 상승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그러는 주제에 포인트는 무시무시하게 차지하니 효율이 좋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완성된 괴물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불리할 때 전장에 내보낼 수도 있고,전략적인 사용 또한 가능하므로. 오히려 단순 효율 면에선 장비 같은 것 몇 개보다 그라디아 하나를 사는 게 훨씬 낫다.
“이제야 겨우 안정이 되었군요. 보셨다시피 무시무시한 괴물 중의 괴물입니다. 용 중의 용이며 그라디아를 거느린다는 것만으로도 그 위엄을 나타낼 수 있지요. 부디 현명한 선택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진행자의 말이 끝나는 순간, 로드들의 보이지 않는 전쟁이 시작됐다.
그라디아. 너무나도 탐이 나는 녀석이다. 7대 죄악을 구매하고 둠을 막아야하는 나조차도 그라디아만큼은 어떻게든 구하고 싶었다.
슬쩍, 둠을 봤다.
그리고 둠의 시선이 그라디아에게 박혀있는 것을 확인했다.
‘관심이 있다. 아니면 관심이 있는 척을 하는 건가?’
놈은 이미 한 차례 나를 속인 적이 있었다. 물론 비밀경매로 바뀌며 그다지 의미는 없어졌지만, 여전히 나를 의식하고 있긴 할 것이다. 내가 그러는 것처럼 말이다.
작전일까? 아니면 순수하게 그라디아가 필요한 것일는지.
‘거의 300만의 가치라.’
내가 본 어느 것보다 높은 수치였다. 100만이 넘어가는 것도 거의 본 적이 없는데, 그 세 배인 300만이라니.
‘둠이 처음 구매한 것은 세 개의 달.’
모든 능력치와 잠재력, 저항을 올려주는 희귀한 물건.
세 개의 달 자체가 필요했던 것일 수도 있고, 저 세 개의 옵션 중 필요한 게 있었을 수도 있다. 아직 확답하긴 이른 상황이지만······ 그 ‘세 개의 달’이 가지고 있던 옵션들과 비교해 그라디아에게 건질 수 있는 게 무엇인지 생각해봤다.
‘지저 수호룡의 직위, 고대 용의 지식, 혹은 거룡의 피부.’
우선 직위는 아닐 것이다. 제외하고.
고대 용의 지식······ 이 부분이 애매하다. 고대 용의 지식이라고 칭해지는 것을 나는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탓이다. 만약 둠이 노린다면, 이것일 가능성이 높다고 봤다.
그리고 거룡의 피부.
굉장한 방어력······ 항마력 등을 가져다주는 게 분명했다. 아니라면 암흑인들이 철저하게 몇 중, 몇 십 중으로 방비한 것들이 크게 효과를 주지 못했을 리 없으니까.세 개의 달과 비슷한 측면이 있다고 한다면 바로 이것이다.
‘항마력?’
······ 고민해봐야 할 문제인 듯했다.
비밀경매의 단점은 둠이 무엇을 바로 원하고 구매하려는 지 알 수가 없다는 것. 요령껏, 눈치껏 때려 맞춰야 한다.
나는 둠을 살폈다. 평소 둠의 언행은 기본이고 피나 마력의 순환까지 탐구하려고 했다.
운명의 장난을 사용해야 되나?
하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게다가 둠이 물건을 입찰할 확률 같은 건 운명의 장난으로 알아볼 수 없었다.
‘태도. 태도의 변화.’
우선 말이 없어졌다.
필요한 게 있어 선전포고를 할 때와는 다른 모습이다.
눈빛은 고정되어 있지만 갈망 따윈 읽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일부러 그러는 것 같기도 하다. 최대한 티를 내지 않기 위해.
‘건다.’
판단은 나의 몫이었다.
‘150만.’
가치의 절반에 해당하는 수치를 배팅한다. 100만은 당연히 넘을 것이다. 하지만 150만까지 배팅할 수 있는 로드는 거의 없었다.
기껏해야 셋, 내지 넷.
그리고 그리다이 하나만을 구매하는데 그만한 포인트를 들일 수 있는 자는 없다.
기껏해야 130만, 혹은 140만 언저리일 터.
“이번에도 박빙이었습니다. 게다가 굉장히 높은 포인트로 구매가 확정되었습니다! 놀랍습니다! 150만 포인트에 낙찰되었습니다!”
나다. 이번에도 내가 먹었다.
“150만?”
“대체 누가?”
로드들이 주변을 둘러봤다.
그러나 알 수 있을 리가 없다.
적어도 이번 경매가 끝나기 직전까지, 내가 무엇을 구매했는지 그들은 알 수 없었다.
그래서일까.
둠의 표정이 조금은 사나워진 것 같았다. 내색하지 않으려고 해도 미세한 마력의 움직임마저 제어하기엔 감정이 많이 격화 된 상태인 모양이었다.
‘남은 건 800만 가량.’
총 300만 포인트 가량을 사용했다.
발보르그의 이빨, 나태, 그리고 그라디아!
발보르그의 이빨은 차차하고 나태나 그라디아는 단번에 나를 더욱 높은 곳으로 데려다줄 수 있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다음 경매의 물건은 ‘축복받은 성서’입니다.”
“120만 포인트에 낙찰되었습니다!”
“다음 경매의 물건은 ‘태초의 발자국’입니다.”
“88만 포인트에 낙찰되었습니다!”
“다음 경매의 물건은······.”
······.
* * * * *
경매가 진행될수록, 둠의 머리는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이번 경매에서 얻어야할 것들이 많았다. 그래야만 보다 안정적으로 ‘위대한 별’을탈환할 수 있는 탓이다.
하지만, 막힌다. 누군가가 막고 서있다.
‘누구냐. 대체 누가 나를 막고 있는 것이냐.’
경매라는 이름의 전쟁. 압도적인 포인트를 갖고 있는 자가 강자다. 하지만 둠은 자신보다 더 많은 포인트를 보유한 존재가 있을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우리엘 디아블로, 안달톤 브뤼시엘······.’
만약에 있다면 그 둘이다.
왕의 직위에 올라서면 포인트를 벌 방법은 무궁무진하니까. 아무리 그래도 제일 큰 파벌을 움직이는 자신보다 더 많이 벌어들인다는 건 말이 안 된다.
나머지 로드들은 자신과의 전쟁을 대비하느라 많은 포인트를 썼다. 쓰도록 유도했다.
‘안달톤 브뤼시엘. 가장 알 수 없는 건 놈이다.’
우리엘 디아블로?
솔직히 녀석이 뭘 할지는 뻔했다. 태양왕의 성에서 왕이 되는 것만으로도 벅찼을 것이다. 세작을 모두 제거했다지만 녀석을 진정으로 따르는 자들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하지만 안달톤 브뤼시엘. 놈은 전대 사자왕의 모든 걸 차지했다. 세작도 제거하지않았다. 대놓고 보여주었다.
괴물. 로드들 중 가장 까다로운 괴물이 있다면, 바로 안달톤 브뤼시엘이다.
녀석 또한 포인트를 많이 쓰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세력과 힘을 지니고 있었다. 여러 가지 알 수 없는 행동들도 많이 하니 의외로 쌓인 포인트는 더 많을 것이다.
‘제로, 그리고 아르하임은 내 적수가 못 된다.’
넷 중에 하나가 자신의 휘하 데몬로드를 죽였다. 어쩌면 세작으로 심어두고 정보를 빼갔을 지도 모른다. 자신이 필요한 게 무엇인지조차······ 알아냈을 지도 모르는일이다.
‘암연의 가팔로. 최근 행동이 이상했지.’
암연의 가팔로가 잠시 모습을 감췄던 시기가 있었다. 그 시기에 녀석이 어디를 향했는 지만 알 수 있다면 모든 게 일목요연해질 것이다.
암연의 가팔로는 자신의 비밀을 알고 있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래서 암연의 가팔로가 향했을 길들을 모조리 탐색하는 중이었다. 땅의 기척을 읽는데 도가 튼 녀석들로 말이다.
‘경매가 끝나기 전에만 알 수 있다면.’
둠은 주먹을 쥐었다.
어쨌거나 자신을 방해하는 놈이 있을 거라곤 생각하고 있었다.
그놈을 찾기 위해 모든 전력을 투입한 상태다.
그리고 경매가 끝나기 전에 범인이 밝혀진다면.
‘총공격의 준비를 끝내 놨다.’
범인이 돌아갔을 때 남은 것이라곤 수많은 시체와 조각난 건물들뿐이리라.
* * * * *
요르문간드는 성과 어느 정도 떨어진 이름 없는 산 위에서 ‘요양’하는 중이었다.
자신의 뱃속에 있는 아이는 무척이나 중요했다. 임신이란 걸 경험하는 건 그녀도 처음이었지만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면 더욱 완전하게 태어날 수 있도록 심혈을 기울여야 했다.
후으으으으읍!
대지와 호흡하고 심연의 마력들을 모조리 빨아들인다. 그녀는 세계를 삼켰던 뱀. 모든 ‘근원’조차 씹어 먹어 버릴 수 있었다.
땅과 하늘, 주변의 모든 것들로부터 생명력을 얻었다. 그 모든 생명력은 오로지 태아를 위해 사용되는 중이었다.
주변 산이 황폐해지고, 대지가 죽어갔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많이 먹고 쑥쑥 자라려무나.”
요르문간드가 아름다운 미소를 흘려보았다.
자신이 이런 모성애를 가질 수 있다는 것 역시 처음 알았다. 그래서 더욱 신기했다. 필요에 의해서였다고는 하지만, 오한성. 그는 역시 신비한 기색이 있었다.
‘지금쯤이면 경매인지 뭔지를 하고 있겠지.’
그녀의 눈이 경매장이 있는 쪽으로 향했다. 전부 볼 수는 없지만 그녀의 눈은 보이지 않는 모든 구석을 훑을 수가 있었다.
하지만 경매장을 훑던 그녀의 눈이 잠시 한 지점에서 멈칫했다.
이쪽으로 다가오는 무리들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태양왕의 성 쪽으로 무언가를 찾듯이 옮겨가는 중이었다.
‘마침 잘 됐구나. 배가 고팠는데.’
그녀가 배를 툭툭, 두드렸다.
이 산 주변의 생명체는 모조리 싹이 말랐다.
뱃속의 아이는 먹보라서, 어지간한 양으로는 만족할 줄 몰랐다.
요르문간드가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
스르르르르.
뱀의 형태로 변이한 그녀가 ‘먹이’를 향해 쏜살같이 쇄도했다.
“암연의 가팔로의 행적이 이쪽으로 이어지는군.”
“여기로 가면 뭐가 나오지?”
“사자왕과 태양왕의 성이 나오지.”
그들은 추적자였다. 땅의 기억을 읽고, 아주 작은 흔적을 발판삼아 모든 것을 추적하는 추적자.
둠의 명령으로 암연의 가팔로의 흔적을 쫓은 지 벌써 수십일. 겨우 단서를 찾았다.
“······!”
“흠, 가팔로가 둘 중 하나를 만났단 말인가?”
“······!”
“둠님에게 보고해야겠군. 일단······?”
소리없이 기척이 하나씩 사라져갔다.
이에 의아함을 느낀 추적대의 대장이 고개를 돌리자, 고대하기 짝이 없는 뱀 하나가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게 아닌가?
스르륵!
하늘을 뒤덮은 뱀이 입을 벌렸다.
꿀꺽!
그리고 단번에, 추적대 전체를 삼켰다.
* * * * *
경매는 며칠이나 계속되었다.
중간중간 쉬는 텀을 두며 전략을 짜도록 구성한 것이다.
그리고 1차, 2차, 그리고 3차 경매가 종료되며 거의 모든 경매가 끝났다.
나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최대한 저지한 것 같군.’
1100만에 가까운 포인트를 대부분 써버렸지만 후회는 없었다.
내가 구매한 물건은 도합 8개. 하나에 평균 100만 포인트 가량을 조금 넘게 사용한 것 같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경매가 진행될수록 둠의 표정이 붉게 달아올랐다. 돈 주고도 못볼 진귀한 광경이었다.
“······ 추적대의 연락이 끊겼다고?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것이냐?”
둠이 그 파벌의 몇몇 로드들과 함께 심각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무슨 이야기인진 알 수 없지만, 상당히 심오한 문제인 것 같긴 했다.
“마지막 경매를 앞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전에, 낙찰자들을 공개해야 하는 저희의 입장을 헤아려주십시오.”
마지막 경매.
그게 시작되기 전에, 암흑인들은 결과를 공개한다고 했었다.
비밀경매가 끝나고 마지막 공개경매 하나만을 남긴 셈이다.
그리고 거대한 전광판과 같은 것이 공중에서 내려오며, 물건의 이름과 낙찰자, 그리고 사용한 포인트 등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1) 우리엘 디아블로. 8,800,000pt 사용.
-발보르그의 이빨, 7대 죄악 나태, 그라디아, 축복받은 성서, 최초의 발자국, 7대 죄악 분노, 7대 죄악 색욕.
2) 둠. 4,300,000pt 사용.
-세 개의 달, 칠흑의 벽, 용살자의 방패, 신성으로 가득 찬 그릇, 지옥절단기.
3) 안달톤 브뤼시엘. 2,700,000pt 사용-7대 죄악 교만, 7대 죄악 시기, 죄의 파편 3개······.
“880만 포인트······?”
“잘못 나온 건 아니겠지?”
데몬로드들이 가장 앞에 적힌 이름과 숫자를 보곤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그리고 그중, 가장 주먹을 부들부들 떠는 건 다름 아닌 둠이었다.
‘네놈······ 우리엘 디아블로!’
< 48. 대립자(5)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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