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 대립자(4) >
문제는 나 혼자만 ‘나태’를 노리는 게 아니라는 점.
‘타이밍이······.’
하필이면 비밀경매로 전환 된 직후 가장 처음 선보이는 게 내게 꼭 필요한 물건이라니. 둠에게 한 방 먹인 건 좋았지만, 이건 나 역시 한 방 얻어맞은 셈이었다.
물론 방법이 있긴 하다.
압도적인 포인트로 찍어 누르는 것!
나는 가능하다. 이곳에서 나만큼이나 포인트를 모은 데몬로드는, 없을 것이기에.
하지만 포인트의 분배 또한 내겐 중요한 과제였다.
만약 비밀경매로 전환되기 전, 둠과 나만의 대결이었다면 훨씬 싸게 구입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몇이나 참여할까.’
시작됐다. 이제 내가 원하는 포인트를 심상에 그려 넣고 마력을 주입하는 순간, 입찰가가 정해지며 암흑인들에게 전달될 것이다.
시작가도 없다. 싸게 사면 한없이 싸게 살 수 있지만, 비싸게 사면 한없이 비싸게 살 수밖에 없다는 뜻.
이게 맹점이었다.
‘시작가가 없다······.’
잠시, 생각했다.
로드들이 가지고 있을 평균 포인트에 대하여.
아직은 경매의 초반이었다. 포인트를 남용하기에는 이른 시간.
남용할 정도가 되려면 여유가 있어야 한다. 적어도 200만 포인트 이상은 있어야,여유롭게 참여가 가능할 것이다.
‘참여는 하되 혹시나 싶어 찔러보는 자들도 많겠지.’
싸게 적어서 혹시나 낙찰되면, 그것만큼 좋은 일도 없으니까.
나태. 저 신발을 로드들은 어느 정도의 가치로 평가할까.
‘50만? 60만?’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모르겠다.
미친척하고 구하려고 한다면 높게 질러버릴 수도 있을 터였다.
허나 현격한 차이의 가격을 적어내면 그 또한 손해다.
어렵다. 쉽지 않은 경매였다.
나는 심안을 가지고 있지만 그들의 심상마저 읽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내겐 그 비슷한 권능이 있긴 있었다.
‘운명의 장난.’
모든 것의 가능성을 점칠 수 있는 ‘꿰뚫어보는 자’만의 특권!
물론 정말로 모든 가능성을 점칠 순 없다.
간단하기 그지없는, 예를 들면 내일 비가 오느냐 아니냐 정도의 가능성을 점치는 것이다. 말 그대로 대충 하늘만 봐도 예상되는 수준 말이다.
그러니 확실하게 예상을 하고, 실행해야 한다.
무엇보다 이 권능은 하루에 세 번만 사용할 수 있다.
‘나태를 80만 포인트 이상으로 낙찰하는 데몬로드의 숫자가 둘 이상일 가능성.’
-80:20.
눈앞에 숫자와 비율이 떠올랐다.
애매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나도 데몬로드다. 나를 포함하여 경쟁자가 하나 이상 생길 가능성이 높다는 건, ‘나태’를 강하게 눈독들이고 있는 데몬로드가 있다는 뜻이다.
셋 이상으로 가면 가능성이 현저하게 줄어들 터.
‘큰 수확이군.’
자······ 이제 그게 누구인지를 찾아야 한다.
누가 나태를 노리고 있는 걸까. 하나만 찾으면 된다.
7대 죄악은 파츠가 갖춰졌을 때 보다 강한 힘을 발휘한다. 그것을 다른 로드들도 모르진 않을 것이다. 모든 파츠를 가질 수 있는 수준에 이른 자, 혹은 ‘사재기’를 하려는 자.
‘전자에 무게를 두자.’
사재기를 한다면 오히려 나로선 다행이다.
하지만 그만한 포인트를 보유한 자가 내 대접점에 선다면 여간 피곤할 것이었다.
일단 둠은 제외시켰다. 내가 ‘폭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둠이 구매한 물건과 연관성도 없고, 설령 필요하다 해도 죄악 모두가 필요하리라 여겼다.
그렇다면 남은 건······.
‘제로, 아르하임, 안달톤 브뤼시엘.’
그리고 나는 마지막 이름에 주목했다.
‘안달톤 브뤼시엘.’
왜일까. 왜 그의 태도가 신경 쓰이는가.
느닷없이 비밀경매를 제시한 건 그다. 그리고 그는 사자왕이다. 둠과 마찬가지로 머리를 굴릴 줄 알며, 내게 한 차례 경매를 양보한 적이 있지만, 그 역시 물건의 가치를 꿰뚫어보는데 이골이 나 있었다.
왜 하필 지금 타이밍일까.
‘사전에 알고 있었다?’
나 역시 암흑인들 사이에 첩자를 심어뒀다. 경매에 관한 전반적인 사항들을 미리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경매의 내용물까지는 알 수 없었다.
‘심안.’
나는 다시금 그를 살폈다.
이름: 안달톤 브뤼시엘(value-지배불가)
직업: 데몬로드
칭호:
● 절대악신의 힘(10Lv, 모든 능력치+8)● 별의 주인(9Lv, 모든 능력치+6)● 오롯한 왕의 길(9Lv, 마력+15)능력치:
힘 133(108+14)ss 민첩 135(111+14)ss 체력 124(110+14)ss 지능 124(110+14)ss 마력154(125+29)ss 잠재력(564+70/600)스킬: 심연(11Lv), 휘몰아치는 악(10Lv), 군림자(10Lv), 대악大惡(無)<전후비교>
힘 125 민첩 128 체력 117 지능 114 마력 139 잠재력(533+70/550)힘 133 민첩 135 체력 124 지능 124 마력 154 잠재력(564+85/600)내 기억이 맞는다면 세 번째 칭호는 본래 없는 것이었다.
능력치도 가파르게 상승했으며, 잠재력 한계치가 크게 올랐다.
그리고 못 보던 스킬이 있었다.
대악(大惡).
레벨이 없는 스킬은 무척이나 드문데, 이름으로 보자면 범상치는 않았다.
무엇보다 악과 관련 된 스킬이다. 커다란 악이라 칭할 정도인데 레벨이 없다는 건, ‘조건’을 충족해야 기능이 발휘된다는 뜻이었다.
조건이 무엇일까.
‘적어도 평범한 건 아니겠지.’
7대 죄악과도 무척이나 어울리는 이름 아닌가.
물론 이 모든 건 나의 망상이다. 추론이라 하기엔 근거가 빈약했다. 아주 짧고 얇은 실만 가지고 전체를 꿸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정도 가능성이면 충분했다.
나는 안달톤을 가상의 경쟁자로 선정하고, 그의 입장에서 나태에 얼마의 가격을 매길지 등을 분석했다.
‘라이라가 분석한 결과표에 의하면 안달톤 브뤼시엘의 보유 포인트는 대략 250만.’
라이라는 유능하다. 쉴 만도 한데, 더 열성적으로 움직이며 모든 걸 분석해 내게 가져왔다. 이 포인트 보유량에 대한 예측도 어느 정도 정보를 바탕으로 작성한 것이었는데, 안달톤 브뤼시엘이 250만, 둠은 도합 400만 정도로 추측하고 있었다.
틀릴 가능성이 높긴 하지만 크게 벗어나진 않을 터.
‘111만.’
상념을 흘려보냈다. 확정된 숫자를 생각하자, 삑- 소리와 함께 암흑인들에게 입찰가가 전달되었다.
“자. 입찰을 종료하도록 하겠습니다. 저희에게 모든 입찰가가 전달되었으며, 이중 가장 높은 입찰가를 불러주신 분에게 ‘나태’가 낙찰됩니다.”
곧 진행자가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더니, 입을 크게 벌렸다.
“놀랍군요! 매우 근소한 차이로 결과가 나뉘었습니다. 100만을 넘어, 110만을 넘어······.”
집중했다. 입 안이 바짝 말랐다.
곧, 진행자가 손가락 하나를 펼쳤다.
“111만 포인트에 낙찰되었습니다! 축하합니다!”
······ 휴.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안달톤 브뤼시엘에게 슬쩍 시선을 옮겼다.
동시에 눈이 마주쳤다.
‘역시.’
감이라는 게 있다.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갈고 닦을 수면 닦을수록 감은 날카로워지고 뚜렷해진다. 그리고 지금 눈을 마주치며 나는 확신하게 되었다.
내 상대는 역시 안달톤 브뤼시엘, 그였노라고.
그도 알았을 것이다. 내가 낙찰 받은 사실을 말이다.
하지만 안달톤 브뤼시엘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원래부터 그랬지만 사자왕의 지위에 오르고 더욱 속내를 알 수가 없어졌다.
“규칙상 저희는 낙찰자를 발표해야 합니다. 하지만 편의상 경매가 끝나기 직전에발표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다음 경매로 넘어가도록 하지요!”
발보그르그의 이빨, 그리고 나태.
일단 내가 원하는 것 하나는 얻었다. 참고로 111만 포인트면 어지간한 군단을 운영할 수 있는 수치다. 태양왕이 되지 않았다면 만져보는 것조차 힘들었을 액수.
몇 마리의 강력한 용을, 혹은 최상급의 괴물을 구매해 진영방어에 힘쓸 수도 있다. 영토가 넓어질수록 혼자 무언가를 할 때 제한이 생기는 탓이다.
그것을 물건 하나를 얻는데 사용한 것이다.
어지간한 데몬로드는 못할 행위겠지.
“다음은 물건이 아닌 생물입니다! 후후후, 보시면 깜짝 놀랄 겁니다. 저희도 깜짝놀랐으니까요. 아주 운이 좋았습니다. 일전, 저희는 경매에서 아주 강력한 ‘용의 알들’을 소개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중 ‘암흑룡의 알’은 가장 질이 좋았죠.”
아아, 카르페디엠이 구했던 그 암흑룡 말인가.
그 암흑룡의 심장을 내가 먹었다. 라이라가 암흑룡을 도살하고 심장을 꺼내 위급한 상태였던 내게 먹인 것이다.
“지저에서 군림하는 ‘검은 눈동자 그라디아’의 알이었지요. 그런데······ 저희가 그 ‘그라디아’를 입수했습니다.”
“그 지저의 학살자를?”
“어떻게?”
로드들도 여간 놀란 모양이었다.
그라디아. 들어만 봤지 나도 본 적은 없다.
이곳 심연에는 ‘지저’라는 곳이 존재하는데, 말하자면 지하세계다. 지하세계로 이어지는 입구는 마력이 탁하고 균열이 너무 심해서 들어갈 수 없다고만 알고 있었다.
그곳에 군림하는 자들 중 하나가 바로 그라디아라나.
“자신의 아이를 찾아 지저에서 올라왔더군요. 녀석을 잡기 위해 정말, 정말 많은 희생이 있었습니다. 만 단위의 병사들이 죽어나갔습니다. 귀족들도 숱하게 죽었지요. 후······ 다시 생각하기도 싫은 끔찍한 일이었습니다.”
진행자가 한숨을 내쉬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 막강함은 소문대로였습니다. 지저를 혼자 뚫고 나올 정도의 육체이니, 이 자리에서 이런 말을 하긴 좀 그렇지만, 로드분들이 상대하셔도 쉽지 않을 것입니다.”
데몬로드의 자존심에 금을 가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는 수긍하는 분위기였다.
“그라디아······ 지저의 왕 말인가.”
“살아있는 전설.”
“현존하는 용 중에선 가장 강력하지 않나?”
“아니. 그래도 녀석과 비견되는 용의 이름은 몇 개가 있지. 하지만, 그 용들은 모두 ‘지저’에 있으니······.”
그 천하의 데몬로드들이 수긍을 한다.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이윽고, 거대하기 짝이 없는 철창 하나를 암흑인들이 끌고 왔다.
그 안에······ 광조차 나지 않는, 모든 걸 빨아들이는 칠흑 같은 검은색의 용이 한 마리 있었다.
그 크기는 이타콰와 비교해서 꿀리지 않을 정도.
아니, 조금 더 큰 것 같기도 했다.
“죽은 것 아닌가?”
“마력이 느껴지지 않는데?”
하지만 그라디아는 눈을 감고 있었다.
진행자가 커흠, 목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저희가 사용하는 제어구가 통하지 않아, 일시적으로 마력을 동결시키고 재워둔 상태입니다. 이 작업을 하는 데에만 60일이 넘게 걸렸습니다. 정말이지 끔찍한 일이었지요.”
“그럼 다시 깨어나긴 하는 거냐?”
“예. 마력의 워낙 강대해 오랫동안 재울 수는 없지만, 앞으로 10일 정도가 흐르면 스스로 모든 제약을 깨고 일어날 겁니다. 무시무시하지 않습니까?”
진행자의 말마따나 무시무시했다.
덩치도 덩치지만, 느껴지는 카리스마는 이곳에 모인 파벌의 수장들에 뒤지지 않았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그라디아가 눈을 뜬 것이다.
“지금 눈을 뜬 것 같은데?”
“예? 그럴 리가요.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저희 상회가 혼신의 힘을 들여 확실하게 잠을 재웠는······.”
쿠웅.
그라디아가 비대한 몸집을 일으켰다.
“······ 데?”
진행자도, 암흑인들도 모두 할 말을 잃은 듯 멍하니 그라디아를 바라봤다.
쿠우우우웅!
이윽고, 그라디아가 철창에 몸통을 부딪치며 발광을 하기 시작했다.
“거, 걱정 마십시오. 마력은 여전히 잠긴 채입니다. 또한 주인이 정해지면 저희 암흑인들이 새긴 인장이 반응하며 복종하게 될 겁니다.”
-내 아들은······ 어디 있느냐······?
쿵! 쿵! 쿠우우웅!
미친 듯이 몸을 박아댔다.
신체가 정상적인 상태가 아님에도, 제어구와 철창에 새겨진 마법들이 발동하며 그라이다를 압박함에도, 녀석은 끊임없이 몸을 부딪혀댔다.
‘인상적이군.’
저만한 의지라니.
심연을 열어 그라디아의 능력치를 확인하고 놀랐지만, 저 끈질긴 의지도 내 시선을 앗아가는데 한몫했다.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라디아. 녀석과 내 눈이 마주쳤다.
-내······ 아들······.
< 48. 대립자(4) > 끝
ⓒ 온후
작가의 말
늦어서 죄송합니다. 요즘 잠을 제대로 못자서... 수정하다가 깜빡 잠들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