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 마지막 경매(完) >
‘암연의 가팔로가 왜?’
여태껏 둠이 심어놓은 세작을 정리하는데 온 힘을 쏟았다. 실제로 두 군단장을 포함하여, 사자왕과의 전쟁으로 모두 솎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암연의 가팔로가 찾아오리라곤 생각지 못했다.
파괴왕이라 불리는 그는 둠의 왼팔임과 동시에 전율스러운 학살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혼자서 찾아오는 건 자살행위다.
이곳은 태양왕의 성. 아무리 데몬로드라 할지라도 쪽수 앞에 장사 없는 법. 하물며 이곳엔 라이라도, 우리엘 디아블로도 있었다.
“나는 우리엘 디아블로에게 용무가 있다. 당장 그를 불러와라!”
쿠릉!
상반신은 거대한 황소의 모습을 한 그가 거대한 할버드를 휘두르자, 거센 풍압과 함께 주변의 모든 마족들이 밀려났다.
그러나 위협에서 그쳤다.
암연의 가팔로. 학살의 사신이란 이명에는 맞지 않는 행위.
그래도 이곳이 적진이라는 자각은 있는 걸까?
“행패를 멈춰라. 죽고 싶지 않다면.”
“라이라. 라이라 디아블로. 너를 보려고 이 먼 곳까지 온 게 아니다. 우리엘 디아블로는 어디 있느냐?”
“용무가 있다면 내게 말해라. 하지만 별 게 없는 용무라면, 너는 이곳에서 살아 돌아가지 못한다. 그쯤은 알고 있겠지?”
둠은 적이다. 그것도 가장 까다로운 적이었다. 그의 왼팔을 끊어낼 수만 있다면, 어느 정도의 출혈은 감수할 수 있었다.
거기다가 스스로 적진으로 들어왔으니 이 기회를 놓치면 바보다.
하지만 암연의 가팔로는 묘하게 긴장서린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린년이······.”
가팔로의 입장에서 라이라 디아블로는 풋내기, 그 이상이 아니다. 기껏해야 작고 좁은 전장에서 이름을 날린 정도로 암연의 가팔로와 견줄 수는 없다.
가팔로가 이를 깨물다가, 천천히 할버드를 내려놓았다.
이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네가 우리엘 디아블로에게 전해라. 둠을 죽이고 싶으면 나와 손을 잡아야 한다고. 시간이 없다고 말이다.”
* * * * *
나는 계속해서 고민하고 있었다.
암연의 가팔로가 나를 찾아왔다고?
둠의 왼팔이? 스스로?
그것도 둠을 죽이려는 계획을 가지고?
‘수상쩍어.’
솔직히 말해서 믿음이 안 간다. 무슨 꿍꿍이가 있다고 밖엔 생각되지 않았다.
둠이 아니라 역으로 나를 자빠트릴 계획이 아닐는지.
둠은 모략가고 전략가다. 항상 나보다 한 수, 두 수는 앞서 있었다.
암연의 가팔로를 보낸 것도 둠의 계획이지 않을까?
‘둠은 나를 알고 있다.’
암연의 가팔로를 혼자 보낸 건 올바른 선택이었다. 여럿이 왔다면 당장에 모두 죽였을 것이다.
하지만, 혼자서 왔기에 계속해서 의문이 생긴다.
‘우선 이야기를 들어보자. 듣고 판단해도 늦지 않아.’
어쨌거나, 둠의 계획이라면 그에게도 큰 도박수임은 분명했다. 암연의 가팔로는 그에게 있어서도 상당히 중요한 패일 것이기에.
고개를 끄덕이자, 라이라가 가팔로를 내 방에 들였다.
“나를 보자고 했다던데?”
“그렇다. 그 전에······ 계집은 내보내지?”
계집. 라이라를 말하는 건가?
라이라의 표정이 북풍한설마냥 차갑게 굳었다.
“라이라.”
“로드시여. 놈의 속을 알 수 없습니다. 혹여나 문제라도 생긴다면.”
가팔로는 강자다. 내가 전력을 다해도 이길지, 장담할 수가 없다.
그것을 라이라도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듯싶었다. 그녀가 합세해야만 무슨 일이 생겼을 때 즉각적인 대처가 가능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는 나를 죽일 수 없다.”
넌지시 이르자, 라이라가 나와 가팔로를 번갈아 쳐다보더니,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가팔로가 강하다고 해도 나를 즉살시킬 순 없다. 소란이 나면 성의 모든 병력이 가팔로의 목을 치고자 달려들 것이다.
‘위험한 물건도 없군.’
정말로 무기 하나만 달랑 들고 왔다.
무슨 생각인 걸까?
신종 자살 방법이라도 되는 걸까.
라이라가 물러나고 나서야, 가팔로의 눈이 내게 닿았다.
“둠을 죽여야 한다.”
“둠의 왼팔인 네가 할 소린 아닌 것 같은데.”
“둠은 둠이 아니다. 둠의 가죽을 뒤집어 쓴 무언가다.”
오호라.
그걸 알아챈 건가?
“그래서 반란을 일으키겠다는 소리인가?”
“나는 그가 그리는 계획을 알아버렸다. 그는 위대한 별을 소멸시킬 것이다.”
뭐라고?
“위대한 별을 소멸시킨다?”
이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지.
처음에는 위대한 별을 부수는 게 내 목표이긴 했지만, 위그드라실의 괴물과 싸우기 위해선 그게 필요해졌다.
소멸은 내가 원하는 바가 아니다.
하지만 놈이 위대한 별을 소멸시키려는 이유는 궁금했다.
“위대한 별이 소멸하게 되거든 모든 게 무(無)로 돌아간다. 공허가 넘쳐흘러 세상을 먹어치우고 그 후엔 아무 것도 남지 않게 될 것이다.”
“그걸 둠이 바란다는 말이냐?”
“둠은 그 공허를 스스로 뒤집어쓸 계획을 세우고 있다. 유일신이 되겠다는 것이다.”
이건 또 새로운 견해였다.
위대한 별을 갖는 게 아니라, 그걸 부숴서 뒤집어쓴다?
역발상이라면 역발상이지만, 그게 가능한가?
가능하다고 해도 너무 위험하다.
‘거짓말치곤 신빙성이 있군.’
위대한 별의 이야기와 공허와 관련 된 것은 극소수만 알고 있다. 그것을 알고, 내게 말한다는 건 내게 그 해답이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터.
“그래서 놈을 죽이겠다는 거냐?”
“우리가 그를 따르는 건 위대한 별의 습득 이후. 세계의 재편성이 이뤄졌을 때의 영광을 위해서다. 하지만 세계 그 자체를, 우리를 없애겠다면 그를 따를 필요가 없지.”
지극히 계산적이다.
하지만 맞는 말이었다. 그래서 파벌을 형성하고 우두머리를 만든 것이니까.
“그런데 왜 나를 찾아왔지? 사천왕과 데몬로드는 불가침 조약을 맺었다. 잊은 건가?”
“하, 그딴 조약, 누구도 믿지 않는다. 우리는 모두 너를 주시하고 있었다. 둠이 심어둔 세작마저 모두 제거한 모양이지만······.”
모두 제거가 된 게 맞는 것 같다.
군단장 둘. 기타 협력한 마족들까지 합치면 거의 백에 달했다.
‘징그러운 놈.’
둠. 얼마나 집착 강한 녀석인가. 집착이 강한 상대를 적으로 두면 이렇게 피곤하다.
“내가 세작을 다 제거해서 나를 찾아온 거냐?”
“아니. 네가 가장 많은 포인트를 가지고 있다고 판단해서다.”
즉답이었다.
확실히 내가 모은 포인트는 살벌할 수준이었다.
태양왕이 되며 이룬 업적과, 녹색 말을 판매하며 거둬들인 수익.
이제 곧 열릴 경매에서 나를 따라올 데몬로드는 거의 없을 것이었다.
“경매와 관련된 이야기인가보군. 좋다. 해봐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릴 준비를 했다.
다 믿으면 바보다. 나는 아직 놈을 의심하고 있었다. 놈의 혀에 둠의 독이 섞여있을지 모르니까.
“이번 경매를 통해, 둠은 ‘위대한 별’을 탈취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
위대한 별을 관리하는 건 암흑상회다.
암흑상회의 힘은 도저히 추측이 불가능할 정도다.
하지만 그들이 심연에서 일어나는 일들의 중재 중 대부분을 맡는 걸 보면 대부분을 아우를 정도의 힘을 지니고 있다고 보는 편이 맞다.
“위대한 별을 탈취해 억지로 그 안을 채우고 마지막 전장으로 도약하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지구.”
“그래. 데몬로드의 숫자가 스물 안팎으로 남으면 지구와 이어진 ‘문’이 본격적으로 넓어지며 지구로 전이된다고 하더군.”
“그런 것까지 알기는 쉽지 않을 텐데. 어떻게 알게 된 거지?”
“둠이 갖고 있지 않던 걸 그는 갖고 있었으니까.”
가팔로의 표정이 잔뜩 굳었다. 마치 못 볼 걸 보기라도 한 듯이.
“지식의 샘. 미미르의 샘물. 본래라면 사자왕이 갖고 있어야 하는 것이지.”
일전, 둠이 말했다.
사천왕은 ‘위대한 별’이 심연에 안착하는 것을 대가로 위그드라실의 지혜를 손에 넣었다고.
사자왕. 안달톤 브뤼시엘이 아닌, 그 전의 사자왕은 미미르의 샘물을 얻었다. 본래라면 지금도 사자왕의 보고에 잠들어 있어야 할 것이지만 둠이 갖고 있다는 이야기다.
‘태양왕은 무엇을 얻었지?’
그러고 보니, 태양왕의 보고도 열심히 뒤져봤지만 특별한 물건은 하나도 없었다. 미미르의 샘물에 버금가는 보구는 단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손만 넣었을 뿐인데도 어마어마한 지식이 내게 흘러들었다. 둠. 아니, 둠의 탈을뒤집어 쓴 무언가의 소망이 이뤄지면 모든 게 끝장이다.”
가팔로가 손을 잘게 떨었다.
그때의 공포를 되새긴 모양.
나는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진실인가, 거짓인가.’
진실에 가깝다고 판단되지만 작은 거짓말 하나가 목숨을 잃게 만드는 법.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둠이 경매장에서 ‘위대한 별’을 탈취할 작정이라면, 암흑상회에 먼저 말하면 됐을 텐데?”
“암흑인들은 약해졌다. 무언가가 그들을 약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더욱 경매에 매달릴 것이다. 그들에게 포인트는 자신이 ‘속죄’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니까.”
“속죄?”
“그들은······ 나도 거기까진 모른다. 하여간 암흑인에겐 포인트가 필요하다. 오히려 둠의 계획을 알아차린 암흑인 중에서 동조하는 놈들이 나올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라는 말이로군. 하지만 둠의 계획과 내가 다량의 포인트를 갖고 있는 게 무슨 상관이지?”
“‘위대한 별’의 탈취를 위한 물건들이 이번 경매에 나온다.”
그런 것을 경매에 내놓는다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위대한 별이 탈취되도록 암흑인들이 그런 물건을 내놓는단 말이냐?”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만큼 강력한 물건들이 나온다는 말이다. 그들이 꽁꽁 숨겨두고 있던 보루들. 특정한 환경에서 엄청난 힘을 발휘하는 이기들. 둠이 노리는건 그것들이다.”
“내가 그것을 막아 달라?”
“그렇다.”
가팔로의 얼굴은 사뭇 진지했다.
나는 미간을 구겼다. 이만한 이야기. 솔직히 듣지 않았다면 둠의 계획조차 나는 몰랐을 것이다.
하. 설마 ‘위대한 별’의 탈취를 노리고 있다니.
간이 큰 건지, 자신이 있는 건지.
‘어찌 한다······.’
이제 선택은 나의 몫이었다.
내겐 선택지가 많았다.
당장 가팔로를 죽이고, 둠의 약화를 꾀해 볼 수도 있었다.
아니면 가팔로를 그대로 고이 보내 혼란을 만들 수도 있다.
둠을 막거나, 암흑인들과 어떻게든 커넥션을 취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녹색 말’의 판매를 내가 촉진시켜주마.”
내가 섣불리 결정을 못 내리자, 암연의 가팔로가 한 마디 더했다.
“네가?”
“나는 다시 둠에게로 돌아갈 것이다. 엄청난 의혹을 받게 되겠지만, 믿음의 증거로 ‘녹색 말’을 둠 진영의 데몬로드들이 구매하도록 유도하지.”
과연.
그렇다면 손해는 아니다.
믿어도 그만, 믿지 않아도 그만이었다.
‘독이 든 성수인가, 온전한 성수인가.’
조금이라도 헛디디면 나 역시 나락으로 떨어진다.
나는 고심하며, 가팔로의 눈을 쳐다봤다.
* * * * *
순식간에 시간이 흘러갔다. 상단을 키우고, 성을 안정화시키고, 내 힘을 늘리는 동안 어느덧 경매당일이 된 것이다.
나는 채비를 꾸리고 라이라와 함께 암흑상회로 발을 옮겼다.
하지만 우리 둘만 가선 위험부담이 있다.
둠이 무슨 일을 일으킬지 몰랐기에, 만에 하나를 대비해 정예로 이루어진 군단 하나를 대동했다. 거기엔 야차와 나찰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암흑상회.’
몇 번 게이트를 타자, 공간이 접혀지며 암흑상회까지 도달했다.
입구에 도착하자 전신이 새까맣고 모자를 쓰고 있는 암흑인이 나를 반겼다.
“오! 우리엘 디아블로님. 만나서 반갑습니다. 오늘 경매에 참여하시려고 오신 겁니까?”
“그렇다.”
“역시 우리엘님께선 경매의 참맛을 아시는 분이지요. 환영합니다.”
즐거워 죽겠다는 듯, 암흑인이 나를 안내했다.
주변의 암흑인들 모두가 이런 분위기였다.
축제. 그러나 묘한 긴장감도 흘렀다.
‘······ 긴장을 늦추지 마라.’
스스로에게 다짐을 건넸다.
다른 때의 경매와는 분명히 다르다.
이곳에서, 이 마지막 경매에서, 어느 정도 판가름이 날 것이다.
둠이 노리는 바가 성공할지, 아니면 또 다른 변수가 등장할지.
내가 모든 의도를 이기고 성공할 수 있을지.
주먹을 꽉 쥐며, 경매장으로 입성했다.
< 47. 마지막 경매(完)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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