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 마지막 경매(6) >
“헛소문일 뿐이다! 태양왕의 조무래기들이 우리를 두려워한 나머지 만들어낸 거짓말! 사자의 무리들이여, 적을 태우고 죽이고 물어뜯어라!”
그러나 승리가 머지않았다고 생각한 다른 군단장들은 더더욱 병력들을 채찍질했다. 그중, 가장 선두에 선 세티어 군단장이 가장 많은 열을 올리고 있었다.
‘파루아 군단장. 그 늙은 여우가 죽었으니 이번 전쟁의 공훈은 내 것이다.’
공훈을 세우면 더욱 많은 토지와 노예를 받을 수 있다. 그리고 진영 내에서 입지를 굳히면, 애송이 사자왕을 몰아내고 그가 왕의 자리에 앉을 수도 있을 것이었다.
‘안달톤 브뤼시엘. 사자왕의 숨겨진 혈육이라고? 인정할 수 없다.’
피로 승계되는 왕의 자리라는 게 얼마나 모레성인가. 심연은 강자가 모든 걸 가지는 약육강식의 세계다. 하물며 안달톤 브뤼시엘이 데몬로드였다고 해도, 정작 무언가를 보여준 적은 없다.
그래서 입지가 좁았다. 이번 전쟁, 태양왕을 끌어내리는 자가 차기 왕이 될 것이다.
‘태양왕도, 사자왕도, 모두 애송이일 뿐이야.’
사천왕 중 둘이 새로이 승계했다. 하지만 이제 막 즉위하여 모든 게 어정쩡하다. 사천왕은 서로 싸우지 않는 게 암묵적인 규칙이었으나, 그 규칙을 깰 정도의 틈이 생겨버린 셈이다.
모두가 사자왕의 목을, 태양왕의 목을 원했다. 먼저 가지는 자가 임자다.
파루아 군단장이 가장 신경 쓰였지만 ‘녹색 말’ 따위에게 밟혀 죽었다. 그렇다면 그 다음으로 유력한 건 세티어 군단장, 바로 자신이었다.
“몰아붙여라! 저 겁쟁이들에게 사자의 힘을 보여주란 말이다!”
콰르르릉! 콰아앙!
세티어 군단장이 지휘하는 괴물부대는 모두 반마반수로 이루어져있었다. 마족의 피 절반, 괴물의 피 절반이 몸에 흐르며 서로의 장점만을 흡수한 최강의 부대!
신체개조까지 받으며 오로지 전투력만을 높였다. 사자왕의 진영 내에서도 수위에드는 전투 집단이었다.
무기가 스칠 때마다 거대한 바위가 박살나고, 온갖 변칙적인 마법들이 전장을 휘젓는다. 태양왕의 진영은 맥을 추리지 못하고 후퇴만 거듭할 수밖에 없었다.
‘시시하군.’
그리고 실망이었다.
공훈을 세우는 건 좋지만, 이렇게 간단해서야.
태양왕과 그의 진영은 사천왕 중에서도 매우 특이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무언가를 강하게 믿는다는 것. 유일하게 ‘신’을 섬기고, 종교를 갖고 있다.
그 결집된 힘의 두려움을 알기 때문에 다른 사천왕들도 쉬이 건드리지 못한 것이다.
허나 지금, 그들은 결집하지 못하고 있었다.
‘따로 노는군. 명령을 내리는 지휘자가 모두 죽어버리기라도 한 건가?’
이렇게나 손발이 안 맞아서야.
태양왕은 정말 도망친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니라면 명령체계가 이처럼 개판이 될 리가 없었다.
덕분에 각개격파 당하며 속수무책으로 밀려나가는 중이었다.
‘음?’
세티어가 기다란 꼬챙이와 같은 창으로 적들을 학살하고 있을 때였다.
별다른 저항조차 못하는 시시한 마족들을 상대로 염증을 느끼던 그 찰나에, 지평선 너머에서 거대한 마력의 움직임을 감지했다.
크롸아아아아아앙!
놈은 괴성과 함께 나타났다.
일반 마족과는 비교과 안 되는 마력의 유동성.
멀리서도 보이는 거대한 동체. 심연과 대비되는 새하얀 신체.
무엇보다 신경이 쓰이는 건 그 속도다.
세티어의 눈에도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의 속도로 그것은 자신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 용?”
희미한 잔상으로 확인하건대, 그것은 용이었다.
하지만 흰색의 용이라니. 용은 그 성질에 따라 색깔이 결정되지만, 하얀색의 용은들어본 적도 없다.
착각인가?
콰르르르르르르릉!
착각이 아니었다.
어마어마한 속도로 지상에 낙하한 흰색의 용이, 거대한 날개로 대지를 쓸어버리자, 그곳에 존재하던 모든 생명체의 크기가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그리고 지상엔 어느새 ‘녹색 말’ 열 마리가 자리를 잡고 이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녹색 말은 용의 포효와 함께 나타난다.
한 가지, 소문이 더 있었다.
그런가. 그랬던 건가.
소문의 진상을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게 될 줄이야.
파루아 군단장이 저 녀석들에게 죽임을 당한 거다.
“내가 저것들의 목을 취하면 다른 놈들의 입을 꾹 닫게 만들 수 있겠군.”
하지만 흥미가 생겼다. 그들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소문이 진실이면 어떤가. 정면으로 돌파해 자신이 최강임을 인증 받으면 되는 것이다.
쿠아아아앙!
녹색의 말은 거대한 화염을 토해냈다.
하지만 화염은 터지지 않았다. 일정 간격 안으로 들어온 화염의 주변에서 급격히 거대한 굉음이 일어나며 폭풍보다 거센 바람이 일고, 모든 것을 끌어당기기 시작한 것이다.
마력이 약한 마족들은 그 바람에 사로잡혀 화염의 중심부까지 끌려들어갔다. 그러곤 뼈 하나, 살 한 점 남기지 못한 채 ‘증발’해버렸다.
터지지도 않는다. 첫 소리를 제외하면 정말 조용하게, 모든 걸 태우고 완벽하게 지워버렸다.
‘저게 무슨 마법이지?’
세티어는 끌려가지 않았다. 그의 마력은 어지간한 데몬로드와도 견줄 수 있는 수준. 심연의 최강자인 그가 고작 저런 태풍 따위에 휩쓸릴 리 없지 않은가.
하지만, 처음 보는 마법이다.
‘복합마법이군. 상당한 고위마법이 내가 아는 비슷한 것만 다섯 개 이상······.’
알 수 있는 거라곤 그게 전부다.
저만한 출력, 저만한 마력의 저장을 어떻게 할 수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내 세티어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봤자 조무래기들에게나 효과가 있겠군.’
조무래기들을 거둬내는 용도로는 훌륭하다.
하지만 일정 이상의 강자들에겐 소용이 없다.
피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빨려 들어가는 힘이 그렇게 강한 편은 아니었고, 발사지점도 예측할 수 있어서 가볍게 피할 수 있었다.
입맛을 다셨다. 소문의 녹색 말이라기에 긴장을 했는데, 실체를 보니 소문이 많이부풀려진 듯싶었다.
오히려 세티어 군단장의 눈길을 끄는 건 백색의 용이었다.
쿵!
거대한 동체. 세티어 자신도 작은 편은 아니지만, 목을 끝까지 올려야 겨우 용의 머리가 보인다. 고룡들도 저만한 크기로 자라진 못하는데.
“네가 소문의 실체로군. 이름이······.”
촤악!
쿠우우우우웅!
용의 날개가 세티어의 허리를 강타했다. 급히 막았으나 세이터 군단장의 신체가 산등선이 너머까지 날아갔다.
벽에 박혀, 흙먼지를 거둬낸 다음에야 세티어 군단장의 표정이 굳었다.
‘강하다.’
과연, 어지간한 고룡들보다 강했다.
하지만 약간 부족했다. 덩치나 마력에 비해서 결정타가 부족한 느낌이 있었다.
그리고 그 이유를 곧 알 수 있었다.
“네놈, 아직 덜 자랐군?”
세티어 군단장이기에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저 흰색의 용, 아직 덜 자랐다.
덜 자란 게 저 크기다. 이 힘이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보통 용은 성장을 끝마치면 마지막 탈피를 하고 그 급이 결정되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저 용은, 아직 탈피조차 하지 않았다.
탈피조차 안 했는데 이만한 파괴력을 내는 용은, 본 적이 없다.
이야기로만 전해지는 전설적인 용들이 그러할까.
‘어디서 이런 놈이 나타난 거지?’
어이가 없었다. 만약 다 큰 상태였다면, 거기에 탈피까지 했다면······ 현존하는 모든 용들을 제어하는 ‘용제(龍帝)’의 탄생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이야기도 간혹 전설처럼 내려오곤 있으니까.
크롸아아아앙!
백색의 용이 포효하며 다시금 세티어 군단장에게 달려들었다.
세티어 군단장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곧 그의 몸이 팽창하며 더욱 강인한 근육들을 가지게 되었다.
꽈아앙!
날개가 바닥을 쓸며 다시금 그를 노리자, 세티어 군단장이 정면에서 날아드는 날개를 붙잡고 힘겨루기를 시작했다.
놀랍게도 용의 날개가 그의 손에 막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내 반은 마족이지만, 나 역시 용의 피를 갖고 있다. 그리고 그 피는 어느 용들과도 비교가 안 되는 전설적인 존재의 것이지.”
꽈득!
크아아아아아!
모든 것을 잘라내는 용의 날개가 접혔다. 용이 비명을 내지르며 몸을 빼려고 했지만, 세티어는 놔주지 않았다.
“십 만 년 전 그 용은 갑자기 나타나 마왕을 잡아먹었다. 당시 심연에 군림하던 그 왕이 용에 의해 죽자, 우리들은 쪼개지고 쪼개져 지금의 사천왕이 되었지. 그리고 내 몸에 흐르는 용의 피는, 당시 마왕을 죽인 존재의 것이다.”
세티어가 웃어보였다.
아직 다 자라지 않은 용. 고작 성장기의 용을 상대로 전설적인 용의 피를 지닌 자신이 지는 건 말이 안 된다.
“발보르그. 공포로 얼룩진 그 용의 이름이다.”
쿵!
어마어마한 악력이었다. 용의 발이 바닥에 파묻힐 정도로 거세게 압박하고 있는 것이다.
“네가 탈피했다면 발보르그와 같은 용이 됐을 지도 모르겠지만, 아직 성장조차 끝나지 않은 너는 나를······!”
순간, 위협을 느낀 세티어 군단장이 용을 놓고 한 걸음 물러났다.
그의 뒤에 어느새 검은 얼룩으로 만들어진 ‘문’이 열려있었으며, 거기서 한 여마족이 검을 들고 그를 위협하는 중이었다.
“라이라 디아블로!”
세티어 군단장이 웃어보였다.
어찌 모를 수가 있겠나. 태양왕이 애지중지하는 혈족. 적어도 이곳에서 라이라 디아블로의 이름을 모르는 마족은 없었다.
“오늘따라 운이 좋군. 녹색 말과 라이라 디아블로의 목을 동시에 취한다면······ 상상만 해도 달아오르는구나.”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이건 기회다. 도약할 수 있는 기회. 세티어가 양 주먹을 맞대며 바닥을 박찼다.
그리고 순식간에 라이라를 향해 도약한 세티어가 주먹을 휘둘렀다.
콰직!
“······ 뭐?”
뼈가 뒤틀렸다.
뭐지?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푸아악!
곧, 내장이 터졌다. 자신의 신체 안에서 이변이 일어났다.
이어 기다란 빛으로 이루어진 창 하나가 세티어 군단장의 복부를 뚫고 나왔다.
“언제?”
“루의 창······ 조금 더 잘 다룰 수 있게 된 것 같군.”
라이라가 새하얗게 웃었다. 그녀의 미소는 얼음 그 자체였다. 너무나도 차가워서 닿으면 모든 게 얼어버릴 것만 같았다.
그녀가 적에게 보내는 미소다.
비틀거리며 세티어 군단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동시에 보았다.
그녀의 주변에 떠다니는 빛들을. 창의 형태를 하고 있었으나, 저것들은 하나하나가 가공스러운 무기다. 모든 걸 찌르고 가르는 이적이었다.
“두 번은 통하지 않는다. 공간을 접어 꿰뚫는 무기라면, 계속해서 움직이면 그만일 뿐!”
푸욱!
하지만, 피하지 못했다. 그 속도는 빛과도 같았다. 설마 공간을 접어 이동하는 게 아니라······.
‘내가 보지 못할 정도로 빠르게 움직였을 뿐이라고?’
있을 수 없다. 라이라 디아블로. 전장의 암표범이라 불렸으나 결코 자신과 동급, 혹은 그 이상의 괴물은 아니었다.
그토록 강했다면 이미 소문이 났을 것이다.
무언가가 그녀를 순식간에 바꿨다. 강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보는 게 타당했다.
하지만, 무엇이?
무엇이 라이라 디아블로를 이토록 강하게 만들었는가.
하물며 저 흰색의 용도 알려진 바가 없었다.
크르르릉.
아니나 다를까.
흰색의 용이 어느덧 그의 뒤를 점하고 있었다. 화가 잔뜩 난 모습으로.
도망치는 건 불가능하다.
주변을 둘러봤다.
녹색 말에 의해 거의 모든 아군이 죽었다.
구석에 몰린 쥐의 신세.
‘태양왕은 도망가지 않았다.’
굳이 나갈 필요조차 없다고 느낀 것일까.
이만한 전력. 단순한 뜬소문이 아니었단 말인가!
오만하고 방자하다. 하지만, 하지만······.
세티어 군단장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거대한 벽’을 만난 기분이었다.
* * * * *
-파루아 군단장에 이어 세티어 군단장마저 죽었다.
-단 하나도 살아남지 못했다.
-녹색 말, 그리고 용의 포효가 닿은 곳은 생명체 하나 남지 못한다.
소문이 더욱 가속됐다. 퍼지고, 퍼져서, 억제하지 못할 정도가 되었다.
그리고 진상을 알 수 없는, 미지의 존재에 대한 소문은 ‘공포’ 그 자체였다.
조금씩 정신을 파고들며 좀먹는 공포!
병력들이, 군단장들이 계속해서 죽어가자 우위를 점한 줄 알았던 전장도 어느덧 다시금 반대로 기울기 시작하고 있었다.
“후퇴한다.”
결국, 안달톤 브뤼시엘은 결정을 내렸다. 후퇴하기로. 이대로 더 소모전을 이어가봤자 득 될 게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후 녹색 말에 대한 소문은 심연 전체에 뿌리내렸다.
누군가가 작정하고 의도대로 소문을 흩뿌린 게 아닐까 싶은 수준의 전파속도였다.
그리고······ 어느 순간, ‘절대상회’의 이름을 달고 녹색 말이 판매되기 시작했다.
사자왕이 휘어잡은 전장을 단숨에 역전시킨 최강의 무기로써 말이다.
-녹색 말을 가진 자가 전장에서 승리한다.
-이보다 좋은 대량학살 무기는 없다.
모든 명망 있는 마족들이 달려들어 녹색 말을 해부하고자 했지만, 기술의 종류 자체가 달라 어쩌지도 못한 채 포기하기 일쑤였다.
결국 절대지배 상회만이 녹색 말을 만들고, 팔 수 있다는 게 증명되면서 조금씩 그 무기는 여러 전장에 투입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녹색 말이 투입된 전장은 연이은 승전보를 울리게 되며 ‘그들’의 귀에도 들어가게 되었다.
데몬로드.
진정한 악마 왕의 자리를 노리는 그들에게.
< 47. 마지막 경매(6)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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