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 마지막 경매(2) >
배가 고팠다.
목이 말랐다.
전신에 힘이 없었다.
‘이젠 익숙해.’
몇 번이고 겪어본 상황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피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김민식. 그는 자신의 죽음을 직감했다. 이곳은 적진. 잡힌 이상, 빠져나갈 틈은 없다.
개죽음일 수도 있었다. 자신의 죽음으로 결국 아무 것도 바꾸지 못할 수도 있었다. 그것이 못내 화가 났다.
‘결국 나란 놈의 크기가 이 정도였다는 거지.’
쓰게 웃었다. 가짜 알레테이아의 원조와 노력으로 막강한 힘을 얻었다. 이 정도면, 과거 최강의 영웅들과도 견줄 수 있을 정도다.
어떤 면에선 그들조차 뛰어넘었다.
그러나 부족하다. 심연의 괴물들을 상대하기는 힘에 겨웠다.
모든 ‘문’들로 말미암아 그들을 연합해 심연에 대항하려고 했다.
반은 성공했고, 반은 실패했다.
‘연합체를 만들기 직전이었다. 녀석만 나타나지 않았으면.’
둠. 데몬로드 중 하나. 그 괴물을 마주했을 때, 전신이 얼어버릴 것만 같았다. 또 다른 데몬로드가 진짜로 존재한다는 데에 놀랐지만 그 힘은 전율 자체였다. 보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만약에 놈이 마음만 먹으면 지구 따윈 순식간에 스러질 거다. 과거 한국을 쑥대밭으로 만든 우리엘 디아블로와는 차원이 달랐다.
이후 놈은 자신의 대리자를 보내, 놀랍게도 ‘협상’을 하고자 했다.
‘이름만 협상이고 결국 협박이었지만.’
응하지 않을 경우 지구의 멸망을 가져올 거라는 말. 그게 어찌 협상일 수 있나.
솔직히, 답이 보이지 않았다. 넘을 수 없는 벽을 상대하는 법을 그는 아직 몰랐다.몇 가지 시련을 거치며 이제 겨우 ‘태’만 내었을 뿐.
그런데 시작하자마자 절망과 마주한 것이다.
그래서 더욱 발 빠르게 움직이며 오한성을 찾았다. 오한성. 그에게 무언가 답이 있을 것만 같았기에.
“인간이 아직 안 죽었군.”
“질기군. 그냥 내 손으로 죽이고 싶어.”
“인간이 죽을 땐 어떻게 죽는지 구경이나 하자구. 개구리처럼 배를 뒤집고 죽지 않으려나?”
“멍청하긴. 인간은 멍청해서 배가 고프면 자기 살점을 뜯어먹어.”
“······ 멍청한 건 네놈들이다.”
마족. 종족 자체가 다른, 생김새만 비슷한 녀석들.
놈들은 인간을 모른다. 인간이란 단어만 알 뿐이지 직접 인간을 본 마족은 거의 없는 듯싶었다. 하기야 이곳 심연에서 자신들 외에 인간을 본 기억은 그에게도 없었다.
그들에게 김민식은 훌륭한 볼거리였다.
‘우리를 벌레나 짐승으로 보고 있다.’
마족의 시점에서 인간은 그렇게 보이는 모양이었다.
언제고 짓밟을 수 있는 하등한 종족.
“우리가 멍청하다는데?”
“푸하하, 하긴 너는 좀 멍청하긴 하지.”
각성자의 특혜가 이럴 땐 짜증이 났다. 모든 종족의 언어를 해석하여 들려주고 들려주는 기능. 차라리 아예 못 알아들었다면 이만큼 짜증이 솟지는 않았을 것이다.
“겁쟁이처럼 모여서 구경하는 것밖에 할 줄 모르는 놈들. 너희들이야말로 세상에서 제일가는 얼간이고, 겁쟁이다. 내가 두렵나? 두려워서 철창 밖에서 구경만 하는 거냐?”
“뭐라는 거야?”
“인간이 하도 굶어서 미쳤나본데?”
김민식이 싸늘하게 웃었다.
“겁쟁이 새끼들. 가운데 달려있는 건 폼인 모양이지? 너희 같은 놈들과 하고 싶은 암컷도 없을 거다. 그러니까 이런 어두컴컴한 곳에서 나 같은 인간이나 구경하고있는 거겠지.”
“죽고 싶어 안달이 났구나.”
“사지를 잡아 뜯어줄까?”
두 경비병의 얼굴이 잔뜩 굳었다.
다른 건 몰라도 최근 여마족들의 현상과 관련해서 남자 마족들의 불만이 하늘까지 닿았기 때문이다.
역린을 건드렸으니, 반응하지 않을 리가 없다.
“나는 너희가 무섭지 않다. 너희 같은 겁쟁이들은 결국 안전한 구역 밖에서 남을 헐뜯는 것밖에 하지 못하니까 말이야! 병신들. 몸만 정상이지 너희들은 병신과 다를 게 없어!”
“우리가 너를 못 죽일 거 같아?”
쾅! 쾅!
“죽여 봐! 죽여보라고! 입으로만 내뱉지 말고 행동으로 보여 봐!”
“오냐. 소원대로 죽여주마.”
김민식이 발악하며 몸을 흔들자, 제어구가 뜯어질 듯 튕겼다.
두 경비병이 고개를 끄덕이곤 열쇠로 철창의 문을 열었다.
이어 두 경비병이 근접해오자, 그의 눈이 바뀌었다.
손은 묶였지만 발은 멀쩡했다. 양 발을 이용해 경비병의 고환을 있는 힘껏 걷어찬것이다.
쿵!
“꺼어어억!”
파열음과 함께 경비병 하나가 눈이 뒤집힌 상태로 넘어갔다.
그것을 본 남은 경비병이 창을 들어 김민식에게 쇄도했다.
“이 새끼가!”
푸욱!
양 손이 특수한 제어구로 구속된 상태였기에 움직일 수 없다. 창이 그대로 김민식의 가슴팍을 찔렀고, 피가 터지며 그가 이를 악물었다.
정신이 아찔해졌지만 여기서 포기하면 안 된다.
우위를 점한 마족이 웃었다.
“살점이란 살점은 모두 벗겨서 죽여주마. 제발 죽여 달라고 빌게 될 거다.”
“그건······ 두고 봐야지!”
그대로 창을 양 다리로 집었다. 이후 최대한 빠르게 창을 바닥으로 눕히자, 마족 경비병이 몸을 엉거주춤한 상태로 만들었다.
상체가 앞으로 쏠린 그 틈을 이용해 다시금 마족 경비병의 목을 양 다리로 조았다.
“끄으윽! 놔······ 라!”
마족이 몸부림을 치며, 창에 준 손아귀의 힘을 늘렸다. 마구잡이로 창이 김민식의상체를 헤집어 놓자 피가 온 사방에 튀며 내부의 장기가 터져나갔다.
결국 누가 먼저 쓰러지냐의 싸움이었다.
그리고 먼저 두 눈을 뒤집은 건 마족이었다.
“커헉! 헉, 헉.”
상처를 지혈할 틈도 없이 손을 뻗어 마족의 허리춤에 있는 열쇠로 구속구를 풀었다. 두 손이 자유로워지자 옷을 찢어 가슴팍에 동여맸다.
‘회복마법을 배워둘 걸 그랬어.’
다른 사람이 해주면 된다고 생각해서 배우지 않았던 게 후회되는 순간이었다.
치유력이 높아졌다곤 해도 이 정도 상처면 오래 버틸 수 없다. 기껏해야 5분. 길어야 10분. 그 안에 회복약 비슷한 거라도 구하지 못하면 죽는다.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난 김민식이 지하감옥의 탈출을 꾀했다.
‘젠장. 얼마나 깊은 거야?’
하지만 계단을 오르고, 올라도 지상이 나타나질 않았다.
중간중간 마족들의 시선을 피해 몸을 숨기는 것도 힘든 일이었다.
1분 1초가 영원한 시간처럼 느껴졌다. 3분 정도가 지나자 의식이 흐려지기 시작했고, 4분여가 되었을 땐 눈앞이 아예 보이지 않았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시야가 차단된 거다.
“아저씨. 여기, 서, 뭐해?”
그때였다. 언제고 들어본 목소리.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오히려 죽기 직전이라 더욱 빠르게 떠올릴 수 있었다.
‘오한성이랑 같이 있었던 인간형 용족.’
이름이······ 이그닐이라고 했던가?
보는 사람들마다 ‘세상에서 둘도 없이 귀엽다’고 칭찬하던 그 여자아이가 눈앞에 있었다.
환상인가?
내가 너무 간절해서 보는 환상일까.
“아저씨. 죽어?”
“지상으로······ 안내해라.”
마족 경비병의 옷에서 탈취한 작은 단검 하나를 이그닐의 목에 대었다. 그다지 좋아하는 상황은 아니지만, 상황이 상황이니까.
“죽으면, 안 돼. 아빠가 싫어해.”
“오한성······ 후욱. 한성이 그 녀석에게······.”
젠장. 이젠 말하는 것도 버겁다. 이어 시야가 멀어졌다.
시야가 멀어지기 직전, 한성이 녀석이 떠올랐다. 알레테이아의 본진을 때려 부수고 자신을 구하던 때의 녀석이 말이다.
결국 명이 다해 죽었지만, 그때 녀석이 보였던 눈은 잊히지가 않았다.
그래. 잊을 수가 없는 모양이다.
죽기 직전 녀석의 그 눈이 떠오르는 걸 보면.
‘우린 서로에게 비밀이 너무 많았지.’
알레테이아에 귀의한 자신.
세계의 마지막 영웅으로 추앙받던 오한성.
상극이었고, 절대로 가까이 할 수 없었던 관계였다. 그렇기에 말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이 많다. 그것이 결국 다시 돌아온 지금에까지 이어지는 듯싶었다.
‘우리가 서로에게 조금만 더 솔직했다면······.’
무언가가 바뀌었을까.
조금은 미래가 달라졌을까.
모르겠다. 모르겠지만, 후회는 됐다.
“아저씨. 죽어?”
“제길······.”
허나 이제는 이룰 수 없는 일이었다.
더 이상은, 못 버티겠다.
* * * * *
나는 눈앞에 놓인 시체를 바라봤다.
시체는 아니지만, 시체와 다름이 없었다.
‘멍청한 놈.’
이그닐이 문을 열어 내 앞에 나타나, 민식이 녀석을 데려왔을 땐 너무 늦었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렸다. 생명의 근원이 상당히 말라버린 상태였다.
화타가 와도, 엘릭서가 있어도 이 정도면 살리기 어렵다.
그나마 죽는 시간을 약간 늘려주는 게 전부.
“아빠. 아저씨, 죽어?”
아빠······.
나는 잠시 먹먹한 눈빛으로 이그닐을 바라봤다.
그간 이그닐에게 신경을 쓰지 못했다. 라이라와 요르문간드가 내 아이를 품고 있는 상태였지만, 따지고 보면 이그닐 역시 내 자식과도 같았다.
마음으로 낳은 아이. 종족이 달라도 그런 벽쯤은 내겐 아무 상관없었을 텐데.
지하 감옥을 혼자 배회하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내가 너무 무관심했어.’
이그닐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하지만 이그닐은 전혀 아쉽다던가 서러웠다는 감정 없이 기분 좋게 웃어 보일 따름이었다.
너무 가까웠기에 잊고 있었던 것이었다.
내게 처음은 결국 이그닐과 이타콰였을진대.
머리를 강하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마음 같아선 스스로의 뺨이라도 내려치고 싶었지만, 지금은 해야할 일이 있었다.
“죽게 놔두지 않는다.”
녀석이 죽어선 안 된다. 우리는 서로 해야 할 일이 너무 많다. 이제야 조금 털어놓을 마음이 생겼는데, 죽어버려선 결국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한 채로 끝날 테니까.
하지만 마땅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곳은 심연이다. 제대로 된 치료마법 따위가 있을 리 없다.
물약은 많았지만, 인간에게 들을지 미지수인 것들 천지였다.
-진원지기가 손상됐군.
느닷없이 암령이 말했다.
암령, 손오공. 녀석은 그저 필요할 때만 나설 뿐 말이 없는 편이었다. 그런데 약간의 관심을 나타낸 것이다.
‘방법이 있나?’
-불사조의 심장. 그리고 크투가라는 놈의 도움이 있으면, 낮은 가능성이지만 살 수도 있겠지. 그때까지 이 녀석이 살아있어야겠지만.
방법이 있다.
그다지 어려운 방법도 아니었다.
창고에 넘쳐나는 재보들. 불사조의 심장이야 몇 개는 있을 터다. 크투가는 내 부탁을 거절할 수 없다.
고개를 끄덕이며, 죽어가는 녀석을 바라봤다.
‘죽지 마라.’
또 혼자서 죽어버릴 생각이냐?
아서라. 내 앞에 놓인 이상, 다시는 과거와 같은 상황을 반복하지 않을 것이었다.
* * * * *
몸이 가벼웠다.
하지만 전신은 미친 듯이 뜨거웠다.
“일어났구나.”
앞에, 녀석이 있었다.
오한성.
천진난만한 얼굴로 미소 지으며,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나 ······ 안 죽었나?”
“죽었어. 여긴 지옥이야.”
“안 죽었구나.”
가슴팍을 내려다보았다. 회생불가의 상처가 거짓말처럼 아물어 있었다.
‘녀석이 날 살린 건가?’
하지만, 어떻게?
게다가 이곳은 심연이다. 바깥에 뜬 저 세 개의 달이 지구가 아니라는 걸 알려줬다.
몸 상태가 정상인 걸 확인하자, 김민식이 주먹을 쥐었다.
목이 탔다. 갈증이 났다. 이 갈증은, 녀석을 쥐어패야 풀릴 것만 같았다.
결국 오한성의 멱살을 쥐어잡았다.
“다 털어놔. 너, 대체 뭐하는 놈이냐?”
< 47. 마지막 경매(2) > 끝
ⓒ 온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