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 마지막 경매(1) >
전신이 뻐근했다. 온 힘을 탈진해버린 느낌. 하지만 기분 좋은 탈진감이었다.
절로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아침에 눈을 뜨며 웃어본 게 얼마만이더라?
‘심연에도 빛이 들어오던가?’
급격히 들어온 빛의 무리에 눈살을 찌푸렸다.
이어 눈을 크게 뜨고 전방을 바라보자, 빛으로 이루어진 덩어리 두 개가 내 앞을 움직이는 게 보였다.
이건······.
‘내가 창조한 인자들.’
본래라면 태양탑의 하층부에 있어야 할 그것들이, 어느새 완성되어 나를 찾아온 것이다.
아마도 부족한 점이 채워져 힘을 갖추게 된 것이겠지.
설마, 설마 했는데 정말 ‘엄마’가 필요하리라곤.
이윽고 두 빛 무리가 라이라와 요르문간드의 품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곤 한 부분에 착상하더니, 조금씩 태아의 형상을 갖춰가는 게 아닌가?
‘생명의 창조.’
나는 신이 아니다. 그들처럼 무에서 유를 창조해낼 순 없다. 하지만 다른 방식으로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생명체가 가지고 있는 고유의 권한. 그들만의 축복. 수정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한참을 바라보다가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깨닫곤, 아, 하고 입을 벌리고 말았다.
‘아이.’
임신을 한 것이다.
어느 정도 예상을 하긴 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갑작스럽긴 매한가지였다.
내가 아빠가 되다니.
‘내 자식이라고?’
아직 태어나진 않았다. 하지만 나는 생명의 시작을 직접 두 눈으로 목도하고 있었다. 그건 뭐랄까, 당황스럽지만 무척이나 새롭고 경건함 느낌이었다.
과거가 달라졌다. 과거의 나는 혼자였다. 시리아를 잠시 연인으로 두긴 했으나 말그대로 잠시일 뿐.
아이는 없었다. 책임지고 싶지 않았다. 책임질 수도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언제 죽을지 모르는 시한부 인생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오히려 과거보다 더욱 치열해졌다. 죽을 일은 몇 번이나 있었다. 그러나 과거와 달라진 점이 있다면, 나 스스로의 가치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는 것이다.
‘나는······.’
부품이 아니다. 누군가를 위해 희생하기 위한 영웅조차 아니다.
나는 나다. 나였다. 그것을 인정하는데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래서 살고 싶어졌다. 이제는 누구보다 미래를 원한다.
내 자식을 원했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아도 상관없지만, 그럼에도 나만의 증표 하나쯤은 이 세계에 있었으면 했다.
‘꿈이 아닌 현실이다.’
몇 번이고 현실이 꿈이길 바란 적이 있다. 눈을 뜨면 세상은 원래대로고, 나는 평범한 고등학생으로 돌아가 있기를 소망한 적이 잠시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내가 빚은 나의 아이들이 이곳에 있다. 아직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진 않았으나 그 씨앗을 나는 심었다.
내 영혼이 빚어낸, 세상에서 유일한 나만의 자식들.
‘현실이야.’
몇 번이고 되새겼다. 눈을 깜빡이거나, 뺨을 당겨보거나, 실없이 웃어보기도 했다.
어쩌면 이 둘을 품은 게 라이라와 요르문간드여서 더욱 그럴지도 모른다.
처음에는 그저 창조하여 이용할 생각뿐이었다. 지금은 언제 그랬냐는 듯 그런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아빠가 된다.’
무엇을 준비해야 되지?
이것저것 많은 생각이 났다.
과거 내 동료들도 엄마가, 아빠가 됐던 이들이 있었다. 싸우는 것밖에 못했던 그들의 표정이 밝아질 땐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물어봐도 ‘너도 부모가 되면 알게 될 거야’라는 말 밖에는 해주지 않았던 탓이다.
‘내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제 나는 죽을 수 없다고.
죽어선 안 된다고.
그러니 반드시, 어떠한 역경이 있어도 이겨보이겠노라고.
이 전쟁을 하루라도 빨리 끝내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라는 것을, 더욱 현실적으로 깨닫게 되었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다.’
누워있는 시간조차 아깝다.
나는 쓰러지듯 잠든 둘의 이마에 입맞춤을 하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바라는 미래를 위해선, 내가 직접 문을 열어야 했으므로.
* * * * *
환락의 밤이 지나갔으나 아직 그 영향이 끝나진 않았다.
마족들을 비롯한 모든 괴물들이 더욱 예민해졌다. 곳곳에선 싸움이 끊이질 않았고, 별 것 아닌 일에 서로 죽이는 일도 비일비재해졌다.
“동쪽을 사수했던 군단장이 누구지?”
“2군단장입니다.”
교주 코로나가 답했다.
동쪽. 환락의 밤 때 거침없이 나에게 달려들었던 거인이 그곳에서 왔다. 그곳을 책임지던 군단장이 일부러 놓아주지 않은 이상에야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그를 배신자로 보았다. 둠이 심어둔, 혹은 그 이상에 동조하는 놈. 실제로도 2군단장의 피해가 제일 미비했다.
‘실제로도 수상했지.’
그 뒤로 2군단장을 집중 마크했다. 결과적으로, 놈은 숨기는 게 있다. 이대로 안고가기엔 분명히 불안요소로 작용할 것이었다.
“그를 제명하는 안건으로 회의를 진행하겠다.”
“······ 예?”
코로나가 잠시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내 얼굴은 잔뜩 굳은 채였다.
“2군단장을 제명하는 안건으로 회의를 진행하겠다고 했다.”
“부, 불가능합니다. 빈 자리에 군단장을 임명할 순 있어도, 군단장을 제명하는 건······.”
“이 역시 전례가 없던 일인가?”
“예. 왕보다 더욱 오랜 시간 군림했던 자들입니다. 가능할지라도 반발이 심할 겁니다. 내전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있습니다.”
코로나의 표정이 짐짓 심각해졌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내전은 반드시 피해야할 일이다.
하지만 방법이 없지는 않았다.
“사자왕에게 전서를 넣어라. 그와의 동맹을 제안하기 위한 사자로 2군단장을 출정시키겠다고.”
“······ 사, 사자왕에게 말입니까?”
코로나의 눈이 경악으로 가득 찼다.
이미 사자왕, 안달톤 브뤼시엘과는 이야기가 끝났다. 시기를 보고 있었을 뿐이고, 이제 때가 된 것이다.
내가 그렇다고 입을 열 찰나.
“성에 침입한 인간을 잡아왔습니다. 죽일까요?”
성의 경비병 중 하나가 교주에게 보고했다.
본래라면 침입자를 발견한 순간 죽이는 게 원칙이지만, 최근의 불미스러운 일이 급증함에 따라 죽이지 않고 심문하도록 규칙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에 침입한 인간이라고?
이야기를 들은 즉시, 급히 발걸음을 옮겼다.
심연에 인간이 들어왔다. 하지만 이곳 심연에선 인간이 살아갈 수 없다.
누굴까?
침입했다면 다른 세계, 그중 지구에서 왔을 가능성이 높았다.
심연에 들어와 이곳까지 도달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심연은 과거에도 영원한 미개척지였으니.
‘······ 딱 한 명. 과거를 비틀 수 있는 사람이 있지.’
설마, 설마 했다.
하지만 혹시나가 역시나였다.
김민식.
녀석이 왜 이곳에 있는 지 알 겨를이 없다.
지금쯤이면 지구에서 활약을 해야 하고 있어야 하건만, 다시 심연으로 들어와서 어떻게 이곳까지 도달했단 말인가.
“인간치곤 강해서 경비가 백 가까이 죽었습니다.”
강하다. 그야 그럴 만 했다. 다시 본 민식이는 엄청나게 강해져 있었다.
‘심안.’
이름: 김민식(value-지배불가)
직업: 마검사
칭호:
● 완숙한 모험가(7Lv, 힘+9)
● 괴물 학살자(5Lv, 힘+7)
● 알 수 없는 신의 사도(9Lv, 모든 능력치+5)능력치:
힘 98(77+21)s 민첩 85(77+8)s 체력 80(75+5)s 지능 77(70+7)s 마력 78(70+8)s 잠재력(369+49/483)특이사항:
-불굴의 효과로 인해 심연에서의 마이너스 효과(모든 능력치-30%)가 반 이상으로 줄어듭니다.
스킬: 월광(6lv), 원소마법(8lv), 심판자(7lv), 불굴(7lv)착용한 장비: 다르한의 검(마력+1, 월광), 팔라딘의 망토(민첩+3), 태양빛 반지(마력+2), 지혜의 귀걸이(지능+2)상태창을 훑곤 내심 고개를 주억거렸다.
‘엄청나군.’
엄청난 수라길을 걸어온 모양이다. 그리고 안에 잠든 가짜 알레테이아의 힘 역시 어느 정도 흡수한 듯싶었다.
일반 마족들로는 쉽게 당해낼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
온갖 제어구에 묶여 있는 민식이의 눈빛은 여전히 죽지 않았다.
“또 보게 되는군.”
“이곳의 보스가 너냐?”
“그렇다.”
민식이의 눈빛은 여전히 적대적이었다.
하지만 녀석이 여기까지 온 경위가 궁금했다.
“어떻게 인간인 네가 이곳까지 흘러들어온 거지?”
“이곳에 오한성이라는 인간이 있나?”
오한성. 나다. 지금은 우리엘 디아블로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하여간 민식이의 입에서 ‘오한성’이란 이름이 튀어나올 줄이야.
우리엘 디아블로와 오한성은 관계가 없다. 오한성이 아니라 ‘아르켄’이란 이름으로 활동했기 때문이다.
“오한성? 처음 듣는군.”
“거짓말 하지 마라. 이곳에 요르문간드가 온 것을 안다. 그 뱀 여자가 오한성과 관계가 있는 것을 안다.”
요르문간드를 따라온 건가?
아무리 그래도 이상하다. 그렇다는 건 녀석이 처음부터 심연에 있었다는 뜻이 된다.
“영문 모를 소리를 하는군.”
“녀석이 이곳에 있다면, 전해라. 너의 친구 김민식이 이곳에 왔다고. 네가 돌아오지 않으면 지구가 위험하다고.”
······ 지구가 위험하다?
민식이의 눈빛이 더욱 저돌적으로 변했다.
이를 악물며, 말을 던졌다.
“네 친구인 둠의 대리자라는 놈이 접선해왔다. 지구의 절반을 넘기라고 한다. 빌어먹을 새끼들. 우리를 얌전히 놔둘 순 없는 거냐?”
둠이 지구에까지 영향력을 뻗쳤다?
‘너무 일러.’
지구는 최종장이다. 나는 지구에서 전쟁이 벌어지는 걸 막을 셈이었다. 그런데 그보다 빠르게 둠이 먼저 손을 썼다는 거다.
민식이가 이 상황에서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었다.
진짜라는 소리인데. 지구의 절반을 넘기라니. 무혈입성을 하고 미리 자리를 선점해 놓겠다는 뜻이었다.
“하여간 전해라. 궁금한 게 많지만, 지금은 따로 묻지 않겠다고. 내가 죽으면 그 녀석만이 희망이니까. 혹시 몰라 길드의 상속도······ 제기랄, 죽이려면 어서 죽여라!”
쾅! 쾅!
제어구가 흔들거렸다. 말 그대로 민식이는 발광을 하고 있었다.
나는 잠시 정신이 아찔해지는 것을 느끼며, 몸을 돌린 채 말했다.
“죽이지 말고 지하밀실에 가둬라. 그리고 물과 먹을 것을 일절 금해라. 천천히 죽어가게끔 말이다.”
이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이렇게 말해두지 않으면, 경비병들이 당장 민식이를 죽이려고 들 터였다.
규칙상 어쩔 수 없이 보고한 것이지, 경비병들의 눈에는 살의가 가득했다.
‘둠. 둠. 둠.’
녀석이 나보다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내가 미처 생각하지도 못한 영역을 비집고, 파고드는 중이었다.
제기랄. 이래선 안 된다.
더. 더. 더.
더 빠르게 움직일 필요가 있었다.
* * * * *
사자왕과의 친교를 위해 사자로 보냈던 2군단장이 싸늘한 시체가 되어 돌아왔다.
이는 선전포고와 같았다.
사자왕이 나, 태양왕에게 보내는 전쟁의 서막.
“가만히 있는 건 나를, 그리고 모두를 모욕하는 일이다.”
웬일로 다른 군단장들이 뜻을 같이했다.
“오만한 사자왕의 무리를 모조리 죽여야 합니다.”
“피에는 피로. 한 놈도 살려둬선 안 됩니다.”
친교를 위해 건넨 손을 놈들이 져버렸으니 우리 역시 보복을 해야 한다는 거다.
명분은 좋았다. 확실히 명분은 우리에게 있었다.
나는 내심 미소를 지었다. 사자왕, 안달톤 브뤼시엘이 일을 제대로 처리해준 덕이다.
내게 남은 썩은 뿌리와, 그에게 남은 썩은 뿌리들이 충돌해 서로 사라져갈 것이었다. 둠 역시 이 전쟁으로 인해 방심할 테고, 나는 그 빈틈을 노릴 생각이었다.
‘마지막 경매.’
마침 적절한 시기가 나왔다.
내가 암흑상회에 심어둔 암흑인으로부터 ‘마지막 경매’가 열릴 거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진짜 마지막은 아니지만, 마지막이라 칭해도 될 정도의 매물들이 그곳에서 나온다는 말.
참여하지 않을 수가 없다. 데몬로드라면 말이다.
나 역시 참여할 생각이긴 했다.
그리고 모두 쓸어 담을 작정도 하고 있었다.
그러기 위해선 다른 데몬로드들의 포인트를 탕진시켜야 한다.
경매가 벌어지기 전에, 탕진할 수밖에 없게끔 상황을 유도해야 했다.
‘신경이 쓰이긴 하군.’
계획은 완벽하다.
하지만, 민식이의 말이 계속해서 걸린다.
내가 돌아오지 않으면 지구가 위험하다는 게.
‘자세히 들어봐야겠지.’
녀석도 무언가를 눈치 채고 있는 것 같았다.
“후우.”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마냥 모든 걸 숨길 순 없단 말인가?
< 47. 마지막 경매(1) > 끝
ⓒ 온후
작가의 말
글 쓰는 속도가 원망스럽습니다ㅠㅠ저녁에 못한 연재분을 연재 하려고 하면 미묘하게 분량이 부족하거나, 마음에 들지 않은 경우가 많네요.
일단 한편을 빨리 완성했으니, 다음편도 계속해서 써보도록 하겠습니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