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신사냥꾼-205화 (206/251)

< 46. 환락의 밤(2) >

저 행동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를 내가 아니다.

여태껏 바깥에서 숱하게 봐온 모습이었으니까.

‘라이라조차도 버틸 수 없을 줄이야.’

아무래도 내 생각보다 흩뿌리는 페르몬의 강도가 훨씬 강한 모양이었다.

라이라가 식은땀을 흘리며 몸을 비틀거렸다. 숨을 가다듬으며 상태를 회복하려 했지만 그럴수록 안색만 창백해질 뿐이었다.

이어 그녀의 눈이 내게로 향했다. 동공이 크게 흔들리고 확장됐다. 그러곤 천천히손을 뻗어 내 얼굴로 향했다.

하아아아······.

짙은 숨결이 지척까지 닿았다.

하지만 나는 다가오는 그녀의 손길을 쳐냈다.

“정신 차려라.”

“아······.”

외부의 충격이 가해지자, 그제야 조금은 정신을 차린 듯 눈빛이 돌아왔다.

하지만 자신이 하려했던 행동을 되짚고는 당황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지금의 내 상태는 정상이 아니다. 내 안의 무언가가 여자를 매혹시키고 있었고, 육체와 정신에 강하게 작용하여 발정을 유도하는 것이었다.

‘자체 발정제라니. 미쳐버리겠군.’

자체발광은 들어봤지만 이건 그 경우를 아득하니 넘어섰다. 우리엘 디아블로가 천년동정이었던 것이 한꺼번에 폭발하듯 부작용을 낳은 게 아닐지 생각마저 들 정도다.

반신 발키리의 피를 잇고 그 격조차 평범한 괴물과는 궤를 달리하는 게 라이라다.내가 깨어나기 전부터 ‘전장의 표범’이라 불렸으며 몇 차례의 각성 끝에 어느 데몬로드조차 쉽게 건드릴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안일했다.’

그래서일까.

언제나 다시 일어서는 모습을 봐서 그런지 내 마음 언저리에서 ‘라이라는 쓰러지지 않는다’라는 인식이 생긴 모양이었다.

작금의 상황에도 라이라만은 괜찮으리라 여긴 것이다.

“······ 씻고 오겠습니다.”

찬 물로 세안하며 정신을 차려야겠단 생각인지, 라이라가 빠르게 몸을 돌려 발걸음을 놀렸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에 새겨진 당황과 수치를 나는 보았다.

‘그녀는 프라이드가 강하지.’

탁. 이마를 짚었다. 내 앞에서나 얌전한 척을 하지, 본래의 라이라는 무척이나 용감하고 자존심 강하며 고집스럽다.

그것을 알기에 그녀가 얼마나 많은 충격을 받았을지 짐작할 수 있었다.

수치심에 혀를 깨물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나를 오한성이라 받아들인 시점에서, 그 강도는 훨씬 높았을 터.

“이 망할 몸뚱이.”

한숨을 푹푹 내쉬며 몸 구석구석을 훑었다.

대체 어디서 매료의 힘이 나오는 걸까?

마력인지, 냄새인지, 나는 모르겠다.

누군가에겐 축복이라 불릴 수도 있는 일. 누군가 보면 배부른 고민이라 놀릴 일. 하지만 당사자인 내겐 떫떠름 자체인 그런 일이었다.

* * * * *

인산인해. 왕이 가진 매력에 성의 모든 ‘암컷’이 모여들었다. 순식간에 소문이 돌고, 이제는 직접 얼굴을 안 봐도 그 근처에 다다르면 자체적으로 매료가 되는 것이다.

그 강렬한 향이 순식간에 성을 뒤덮자 문제가 생겼다.

“태양왕이 이상한 마법을 사용한다.”

“태양왕은 멸종됐다 전해지는 인큐버스가 아닌가?”

“성 내의 모든 여마족들을 왕이 강탈해갔다.”

남은 수컷들은 소외되고 극적으로 버림받는 경우도 생겼다.

이쯤되자 태양왕을 ‘인큐버스’라고 여기는 작자들이 있었다. 인큐버스는 고대종이며, 이미 소실된 종족. 전쟁에 밀려 멸망당한 그 비운의 종족의 마지막 생존자가 아닌지 말이다.

이는 굉장히 불명예스러운 소문이었다.

“백색의 왕은 전대미문. 그가 인큐버스였기 때문에 백색이 나온 것이다.”

‘백색의 왕’이었던 게 연결되어 악의적인 소문이 의도적으로 퍼져나갔다.

아무리 마족이 전투종족이라 할지라도 번식은 본능이다. 자신과 짝짓기를 하던 대상이, 아내나 딸이 다짜고짜 자기를 버리고 떠난다면 화가 날 수밖에 없다.

정작 소문의 당사자인 우리엘 디아블로는 집에서 나오질 않으니 소문은 계속해서부풀려지고, 실제의 상황도 더욱 악화만 되어갔다.

이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선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고, 우리엘 디아블로는 결국 결단을 내렸다.

「작금의 현상은 태양신의 가호이다. 하지만 가호의 힘이 너무 강해 마력이 미쳐날뛰니, 그 마력이 하늘에 닿아 짐의 매력이 뭇 여인들의 가슴을 무너트리는 바, 이 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해 짐의 반려를 구하는 시험을 치루겠다.」

결혼공고다.

공고가 나가고 태양성을 다시 한 번 발칵 뒤집어졌다.

공고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이는 유례가 없던 일. 무려 태양신의 가호가 이만한 상황을 만든 것이다.

순식간에 인큐버스라는 소문이 지워지고 그 자리를 탐내는 작자들이 넘쳐나게 되었다. 왕이 직접 ‘반려’라는 단어까지 사용했으며, 신의 가호로 인해 태어난 자식은 역대의 어느 왕들보다도 강할 것이란 이야기가 여기저기 퍼져나갔기 때문이다.

-왕의 반려가 되어 아이를 낳아라!

-그렇다면 차기 왕의 자리는 따 놓은 당상이다.

반려라고 했지만, 왕이 몇 명의 반려를 둘 지는 마족들도 짐작하지 못했다. 하지만 하나는 아닐 것이다. 역대의 어느 왕들도 자신의 짝을 하나만 둔 경우는 없었으므로.

문제는 ‘시험’인데, 여마족들은 어느 시험이든 감내해내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태양성 모두의 관심이 ‘우리엘 디아블로’에게 집중 된 순간이었다.

* * * * *

이 모든 건 ‘코로나’의 작품이었다.

나는 왕이고, 악의적인 소문을 용납해선 안 된다. 반대로 그 소문을 한 번에 뒤집을 카드는 이것밖에 없다는 게 그의 설명이었다.

왕의 반려를 구하는 공고를 내려라.

‘명분은 좋군.’

반대할 도리가 없었다. 지금의 상황은 충분히 비정상적이다. 게다가······ 이 상태를 이용해 억지로 누군가를 품는 건 마음에 내키지 않는다.

가장 걸리는 건 라이라였다.

그녀의 상태가 심각해지고, 나는 일부러 그녀를 내게서 떼어놓았다. 그녀가 사랑하는 건 내가 아닌 우리엘 디아블로. 억지로 품은들 프라이드 높은 그녀에게 큰 상처만 남기게 된다.

결국 이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선, 명분을 내세워 반려를 구할 수밖에 없다.

‘영웅 중에서······ 유명한 바람둥이가 있었지. 죽기 전까지 십만 명의 여자를 품는 게 소원이라고 했던가.’

별난 놈도 있었다. 그 녀석은 자신만의 하렘을 만드는 게 꿈이라고 했다.

그리고 지금 내 상황은, 그 녀석의 꿈조차도 아득히 뛰어넘고 있었다.

576,433명.

‘내 반려가 되기 위해 시험에 도전한 참가자들의 숫자.’

오십칠만 이라니.

이것도 몇 가지 조건으로 거르고 걸러낸 숫자다.

최소한의 조건마저 걸지 않았다면, 천만 단위가 간단히 넘어버렸을 테다.

-성인일 것이며, 노쇠하지 않았어야 한다.

-처녀이며, 태양신에 대한 신앙이 굳건해야 하고.

-몸이 상처 하나 없이 깨끗해야 하며.

-최소 다섯 가지 이상의 마법을 사용할 줄 알고.

-시험재료로 준비한 돌덩이(250kg)를 한 손으로 들어야 한다.

이 조건들은 태양교의 교주 코로나가 준비한 것이었다.

신의 아이를 낳아야 하니 그만큼 신체에 관한 규율만은 까다롭게 본대나.

그다지 신경을 쓰고 싶지 않아 알아서 하라고 했더니 이렇게 되었다.

거르고, 걸러서 선정된 게 무려 57만.

‘이젠 나도 모르겠다.’

내 코가 석자였다.

나 좋다고 몰려든 이들을 막무가내로 내칠 수도 없는 노릇 아니겠나.

반쯤은 포기했다.

게다가 내 상태도 나날이 안 좋아지고 있었다. 아마도 본체의 상태가 악화되어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왕이시여. 직접 참관하시어, 이들의 용기를 북돋아 주십시오.”

코로나는 여기에 한 가지 조건을 더 붙였다.

직접 참관이라니.

“꼭 해야 하나?”

“성을 하나로 만들 기회입니다. 그들 모두를 품게 된다면 태양이 만물을 비추듯 세상이 바뀔 겁니다.”

코로나의 눈이 부담스럽게 반짝였다.

그는 나에 관한 일이라면 목숨을 걸고 해낸다.

아마도 내 반려를 구하는 일이 무슨 사명인 양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래, 좋다. 악의는 없으니까.

다 좋은데.

‘날 두 번 죽이는군.’

과거에도 해본 적이 없는 결혼을, 이 몸으로 하게 생겼다.

* * * * *

웅성웅성.

성의 중심부. 시험장으로 지정 된 장소는 마족들로 들끓고 있었다.

그들 대부분이 왕의 반려가 되고자 찾아온 여마족들이며, 합격하지 못한 이들도 내 얼굴이나 한 번 보고자 자리를 꿰어 찬 것이다.

나는 무겁게 높은 자리에 앉았다.

444개의 계단이 준비되었고, 태양과 용이 그려진 딱 봐도 부담스러운 의자 위에 묵직하게 앉아서 가만히 그들을 지켜보는 게 이번에 내가 해야 할 역할이었다.

“첫 번째 시험은 지혜를 겨루는 장입니다. 신의 아이를 잉태할 모체는 그만큼 현명하고 명석해야 하는 법. 열 가지 문제를 준비했으나, 하나라도 틀리는 경우에는 탈락으로 처리하겠습니다.”

교주 코로나가 내 대리자가 되었다.

그리고 탑의 위에서, 킥킥대며 크투가가 나를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이만한 장관은 나도 거의 본 적이 없구나. 크크큭. 역시 넌 재밌는 놈이야.

‘닥쳐라.’

-차라리 전부 안지 그러냐? 저 중에 하나만 고르는 건 너무 무자비하지 않냐? 다 너 좋다고 모인 암컷들인데 말이야.

-아니면, 그거냐? 고자냐? 너 사실 거시기 없는 거 아니냐? 내가 봐온 수컷들은 그저 할 수만 있으면 좋아한 놈들이 대부분인데 말이야.

이놈은 아저씨가 분명하다.

머릿속을 울리는 크투가의 목소리를 애써 무시했다.

지금의 나는 무척이나 예민하다. 여마족들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무시무시했던탓이다.

10가지 문제는 주로 심연이나 태양교, 그리고 나에 관한 것이었다.

‘어쩐지 이것저것 꼬치꼬치 캐묻더라니.’

코로나의 철두철미함에 혀를 내둘렀다.

모든 것에 통달하지 않고선 반려의 자격이 없다는 뜻일까.

아홉 문제에 도달할 때까지 무려 절반이 떨어졌다. 57만 명 중에 28만 명가량이 남은 것이다.

그래도 많다. 그것을 느꼈는지, 코로나의 표정이 삼엄해졌다.

“마지막 문제는 태양왕의 신상에 관한 것입니다. 왕께서 탄생한 서력을 각자 준비한 종이에 마력으로 적으십시오.”

시험자 대부분이 난색하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하지만 우리엘 디아블로가 본래 태양성 출신이라는 이야기는 꽤 유명하다. 정말 관심이 깊었다면, 어떻게든 알아낼 수 있는 범위의 문제였다.

이어 엄청난 탈락자가 속출했다.

28만 명 중에서도 이 문제를 맞힌 여마족은 1만이 채 되지 않았다.

‘생각보다 많군.’

하지만, 꽤 놀랐다.

무려 일만 가까이나 남은 것이다.

진짜로 내게 관심이 깊지 않고선 알아낼 수 없는 부분일진대.

단순히 매료된 게 아니라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어야 알 수 있다고 여겼다. 아니면 아직도 나는 이 매료의 힘을 과소평과하고 있는 걸까?

하여간 대다수의 탈락자들은 눈물을 머금고 시험장을 떠났다. 간혹 참을 수 없는지 달려드는 자들이 있었지만, 삼엄한 경비 속에서 철저하게 제재당했다.

“다음 시험은 서로의 정신력을 겨루는 장입니다. 그대들은 마력을 제한받고 특별히 마련된 장소에서 삼 일간 머물게 됩니다. 포기는 자유이며, 쓰러지는 순간 탈락입니다. 무리하다간 백치가 될 수도 있으니 조심하시길 바랍니다.”

나는 내심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3일은 이 장면을 안 봐도 된다는 것이다.

여유가 생기자 턱을 쓸고, 주변을 바라봤다.

그러고 보니 라이라는 어디 간 거지?

< 46. 환락의 밤(2) > 끝

ⓒ 온후

작가의 말

에고고 늦어서 죄송합니다.

평일 연재는 정상적으로 진행됩니다. 이제 뚫었으니, 달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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