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 더 로드(5) >
“오오, 우리엘 디아블로님! 새로운 태양왕으로 등극하신 걸 축하드립니다!”
“축하드립니다!”
기다란 사절단의 행렬은 끊이질 않았다.
그들은 내 앞에 무릎 꿇고 앉아 자신이 가져온 공물을 내밀며 얼굴을 내비췄다.
심연의 작고 큰 도시의 지배자들, 온갖 이해관계로 인해 나를 떠보고자 온 불한당들······ 이 중에서 실제로 내게 잘 보이고자 이곳에 온 자는 거의 없었다.
‘여기선 위엄을 드러낸다.’
내가 하는 모든 몸짓과 말 한 마디에 그들은 계산을 한다. 저울질을 하고 누구에게 붙을지 판단하는 것이다.
현재 심연은 아수라장이다. 둠의 총공세가 시작되며 균형이 무너졌다.
사천왕에게 붙어 안위를 챙기려는 자들이 많을 것이고, 이제 막 즉위한 나는 그들의 먹기 좋은 먹잇감처럼 보였을 터.
“형편없군.”
묵직하게 한 마디, 입에 담았다.
그들이 가져온 재화를 턱 끝으로 바라보며 끝내 실망한 듯 고개를 저었다.
물론 당장 내 앞에 놓인 것들은, 내가 우리엘 디아블로로 활동하며 번 것들보다 더 많았다.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일개 데몬로드가 아니다.
태양왕.
그에 걸맞은 대우가 필요하다.
그리고 지금 눈앞에 놓인 자들이 내놓은 건 태양왕의 이름값에 어울릴 정도의 재화가 아니었다.
“태양왕을 뭐라고 생각하는 거지? 고작 이딴 쓰레기들을 가져오며 축하한다고?”
자리에서 일어나 마력을 방출했다.
12가지 시련을 겪으며 내 마력은 한없이 깊어진 상태.
일개 괴물들 따위는 감당하기 힘들 것이었다.
나는 금은보화가 쌓인 눈앞의 제단에 올라, 그것들을 발로 무참하게 짓밟았다.
“나를 농락할 셈이냐? 내가 본래 데몬로드였다고 하여 내 그릇마저 작게 본 건가!”
대놓고 욕심을 드러낸다.
실제로 내겐 보다 많은 재화가 필요했다. 앞으로의 전쟁을 준비하려거든, 계속해서 마르지 않을 자원줄이 있어야 했다.
가장 쉬운 방법은 이곳에 모인 자들에게 내가 ‘욕심 많은 왕’임을 보이는 거다.
욕심을 채워주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준다는 듯 유혹하고 그들이 내게 재화를 건네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쿠르르릉.
태양탑에 만들어진 제단. 그 주변부가 흔들렸다.
그때였다.
내가 던진 미끼를 문 자가 있었다.
“태양왕이시여. 저희 사절단은 아직 왕의 근처에 도달하지도 못했습니다. 부디 저희의 것을 보시고 판단해주시길.”
그윽하게 시선을 옮겼다.
저 멀리에서, 거북등껍질로 무장한 종족의 무리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심연의 뒷면을 지배하는 3개의 상단. 그중 하나인 ‘일리언스 상단’입니다. 급격하게 성장하여 다른 상단과 사이가 좋지는 않지만, 어떠한 철광석보다 두꺼운 등껍질을 가진 ‘검은 괴물거북’의 사냥을 업으로 삼던 인어족이며, 계산이 철저하기로 유명합니다.
이곳에 오기 전 라이라가 내게 설명한 부분이었다.
일리언스 상단. 심연을 지배하는 거대부호라.
인어라 칭한 만큼 확실히 피부 겉면이 반들반들했다. 또한 다리가 있지만 마력의 유사성을 따져봤을 때 마법으로 만든 것인 듯했다.
그들의 행렬은 50여명 정도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자신감 넘치는 모습으로 다가와선 제단 앞에 가져온 재화를 풀었다.
“······ 과연 일리언스 상단. 제법 생각이 있는 것 같군.”
그것들을 보며 나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3대 부호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라는 듯 휘황찬란한 물건이 많았다.
당장 무너진 성 몇 개는 바로 만들고도 남을 정도는 되는 것 같았다.
아니, 단순히 그 정도가 아니다.
‘너무 많아.’
단순히 사절단으로 취임식을 축하하며 바치는 것치곤 재화의 양이 너무 많다. 포인트로 따지면 족히 300만 포인트는 될 것이다.
이만한 걸 그냥 준다?
상인은 밑지는 장사는 절대 안 한다. 이들이 정말 상인이라면, 그에 상응하는 무언가를 얻어내려 할 터.
긴장을 놓아선 안 된다.
“알아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일리언스 상단의 부상단주를 맡고 있는 오냑이라 합니다.”
스스로를 오냑이라 소개한 어인은 날카로운 철갑상어의 뾰족한 코를 가지고 있었다.
부상단주. 상단주가 직접 오진 않았으나 3대 상단이다. 부상단주를 보냈다는 건 그만큼 이번 행사를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뜻이었다.
“오냑, 일리언스 상단. 기억해두마.”
“이것들이 끝이 아닙니다.”
“뭐가 더 있단 말이냐?”
“보물 중의 보물이 남았지요.”
오냑은 여전히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말하며 웃어보였다.
이어, 그의 옆에서 머리끝까지 천을 뒤집어쓰고 있던 여인이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섰다.
“새로운 태양왕의 즉위를 상단주께서 직접 축하하고자 하는 의미로, 그분이 가장아끼던 셋째 딸을 왕께 바치고자 결정했습니다. 스칼렛 아가씨.”
스칼렛이라 소개된 여인이 천천히 천을 벗었다.
그러자 주변이 환해지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이토록 아름다운 어인이라니. 미(美)의 기준이 다르다고는 하지만, 결국 궁극점은 비슷해지기 마련이었다. 눈앞의 여인은 그 궁극점에 다다랐다 보기에도 충분할 듯싶었다.
압도적인 미모.
감히 요르문간드와 쌍벽을 이룰 수준이었다.
하지만 둘이 가져다주는 아름다움은 그 궤가 달랐다.
‘요르문간드가 폭발적인 아름다움이라면, 이 여인은 은은하고 신비하군.’
흔히 말하는 우물(尤物)과도 같은 여자.
요르문간드는 쉽사리 접근하지 못하지만, 이 여인은 누구나 ‘갖고 싶다’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묘한 마력을 지니고 있었다.
경국지색이라 하던가? 나라를 망하게 만드는 여인이 딱 이런 여인일 것만 같다는느낌이 들었다.
“스칼렛이라 합니다.
자신을 드러내는 것마저도 기품있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오냑이 거들었다.
“스칼렛 아가씨는 모든 어인들 중에서도 가장 아름답습니다. 아가씨를 보고자 매일 수천의 어인들이 발치에서 애절하게 몇날며칠을 기다리곤 하지요. 상단주께서도스칼렛 아가씨를 무척이나 아끼셨으나 나이가 차서 주변을 물색하고 있었습니다만······.”
오냑이 작게 혀를 차곤 고개를 저었다.
“마땅한 상대가 없었습니다. 지옥왕이 직접 스칼렛 아가씨를 보고 납치를 시도했을 정도였으나, 상단주께선 격노하시며 거절의 의사를 확실히 밝혔습니다. 하지만 이후 지옥왕의 욕심 때문에 아가씨는 상단 밖을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눈물바다가 되려고 한다. 따라온 어인들이 모두 눈시울을 붉혔다.
“이곳에 온 것도 상당한 모험이었습니다. 지옥왕의 손아귀에서 겨우 눈을 돌릴 수 있었지요. 부디, 저희 아가씨와 저희 상단을 도와주시지 않겠습니까?”
스칼렛과 오냑을 비롯한 모든 어인들이 무릎을 꿇었다.
상당히 진심어린 말투. 애절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너무나도 저자세다. 정말 그런 사연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들의 행동은 과한 감이 없잖아 있었다.
‘3대 상단은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기로 유명하다 했지.’
사천왕조차도 쉽게 건들 수 없는 게 그들이다. 그들만의 견고한 카르텔을 형성해 누구의 개입도 허락하지 않는다고.
만약 내가 라이라를, 요르문간드를 몰랐다면, 이 유혹에 빠졌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스칼렛이라 불린 여인은 우물처럼 깊었기 때문이다.
단순한 정신공격이 아닌 본능에 의거한 유혹.
하지만 섣불리 발을 담기엔 걸리는 게 많았다.
이 모든 게 상단주의 그림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만큼 나를 높게 봤다는 뜻.’
내게서 무엇을 본 걸까?
더불어 정말로 그토록 아끼는 딸을 내게 보내면서까지 무엇을 얻으려는 걸까?
“그녀를 품으라는 말인가?”
“예. 당장이 힘들다면, 지옥왕의 손길을 벗어날 수 있을 때까지만 머물게 해주셔도 됩니다.”
“이러한 사항들을 그녀도 알고 있는 건가?”
“예.”
“너에게 말한 게 아니다. 스칼렛, 그녀에게 물은 거다.”
선을 그었다. 뭔지도 모르고 함부로 품을 수는 없었다. 최소한 독인지 약인지는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힘을 키울 때 가장 좋은 건 혈연으로 묶이는 거지.’
안다. 어쩌면 이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그들의 힘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그것을 부정할 생각도 없다. 다만, 걸리는 게 너무나도 많았다. 내키지도 않았고.
이어 스칼렛의 깊고 깊은 눈빛이 내게 닿았다.
“제가 선택한 일입니다.”
“네가 선택했다고?”
“예. 태양왕께서 새로 등극하셨다고 들었을 때, 그 무용담과 수많은 이야기들을 듣고 제가 결정했습니다. 이분이야말로 제게 맞는 분이라는 것을요.”
상단주가 결정한 게 아니다?
그녀가 직접 내 곁으로 오기를 희망했다니······.
‘눈에 비치는 현묘함. 이런 느낌은 착각이 아닐 때가 많지.’
그녀의 눈은 깊었고, 또한 현묘했다.
나는 선택해야 했다.
품을 것인가, 내칠 것인가?
품는다면 300만 포인트에 다다르는 막대한 재물이 따라온다.
또한 계속해서 추가적인 지원이 있을 것이라 기대할 수 있다.
내친다면······.
‘그들의 성의를 무시한 게 되겠지.’
하!
머리를 잘 썼다.
나는 스칼렛의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미(美)에 홀린 게 아니다. 라이라를 만나고, 요르문간드를 접하고, 신성과 시련을 깨며 내 정신은 누구보다 성숙해진 상태였다.
“잠시간 머물게 해주마. 하지만 지옥왕의 손길이 더 이상 미치지 않는다고 판단할 때, 그때엔 돌아가야 할 것이다.”
완전히 받아들이지 않는다.
적당히 거리를 두며, 성의를 무시하지 않는 선에서 마무리하기로 했다.
그 뒤로 다른 상단과 지배자들이 내게 다가왔지만 눈에 차지 않았다.
일리언스 상단. 그리고 스칼렛······.
보물이 될지 그냥 처치 곤란한 돌덩이가 될지 조금 더 지켜봐야겠다.
* * * * *
“아가씨. 어떠셨습니까?”
오냑이 부복했다.
우리엘 디아블로에게, 상단주에게 조아리는 것보다 더욱 극진한 태도로.
스칼렛은 그 천혜와 같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제 미모에 혹하지 않았어요. 더 깊고, 더 웅장했죠.”
스칼렛은 특별하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무엇이 맞고 틀린지 알아낼 수 있었다.
더 나아가 무엇이 옳고 그른지마저 분별해낼 능력이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우리엘 디아블로를 보았을 때, 전율하며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그만한 그릇의 크기는 본 적이 없었던 탓이다.
“그렇다는 건······?”
“예. 제 생각이 맞았어요. 그가 제왕이 될 거예요.”
“아······!”
오냑이 입을 크게 벌렸다.
스칼렛이 하는 말은 틀린 게 없다. 적어도 오냑이 봐온 것들은 그랬다.
이어 스칼렛이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조금 분하군요. 제 미모에 혹하지 않는 자가 있다니.”
“어쩌시겠습니까?”
“그가 제게 반하게 만들어야겠어요. 마음 깊숙한 곳에서 우러나올 정도로. 제왕의 처는 하나면 충분하니까.”
스칼렛은 그림자에 숨어있던 한 존재를 떠올렸다.
우리엘 디아블로의 근처에서 호위하듯 서 있었으나, 둘 사이의 애틋한 감정을 그녀는 읽은 것이다.
‘라이라 디아블로라고 했던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러나 질 거란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매력에 자신하고 있었다. 시간이 걸려도 결국은 자신을 택할 것이라고.
오히려 너무 쉽게 넘어가면 재미가 없으니까.
“모든 일정을 그에게 맞추죠. 가져온 모든 것들을 풀도록 하겠어요.”
“상단주께 알릴까요?”
“아뇨, 알리지 마세요. 그 과정에서 지옥왕이 알아차릴 수도 있으니까요.”
지옥왕의 이야기는 거짓말이 아니었다. 그 끈질긴 작자를 피해 겨우 이곳까지 왔는데, 들켰다간 그의 심리만 건드릴 수도 있었다.
스칼렛이 주먹을 꽉 쥐며 말했다.
“그에 관한 모든 걸 알아내세요. 하나부터 열까지 빠트림 없이. 반드시 그가 제게반하게 만들겠어요.”
< 45. 더 로드(5) > 끝
ⓒ 온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