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 더 로드(4) >
둠이 인상을 찌푸렸다.
“6군단장이 죽었다고?”
태양성의 깊숙한 곳에 심어놓은 세작이 전해준 정보 탓이었다.
6군단장을 자기의 편으로 끌어들이고자 들인 공이 매우 크다. 막대한 제화와 힘을 주었건만 그것을 허무하게 날려버린 것이다.
“태양신과 그 사자가 나타나 6군단장을 죽였다고 합니다.”
“말도 안 된다. 태양신은 없어.”
둠은 확신하고 있었다. 그는 본래 사자왕이었던 자. 지금은 둠의 가죽을 뒤집어쓰고 있으나 사자왕의 자리에 있을 때 모든 현실을 깨우친 바가 있었다.
신이라 불리는 족속은 ‘허무’에 갇혔고, 당연히 태양신도 있을 리 만무했다. 그런데 태양신과 그 사자가 6군단장을 처리했다니, 있을 수 없는 일.
세작이 계속해서 말했다.
“태양왕과 태양신이 합심하며 태양성의 마족들을 포섭하기 시작했습니다. 남은 하나도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멍청한 놈. 때를 기다리라고 그렇게 말했거늘······.”
심어놓은 세작은 많았다. 6군단장 역시 그중 하나였으나 남은 하나가 더 있었다. 군단장 두 명이 함께 있었다면 역전을 꾀해 볼 수도 있겠지만, 6군단장의 폭주로 인해 중요한 카드 하나가 허공에 증발해버렸다.
‘내 승리는 확정적이다. 팔콘을 죽이고 놈의 지지기반을 거의 흡수했으니, 쉴 새 없이 몰아치기만 하면 되었지.’
팔콘을 죽인 뒤 여태까지 놈의 지지기반을 흡수하느라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그 작업도 거의 끝나가던 참이다.
이대로 무난하게 시간이 흐른다면 이 전쟁, 자신의 승리였다.
불확정 요소의 발을 묶어두고자 일곱 군단장 중 두 명이나 회유한 것인데 그중 하나가 죽고, 우리엘 디아블로의 위상만 높아진 탓이다.
“우리엘 디아블로의 움직임은?”
“왕성에서 지내지 않고 일반 마족들과 함께 지내는 중입니다.”
“일반 마족들과 함께?”
둠은 고개를 갸웃했다. 왕은 당연히 왕성에 있어야 하는 법이다.
“예. 심지어 쓸모없는 마족들을 거둬들인 뒤 그들을 먹이고 재우며 훈련시키고 있다고 합니다.”
“발악을 하는군. 하긴, 진골 이상의 마족들은 쉽게 따르려고 하지 않을 테니······.”
“오히려 힘 있는 마족들과 접선하고 있는 건 태양교의 교주 코로나라고 하더군요.”
양동작전을 쓴다?
둠이 천천히 턱을 쓸었다.
왕이 직접 움직이는 것보단 오히려 그편이 나을 수도 있다.
“그래봤자 시간이 지날수록 반발심만 커질 텐데.”
“예. 두 입장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습니다.”
힘 있는 자들 일수록 자신이 대우받는 걸 좋아한다. 6군단장을 포섭한 것도 바로 그러한 점을 공략해서다. 그런데 새로 즉위한 왕이라는 놈은 약자들과 놀고 있다.
멍청한 건가?
밑바닥에서부터 시작한 놈이라 잘난 놈들과 어울리는 법을 모르는 걸까.
“다행이군.”
둠이 한시름 놓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상화에서 우리엘 디아블로까지 신경을 쓴다면 시간이 많이 지체될 것이다. 그럴수록 로드들은 뭉칠 것이고 자신에게 저항하려 들 터였다.
“지금은 놈에게 신경 쓸 겨를이 없다. 중립의 데몬로드들과 접선은 되고 있나?”
“두 명이 넘어왔고 나머지는 계속해서 진행 중입니다.”
“좋다. 다음 경매가 다가오기 전에 최대한 일을 앞당기겠다.”
여기서 속도를 더 높인다. 달리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뜻.
“보기 좋은 광경이로군.”
그런 둠의 밑으로, 거대한 시체의 밭이 펼쳐지고 있었다.
지독한 악취와 피냄새가 코끝을 마비시킬 정도였다.
자신에게 반하는 모든 자들을 무참하게 살육한 결과.
둠의 욕망이 심연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 * * * *
단순하게 먹여주고, 재워주는 것만으로 만족할 생각은 없었다.
그들은 그 값을 하기 위해, 일을 배워야 했다.
나는 성 안으로 백원후들을 들여, 버림받은 마족들이 기술을 배울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했다.
“아무리 대라선의 말씀이라 해도 내키지 않는구나.”
은후.
예전 내 검을 만들어준 적이 있는 대장장이 중의 장이었다.
그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한 마디를 내뱉었다.
하지만 ‘대라선의 말’은 마법과도 같았다.
“저희가 이런 기술을 배울 수 있겠습니까?”
“저는 손 한 쪽이 없는데요.”
문제는 마족들의 태도다. 버림받은 그들은 그대로 방치되어 썩어갈 뿐이었다. 누군가가 나서서 무언가를 가르쳐준다는 상황 자체가 익숙하지 않았다.
게다가 신체적 결함이 있는 마족들이 더욱 많은 상황.
그러자 은후가 대뜸 눈썹을 찌푸렸다.
“시력이 없는 자들은 손끝의 감각이 더욱 뚜렷해진다. 신체 중 결함이 생기면 다른 쪽이 진화하게 되어있다. 너희들은 그런 것도 모르는 거냐?”
“망치는 내 아이처럼 소중하게, 모루는 내 아내의 배처럼 따듯하게 어루만져야 한다.”
“자, 봐라. 할 수 있지 않느냐?”
싫다, 싫다 하지만 역시 들이길 잘한 것 같다.
은후는 쉰 소리를 내면서도 할 일을 다 하고 있었다.
이에 전투가 불가능한 마족들은 기술을 배웠다. 오히려 신체적 결함이 있기에 더욱 세심한 작업이 어울리는 경우도 많았다.
그리고 신체가 멀쩡한 마족의 경우, 다시금 ‘재수업’을 시켰다.
“무공의 기본은 마음의 평정심에서 시작된다. 평정심이란 나 스스로를 인정하고 용서할 때 비로소 나타나는 것. 그러기 위해 너희들에게 오늘 가르칠 건 마음을 다스리는 법, ‘심법’이다.”
구화랑을 비롯한 야차들도 성내로 들어와 무공을 전파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신체가 마족과는 다르다고 하나, 범용성이 넓은 무공은 충분히 있었던 것이다.
일이 진행될수록 태양교에 귀의하는 신도들도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태양은 모두를 아우릅니다. 우리의 태양을 제외한 모든 이들은 평등합니다.”
이 모든 과정이 ‘교화’의 과정이었다.
밑바닥에서 기어 다니던 마족들은 짙은 패배감과 무력함으로 삶을 살아간다.
그들이 다짜고짜 변화하기를 바랄 수는 없다.
하지만 이렇게 조금씩 교화시키면, 스스로의 삶이 불필요하지 않다는 걸 인지시키면 그 폭발력은 보통의 것보다 배가 되는 법이었다.
나는 그런 경우를 숱하게 봐왔다. 멸망하기 전 지구에서.
‘마족은 민주주의를 받아들이지 못해.’
하지만 한계는 분명히 있었다.
모든 이들이 평등하고, 그 구성원 모두가 같은 힘을 지니고 있다는 기본전제를 마족은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막강한 우두머리 하나를 두면, 빛을 따르는 반딧불이처럼 우르르 일어서게 되어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 마디로, 나는 ‘태양’이 되고자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몇 개의 ‘규칙’도 만들었다.
-우리는 모두 같은 태양신의 자손이다. 자손들끼리의 살육을 금지한다.
-우리는 하나의 구성원으로 하나가 되어야할 의무가 있다.
-우리의 적은 우리에게 배고픔과 고통을 준 불신자들이다.
-우리는 심연의 진정한 주인이 될 권리를 가졌으며, 이것은 태양신의 이름으로 허락된 것이니 그 권리를 쟁취하고자 투쟁해야한다.
네 가지.
다소 편파적이지만 반드시 필요한 규칙이었다.
이런 작은 규칙조차 없어서 성의 내부에선 하루에도 수백의 마족들이 살육전을 벌인다. 나는 그들을 엄하게 벌하며 본보기로 내세웠다.
그러자 살육의 빈도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하지만 마족의 전투성향은 본능적인 것. 강제로 누른다고 억압되는 게 아니라는 것 역시 나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밑의 항목도 추가한 것이다.
‘우리의 적은 태양신을 믿지 않는 불신자들이다.’
그 불신자는 내부에 있을 수도 있고, 외부에 있을 수도 있다.
그리고 그러한 불신자들을 죽이는 데에는 아무런 제제를 두지 않았다.
그러자 ‘불신자 사냥’이 시작됐다.
“태양신을 믿지 않는 이단은 우리의 구성원이 아니다!”
“죽이자! 그들의 재화를 빼앗고, 그들의 신체를 불태우자!”
다소라 하기엔 많이 과격했다.
마족들의 방식은 ‘죽음’외엔 없었던 것이다.
이 운동은 밑에서부터 번져나가며 순식간에 성 전체를 들썩였다.
그러자 군단장들의 입지가 더욱 좁아지는 계기가 됐다. 그들 역시 ‘불신자 사냥’에서 마냥 자유로울 수는 없기 때문이다.
과격해도 이게 그들에게 맞는 방식이었다. 억지로 맞지 않는 옷을 입히면 탈이 나게 되어 있으니, 나는 최대한 저들과 나의 방식 그 중간의 줄을 계속해서 탈 필요가 있었다.
[놀라운 왕의 업적입니다. 백만 이상의 마족을 세뇌하는데 성공했습니다.]
[2,000,000pt를 획득했습니다.]
[세뇌 된 마족의 행동에 따라 추가 포인트를 획득합니다.]
[왕의 권위가 나날이 상승하고 있습니다.]
[명예 2,700점과 500,000pt가 추가됩니다.]
······.
[왕의 위엄을 보이세요. 더욱 많은 마족들이 따르도록 만드세요. 그들이 진정으로 왕을 따를 때, ‘더 로드’의 칭호가 부여됩니다.]
좋은 소식은 또 있었다.
포인트가 미친 듯이 늘어나고 있었다.
일반적인 왕이었다면 얻지 못했을 그런 추가사항들.
나는 진심으로 그들이 나를 따르도록 만드는 중이었다.
포인트는 힘이다. 암흑인이나 신들조차 어찌할 수 없는 새로운 법칙 중의 하나였다. 이 포인트야말로 다대일을 버티게 해줄 나의 근간이 되어줄 것이다.
하지만 마냥 돕기만 해선 모든 이들의 진심을 얻을 수 없다.
모든 이들의 진심을 얻기 위해선, ‘위험’이 동반되어야 한다.
‘외부의 적만큼 내부가 결집하도록 만드는 힘은 없지.’
태양성을 직접 공격한 외부의 적은 여태껏 없었다. 태양왕이 기거하는 이곳을 공격했다간 미안하다는 말로는 절대 안 끝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있다면?
태양왕의 성을 공격할 정도로 호전적인 적이 존재한다면 어떨까.
그리고 그 적이 결코 만만한 적이 아니라면······.
“로드시여. 사자왕의 전언입니다.”
라이라. 그녀가 바깥을 나갔다가 돌아왔다. 회복한 그녀를 아직 6군단장의 자리에 앉히진 못했지만, 일이 내 예상대로 흘러간다면 조간만 라이라를 그 자리에 앉힐수 있을 것이다.
하여간, 그녀의 귀환은 많은 것을 뜻했다.
“그가 뭐라고 했지?”
“‘마음대로 하라.’라고······.”
짝!
손뼉을 쳤다.
안달톤 브뤼시엘. 새로운 사자왕으로 등극한 그가 내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의 정적을 내가 제거하고, 반대로 성 안에 숨은 채 내 목숨을 노리고 있는 정적을 그가 제거하는 완벽한 시나리오.
‘배신자는 하나가 아니다.’
둠이 하나만 심어뒀을 리가 없다.
다른 세작도 심어뒀을 가능성이 100%였다.
가만히 등 뒤에 검이 꽂혀줄 생각 따윈 전혀 없었다.
작게 미소지으며, 저 너머를 바라봤다.
마침 성문으로 들어오는 거대한 마차의 행렬이 있었다.
수많은 종류의 마족이나 괴물들이 쉴 새 없이 들어왔다. 모두 행색이 다르고 서로를 견제하는 느낌도 없지않아 있었지만, 그들은 내가 왕위에 오른 것을 축하하고자 사방에서 보낸 사절단 들이었다.
“조심하십시오. 저들은 로드의 재량을 확인하고자 이곳에 온 자들입니다.”
“알고 있다.”
외부의 적을 안달톤 브뤼시엘이 준비한다면, 나는 더욱 내실을 다질 때였다.
나의 적이 될 자들과 아군이 될 자들을 확실하게 구분지어야 한다.
저 행렬엔 사천왕 외에도 수많은 도시의 지배자들, 대부호나 막강한 힘을 지닌 자들의 사절단도 포함되어 있었다.
저들은 축하한다는 말을 건네며 나를 떠보려고 할 게 분명했다.
축제가 시작될 것이다.
“전쟁을 준비해야겠군.”
하지만 대상에 따라 마냥 즐거운 축제가 될 것 같진 않았다.
< 45. 더 로드(4)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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