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 더 로드(3) >
‘내가 왜 이러지?’
신체는 어느 정도 회복되어 있었다. 전장의 표범이라 불리는 자신이 균형을 잃는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그를 본 순간 다리에 힘이 빠졌다. 안도감이 들었다.
굉장히 묘한 감각이었다.
그날, 라이라는 선을 그었다. 긋기로 했다. 현실을 도피하던 자신을 꾸짖고 다시 되돌아와, 오로지 그분의 꿈을 위해서만 달려 나가자고.
겉모습은 우리엘 디아블로지만, 그는 우리엘 디아블로가 아니니까.
‘오한성.’
그의 흉내를 내던 인간.
죄질이 결코 가볍지 않다. 몇 번을 죽여도 마땅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엘 디아블로에 의한 것이라면, 그분의 소망과 연결된 일이라면, 그저 꿈을 공유한 별개의 존재로 인식하자고 마음먹었다.
실제로 잘 되어가고 있는 듯했다.
잘 되어가고 있는 듯했는데······.
“내 얼굴에 뭐가 묻었나?”
“아,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잠시 경황이 없어서.”
라이라가 고개를 털었다. 그는 오한성. 자신과는 종 자체가 다른 인간. 계속해서 되뇌었지만 쉽지 않았다.
우리엘 디아블로의 가죽을 뒤집어써서 그런 것이라고 애써 위안했다. 하지만 그의 얼굴을 보았을 때 가장 먼저 오한성의 얼굴이 떠오른 것도 사실이었다.
마지막에 그녀를 감싸고, 그녀가 눈을 뜨자마자 찾았던 건 다름 아닌······.
‘생각아, 멈추자. 멈춰야 해.’
애써 부정하며 한 발자국 더 물러났다.
여기서 더 깊이 사고했다간 자신이 세워두었던 마지막 벽마저 무너질지도 모른다. 애써 마음을 가라앉히고 라이라가 물었다.
“로드시여. 반란군은 몰아내신 건가요?”
“6군단장은 죽었다. 그의 기사들은 죽거나 투항했지. 생각보다 충성을 다하고 있는 것 같진 않더군.”
“······ 다행입니다. 바로 현장에 복귀하도록 하겠습니다.”
“조금 더 쉬어라.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상태로 나섰다간 괜히 내 얼굴에 먹칠만 한다.”
“방금 그건 시, 실수로.”
“실수로 넘어졌다고?”
그가 눈을 좁히며 라이라를 바라봤다.
라이라는 말을 아꼈다. 그녀만한 이가 실수로라도 발을 헛디뎌 그의 품에 안겼다는 건 더욱 문제가 될 소지가 있었다.
“······ 죄송합니다. 조금 더 휴양하겠습니다.”
차라리 아픈 쪽이 나았다.
대답을 들은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몸이 낫거든 나를 찾아와라. 비어있는 6군단장의 자리에 너를 올릴 생각이니까.”
“6군단장의 자리를, 말입니까? 다른 군단장들의 반발이 심할 겁니다.”
“아니. 이젠 상황이 바뀌었다. 당분간은 그들도 내 말을 들어야 할 거야.”
“······?”
라이라는 고개만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6군단장을 죽이고,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지 않고서야 그 말 많고 탈 많은 군단장들이 가만히 있을 리 만무했던 탓이다.
하지만 그의 표정엔 자신감이 넘쳤다. 생각대로 일이 진행되고 있다는 증거.
이윽고 그가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정말 좋은 날씨야.”
그러곤 몸을 돌려, 방을 나갔다.
라이라는 한동안 멍하니 그의 뒤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지금 뭐라고 한 거지?
좋은 날씨라고?
그에게서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말.
게다가 마지막에 보인 미소까지······.
다르다. 달라졌다. 여태껏 보인, 우리엘 디아블로의 흉내가 아니었다.
뭐라고 해야 할까.
여유. 그리고······.
“허어어어억! 바, 바바바, 방금, 태, 태양왕님 맞으시죠? 태양신의 아들께서 이 누추한 집을 들르시다니!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아요!”
옆에서 숨을 멈추고 있던 마족 소년이 호들갑을 떨었다.
* * * * *
시련을 통과한 이후 나는 나 자신의 본질을 보게 되었다.
더 이상의 가식이나 연기가 아닌 나 스스로의 모습으로 세상을 살기로 마음을 먹은 것이다.
“······ 성을 재건하지 않으시겠다고요?”
“나는 다른 마족들과 같은 장소에서 머물겠다. 왕성은 권위와 파괴의 상징. 내가 말한 ‘개혁’과는 거리가 멀어.”
코로나가 기겁하여 되물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일 따름이었다.
밑에서부터의 개혁, 이곳의 모든 마족들이 나를 따르게 해야 한다.
그러려면 여태껏 없었던 왕의 모습을 보여주면 된다.
“대신 그곳에 태양신을 상징하는 상을 세우도록 하지. 성을 둘러보니 변변찮은 상징 하나 보이지 않더군.”
“······ 정말이십니까?”
코로나의 눈알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태양탑을 제외하면, 태양신을 상징하는 상징물이 없었다.
아마도 군단장들과 역대의 왕들을 겪으며 모두 사라진 것이리라.
오죽하면 태양탑의 지하는 아예 관리조차 되지 않고 있지 않던가.
“태양신의 상을 건설하고, 교리를 담은 서적을 인쇄하여 이곳의 모든 마족들에게뿌리도록.”
“책은 이미 배포되어 있습······.”
“신께서 강림하셨다. 그분이 직접 하신 말을 수록해야 하지 않겠나?”
“아······!!”
둔기로 크게 한방 얻어맞은 듯 코로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복음. 신의 말을 담은 서적. 하지만 너무나 오래되어 제각각의 해설을 갖게 되었다. 여기서 진짜 신이 등장하여 처음부터 어록을 쏟아낸다면, 다시금 하나로 통합될수 있을 터.
‘같은 교라도 해석에 따라 파가 나뉘기도 하니.’
이곳 역시 다르진 않을 것이다. 정통의 태양교가 존재하고, 이곳에서 파생된 몇 개의 파가 또 있을 거라고 보았다. 더불어 사이비도 존재할 것이다.
그들을 통합할 수 있다면 상당한 전력이 될 게 자명했다. 원래 뭔가를 광적으로 믿는 사람들이 ‘내 편’일 땐 생각보다 든든한 경우가 많았다.
반대로 ‘적 편’일 땐, 세상에서 가장 까다로운 적수가 되기도 하지만.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니다. 그럴 여유가 없었던 것뿐이지.”
나를 바라보는 코로나의 눈이 초롱초롱 빛났다.
내가 다 부담스러울 지경이었다.
“상을 건설하겠습니다. 하지만 거주할 장소는······ 사도들을 주변에 배치해놓도록 하겠습니다.”
이건 절대로 양보하지 못하겠다는 듯 굳건한 눈빛이었다.
“그것까진 말리지 않으마.”
“감사합니다.”
무조건 반대해서도 안 된다. 사람을 다룰 땐, 그 사람의 의견에 귀 기울이고 적당히 조율하면서 때로는 받아들여주기도 해야 하는 법이었다.
마족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특히 코로나는 내게 굉장한 신뢰를 보이고 있으니, 약간의 행동만으로도 곱절의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사는 곳이 다 똑같군.’
그러나 여기서 끝낼 생각은 없었다.
나는 그들의 생활에 깊숙하게 침투 할 작정이었다.
그러기 위해선 먼저······.
“한 가지 더. 급식소를 설치하겠다.”
“급식소요?”
“위생상태도 엉망이지만, 헐벗은 아이들이 너무 많더군.”
크투가를 찾으며 성을 돌아다닐 때의 일이었다.
왕성의 주변을 제외하면, 이곳의 치안은 최악이었다.
모든 부가 왕성 주변에 집중되어 있었다. 반절이 넘는 마족들은 노예처럼 일하거나 굶주림을 겪고 있었는데, 아이들은 그 경우가 더 심했다.
“전쟁으로 부모를 잃거나 마력적성이 부족한 아이들의 경우 외곽으로 쫓겨나기도 합니다. 혹은 불구거나 뭔가 결함이 있는 아이들이 그렇지요.”
별 거 아니라는 듯이 답한다.
이곳에선 이게 일상이기 때문이다.
약육강식. 약자가 도태되는 게 당연한 곳.
그대로여선 안 된다. 바뀌어야 한다. 모두가 뭉쳐야, 그래야 이길 수 있다.
“약하다고 버려지는 아이들이 있어선 안 된다. 아이들은 우리의 미래다. 불구라 하여도 그들에게 맞는 일을 주면 되지. 왜 방치를 하고 있는 거지?”
“하지만 쓸데가 없지 않습니까?”
“태양은 만물을 비춘다. 차별을 두지 않아.”
잠시, 코로나가 멈칫했다.
그나마 가장 머리가 뚫린 코로나마저 이런 반응이다.
아무래도 마족과 인간의 차이인 듯싶었다.
“태양은······ 만물을 비춘다.”
하지만 코로나는 그 말을 되뇌었다. 깨우치려는 의지가 있어서 다행이다.
“그리고 관련부서를 만들어 모든 마족들의 이름과 생년을 명시해 빠짐없이 모두를 아우를 수 있도록 해야겠다. 그 편이 낙오자가 없고, 관리하기도 편하니.”
워낙에 많은 마족이 죽고 태어나길 반복해서 그런지 너무 주먹구구였다. 제대로 된 기관이 거의 없었다. 내게는 너무나도 낯선 환경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내 식에 맞게끔 조정할 필요가 있었다.
“전해두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군단장들이 가만히 있을까요?”
“반대하겠지.”
“따로 생각하시는 게 있으십니까?”
“한동안은 괜찮을 것이다. 지금은 내 힘이 가장 강할 때니까.”
왕은 즉위한 직후가 가장 강하다. 하물며 내 뒤엔 타칭 태양신이 있다.
이 순간에 반론을 들이는 건 그들에게도 위험부담이 컸다.
이때, 할 수 있는 모든 걸 해놔야 한다. 나중에 부딪혀도 탈이 없도록.
“설령 반대한다 하더라도 그들은 손쓸 방법이 없다.”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그들은 이 성의 80%가 넘는 것들을 독점하고 있습니다. 힘과 부를. 당장 6군단장의 자리가 비어 혼란스러운 상태입니다만, 그들이 합심한다면······.”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조언이었다.
이런 조언은 백 번도 들어줄 수 있다.
“괜찮다. 그에 대한 대책도 세워놨으니까.”
힘을 합치면 나도 곤란하다.
그러니 힘을 못 합치게 하면 된다.
‘분열.’
작은 미끼 하나만 던져주면 자기들끼리 치고받고 싸울 것이다.
결국에는 내가 주는 것만 받아먹으며 고분고분 해지리라.
문제는 그 미끼다. 무엇을 주어야 나머지 여섯 군단장이 싸우게 될까?
‘왕의 자리.’
왕의 자리쯤은 걸어야 그들이 움직일 터다.
예컨대······ 투표는 어떨까?
제도 자체를 엎어버리는 거다.
힘으로 쟁탈하는 왕이 아니라 스스로 모범을 보여 권위를 뽐낸다.
그러기 위해 마족들에게 표를 주고 직접 왕을 뽑게 만든다면?
나는 이 결과가 엄청나게 궁금했다. 인간과는 다른 종족. 하지만 다를뿐 틀리진 않다는 게 증명될 것인가?
아니면 그들은 역시 힘의 논리로만 돌아가는 종족일는지.
‘당장은 생각만.’
아직은 시기상조다. 여러 과정을 통해 ‘씨앗’이 보인다면 충분히 걸어볼 만 한 낚시였다.
하지만 그 말을 꺼내기 전에, 내가 먼저 ‘민심’을 얻어야 한다.
* * * * *
미친 왕이 나타났다!
소문은 삽시간에 퍼졌다.
새로 즉위한 왕의 행보가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우선 왕성의 외각에 직접 왕이 행차하며, 헐벗은 아이들에게 밥을 나눠주기 시작했다.
이것만으로도 놀라운 일이었다.
그 더럽고 냄새나는 장소는 덜떨어진 마족뿐이 없는 장소다.
멀쩡한 마족은 제정신으로 그곳에 들어가려고 하지 않는다.
누가 죽어도 아무도 모를 그런 장소에, 왕이 직접 행차할 줄이야.
뿐만이 아니다.
왕은 왕성에 살지 않는다. 평범한 집에서 여타 다른 마족들처럼 살아갔다.
“정신이 나간 거 아니야?”
“전혀 왕 답지가 않군.”
“왕이 권위가 없어서야······.”
힘 있는 자들은 그런 왕의 행보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더욱 몰아붙여야 움직이는 게 마족의 습성이다. 저토록 한없이 퍼줘선 배부른 돼지가 되어 생각만 많아질 따름이었다.
왕의 첫 행보에 모두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니 그저 왕이 미쳤다고 할 수밖에.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 어떤 왕을 만나게 될지, 그래서 어떠한 변화가 생겨날지, 현재의 그들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 45. 더 로드(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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