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신사냥꾼-199화 (200/251)

< 45. 더 로드(2) >

저만한 화염은 본 적이 없었다. 교단의 벽화나 고서에나 남아있을 법한 진정한 신의 위업이 아닌가!

“크아아아아아아악!”

6군단장이 거구의 몸을 뒤틀었다. 작렬한 불덩이에 전신이 짓이기고 화하며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지르고 있었다.

화륵! 화르륵!

천마의 육체와 합일한 크투가가 발을 옮길 때마다, 주변의 흑기사들이 하나, 둘 타버리고 사라졌다.

증발.

살점 하나 남기지 않고 깔끔하게 지워버린 것이다.

콰르르릉!

세상이 적염으로 물드는 듯했다.

성벽이 무너지고, 왕성조차 녹아내렸다.

말 그대로 주변 모든 게 녹아내리고 있었다.

“나, 나는 주글 수 없······!”

오로지 6군단장만이 그 불길에서 버텼다.

하늘에서 떨어진 불덩이를 거둬내고 모습을 드러낸 6군단장의 몸은 이미 절반 이상이 타들어간 상태였다.

뼈와 내장이 보이며, 그조차도 순식간에 쪼그라들어 화염 속 괴물을 연상시켰다.

마력도, 생명력도, 심지어 영혼마저 태워버리는 불꽃이었다.

6군단장은 마지막 힘을 짜내 크투가를 향해 한 발자국씩 움직였다.

툭. 툭. 투우욱······.

하지만 세 발 자국을 걷기도 전에, 그의 몸 전체가 아스라이 사라졌다.

퉁. 퉁. 투르르르.

마지막 남은 두개골이 바닥을 구르다가 이내 먼지처럼 화했다.

그러자 주변에 남은 ‘적’은 더 이상 없었다.

“힘이 넘치는군.”

헤라클레스는 ‘힘’으로 대변되는 존재다. 하지만 그의 진정한 힘은 ‘불굴’, 포기하지 않는 것이었다. 크투가의 성정과도 매우 어울린다고 할 수 있었다.

완전한 합일을 한 게 아님에도 이만한 위력이다.

왜 천마가 이 신체가 나쁜 놈의 손에 들어가지 않게 해달라고 부탁했는지 알 것만같았다.

“태양신을 뵙습니다.”

“태양신을 뵙습니다!”

교주와 교단의 신도들이 하나, 둘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크투가는 인상일 찌푸렸다.

“신?”

태양신이라니.

가당치도 않은 소리다. 크투가는 태양신이라면 이를 갈며 싫어했다. 그 가짜 놈에게 걸려서 오랜 시간 이곳에 갇혀있었던 탓이다.

크투가가 오한성을 바라봤다.

오한성은 고개를 저었다.

‘이대로 신 노릇을 하라는 거냐?’

토악질이 나온다. 본능적인 거부감이 있었다.

하지만 오한성과 크투가는 약속을 했다. 계약으로 묶여있었다. 계약의 내용은······ 놈이 헤라클레스의 신체를 가져올 경우, 똥구멍이라도 핥을 정도로 충성을 다하겠다는 것.

빌어먹을. 설마 15일 만에 정말로 가져올 줄은 몰랐다.

그래도 약속은 약속이다. 크투가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자 놈이 앞으로 튀어나왔다.

“너희의 죄가 하늘에 닿아 태양신께서 분노하시며 이곳에 당도했도다!”

저건 또 무슨 소리야?

불꽃이 오그라들었다.

귀까지 막아버리고픈 심정이었다.

웃기는 노릇이다. 가장 싫어하는 놈의 흉내를 내야 하다니!

그러나 놈은 멈추질 않았다.

“왕의 칭호는 신이 점지한 것. 하물며 이번의 ‘왕’은 태양신께서 각별히 주시하고 있었던 존재였다. 그를 배반하는 행위는 곧 신을 적으로 모는 것과 같도다!”

“어떻게 해야 저희가 죄를 씻을 수 있겠습니까?”

심지어 저 궤변이 먹힌다.

교주 코로나가 발아래 조아리며 정성을 다하고 있었다.

하는 걸로 봐선 간이고 쓸개고 전부 빼어다줄 기세다.

“하지만 신께선 아량이 넓으시다. 지금이라도 죄를 깨우치고 참회한다면 너희의 죄를 사할 것이다.”

“참회하겠습니다.”

“아직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불신자들이 도처에 널렸다. 그들에게 진정한 신의 말씀을 전파하라. 그러지 않으면 신의 분노가 모두에게 닿으리라.”

신의 분노를 모두가 목격했다.

무려 6군단장이 마음먹고 일으킨 반란을 단번에 제압했다.

모든 걸 태우는 그 자태는 말 그대로 태양신과 같았다.

교주 코로나의 눈이 더없이 빛나기 시작했다.

교단의 영향력을 키울 절호의 기회. 군단장들에게, 역대 왕들에게 가려져 숨죽여 지내야했던 시절과 결별할 때가 왔다.

“그리하겠습니다. 태양교의 교리를 더욱 강하게 전파하겠습니다.”

“끝이 아니다. 태양왕에게 반기를 든 자, 드려는 자, 그들에게도 신의 분노가 향할 것이다.”

경고다. 6군단장만으로 끝나지 않을 거란.

동시에 신의 사자가 손을 들어 하늘을 가리켰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순 없다. 너희들의 죄 역시 마찬가지다. 믿으라. 믿지 않으면 다시금 신벌이 내려질 뿐이니!”

모든 이들이 멍하니 사자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압도. 모든 마족들이 압도되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터.

“모든 벽을 허물고, 모든 권위가 무너졌다. 지금에야말로 통합할 때다. 신의 이름으로 저 너머의 가짜들을, 불신자들을 처단할 때가 되었다. 신과 그 신의 대변자인 왕을 따르라! 나는 오로지 신의 ‘목소리’만을 전할 뿐이니!”

더불어 선도 그었다. 사자는 말을 전할뿐, 그것만으로 자신의 권위를 챙긴 것이다.

진정으로 따라야할 존재는 신과 왕. 왕이라면 우리엘 디아블로를 말하는 거였다.

아아······!

교주, 코로나는 전율했다.

어쩌면 왕이 그간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건 이때를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신을 부르기 위해 진정으로 헌신하며 기도한 것이다.

감히 전례가 없었던 일.

역대 어느 교주도 직접 태양신과 소통하진 못했건만.

‘그분은 다르다.’

연설로부터 시작된 변화가 지금에 이르러 극에 달했다.

그가 말한 믿음에 관한 이야기는 허언이 아니었던 셈이다.

믿으라! 믿으면 승리할 테니.

다른 누군가가 했다면 개소리 이상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신의 사자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믿습니다.”

“믿습니다!”

크투가는 아예 눈과 귀를 닫아버렸다.

그리고 오로지 신의 사자라 불리는 오한성만이 내심 미소 지을 뿐이었다.

* * * * *

성공적인 데뷔였다. 적어도 교주 코로나의 절대적인 믿음을 얻었다.

그는 이제 왕과 신의 이름을 등에 업고 교단의 세를 늘려갈 것이다.

교단의 세가 강해져서 군단장들을 위협할 정도가 되면, 그들은 자신이 숨겨뒀던 모든 걸 내 앞에 내놓으며 바짓가랑이를 잡아야 할 테지.

‘아주 좋아.’

솔직히 천마의 신체가 가진 잠재력이 이정도일 줄은 몰랐다.

살아있는 불, 크투가와 만나 엄청난 시너지를 일으킨 것이다.

그 힘이라면 충분히 파벌의 수장들과도 겨룰 수 있을 듯했다. 어쩌면 그들보다도 한 차원 더 강할지도 모른다.

-문제는 길게 싸울 수가 없다는 거다.

나는 탑의 아래로 향했다. 태양신의 보고가 있는 곳, 태초의 시작이 잠들어있는 장소.

“너의 불로도 10분 정도가 한계인가보군.”

-지하 밑에 봉인된 나의 불꽃을 가져다준다면 3배는 더 움직일 수 있다.

“당장은 안 된다.”

-왜지?

“쐐기를 박아야 하니까.”

-흠, 태양신의 보고에 태초의 생명력들이 잠들어 있다고 했지. 그걸 이용해 뭐라도 만들려고 그러냐? 아서라. 새로운 생명의 창조가 그리 쉬운 줄 아냐?

크투가의 말을 무시했다.

내가 지금 태양신의 보고로 향하는 이유.

내가 가진 ‘폭식’의 권능을 이용해 인자들을 받아들이며 새로이 조합하기 위해서다.

‘신의 아이를 만들어야지.’

더불어 내 신성을 닮은 생명체를 창조해, ‘태양신의 자식’으로 둔갑시키고 우리엘디아블로를 진심으로 따르지 않는 자들조차도 움직일 계획이었다.

태양신의 자식과 우리엘 디아블로. 그 둘 다 결국은 나의 힘이었다. 그들은 똑같은 자를 따르고 있다는 자각도 없이 내 의지에 따라 움직이게 될 것이었다.

“한성. 새로운 생명의 창조에는 많은 시간이 듭니다. 하지만 우리에겐 시간이 없습니다.”

기계와 같이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어둠속 인영이 내게 말했다.

크로노스. 그녀는 시련의 방을 나온 직후에도 계속해서 다른 공간 속에 숨어있었다. 조금이라도 자신의 존재가 들키는 걸 늦추기 위함이었다.

“여유가 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나마 이번엔 도와줄 수 있는 동료들이 있지. 크로노스, 너라면 일정 공간에서 시간의 흐름을 바꿀 수 있지 않나?”

크로노스 역시 천마가 남긴 ‘희망’ 중에 하나였다. 그리고 본래라면 그녀를 찾아가는 건 내가 아니라 김민식, 녀석이어야 했다.

하지만 민식이 녀석이 정말 진리의 사도라 할지라도 본연의 한계는 뛰어넘지 못한다. 나처럼 우리엘 디아블로라는 히든카드가 있었던 것도 아니니까.

그래서 떠올린 게 크로노스, 시간 그 자체의 정의였다.

어쩌면 크로노스는 진리의 사도가 자신을 찾아왔을 때 도와줄 방법을 가지고 있었던 게 아닐까. 그리고 그 도움이라면 역시 시간과 관계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녀와 만났을 때 시간의 흐트러짐을 느꼈지.’

어쩌면 이미 15일은 진즉에 넘겼을지도 모른다. 그곳에서의 시련은 결코 만만한 게 없었으므로. 그러나 정확히 15일이 맞춰졌다. 그걸 보며 확신할 수 있었다.

“······ 맞습니다. 하지만 한계가 있습니다.”

“충분해.”

나의 분신이며, 동시에 신의 아이를 만든다.

할 수만 있다면, 순식간에 둠이 올린 속도를 맞추고 그 이상으로 달려나갈 수도 있을 것이다.

* * * * *

“헉! 허억······!”

라이라 디아블로.

그녀가 급히 상반신을 들어올렸다.

전신에 식은땀이 가득했다.

악몽을 꿨다. ‘그’가 사라지는 꿈.

죽음을 맞이하고, 라이라를 둔 채 혼자가 가버리는 꿈.

뒤를 따라 달려갔지만 따라잡을 수 없었던 그런 막막한 꿈.

‘여긴?’

급히 주변을 둘러봤다.

익숙하지 않은 환경. 성과는 비교도 안 되는 작은 방 안에 눕혀져 있었다.

이그닐도, ‘그’도 보이지 않았다.

혹시 뭔가 잘못된 걸까?

정말로 사라졌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공포가 엄습해왔다. 입이 바짝 말랐다. 왜 이러는 건지, 그녀도 알지 못했다.

다만 조바심이 났다.

‘혼자서 이길 수 있는 전력이 아니었어.’

6군단장은 강했다. 그가 끌고 온 기사들은 분명히 쉽지 않은 상대였다.

오한성, 그리고 우리엘 디아블로만으로는 벅찰 터였다.

어쩌면 자신을 구하기 위해 몸을 던졌을 수도 있다.

“어! 일어나셨어요? 회복이 엄청 빠르시네요.”

방문이 열리고, 어린 마족 하나가 젖을 수건을 든 채 나타났다.

라이라는 순식간에 소년의 뒤로 돌아가 손톱을 세우며 목을 겨눴다.

“그는, 그분은 어디에 있지?”

“예? 누굴 말씀하시는 건지······.”

“오한성. 인간의 모습을 한 남자.”

“오한성? 인간이요? 흠, 본 적 없는데요.”

아······!

라이라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아마도 이그닐이 자신을 구하고자 문을 열었을 것이고, 그는 끝까지 남아 적들과 대치했을 것이다.

이 소년이 본 적이 없다면, 아마도······.

‘안 돼.’

주먹을 불끈 쥐었다.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복수를, 복수를 해야 한다.

물론 혼자선 힘들 것이다. 하지만 가능과 불가능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끼이익-

그때였다.

재차 문이 열리며 들어오는 자가 있었다.

그를 본 라이라의 눈이 더없이 커졌다.

“문이 너무 작군.”

“······ 로드시여!”

우리엘 디아블로!

그를 본 라이라가 저도 모르게 폴짝 뛰었다.

그러다 중심을 잃고 반쯤 쓰러지려 하자.

“회복이 덜 된 모양이구나. 조금 더 누워있어라.”

그가 몸을 당겨 천천히 자신의 가슴팍으로 라이라를 잡아당겼다.

겨우 자세를 진정한 다음에야 라이라는 얼굴을 살짝 붉힌 채 떨어질 수 있었다.

< 45. 더 로드(2) > 끝

ⓒ 온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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