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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신사냥꾼-198화 (199/251)

< 45. 더 로드(1) >

-여행의 시작과 끝이 전투로 얼룩질 것 같다는 느낌이 드는데.

암령, 손오공이 작게 투덜댔다. 현장과 함께했던 여행 역시 그와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녀석은 내 여행에 동참하기로 했다.

투덜대면서도 그 미친 괴력으로 본신을 움직여 산을 떼어내 던져버렸으니.

쾅! 쾅! 콰르릉!

여의봉은 제한 없이 늘어나고 줄어든다. 내리치는 족족 땅이 파열되며 마족들이 납작하게 짜부라졌다.

순식간에 벽이 무너지고, 왕성까지 곧게 뻗은 그것을 나는 올라탔다.

대답할 겨를이 없었다. 즉시 여의봉을 밟고 라이라를 향해 일직선으로 뻗어나갔다.

“뭐, 뭐야?”

“인간?”

내가 내달리는 것을 본 마족들이 한 마디씩 꺼내기 시작했다.

그렇다. 지금의 나는 ‘우리엘 디아블로’가 아니다.

아니지만, 다르지 않다. 저들만이 그것을 모를 뿐.

‘라이라는 알고 있다.’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라이라는 나를 분명히 ‘로드’라고 불렀다. 급박한 상황에서의 본능적인 외침과도 같았겠지만, 그래서 더욱 의미가 있었다. 분명히 마음 한 켠 어느 정도는 그녀의 마음이 열렸음을 뜻하는 거였으니까.

스릉!

월천이 잘게 울었다. 6군단장과 그의 휘하 망령기사들.

배신자의 무리다. 여태껏 숨어 있다가 드디어 꼬리를 내밀었다.

왜?

‘둠과 협조한 놈이 얌전할 리가 없지.’

끼리끼리 논다는 말이 있다.

둠과 손을 잡은 녀석이 오랜 시간 은둔하며 조용히 있을 리가 만무했다.

일 벌리기 좋아하는 둠만큼이나 호전적이리라.

그리고 그 생각이 맞았다. 내가 잠시 자리를 비운 틈을 타선 이렇게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콰아아아아앙!

왕성으로 다가가, 그대로 월천을 휘두르자 거센 풍압이 모든 걸 잘라냈다. 막아서고 있는 기사들과 지옥마들이 속절없이 반으로 나뉘었다.

생각 이상으로 강력한 한 방.

“엄청난 마력······!”

“인간이 아닌 건가!”

마족들이 허둥댔다. 일격으로 순식간에 서른 이상의 기사가 증발한 탓이다.

나조차도 놀라고 있었다.

시련을 통과할 때보다 급격히 강해진 느낌이 들었다.

‘모든 마력이 융화되었다.’

이는 암령의 마력이 내게 온전하기 작용하기 시작해서 생긴 현상이었다. 암령이 나를 따르자, 녀석의 마력이 내 안에 혼잡해있던 마력들을 일시에 절반 이상 녹여버렸다.

하지만 그걸 감안해도 이해할 수 없는 힘이었다.

‘신성.’

내게 깃든 신성은 오로지 거신에게만 작용하는 게 아니었던가?

지금 이 순간, 내 신성이 함께 타오르고 있었다. 신성이 새어나와 주변을 빛으로 물들일 정도였다.

“태양신······ 태양신의 사도······!”

오로지 교주 코로나만이 상반된 반응으로 이런 나를 받아들이고 있을 뿐이었다.

그의 외침은 경악을 넘어 경기를 일으킬 수준이었다.

쿵!

바닥에 착지하여 전각을 밟자 바닥이 울렁이며 벽이 세워졌다.

그 사이에서 나는 쓰러진 라이라를 부축했다.

“괜찮나?”

“여긴, 위험합니다. 영지로 피하셔야······.”

라이라는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었다. 전신이 다치지 않은 곳이 없고, 몇날며칠을 싸웠는지 신체의 기력이 전부 쇄해 있었다. 한계를 넘어서 극한까지 자신을 몰아넣고 있었던 셈이다.

비몽사몽.

아마 지금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를 테지.

그래도 좋다.

나를 로드라고 불렀고, 나를 걱정하는 그녀의 속마음은 진짜였으므로.

“쉬어라. 여긴 내가 처리하마.”

“하오나······.”

툭!

부드러운 마력을 주입시켜 잠시 그녀의 정신을 끊어놓았다. 극한까지 몰린 상태라 라이라는 즉시 눈을 감고 잠에 들었다.

더 시간을 지체했다간 원기를 사용하고 만다. 생명력 말이다. 그런 상황을 나는 바라지 않았다.

“아빠아아아아아!”

콩!

그 순간 이그닐이 하늘에서 날아와 내 가슴팍에 강하게 안겼다.

그런 이그닐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느지막이 말했다.

“이그닐. 라이라와 함께 잠시 피해있으려무나.”

“쟤들, 나빠!”

라이라를 공격한 마족무리를 가리키며 이그닐이 뺨에 공기를 잔뜩 주입시켰다.

빵빵해진 뺨을 툭툭 건드리곤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나쁜 놈들은 혼내줘야지.”

“이그닐도, 싸울래!”

아서라. 라이라조차 이그닐이 싸움에 개입하는 건 원치 않을 것이다. 여태껏 이그닐이 주변만 정찰하고 있었던 걸 보면 알 수 있다.

이그닐의 역할은 보조에 어울린다. 문을 열고, 닫으며 안전을 도모하는 게 이그닐이 해야할 역할이었다.

“안 돼.”

“그치만······.”

“나를 믿어라.”

“우움.”

이그닐이 똘망똘망한 눈초리로 나를 바라봤다.

그러곤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이그닐, 아빠 말 잘들어.”

“라이라를 지켜다오. 그 역시 매우 중요한 일이니.”

“응!”

동시에 이그닐의 앞에 문이 형성되었다. 이그닐이 라이라를 들어 올리며 날개를 펼치곤 즉시 문 안으로 들어섰다.

걱정스럽다는 듯 나를 쳐다봤지만, 나는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지금이라면.

모든 걸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시련의 영향일까? 아니면 헤라클레스의 의지라도 정말 이어받은 건가?

고개를 저었다. 비몽사몽간에 말했던 라이라의 한 마디가 더욱 컸다.

-로드시여!

‘로드, 로드라.’

우리엘의 몸으로 듣던 때와는 전혀 느낌이 다르다.

그녀의 믿음, 신뢰의 증거.

깨어나면 다시 그렇게 부르진 않겠지만······.

콰앙!

쿠루루루룽!

마력을 덧씌워 세웠던 벽이 무너졌다.

6군단장. 녀석이 거대한 몽둥이를 들고선 나를 맞이했다.

“네놈, 라이라 디아블로를 어디다 숨겼지?”

이미 문을 통과한 라이라는 이곳에 없었다. 그녀가 이곳을 지키고 있었던 건 오로지 ‘우리엘 디아블로’때문.

하지만 내가 온 이상, 그러한 걱정은 이제 필요 없었다.

“저 세상에 가서 물어봐.”

짧게 미소 지으며 월천을 들었다.

동시에, 제천대성이 내 뒤로 크게 날아오르며 섰다. 제천대성의 손에는 눈을 감고축 늘어진 천마의 신체가 들려있었다.

“크투가! 약속을 지켰으니 너 또한 약속을 지킬 차례다.”

-······ 그래 보이는군.

크투가의 재등장이었다.

* * * * *

크투가는 ‘그날’을 잊을 수 없었다.

가짜 태양신과의 내기에서 승리했지만, 보고 안에 놈은 자신을 가둬뒀다. 그 이후아득한 세월이 흘렀다.

크투가의 성정은 더욱 난폭해져서 언제나 건드리면 터질 것만 같은 화산처럼 존재하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목소리조차 들을 수 있는 존재가 없었기 때문에, 크투가는 점점 병들어 어둠의 정령처럼 변해가는 중이었다.

-너 정도의 정령도 어둠에 잡아먹힐 수 있는 건가?

놈은 오로지 ‘신성’을 지니고 유람을 하는 중이었다.

신체를 내버린 채 진짜 신격을 지닌 신이 심연을 활보하고 있다는 사실에, 크투가는 궁금증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와 함께하는 영혼도 몇 개 있었는데, 그들은 매우 측은지심한 눈빛으로 크투가를 바라봤다.

“그 따위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지 마라! 불태워주마!”

-네 불꽃으로는 날 어쩔 수 없어. 본래의 불꽃은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지금 네가뿜어내는 불꽃은 무척이나 초라하거든.

초라하다고?

불 그 자체, 살아있는 불이라 불리며, 크투가가 가진 진화의 힘은 신들마저 탐을 냈던 것이다.

그런데 초라하다니!

-내게 시간이 많았다면 너를 도와줬겠지만, 안타깝구나. 우리는 ‘녀석’을 막아야 해서 말이야. 성공할 확률은 적어보이지만······.

“내 봉인을 풀어라! 안 그러면 네놈들의 영혼의 찌꺼기 하나마저 다 불태울 테니!”

-그래도 너의 ‘불만’ 정도는 받아줄 수 있겠지. 그래, 덤벼봐.

놈은 몸을 풀곤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크투가를 도발했다.

크투가는 자신이 갖고 있는 모든 불꽃을 쏟아 부어 때려 박았으나, 상대는 꿈쩍도하지 않았다.

-고작 이 정도야? 이래선 크투가라는 이름이 아깝다. 조금 더 힘을 내 봐!

“크아아아악! 이 빌어먹을 새끼!!”

가지고 놀았다.

그렇게밖에 말할 수가 없다.

본연의 불이 있었다면 이토록 허무하게 당하진 않았을 것이다.

크투가는 자신의 불꽃을 모두 쏟아내고 텅 비게 되었다.

-뭐, 나름 재밌었어! 역시 나한텐 안 되는군. 나도 너무 강해서 탈이라니깐.

“네놈. 이름이 뭐냐.”

-천마.

“이상한 이름이군.”

-그래? 하여간 언젠가 너를 알아봐주는 자가 나타날 거야. 봉인이 풀리면 그때 다시 덤벼보라구.

“돌아오는 거냐?”

-이기면.

“대체 상대가 누구기에?

-굉장히 나쁜 놈이 있거든. 그래도 이겨야지. 그래야 세계를 구할 수 있으니까.

“고생을 자처하는 놈이군.”

크투가는 한숨을 푹 쉬었다.

듣는 것만으로도 피곤했다. 세계를 구한다는 어린애들 꿈과 같은 말을 직접 입에 담는 녀석이 있을 줄은 몰랐다.

하물며 그게 신일 줄은 더더욱 몰랐고.

“네놈이 죽으면 내가 너를 죽인 놈을 태워 죽여주마. 그러면 내가 더 강하다는 게인정되겠지.”

-오! 좋은 생각인데?

“그러니 네가 싸우러 가는 상대의 이름을 말해다오.”

-그건 때가 되면 알게 될 거야. 그보다······ 정말 그럴 생각이라면 내 육체를 찾아주지 않겠어?

“신성을 발현하고 남은 껍질 말이냐?”

-비슷하지. 그 껍질이 나쁜 녀석의 손에 안 들어가게 해줘. 꽁꽁 숨겨두긴 했는데, 조금 불안하긴 하거든. 그게 녀석들의 손에 들어가면 진짜 답이 없어.

“그렇게 위험하다면 왜 없애지 않은 거냐?”

-그것도 ‘희망’ 중에 하나니까.

스스로를 천마라고 밝힌 남자는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둠뿐이 없는 심연에서 그는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내가 숨겨놓은 ‘희망’들이 언제고 세계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고 있어. 내가 패배한다면, 그 희망들이 내 뒤를 이어주기를 말이야.

“나쁜 놈의 손에 들어가면 내가 전부 태워주마.”

-오~ 엄청 믿음직스럽네. 하지만······ 나타날 거야.

“나타난다니? 누가?”

-나처럼 여행을 좋아하는 누군가가 말이야.

이후 콧노래를 부르며 그가 손을 흔들곤 떠나갔다.

그는 정말로 즐거워보였다.

싸우러 가는 게 아니라, 진짜 여행이라도 떠나는 것처럼 보였다.

그와 함께하고 있는 격 높은 혼들도 마찬가지였다.

크투가도 그 대열에 함께하고 싶었다. 하지만, 함께할 수 없었다.

선택받지 못한 걸까?

비워내도 다시 채우질 못해서일까.

-그런 녀석이 나타난다면, 함께 떠나보라구. 분명히 좋은 기억으로 남게 될 테니까. 혼자선 외롭잖아?

크투가가 다시금 현실로 돌아와 정면을 바라봤다.

‘희망’이 눈앞에 있다.

그리고 천마와 비슷한 얼굴로 웃고 있는 녀석이 보였다.

기가 막히게 싸우는 걸 좋아하고, 승부사의 기질이 있는 것마저 비슷하다.

스스로는 부정하겠지만······.

‘약속을 지킬 차례다.’

오냐. 어디 한 번 떠나보자.

어디까지 갈지, 크투가도 궁금했다.

* * * * *

세상이 황혼으로 물들었다.

어둠이 물러가고 그 자리에 빛과 불꽃이 채워졌다.

크투가와 천마의 육체가 하나로 합쳐지는 순간, 세계가 불꽃으로 들끓기 시작했다.

모든 걸 태워버리는 신성!

모든 걸 비추는 거룩함!

하나, 둘, 그 앞에 교주와 신도들이 무릎을 꿇기 시작했다.

드디어 나타났다.

드디어 강림하셨다.

신의 사자와 함께, 신이 나타나신 것이다.

“아아, 태양신이시여!”

쿠우우우웅!

태양신이 6군단장을 가리켰다.

그러자 태초의 화염이 하늘에서 작렬하며 ‘적’을 태웠다.

< 45. 더 로드(1) > 끝

ⓒ 온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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