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 열 두가지 시련(2) >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이곳은, 이 장소는, 모든 것을 ‘공유’하게 만든다. 암령의 좌절과 절망감 역시도 내게 전해졌다.
-내가 겪어온 여행은 무한한 고통뿐이었다! 여래와 현장에 의해 농락당하며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지! 이제 다시는 그러한 삶을 살지 않으리라!
아무래도 조용할 마음은 없는 모양이었다.
게다가 내가 알고 있는 이야기처럼 아름답지만은 않은 듯싶었다.
현장과 손오공의 여행. 하지만 당사자인 암령이 그 여행자체가 무척이나 괴로웠다고 말하고 있었다.
콰르르르르르릉!
제천대성의 신체가 크게 발돋움을 했다. 여의봉은 계속해서 나를 추격했고, 월천으로 내리쳐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진퇴양난.
하지만 확실한 건, 암령이 발버둥 칠수록 제천대성의 신체 역시 마구잡이로 공격을 해온단 사실이다.
암령을 얌전하게 만들 필요가 있었다.
‘암령은 이미 내게 깊숙하게 뿌리를 박았다. 돌려보내는 순간 나도 죽겠지.’
그 방법은 논외다. 암령의 힘과 마력은 이미 내 생명의 근원에까지 뿌리를 내리고있었다. 지금은 온전한 나의 힘이라 할 수 있을 정도다.
빼내는 순간 목숨을 부지하지 못하리라.
그러나 암령은 자신의 신체로 돌아가길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애당초에 암령은 왜 봉인을 당한 거지?’
미간을 구겼다.
암령. 제천대성의 신체와 혼이 분리된 이유가 뭘까.
암령은 오랜 세월 대라선이나 나찰에게 이어지며 꾸준히 그들의 생명을 갉아먹고있었다. 월천 역시도 암령을 다루지 못해 마력을 크게 상실했다고 하였다.
현장과의 여행 끝에 손오공은 사귀를 물리치고 악령의 위협에서 사람들을 구하는신으로서 신앙 그 자체가 되었을 터.
그런데 지금 내 눈앞에 놓인 제천대성은 이야기처럼 마냥 우아하게 보이지만은 않았다.
‘암령을 봉인한 건 천마다. 크투가는 천마가 현장의 혼과 함께 돌아다녔다고 했다. 이 봉인 자체가 현장의 묵인 하에 이루어졌다는 것. 이유가······ 이유가 있을 것이다.’
허나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본래라면 현장은 손오공을 개과천선시키는데 성공하지 않던가?
그러나 내 안에서 발버둥치는 이놈은 개과천선과 거리가 멀었다.
녀석이 가진 ‘악의’에 나까지도 정신이 혼미해질 수준이었으니.
콰직!
여의봉이 따라오는 속도는 말 그대로 빛과 같았다. 사방팔방으로 늘어나고 줄어들며 내가 있는 곳이라면 어김없이 덮쳐들었다.
월천으로 막아내고 그 무지막지한 힘에 팔이 걸레짝처럼 휘어버렸다. 뼈가 어긋나고 부서지길 계속해서 반복하고 있는 셈이다.
이대로는 길어야 10분 남짓.
단순히 버티기만 해선 그 시간이 내게 주어진 마지막 유예이리라.
‘근두운까지 있었으면 1분도 못 버텼겠군.’
전승에 따르면, 제천대성은 72가지 변신술과 근두운, 여의봉을 가진 패자로 여겨진다. 그 위세를 누르지 못해 옥황상제가 자신의 위명에 버금가는 ‘제천대성’이란 명호를 허락하고 만 것이다.
만약 이야기 그대로의 제천대성이었다면 조금도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그야말로신 중의 신이니까.
‘근두운이 없다. 완벽하지 않다.’
틈이 있을 것이다.
놈에겐 72가지 변신술도, 단번에 10만 8천 리를 날아갈 수 있다는 근두운도 없었다.
그러나 일반적인 공격은 통하지 않는다. 월천으로 맞서봤자 내 신체가 버티지 못하고 산산조각 날 뿐이다.
-돌아가리라. 그리하여 이 세상을 위시하리라!
“네가 봉인당한 채 돌아가지 못한 이유를 알겠군.”
그래서 도리어 나는 암령을 자극했다.
암령은 분노의 화신과도 같았다. 내가 자극하자 심장이 미친 듯이 뛰며, 제천대성의 신체가 더욱 날뛰기 시작했다.
-네 따위가 뭘 안다는 말이냐! 나는 태어날 때부터 왕이었다. 왕 중의 왕인 내가 억지로 말을 들어야만 했던 그 굴욕! 500년간 나를 가두고, 현장은 가르침이란 명분하에 고통으로 나를 다스리고자 했다! 내가 보기에 죄인은 너희다!
새로운 시각에서의 견해였다. 하지만 나는 암령을 더욱 부정했다.
“혼자서 살 수 있는 세상은 없다. 울타리를 부수고, 규율을 비웃으며 폭군처럼 날뛰었으니 벌을 받을 만도 하지. 말을 들어보니 더 확신이 드는군.”
암령은 혼자서 세상을 왕따 시키는 부류다.
이해는 한다. 나 역시도 그런 부분이 없잖아 있으므로.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나 역시도 연결되어 살아가는 존재. 혼자서 활동하고자 하지만 알게 모르게 모든 이들을 조금씩 연결되어 있다.
그것을 암령은 부정했다.
-너는 다를 줄 아느냐? 너희들은 항상 ‘다름’에 차별을 둬선 안 된다고 말하지만 ‘다름’을 인정하지 못한다. 다른 걸 보는 순간 공격하고, 억지로 자신들에게 맞게 조종하려 들지!
“너는 달랐을 뿐이라고 말하는 거냐? 그래서 네가 봉인됐던 나찰들을 괴롭힌 거고?”
월천 이전에도 암령을 봉인했던 자들이 있었다.
월천이 말하길, 그들 대부분이 폐인이 되거나 죽었다고 했다.
나 역시도 조금만 엇나갔으면 그대로 될 뻔했었다. 암령은 몇 번이나 나를 죽이거나 육체를 빼앗을 기회를 엿봤고, 그럴 때마다 나는 우연찮은 기회와 내가 가진 기지를 발휘하여 벗어날 수 있었다.
-약육강식은 자연의 섭리다. 육식동물이 육식을 하지 않으면 죽듯 나는 자연의 섭리를 행한 것뿐이다! 쥐새끼가 호랑이를 움직일 순 없는 법!
“하지만 너는 손톱도, 이빨도 전부 빠진 호랑이였지. 네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지금처럼 왱왱대며 떼를 쓰는 것뿐이었다. 결코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려 들지 않아.”
촤륵!
변화가 생겼다.
여의봉이 따라오는 속도가 조금이지만 느려진 것이다.
덕분에 대처가 가능해졌다.
“너는 약하다. 그래서 봉인 당했다. 그래서 농락당한 것이다. 다름을 인정해 달라? 아니, 넌 다르지 않아. 더 강했다면 벌을 받지도, 봉인을 당하지도 않았겠지. 이대로 돌아가 봤자 같은 역사를 반복하는 게 전부일 것이다.”
암령. 너에겐 한계를 돌파할 힘이 없다.
억압당하며 떨어진 건 그 때문이다.
-닥쳐라!
“뭘 아느냐고? 잘 안다. 그 무력감······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좌절감. 현장이나천마가 너를 봉인한 건 너의 아집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였다. 네가 조금 더 강해지길 바랐지만, 결국 너는 달라진 게 없는 듯하군.”
-개소리! 놈들은 나를 농락하려 했던 것이다! 놈들은 나를 가둬 자신의 우월함을인증하려 했을 뿐이야!
“그럼 너의 육체가 왜 이곳에 남아있는 거지?”
제천대성의 신체를 보자마자, 의문은 있었다.
천마는 현계에 자신의 신체를 남겼지만, 그 역시도 결국 ‘위대한 별’의 모체가 되어버렸다. 어쩌면 현장도 함께 끌려갔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암령만은 남아있다.
암령만은 계속해서 계승되고 있었다.
하물며 그의 신체 역시도 무사히 ‘봉인’이란 이름 하에 이곳에 남겨진 상태였다.
‘아아.’
그제야 깨달았다.
천마와 현장은 암령을 일부러 숨겨둔 것이다.
어쩌면, 암령이 그들의 ‘희망’이었던 건 아닐까.
위그드라실에서 생성 된 가짜 신이 아닌, 온전한 진짜 신으로 그 위신을 발휘해주길 바란 건 아닐까.
누가 뭐라 해도 암령은 제천대성이니까. 감히 옥황상제와 버금간다고 전해지는 그 신 말이다.
‘위대한 별’을 만드는데 어마어마한 신성과 제물이 필요하다. 암령 정도의 신성이었다면 분명히 탐을 냈을 것이지만, 암령만은 온전하게 남아있었다.
이제야 비로소 이곳이 무얼 하는 장소인지 알 것만 같았다.
‘영웅의 무덤. 오로지 진짜를 기리기 위한 장소.’
내가 만난 모든 시련은 진짜였다. 진짜 영웅들만이 내 시련에 동참해준 셈이다. 천마는 내가 그들과 교감하며 무언가를 깨닫길 바라는 듯싶었다.
하지만 나만이 아니다. 더불어, 암령 역시도 깨우치길 바란 것이었다.
“왜 그들이 너를 남겼는지 정말 모르겠단 말이냐?”
쾅!
정면으로 부딪혔다.
주먹과 주먹. 냅다 제천대성의 면상 앞으로 뛰어든 탓이다.
곧 뼈가 가루처럼 부서지며 전신의 골격이 뒤틀렸다. 망할! 힘의 차이는 더욱 현격하게 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제천대성의 눈을 똑바로 쳐다봤자. 곧 암령이 반응했다.
“너만이 바꿀 수 있다. 천마도, 현장도 해내지 못했지만, 너는 가능할 거라고 그들은 믿었다. 혼자서 힘들다면 내가 도와주마. 네가 정말 왕 중의 왕이라면, 그에 걸맞은 품격을 보이도록 내가 치장을 해주마.”
-헛소리다. 나를 현혹하려 들지 마라······!
흔들렸다.
암령이 흔들리자 제천대성의 육체도 잠시 정지했다.
“너만이 남았다. 내 안에 있었으니 너 역시도 들었겠지. 모든 ‘신’은 사라졌다. 천마도, 현장도, 네가 증오해 마지않던 그들은 ‘위대한 별’의 거름이 되었다. 우연찮게너만 살아남았다고 생각하는 거냐?”
모든 게 보였다.
이곳, 나찰산에 천마가 둥지를 튼 이유.
굳이 ‘야차’와 ‘나찰’을 만든 이유······.
야차는 정말 특이한 종족이었다. 내가 가진 ‘지배자’의 권능도 거의 통하질 않는데다, 그 투지만은 하늘을 찌를 정도였다.
오로지 시련을 이겨내기 위해 존재하는 종족.
포기하지 않고, 굴하지 않으며, 맞서 싸우는 투지만은 묘하게 암령과 닮았다.
그들이 만들어진 이유가 곧 암령의 존재 때문이 아니었을까.
오로지 암령을 숨기기 위해, 야차라는 종족을 만든 건 아닐까.
‘그럼 아귀와 대아귀는?’
풀잎여왕 호라의 반응을 살펴보면 아귀와 대아귀가 처음부터 나찰산에 존재하진 않았던 듯싶다. 그 역시 천마에 의해 생성된 괴물이라면 분명히 이유가 있으리라.
여왕 대아귀라는 녀석을 만나면 보다 확실해질 것이다.
그보다 지금은 암령이 중요했다.
녀석이 깨닫도록 만들어야 한다. 천마와 현장의 진의를. 그들이 암령을 싫어한 게아니라는 것을.
“그들은 사라졌다. 너만이 살아남았다. 천마가, 현장이, 너만을 살렸다. 그리고 너는 계속해서 분노와 복수심을 씹어 먹으며 생존해왔다. 그러한 ‘원동력’이 없으면너는 진즉에 죽어버렸을 테니까.”
-내가 가진 분노조차 그들이 만들었다는 거냐? 나를 살리기 위해?
“거기까진 나도 모르겠군. 그러니 물어봐야하지 않겠나? 이대로 단순히 분노에 몸을 맡긴 채 끝낸다면, 단언하지. 너는 아무 것도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목에 피가 섞였다.
애써 무시하며 계속해서 말했다.
“약함을 인정하고 분노를 가라앉힌 채 냉정하게 주위를 둘러볼 수 있게 된다면, 인정하지. 너는 결코 약하지 않노라고. 그들에게 나는 약하지 않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거다.”
진정한 제천대성의 신위를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제야 암령의 떨림이 멎었다. 머릿속으로는 부정하고 있으나 조금은 차분해진 듯싶었다.
-나는······.
“미련을 버려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지. 마땅히 그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으니.”
-처음부터 시작하라고? 그게 가능하단 말이냐? 그렇다면 이 분노는 어디로 향해야 한단 말이냐. 나는 아직도 그들이 밉다. 너의 말 역시 동의할 수 없다.
“당장은 버리지 않아도 좋다. 하지만 나와 함께하는 여행은 썩 재밌을 거다. 여행의 끝엔 항상 새로운 답이 나오게 되어있지.”
처음으로 암령과 나는 마주보았다.
정면에서 본 암령은 어린아이와 다를 게 없었다.
어디로 향해야할지 모르는 철부지 꼬마.
“여행을 떠나자. 테마는 ‘위대한 별’로 향하는 여행······ 정도로 하지. 네가 현장과 함께했던 그 여행에 비할 바는 못 되겠지만······.”
부르르르!
몸이 흔들린다. 뼈가 부서지고 머리가 크게 흔들린 것 같았다.
잠시 주춤거리자 그 순간 털썩! 하는 소리와 함께 몸이 눕혀졌다.
그리고 그대로 의식이 날아갔다.
* * * * *
그에게 여행은 무척이나 괴로운 것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당연한 것들을 행할 때마다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머리를 찔렀다. 억지로 귀신을 잡고, 인간을 도우며 세계를 돌았다.
-모두에게 사랑받는 존재가 되려무나.
현장. 그는 항상 말했다.
하지만 이해할 수 없었다. 왕이 어떻게 사랑받는 존재가 될 수 있단 말인가.
실수를 저지르거나 잘못을 할 때마다 그는 측은지심한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곤 했다.
그 눈빛이, 싫었다.
그리고 세상이 변하며 그 역시도 자신에게서 떠나갔다.
-오공아. 돌아오면 다시 한 번 여행을 떠나자꾸나. 허허, 이번에는 네가 원하는 곳으로 가야겠다. 어디로 갈지 미리 생각해 두려무나.
그리고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천마와 함께 떠나간 이후 수백, 수천 년이 지났음에도.
‘여행을 떠나자고?’
모르겠다.
짐승의 왕인 자신이 누군가와 다시 함께 하게 되리라곤 상상해본 적도 없으니까.
여태껏 부정하고 밀어내기만 했는데, 녀석은 자신을 돕겠다고 말한다.
‘새로운 답······.’
물어보고 싶었다.
왜 자신만 두고 떠났느냐고.
왜 자신만 살려둔 것이냐고······.
그러기 위해선 녀석의 말마따나 움직여야 한다.
적응해야 한다.
······ 여행을 떠나야 한다.
< 44. 열 두가지 시련(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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