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 열 두가지 시련(1) >
-언제까지 죽여야 하는가?
어두컴컴한 동굴.
거대한 묘비에 새겨진 말이었다.
산자의 마지막 말이라 하기엔 의미심장한 문구.
별 다른 의미가 없는 듯 하면서도 있을 것만 같은 그런 글귀가 가장 먼저 나를 반겼다.
“와라.”
하지만 이것 또한 시련의 일부임을 나는 안다.
벌써 일곱 번 째. 여섯 번의 시련을 쉬지 않고 돌파하며 내 정신은 한껏 고조되어 있었다. 대분의 시련은 정해진 괴물을 죽이는 것이었지만 모두가 같은 조건으로 이뤄지진 않았다.
비석은 하나였다.
하지만 무덤은 두 개였다.
쿵!
두 개의 무덤에서 검은색 붕대를 감은 사자(死自)들이 튀어나왔다. 좀비와 비슷하지만 좀비는 아니다. 그보다 훨씬 격조 높은, 살아생전 영웅이라도 됐을 법한······.
한 명은 남자고 한 명은 여자였다.
남자는 낫을 들었으며 여자는 지팡이를 들고 있었다.
[죽어서도 죽지 못한 자. 한때 대륙최강의 암살집단의 수장이었으며, 오로지 악자들만을 살해했으나 배신으로 인해 묻힌 사자입니다.]
[최강의 마법사, 그랜드 위저드라 불린 여인, 사자의 아내였으나 그녀는 사자의 죽음을 막지 못해 비관하다가 절망한 채 죽었습니다.]
[죽은 다음에야 둘은 비로소 하나가 될 수 있었으며, 오로지 이곳 묘지 안에서만 그 인연을 확인하는 게 가능합니다. 둘은 침입자를 결코 방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제기랄.
세세한 이야기는 됐다. 굳이 알려주지 않아도 내 눈에는 보이는 탓이다.
저들의 인연이.
인연의 선이 얼마나 굳건하게 연결되어 있는지.
서로가 서로를 지극히 바라며 비참하게 죽어갔다는 걸.
‘모든 관문이 이런 식이다.’
평범한 시련이 없었다.
시련의 대상을 죽이는 건 맞지만, 그 대상들 모두에게 ‘이야기’가 부여되어 있었다.
물론 개의치 않는다. 개의치 않지만, 그들을 죽일 때마다 내 안에서 무언가가 하나씩 부러지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모두 이 동굴의 기묘한 분위기 때문이다. 더불어 그들의 기억이 조금씩 내게 흘러오는 탓이었다.
‘어차피 다른 세계의 이야기야.’
고개를 젓는다. 대륙최강의 암살집단? 최강의 마법사?
저들이 태생은 지구가 아니다. 내가 알지 못하는 또 다른 차원. 육도(六道)라 칭해지는 여섯 개의 세상 중 어딘가일 것이다.
저들의 세계나 저들의 생명 따위, 내 알 바 아니었다. 나는 내가 살고 있는 세계를지키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침······ 입······ 자.
-우리를······ 방해할 순······ 없다.
콰칭!
바람의 칼날이 내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동시에 낫을 든 남자가 순식간에 내 뒤로 솟아났다.
블링크? 축지법이라도 되는 건가?
‘인지하지 못했다.’
어찌됐건 한 대륙 최강의 암살자다.
수많은 암살 위협을 당해봤지만 반응조차 하지 못한 건 처음이다.
지구의 레벨로 생각해선 안 된다.
‘금강불괴.’
모든 공격으로부터 타격을 반감시켜주는 스킬. 반응하지 못한 공격에 오로지 이 스킬만이 발동됐다.
촤악!
하지만 살점이 뜯겨져 나가는 걸 막진 못했다. 어깨의 뼈가 보일 정도로 움푹 파인 다음에야 나는 겨우 발걸음을 뒤로 옮길 수 있었다.
그리고 월천을 들어, 그대로 남자의 목을 돌려 쳤다.
스으윽.
없다. 사라진 뒤다.
마치 안개처럼 사라지곤 다시 내 뒤에 나타났다.
저주받은 망령과 같았다.
콰아아앙!
그 사이, 거대한 벼락이 내 정수리 위로 떨어졌다.
무시무시한 마력. 피하지 않으면 상당한 타격을 입을 것이다.
피해야 하나?
‘피해선 안 된다.’
낫을 든 남자가 그 즉시 내 목을 앗아갈 터였다.
나는 그대로 검을 바닥에 내리쳤다.
콰아앙!
돌이 튀며 잠시 위를 막아선 사이, 풀잎정령들이 튀어나와 빠르게 파놓은 구멍 사이로 뿌리를 내렸다. 촘촘히 박힌 뿌리들이 폭뢰를 막아내자, 순간 바닥이 일렁이며녹아가더니 그대로 용암지대가 생성되기 시작했다.
-아 뜨거!
-미안해요. 이곳에서 저희는 힘을 발휘할 수 없어요.
-씨이! 분하다!
풀잎 자매들이 고개를 내저었다. 불과는 극상성인데다 지대 자체가 바뀌어버려선힘을 발휘할 수 없는 게 당연했다.
‘엄청난 임기응변.’
정령사도 한, 두 번 상대해본 솜씨가 아니다. 게다가 살아생전 얼마나 대단한 마법사였기에 이 넓은 지대 모두를 용암지대로 바꿔버린단 말인가?
‘저들 또한 영웅이었다.’
여섯 번의 시련, 대상 대부분이 괴물이었지만 이처럼 영웅이었던 자들도 있었다. 하지만 비참하게 죽은 끝에 이곳에 도달했다.
영웅의 말로.
그 끝은 항상 처참하다.
여왕 대아귀······ 어쩌면 일반적인 대아귀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힘을 아낄 틈은 없어 보이는군.’
급할수록 돌아가라.
그다지 좋아하는 말은 아니지만, 힘을 아끼며 전진만 할 수는 없을 듯했다.
* * * * *
꿈틀.
위대한 별이 아주 미세하게 진동했다.
누구도 알아차릴 수 없을 정도이나 그 변화를 소수의 암흑인들은 읽었다.
“위대한 별께서 지금 움직이신 건가?”
“그럴 리가. 내용물이 거의 채워지지 않았는데? 착각 아니야?”
“하지만······.”
“아직 ‘시기’가 되지 않았어. 위대한 별께서 움직이시려면 적어도 데몬로드가 50마리는 죽어야 한다. 균열도 훨씬 커져야 하고······.”
쿠르르르르.
“······ 공작께 말씀드려야겠군.”
착각이 아니었다.
탑이 거세게 흔들리며, 위대한 별을 가둬둔 ‘차원막’이 요동친 것이다.
“차원막이 사라지면 어떻게 되지?”
“‘초균열’이 일어나고 니드호그가 위대한 별을 잡아먹으러 나타나겠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갑자기 왜······.”
구아아아아아앙!
차원막이 더욱 거세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차원막 바깥으로 튕겨져 나온 소리는 암흑인들에게 한 가지 생각을 심어줬다.
······ 마치, 구슬픈 비명 같지 않은가.
* * * * *
헉, 헉······!
거칠게 숨을 내뱉었다.
빌어먹을. 욕이 입 안을 맴돌았다. 하나면 모를까 둘을 동시에 상대하는 건 여간 까다로운 일이었다. 하마터면 역으로 당할 뻔했다.
‘영웅의 끝엔 죽음만이 존재한다.’
남자와 여자는 서로 부둥켜안고 있었다. 마지막까지 함께하겠다는 듯. 절로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다.
동시에 그들의 기억이 내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왔다.
-제국을 위해 죽어라! 너의 존재는 너무나 위험하다!
-그런 게 어디 있소? 나는 오로지 제국을 위해 일했건만!
-최강의 그림자, 아그릿사. 그대의 공로는 높게 치하하는 바다. 신들의 무자비한 폭정으로부터 그들의 아바타들을 죽이고 결국 인간의 승리를 일궈낸 장본인이 그대이니까.
-그럼 대체 왜?
-신들의 세계가 끝나고 인간의 시대가 찾아왔다. 더 이상 감당하지 못할 무기는 필요 없다는 뜻이다.
내가 모르는 세계의 이야기다. 하지만 감정이 복받쳐 올랐다. 아그릿사. 내가 그가 된 것만 같았다.
그는 저항했으나 결국 제국의 무자비한 공격 아래 무릎을 꿇는다.
좌절하고, 절망하고,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한 채로.
하지만 그는 영웅이었다. 오로지 인간을 위해 자신의 무기를 사용했다.
그러나 인류에 배반당해 죽었다.
어쩌면 괴물에게 죽은 내가 나을 수도 있겠다.
‘영웅이란 이름은 너무나도 부조리하지.’
안다. 그래서 다시 돌아왔을 때, 영웅 따윈 안 되겠다고 한 거다.
영웅이란 이름의 무게를 알기 때문에.
부르르 몸을 떨었다. 눈물이 흘렀다. 주먹이 쥐어지고, 그대로 무릎을 꿇고 말았다.
그의 기억만이 아니다.
그의 감정, 그의 모든 것들이 나를 관통했다.
누구도 이 시련을 깨지 못한 이유. 깨지 않으려고 했던 이유.
그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아아······!”
신음이 입 밖으로 새어나왔다.
이를 악물었다.
나는 오한성이다. 나는 그가 아니다. 알지만, 알고 있지만, 이 처절한 기분은 대체 뭐란 말인가.
시련을 넘어갈수록 이러한 현상은 더욱 강해졌다.
[일곱 번째 시련을 완료했습니다. 다음 시련으로 넘어갑니다.]
감정이 정리되기도 전에, 주변의 환경이 바뀌었다.
이번에도 거대한 석상 하나가 있었다.
원숭이 모양의 석상은 거대한 봉 하나를 쥐고 머리에 둥근 띠 하나를 하고 있었는데, 어쩐지 눈에 익은 모습이었다.
[제천대성이라 불리며 천계의 말썽꾸러기로 분류되던 원숭이입니다. 은인을 만나 도와 덕을 알게 되고 사귀(邪鬼)를 물리치며 추앙받지만, 반쪽짜리에 불과합니다. 나머지 반쪽의 어둠 때문에 진정한 신이 되지 못한 그의 육체는 구천을 떠돌게 되었습니다.]
[여덟 번째 관문의 문을 열 열쇠는 그에게 있습니다.]
두근! 두근!
심장이 아려왔다.
내 안에 잠든, 암령이 움직였기 때문이다.
암령의 진짜 정체가 제천대성임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암령의 육체가 지금 내 눈앞에 있는 것이다.
-여기에, 여기에 가둬뒀었구나!
암령이 필사적으로 움직였다. 내게서 제어권을 다시금 빼앗고자 했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놈에게 육체를 내어줄 생각은 없었다.
게다가 시련의 내용이 조금 달랐다.
죽이거나 제거하라는 게 아니다. 열쇠가 그에게 있다고 한다.
‘죽일 수도 없겠지만.’
불사(不死). 제천대성은 죽지 않는다. 물론 사천왕처럼 무언가 조건이 마련된다면 죽을 수도 있겠지만, 당장 내가 죽일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쿵!
이윽고 제천대성의 육체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발을 디딘 것만으로도 땅과 허공이 뒤집혔다. 이어 여의봉을 휘두르자 순식간에 늘어나 내 머리를 내리쳤다.
“끄으으윽······!”
막았다. 막아섰다. 하지만 여의봉의 크기가 조금씩 두꺼워지며 무거워지고 있었다. 그것을 제천대성은 아무렇지도 않게 쥐고 있는 것이다.
힘 대결은 무리다. 정면으로 싸워선 이길 수 없다.
아니, 우리엘 디아블로의 육체로 임해도 쉽지 않을 듯싶었다.
그야말로 괴물.
한때 신으로 추앙받던 원숭이의 육체였다. 영혼이 깃들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 힘은 내가 어찌할 수준을 넘어섰다.
다른 방법. 열쇠를 찾을 방법이 있을 터.
-돌아갈 것이다. 저 몸은 나의 것이란 말이다!
-천마여! 현장이여! 너희들은 왜 내게서 뺏어가기만 하느냐! 왜!
암령에게서 짙은 ‘미련’이 느껴졌다. 필사적으로 발버둥치고 있었다.
그러자 제천대성의 움직임이 더욱 격렬해졌다. 마치 연동이라도 하듯.
‘이 시련은 암령과 관계가 깊다.’
열쇠는 제천대성에게 있다고 하였다.
어쩌면 열쇠는 암령에게 있지 않을까.
암령 역시도 제천대성인 탓이다. 육체와 정신이 분리되어 있었다.
하지만, 어째서 제천대성의 육체가 이곳에 있는 걸까?
암령의 반응으로 보면 가짜가 아니었다. 진짜 육체였다.
그리고 이곳은 여왕 대아귀에게 향하는 골목과도 같은 곳.
고작 여왕 대아귀를 지키고자 제천대성의 육체가 배치되어 있다니. 주객전도도 이런 주객전도가 없었다.
촤아악!
꽈득!
어깨뼈가 부러졌다.
월천으로 여의봉을 쳐냈음에도 육체가 견디지 못한 것이다.
울컥!
피를 각혈했으나 암령은 제맘대로 떠들었다.
-돌아갈 것이다. 복수할 것이다. 나를 조롱했던 세상을, 천계를!
-나는 원숭이의 왕이다. 너희들 인간과 신의 잣대로 나를 재단하지 마라······!
이 정도면 울부짖음이었다.
어쩌면 암령이야말로 제천대성, 손오공이라 불리던 그대로의 모습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시끄럽다.”
왱왱대는 소리를 끝까지 받아줄 내가 아니다.
< 44. 열 두가지 시련(1) > 끝
ⓒ 온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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