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신사냥꾼-193화 (194/251)

< 43. 크투가(完) >

-뭐, 이 자식아? 계약을 어기겠단 소리냐?

당연하다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크투가가 성을 내며 멱살이라도 쥐어 잡을 기세로 나를 노려봤다.

“태양신의 보고에 놓인 너의 불꽃이 잠시 필요하다.”

-하지만 너와 나는 서로의 이름을 두고 계약했다. 어기면 너는 그대로 가루가 될 것이다.

강력한 존재일수록 ‘계약’이나 ‘약속’은 그만한 힘을 지닌다. 단순하게 계약내용을 어기는 짓을 했다간 크투가의 말대로 나는 산산조각 찢겨나갈 것이다.

“시간을 달라는 뜻이다. 내가 태양신의 보고에서 원하는 결과를 얻을 때까지만.”

-안 돼. 이미 나는 기다릴 만큼 기다렸어. 당장에라도 이곳을 벗어나고 싶다!

크투가의 의지는 견고했다. 하지만 태양신의 보고에 잠든 인자들을 움직이며 원하는 결과를 얻으려거든 그의 동의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모든 것에 있어서 절대적인 건 없다. 하물며 쌍방의 동의로 이루어진 계약이라면,상호간의 합의를 통해 원만한 타협점을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타협점. 타협점이라.

하나가 있긴 있었다.

“헤라클레스의 신체를 찾아와주지.”

-지금 농담하는 거냐?

“헤라클레스의 신체를 찾으면, 너는 나를 따르기로 했지.”

헤라클레스의 신체. 아마도 천마(天魔)를 말하는 것일 테다. 나찰산 100층에 있는, 야차와 나찰들의 시조격이 되는 존재.

동시에 암령을 다스린 자이기도 하며, 현령과 함께 세계를 구축하려 했던 선자(仙子)다.

-나는 내 눈앞에 그것이 놓이기 전까지 믿지 않을 거다. 게다가 계약내용은 그 전에 먼저 내 봉인을 풀어주는 게 선결이었어.

“그러니 계약내용을 조금만 완만하게 바꾸자는 거다. 15일 안에 헤라클레스의 신체를 찾아오지. 그 시간동안 찾아 돌아오지 못한다면 그 다음은 네 마음대로 해도좋다.”

크투가의 불꽃이 1초라도 불을 내어주지 않으면 보고에 잠든 인자들은 다시 잠들것이다. 데워서 일으키려거든 몇 년, 몇 십 년, 어쩌면 몇 백 년이 걸릴지도 모른다.

그에 비하면 15일은 짧은 시간이다.

하지만 그 시간동안 나는 ‘전이’를 해야 한다. 전이를 하면 우리엘 디아블로의 육체는 잠들고, 약점에 노출된다.

그러니 크투가와 라이라 등이 나를 지켜줄 필요가 있었다.

지금 크투가와 이렇게 대면한 건 그의 동의를 끌어내기 위해서였다.

-15일 안에 헤라클레스의 신체를 찾아오겠다고? 푸하하! 전 차원에 흩어진 암흑인들도, 그 어떤 존재도 찾지 못한 게 그의 신체다, 이놈아. 보나마나 이상한 걸 하나 주워다가 헤라클레스의 신체라고 내놓고 속여 볼 작정인 듯한데······.

“속일 생각은 없다. 네가 납득 할 만한 결과물일 거라고 자신하지.”

-시간을 끌 속셈이냐? 탑의 지하에서 뭘 보았기에?

“가능성.”

모든 것의 시작, 그 가능성을 보았다.

더불어 내가 나아가야할 방향도 그곳에서 찾을 수 있었다.

그러기 위한 시간이다. 대라선의 자격으로 나찰산 100층에 올라 그의 신체를 직접 가져와야 했다. 어쩌면 15일도 부족할지 모른다. 이 역시 도박수인 셈이다.

크투가가 인상을 찌푸렸다.

-네놈이 뭔 놈의 가능성을 봤는지 모르겠다만, 15일 만에 어디 한 번 가져와 봐라.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네 육체와 영혼은 모두 나 크투가에게 구속된다. 아니, 나는 너를 또 다른 나의 아바타르로 만들어 심연을 영원히 방황하게 만들 것이다.

아바타르. 크투가의 분신처럼 만들겠단 뜻이다.

하지만 호의적인 내용은 없어보였다. 일종의 으름장이었다.

동시에 크투가의 불꽃이 몇 가닥 튀어나와 내 전신을 감쌌다. 계약의 갱신이 성립되었음을 알려주는 불꽃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 부탁할 게 있다.”

-부탁? 부탁이라고? 나는 지금 매우 화가나 있는 상태다. 기다려야 하는 시간이 무려 15일이나 늘어났으니까 말이야!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군대 제대를 앞둔 병장이 합당하지 못한 일로 15일간 영창을 가게 되어 군생활이늘어난 것과 비슷한 기분이겠지.

“15일간 나를 지켜다오.”

-성을 나가는 게 아니었냐?

“이 몸은 이곳에 둔 채, 다른 수단으로 헤라클레스의 신체를 찾을 생각이다. 문제는 그 시간동안 이 몸이 무방비해진다는 거지.”

-어차피 너는 이 성의 왕이다. 누가 너를 건드린단 말이냐?

“배신자.”

군단장들 중에 배신자가 있다. 단수일 수도 있고, 복수일 수도 있다.

둠이 팔콘을 죽였다. 그 속도는 실로 어마어마하다. 하지만 둠은 내가 온전하게 왕의 자리에 앉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내 연설을 듣고 ‘만에 하나’ 변수가 생기기 전에 둠이 그 배신자를 움직이기 시작할 것이다. 어느 정도의 규모일지는 모르겠지만 조만간이라고 보았다.

태양신의 보고에 깃든 인자들. 그 인자에 답이 있다. 내가 진정한 태양왕의 자리에 오르려거든 그 인자와, 크투가의 힘이 필요하다.

나는 다시 한 번 힘을 주어 입을 열었다.

“필사적으로 나를 지켜라. 그러면 너는 너의 불꽃과 헤라클레스의 신체를 얻을 수 있을 테니.”

* * * * *

나찰산의 100층에 천마는 자신의 신체를 남겨뒀다.

그리고 천마의 신체는 새로운 대라선이 나타나면 자격을 부여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하지만 신체라는 그릇 안에는 내용물이 없었다. 그 내용물, 영혼은 이미 위대한 별의 거름으로 사용되었던 탓이다.

천마가 정말로 헤라클레스라면, 그는 자신의 운명을 알고 있었던 걸까?

그래서 오로지 대라선만이 출입할 수 있는 현계에 자신의 신체를 남겨둔 것일지.

“오랜만이로군요.”

호라. 한때는 죽음의 숲이라 불리던 숲의 주인, 꽃의 정령왕인 그녀가 나를 맞이해주었다.

현재의 나는 전이한 이후 원래의 신체로 돌아간 상태였다. 그리고 대라선의 권한을 이용해 나찰산에 단번에 이동할 수 있었다.

문제는 현계로는 한 번에 이동할 수가 없다는 거다. 그래서 다시금 호라를 찾을 수밖에 없었다.

“잘 지냈나?”

“주변을 둘러보세요.”

나찰산은 변했다. 야차와 나찰이 떠나간 이후, 꽃이 만개하며 흐드러지게 아름다운 곳으로 변모했다.

“아름답군.”

“보는 눈이 있네요. 좋아요, 그래서 나를 찾아온 용건이 뭐죠?”

“현계로 가야한다.”

“‘그’를 찾으러 갈 셈이군요.”

호라의 표정이 살짝 변했다. 실망, 그리고 약간은 화도 난 듯싶었다.

호라는 크투가와 비슷한 종류의 정령이다. 감히 왕의 이름을 사용해도 전혀 하자가 없는 강대한 존재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에 감히 천마를 상대로 ‘사기꾼’ 운운하며, 맞설 수 있었던 것이다.

이윽고 호라가 고개를 저었다.

“당장은 현계까지 닿는 줄기를 피워 올릴 수 없어요.”

“왜지?”

“현계가 닫혔기 때문이에요.”

현계가 닫혔다?

닫혔다면, 닫은 자가 있을 것이다.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거나.

천마의 신체엔 의지가 없다. 그 신체가 스스로 문을 닫을 수 있을 리 없었다.

내 표정을 읽은 호라가 느지막이 답했다.

“가끔 닫힐 때가 있어요. 그리고 백년 정도가 지나면 다시 열리길 반복하죠.”

“백 년······.”

“특별한 일이 없다면요. 그대는 이미 대라선의 업을 입었으니, 100년 정도는 충분히 기다릴 수 있을 거예요.”

“아니, 기다릴 수 없다.”

100년은커녕 내게 주어진 시간이 15일이다.

그마저도 계속해서 빠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어떻게 열 수 있지?”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에요.”

호라가 슬며시 웃어보였다.

여우가 따로 없다. 아마도 공짜로 그 방법을 알려줄 생각은 없는 듯 보였다.

“그리고 제게도 해결하기 힘든 문제가 있답니다.”

“내가 해결해주지.”

“어머, 믿음직해라. 현계의 문이 닫히면 나찰산에 대아귀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요.”

대아귀.

놀라울 정도로 크고 탐욕적인 괴물들을 일컫는 이름이다.

“아귀들이 서로를 잡아먹기 시작하고, 수많은 대아귀가 탄생하며 구역을 늘리죠.야차와 나찰, 대라선이 없는 지금 번식을 막을 천적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 저 역시도 대아귀들을 하나하나 제거하긴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랍니다.”

“대아귀를 제거해 달라?”

“대아귀 중에서도 ‘여왕’이라 불리는 대아귀가 있어요. 그 여왕을 죽이면 대아귀는 늘어나지 않을 거예요.”

과연. 여왕 대아귀를 사냥해달라는 말이다.

들어본 적도, 본 적도 없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었다.

다만 걸리는 점이 있었다.

“한 마리라면 스스로 제거할 수도 있었을 텐데?”

“쉽게 제거할 수 있었다면 여느 나찰이나 대라선이 진즉에 제거했겠죠. 여왕은 99층, ‘암계’라 불리는 곳에 아주 어려운 봉인식으로 방을 걸어 잠그고 있답니다. 그대들이 말하는 ‘시련’이라고도 하죠.”

나는 나찰산에서 몇 개의 시련을 통과했다.

심지어 나찰들이 행한다는 시련마저 돌파해보이며 주목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런데 여왕 대아귀가 있는 곳의 시련은 그보다 훨씬 어려운 모양이었다.

“포기해도 좋아요. 어차피 현계의 문은 100년이면 열리니까. 저도 억지로 문을 열려면 여간 힘이 들고 말이죠.”

“하지.”

대아귀 전부의 씨를 말리는 게 아니라면 할 수 있다. 누구도 깨지 못한 시련을 몇 번이나 돌파해내지 않았던가.

호라가 싱글 웃어보였다.

“성공하길 바랄게요.”

99층. [암계(暗界)]라 불린 곳은 이름처럼 매우 어두운 장소였다.

대아귀들이 우글대며, 바로 위에 닫혀있는 거대한 ‘문’이 보였다.

하지만 문은 닫힌 채로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문이 닫힐 때 대아귀가 빠르게 늘어난다면, 어떠한 연관관계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여왕’이 있는 봉인식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거대한 산, 그 입구가 알 수 없는 힘으로 닫혀있었던 것이다.

그곳을 열기 위해선 시련을 해결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그 시련의 내용은 무척이나 눈에 익은 것이었다.

[암계, 여왕의 굴로 향하기 위해선 봉인식을 해제해야합니다.]

[12가지의 시련을 해결하십시오.]

헤라클레스. 인간 최고의 영웅이라 불리던 자. 그가 ‘영웅’이 되기 위해 해결했던 12가지의 시련이 내게 주어졌다.

* * * * *

움직임은 있었다.

태양왕 우리엘 디아블로를 죽이기 위한 움직임이.

안개가 낀 저녁, 다섯의 마족이 은밀하게 움직이며 처소를 덮쳤다.

하나하나가 초강자이며 능히 다섯이 뭉치면 그 어떤 적이라도 쓰러트릴 수 있을 정도의 비밀병기.

간을 보는 것치곤 강하다. 진짜 죽이기 위해 찾아온 것이다.

-머리가 아프군. 이런 애송이들 상대나 하고 있어야 하다니······.

하지만 그들을 맞이해준 건 우리엘 디아블로가 아니었다.

거대한 불길. 살아있는 불, 크투가!

그는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저으며 거대한 불의 장벽을 일으켰다.

화르르르륵!

절대로 꺼지지 않는 불이 다섯 마족을 집어삼키자 그들이 비명을 내질렀다.

벌써 10일이 넘게 흐르며 반복된 상황이다.

-무서울 게 없던 내가 보모역할이나 하고 있다니. 크투가란 이름이 울겠구나, 울겠어.

하지만 그것도 앞으로 5일이면 끝난다.

5일. 그 안에 돌아오지 못한다면 크투가는 진짜로 우리엘 디아블로의 몸과 영혼을 지배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 이전에 또 다른 문제도 있었다.

‘본격적으로 공격이 오면 굉장히 피곤해지겠군.’

“아빠아~ 우우움.”

크투가의 뒤쪽, 이그닐이 뺨을 파묻은 채 우리엘의 가슴팍에 올라가 있었다. 그런이그닐을 바라보며 크투가가 쓰게 혀를 차고 말았다.

자잘한 암살시도는 막아낼 수 있지만, 본신의 힘은 태양탑의 지하에 묻혀있다. 본격적인 공격이 근시일 내로 시행된다면 무사히 지켜내지 못할 수도 있었다.

‘어렵군, 어려워.’

놈이 정말 헤라클레스의 신체를 찾아올 수 있을까?

솔직히 지금도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 자신있는 눈빛을 보고있노라면 조금은 믿고 싶어지기도 했다.

왜 그런 이상한 놈과 엮여선.

크투가의 불꽃이 한숨처럼 휘었다.

< 43. 크투가(完) > 끝

ⓒ 온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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