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 크투가(6) >
“알 아락사르. 지구의 관리자가 누구냐?”
철컹. 1.5km 길이로 파인 좁고 깊은 지하감옥. 가장 흉악한 초인 범죄자를 가둬두기 위해 만들어진 시설이지만, 그중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존재는 하나뿐이었다.
알 아락사르. 인류를 잠시나마 위협했던 괴물. 그가 마력을 제어하는 철구에 전신을 얽매인 채 벽에 묶여 있었다.
“알 아락사르! 협조하지 않으면 우리도 널 지켜주기 어렵다.”
“날 지킨다고? 이 따위 장식품들로 말이냐?”
쿠르르릉!
벽이 흔들린다. 제어구에 미세하게 금이 가기 시작했다.
철창 앞에 있던 백여 명의 사람들이 급히 물러섰다.
대부분이 절륜한 능력을 지닌 각성자이고, 조금이나마 알 아락사르를 압박하고자 모였지만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콰아아아아앙!
알 아락사르는 물의 기사. 그의 육체는 변형이 가능하다. 마력을 억제하는 도구들로 중무장을 시켜봤지만 그조차도 알 아락사르의 마력을 짓누를 순 없었다.
제어구가 터질 것처럼 팽창했다. 모든 이들의 전신에 솜털이 삐죽 섰다. 본능적으로 무기에 손을 가져가고 긴장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그가 멈췄다.
“나 스스로가 이곳에 갇히길 원하고 있는 것이다. 내 사명을 벗어난 일을 저질렀기 때문에.”
“······ 그 사명이란 게 우리가 원하는 바에 합당하다면 도와줄 수 있다. 우리는 지구에서 가장 힘이 강한 친구들을 뒀으니까.”
“너희들은 약하다. ‘그’만이 이상하게 강했을 뿐이야.”
“‘그’라면 그 지구의 관리자를 말하는 건가? 우리 역시 그를 찾고 있다. 이 혼란을타개할 수만 있다면 전력을 다해 너를 도와주마.”
-저주받은 뱀이 결국 ‘신들의 황혼’을 불렀구나. 지구의 마지막 ‘관리자’는 어디 있는가? 그만이 이 혼돈을 수습할 수 있을 것일진대.
-나는 알 아락사르. 지구의 관리자를 수호하는 물의 기사. 깊은 어둠 속에서 내 정신은 깨어났으나 나는 이미 자격을 잃었도다······.
알 아락사르가 정신을 되찾고 쓰러지기 직전에 한 말이었다.
하지만 알 아락사르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자격을 잃었다. ‘그’를 찾을 수도, 찾아서도 안 되지.”
“다람쥐 쳇바퀴군. 벌써 한 달이 넘도록 여기서 진전이 안 돼.”
흰색 가운을 입은 대표로 보이는 남자가 고개를 내저었다. 지난 한달 동안 어르고달래봤지만 알 아락사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검은 문’의 이현상은 점점 커지고 있었다. 세계 곳곳에 나타난 ‘검은 문’이 커지며 심연으로 빨려 들어가는 인류가 늘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학자들은 그것을 ‘종말의 전조’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날, 하늘에서 보았던 수많은 괴물들. 스스로를 ‘우리엘 디아블로’라고 말했던 그 악마의 왕과 같은 괴물들이 이곳 지구로 향하는 건가?”
“······.”
“젠장! 사람이 물으면 대답을 하란 말이다!”
쿵! 쿵!
대표로 보이는 남자가 철창을 거세게 걷어찼다.
그만큼 얼굴에 절박함이 드러났다.
그때, 의외의 곳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향할 거다.”
죄수복을 입은 남자. 부스스 정돈 안 된 머리칼, 하지만 야수와 같은 눈빛을 지닌 김민식이었다. 그 역시 그동안 이곳에 수감되어 있었으나 알 아락사르의 입을 열고자 억지로 데려온 것이었다.
“······ 향한다?”
“나는 심연에 들어가 봤으니까 알 수 있다. 애당초 ‘문’이란 건 우리가 쳐들어가기위해 만들어놓은 게 아니니까.”
“범죄자의 말을 쉽게 신용할 순 없군.”
“나는······.”
김민식은 쉽게 말을 잇지 못했다.
가짜 알레테이아에게 정신을 좀 먹힌 뒤, 그는 수많은 학살을 자행했다. 그를 쫓는 자들을 죽이고, 죽이지 않아도 되었을 사람들도 죽였다.
물론 그 연유의 중심에는 신흥종교 알레테이아가 있었다.
알레테이아의 신도들은 아직도 곳곳에 남아있다. 가짜 알레테이아가 그에게 종속되었음에도 그들은 끊임없이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알 아락사르를 쓰러트렸지만, 그에게 걸린 혐의가 모두 벗겨진 건 아니었다.
‘시간이 없다.’
하지만 김민식도 안다. 이런 곳에 계속 있어선 안 된다는 걸.
‘영웅. 내가 갈 수 있는 길은 그뿐이야.’
영웅이 되겠다고 마음먹었다. 이곳의 철창을 부수고, 빠져나가는 일은 간단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래선 영웅이 될 수 없다.
영웅이란 ‘인정’에서 시작된다. 그들 모두에게 인정받아야 한다. 필요한 사람이라고, 더 이상 대체할 사람이 없다고.
“알 아락사르. 네가 진정으로 기사라면, 나는 승자의 권리로 너에게 묻겠다. ‘관리자’가 누구냐?”
“······ 승자, 라고?”
알 아락사르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그는 기사다. 심지어 한때는 관리자를 바로 옆에서 수행한 기사 중의 기사였다.
그가 패한 건 위대한 별에 의해 자아를 잠시 잃었기 때문이다. 제대로 정신이 있고 전력으로 임한다면 결코 인간의 검 따위엔 쓰러지지 않았을 것이다.
“패배를 부정하는 거냐?”
“나는 패배하지 않았다······!”
꽈아아아앙!
철창이 부서졌다. 그대로 물의 탄환 하나가 날아가 김민식의 미간을 노렸다.
김민식은 전신을 움직일 수 없는 죄수복을 입고 있었다. 이 역시 마력을 제어하는기능이 있었고, 자의로 이 구속복을 풀어낸 사람은 아직 없다.
촤악!
하지만 그 순간, 그의 손이 정확하게 물의 탄환을 쳐냈다.
구속복의 상체가 찢어진 상태였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 모두가 눈이 휘둥그레진 채로 김민식을 바라봤다.
“다시 한 번 싸워보자는 거냐? 좋다. 네가 인정할 때까지 싸워주지.”
김민식은 긴장했다. 말은 자신 있게 했지만, 아직은 알 아락사르를 이길 수 없다. 가짜 알레테이아의 협조 덕택에 지난 한 달여간 몰라보게 강해졌지만 아직 알 아락사르에게 닿지는 못했다.
하지만 기백에서 밀리진 않았다.
밀릴 수 없었다.
“······ 적어도 자격은 있는 듯하군. 좋다. 내 의지가 아니었으나 그래도 패배는 패배. 네가 원하는 것에 한 가지만 답해주마.”
“관리자가 누구냐? 그라면 지구에 일어난 이 혼돈을 잠재울 수 있는 건가?”
“질문이 두 개인데.”
“······ ‘지구의 관리자’라는 자가 누구냐. 아르켄인가?”
알 아락사르가 잠시 턱을 쓸었다.
관리자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에 특별히 무슨 의미가 있지는 않았다. 관리자는 말 그대로 ‘관리’만을 도맡기에 그 존재를 모르는 자가 대부분인 탓이다.
전능한 ‘신’이라 하기에도 거리가 있고, 고장난 것을 고치는 수리공과 같은 존재였다.
“아르켄이라는 이름은 처음 듣는구나. 관리자는 그런 이름이 아니다.”
“그럼?”
“그리고 안타깝지만, 나 역시도 관리자의 이름을 알지 못한다.”
“내가 원하는 것을 답해주기로 하지 않았나?”
“관리자는 권한이 중요하지 이름이 중요하지 않다. 게다가 새로이 관리자가 들어설 때 제대로 그의 능력을 확인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다만, 그가 인간이라는 건 안다.”
“인간이 지구의 신이라고? 최초의 인간이라도 된단 말이냐?”
알 아락사르가 고개를 저었다.
“너희와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일 것이다. 흠······ 대략 이렇게 생겼었지.”
알 아락사르가 손을 뻗었다. 그러자 손에 있는 물들이 변환되며 다른 형상을 만들었다.
인간의 얼굴.
남자고, 눈썹이 짙고, 지극히 평범한 인상이다.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이 동요했다.
“어쩐지······ 동양인 같은데?”
“구분이 잘 안 가는군. 대체 누구지?”
심지어 김민식마저 고개를 갸우뚱했다.
“정말 이 사람이 그 관리자가 맞는 건가?”
“흠, 인간들은 다 비슷하게 생겨서 이게 확실하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너와 같은 피부색깔을 지니고 있긴 하였다. 더불어 너와 비슷한 언어를 사용했지.”
알 아락사르는 애당초 인간이 아니다. 그는 지고의 용이 만들어낸 존재. 인간이 완전 다른 종족의 생김새를 구분할 수 없는 것처럼, 그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최대한 비슷하게 구현해보긴 했지만 한계가 있다는 뜻.
김민식이 되물었다.
“한국사람······ 그중에 관리자가 있다?”
남자고, 흔한 인상이다.
그래도 여전히 해변가에서 바늘 찾기였다.
“비슷할 것이다. 하지만 제대로 답을 해주지 못했으니 그 뒤에 것을 답해주마. 관리자의 제대로 된 권한은 ‘이변을 고치는 것’이다. 그가 지구에 있는 것만으로도 극적인 이변은 자동으로 고쳐지지. 그런데 지금은 관리자가 지구에 없는 듯하군. 심연과 지구가 지금 시기에 이어지다니······.”
“지구에 없다면, 어디서 찾아야 하지?”
“너는 이미 관리자를 만나봤을 텐데?”
“뭐?”
“그의 권한이 너에게도 닿아있는 게 보인다. 그것도 꽤 진하게. 흠······, 하여간 내가 답해줄 수 있는 건 여기까지다.”
알 아락사르가 팔짱을 낀 채 다시 철창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오로지 속죄하고자 철창 안에 있는 것이라는 게 재확인된 셈이다.
김민식은 눈을 깜빡였다.
‘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 지구의 관리자가 있다고?’
지구의 관리자, 언뜻 듣기로는 신과 같은 존재다.
그런 존재가 자신의 주변에 있었다니.
하지만, 대체 누가?
김민식은 고개를 저었다.
그를 찾아야 한다. 그래야 최악의 상황을 막을 수 있다.
그리고 한 가지 확실한 게 있다.
김민식이 시선을 돌려 사람들을 바라봤다.
찢어진 구속복을 던지고, 손가락으로 지상을 가리키며, 썩은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나를 지상으로 올려 보내라. 아무래도 너희들을 구원할 수 있는 건 나뿐인 것 같으니까.”
영웅이, 되겠다.
* * * * *
성역에 들어온 순간, 내 눈에 보인 건 작은 알갱이들이었다.
알갱이······ 아니, 알이라고 해야 할까?
알. 알은 가능성이고 생명 그 자체다. 그리고 이 주변에 떠있는 모든 것들이 아주 작고 미세한 알이었다.
‘인자. dna.’
뭐라고 정확하게 설명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내 눈에는 또렷하게 보였다.
최초의 인류, 최초의 마족, 최초의 거인, 그 모든 것들이 이곳에서 시작되었음을.
‘크투가의 불이 이 인자들에게 흡수되고 있었군.’
그곳의 중심에, 거대한 불꽃이 있었다.
크투가의 불꽃이다. 놈의 불꽃이 이곳에 갇혀서 인자들을 성숙하게 만드는 중이었다.
그래. 이곳은 태양신의 보고였다.
태양은 모든 것의 ‘진화’를 일으켰다. 이곳은 그 진화의 서장과도 같은 장소.
내가 바깥에서 만난 거렁뱅이는 가짜지만, 그 의지만은 진짜와 다를 바가 없었다.이곳을 소중히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동시에 왜 ‘믿음’을 중시했는지 알 것 같았다.
‘믿지 않으면 진화는 시작되지 않는다.’
진화는 필요에 의해 생겨난다. 환경에 적응하고, 생존을 하기 위해.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가장 중요한 게 바로 ‘믿음’이었다.
태양신의 의지를 이은 역대의 모든 태양왕들에겐 그 믿음이 부족했다. 아직 나 스스로도 왜 문이 열린 것인지는 의아하지만 적어도 다른 태양왕들보단 나았다는 거겠지.
어쩌면 내 안엔 잠든 신성 때문일지도 모르고.
“새로운 아담과 이브를 만들라는 건가?”
피식 웃고 말았다.
신성을 얻었지만 진정한 신으로 가는 길은 새로운 종족을 번창시키는 것이었다. 여태까진 별 생각이 없었지만, 가장 중요한 열쇠를 여기서 찾게 된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크투가의 불꽃은 오랜 시간 잠들어있던 인자들을 다시금 활발하게만드는데 도움을 준 듯싶었다.
이 인자들이 움직이려면, 크투가의 불꽃이 필요하다.
태양신의 불이 없는 지금 크투가의 불꽃만이 인자들을 데워줄 수 있었다.
‘대단한 보물을 발견했는데······.’
문제는 크투가다.
작게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크투가의 소원을 이뤄줄 순 없을 듯싶었다.
< 43. 크투가(6)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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