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 크투가(4) >
-대단한 사기꾼께서 납셨군.
나를 본 크투가가 간단하게 품평했다. 사기꾼이라. 나쁘지 않은 어감이다.
“덕분에.”
-이제 약속대로 내 봉인을 해제해줘라.
크투가를 끌어들인 건 성공적이었다. 크투가가 태양의 흉내를 내줬기에 조금 더 원활하게 퍼포먼스를 진행할 수 있었다.
과연 얼마나 큰 효과로 돌아올 지는 미지수지만, 없는 것 보단 나았다.
“뭘 하면 되지?”
-이곳 탑의 깊숙한 곳에 내 발목을 잡고 있는 봉인구가 있다. 그 봉인구 때문에 나는 이 성을 벗어나지 못하지.
“그 봉인구는 태양왕만 풀 수 있는 모양이로군.”
-맞다.
천천히 탑을 내려간다. 연설이 끝난 직후. 아무도 나를 붙잡는 이는 없었다.
지금이 크투가의 봉인을 풀 기회하면 기회였다.
“대체 누가 있어 너만 한 존재를 봉인한 거지?”
크투가가 태양의 흉내를 낼 때, 그의 품격은 진짜였다. 그걸 본 직후에야 어째서 그토록 강대한 존재가 봉인되어 있는 것인지에 대해 의문이 생겼다.
크투가는 고개를 돌렸다.
-태양신이다.
“태양신? 그게 정말 실존한다고?”
-열심히 그에 대해 연설하지 않았냐?
“사기꾼의 연기였지. 정말 믿지는 않아.”
-흠. 물론 진짜 태양신은 아니다. 그 역시 가짜였다.
가짜. 만들어진 존재.
위그드라실에서 그러한 일이 있었다는 걸 크투가가 말한 적이 있었다.
-진짜는 허무 속에 갇혀있지. 하지만 가짜라도 진짜의 의지를 가지고 있더군. 내가 불장난 좀 쳤기로서니 남은 소망의 힘을 이용해 나를 이곳에 가둬버린 거다. 가짜 주제에 감히 나를 소멸시킬 순 없으니 말이야.
“불장난을 좀 크게 친 모양이군.”
-내 불과 놈의 불 중에 누가 더 강한지 알고 싶었을 뿐이다. 불은 힘, 불은 근원, 불은 모든 것! 그 자체인 내가 고작 만들어진 불 따위에 질 수는 없지 않겠냐?
역시 이놈은 정상이 아니다.
“이겼나?”
-크하하! 자기가 감당을 못하니 나를 가둔 것 아니냐? 꼬리를 말고 도망친 것이야!
그리 말할 줄 알았다.
그다지 중요한 이야기는 아닌 듯싶어 어깨를 으쓱하곤 말았다.
이후 얼마 걷지 않아 크투가가 다시금 말했다.
-이 이상은 나도 내려갈 수 없다. 나를 봉인한 것이 나의 접근을 막고 있다.
“너를 막는다고?”
-엄청난 성유물이라도 되는 거겠지. 빌어먹을 가짜 놈. 다음에 만나면 잘근잘근 씹어 먹어 버려주마!
“그럼 내가 그 성유물이라는 걸 어떻게 찾지?”
-내 불꽃이 안내해줄 거다.
크투가가 고개를 저었다. 분한 듯 불꽃의 크기가 더욱 커졌다.
이윽고 그 불꽃 중 아주 작은 부분이 떼어져 내 앞을 맴돌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불꽃은 다시금 작은 정령으로 화했다.
‘대단하군.’
최하급의 정령이지만 단순히 불꽃만으로 만들어낸 것이다.
진화만이 아니라 어쩌면 창초의 힘까지 가지고 있는 건 아닐까?
어찌됐든 혼자 내려가라는 말. 고개를 끄덕였다.
엄청난 성유물이라는 말에 궁금증도 생겼다.
‘근원의 정령을 봉인시킬 정도의 물건이라.’
그게 정말로 대단한 것이라면 더욱 욕심이 생긴다.
‘그나저나 이곳 지하는 특히 관리가 안 되고 있어.’
게다가 지하로 내려갈수록 감시도 허술해졌다. 연설이 끝난 직후여서라 하더라도지나치게 허술하다. 지키는 마족 자체가 보이지 않았다.
관리도 되지 않은 듯 곳곳이 무너지거나 마모된 상태였다. 이런 곳에 그런 엄청난성유물이 있다는 게 쉽사리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아니, 이로서 확실해졌다. 역대 어느 태양왕들도 태양교를 반기지 않았다는 걸.
‘박해를 받은 건가?’
짧은 시간 동안 이곳에 머물며 깨달은 건 태양교의 영향이 그다지 크지 않다는 거다. 교주인 코로나 외에 신도들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저 ‘형식상’으로 남겨두고 있다는 느낌이 강했다. 그래서 그러한 연설을 준비한 것이었지만 생각보다 견제가 심한 듯싶었다.
“왕이라고 하여 이 문을 열 수는 없습니다.”
아예 아무도 없는 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거렁뱅이······ 헤질 대로 헤진 옷을 입은 마족 하나가 그곳에 있었다.
퀭한 눈, 역한 냄새, 병이라도 걸린 듯 인상조차 새파랗다.
“너는?”
“이름 없는 방랑자입니다. 지금은 잠시 이곳에 머물러 있지요.”
“왜 내가 이 문을 열 수 없다고 생각하는 거지?”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믿음?
뚱딴지같은 소리였다.
살짝 눈살을 찌푸리자 마족이 말을 이었다.
“역대의 어느 왕들도 이 문을 열지는 못했습니다. 그리하여 버려졌고, 그리하여 잊혀 졌지요.”
“태양교의 교주라면 제법 건실한 믿음이 있을 텐데.”
“교주는 따르는 자. 이 문을 열 ‘권한’까진 없습니다.”
거렁뱅이 마족이 하는 말치곤 뼈가 있다. 단순한 마족은 아닌 듯싶었다. 하지만 그에게서 풍기는 마력은 극히 희미했다. 거의 죽어가는 시체와 다를 바가 없었던 것이다.
나는 마족을 무시하곤 문 가까이로 다가갔다.
왕만이 열 수 있는 문이지만, 정작 어떤 왕도 열지 못한 문.
모순이 따로 없었다.
그리고 천천히 문고리로 손을 옮기자.
쿠우웅!
튕겨져 나갔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나는 더욱 얼굴을 구길 수밖에 없었다.
‘튕겨졌다고?’
오한성이 아닌 우리엘 디아블로의 신체다. 강화가 될 대로 된, 무엇을 해도 중간 이상은 하는 강자의 육체였다. 그런데 저항할 틈도 없이 튕겨졌다. 엄청난 반발감이있었다.
쿠우우웅!
몇 번을 도전해도 마찬가지였다. 마력을 둘러보고, 검으로 내리그어도 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다시 오지.”
하지만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내겐 모든 문을 열 수 있는 만능키가 있었다.
‘이그닐.’
이그닐은 열쇠다. 이그닐이 못 여는 문은 여태껏 없었다.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내가 있는 곳 어디라면 이그닐은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다시금 이그닐과 함께 탑을 내려갔다. 하지만 탑의 지하를 본 이그닐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 것도 없는데?”
“없다고?”
“응! 이그닐 눈엔 아무 것도 안 보여요. 아빠, 뭐가 있어요?”
이그닐이 거짓말을 할 리는 없었다.
문도, 그리고 문의 옆에 선 마족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분명히 내 눈엔 보였다. 내 앞에 있었다.
“자격이 없는 자들은 저와 문을 볼 수 없습니다.”
죽어가는 마족이 말했다.
“망자인가?”
“잠시 이곳에 머무르는 방랑자일 뿐입니다.”
잠시 생각에 잠겼다. 다른 이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 정령과 같은 듯싶으나 정령은 아니었다. 정령이었다면 내가 몰라볼 리 없었으니까.
하지만, 망자라니? 여태껏 진짜 ‘귀신’은 만난 적이 없었다. 우리엘 디아블로의 꿰뚫어보는 능력으로도 죽은 자의 혼을 보진 못했다.
“믿음이란 건 태양신에 대한 믿음을 말하는 거냐?”
“모든 것에 대한 믿음이지요.”
“선문답이 따로 없군.”
제대로 답해줄 생각은 없는 듯싶었다.
고개를 저으며 거대한 문을 바라봤다. 아카식 레코드, 모든 비밀을 훑어볼 수 있었으나 이 문만은 미지였다.
믿음. 믿음이라. 태양신에 대한 믿음이라면 안타깝지만 내게선 바랄 수 없는 것이다. 신이 존재한다 하더라도 나는 그들을 믿지 않는다. 나는 나 자신을 믿을 뿐이었다.
‘열어볼 수 없는 건가?’
이곳을 열어야 크투가의 봉인을 해제시킬 수 있다. 크투가의 힘을 얻는다면 천군만마를 얻은 듯 든든해질 터였다.
하지만 열지 못하면 모든 게 도루묵이다.
“포기하십시오. 미련은 독입니다.”
“열지 못하는 문은 없다. 모든 문은 열리기 위해 존재하니.”
열리지 않는다면 문이 아니다. 그리고 나는 포기를 모르는 남자였다. 이 문을 열기 위한 방법이 분명히 존재할 것이었다.
“그렇다면 믿으십시오.”
“나는 태양신을 믿지 않는다. 나 자신만을 믿을 뿐이야.”
“정말 그렇습니까?”
미간을 구겼다. 태양신에 대한 믿음을 되묻는 건지, 아니면 나 자신의 믿음에 대한 부정을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결국 나는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어 모든 전승을 뒤져봤지만 저 ‘문’에 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다. 역대 태양왕들의 일지에도 그 비슷한 것조차 언급된 게 없었다.
삼일이 더 흘렀다. 나는 여전히 문을 열지 못했다.
‘요르문간드라면 더욱 간단명료하게 답해줬겠지.’
요르문간드. 그녀와의 ‘운명선’이 끊긴 이후 그녀의 행방은 여전히 묘연했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에겐 분명히 확고한 ‘믿음’이 있었다.
내가 본 누구보다도 강렬한 주관과 믿음으로 똘똘 뭉친 게 요르문간드였다. 그래서 그녀를 싫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내 물음에 답해줄 그녀는 이곳에 없었다.
“로드시여. 시름이 깊어 보이십니다.”
“라이라.”
수척해진 얼굴로 라이라가 다가왔다. 지난 며칠간 이곳은 나를 포함한 모두에게 감옥과 같았다. 왕의 궁, 그 안에 갇혀 모두에게 감시당하는 형편이었다.
배신자가 있다는 걸 아는 이상 긴장을 늦출 수 없다. 그것은 라이라도 마찬가지였다.
“고민되는 게 있다면 제게 말씀해주십시오. 제가 도움이 될 지는 모르겠지만······.”
“네가 있는 것만으로도 도움이 된다.”
시련을 돌파했지만 정작 나를 왕으로 인정하는 자는 거의 없다. 연설이 있은 직후약간의 파문을 일으켰지만 그 결과가 나오려면 시간이 걸릴 것이었다.
그 시간 동안, 나는 나의 자리를 지켜야 했다. 흔들리지 않는 의지와 냉철한 눈으로 주변을 살필 필요가 있었다.
“감사합니다. 하오나, 걱정 마십시오. 이 주변에 따로 이야기를 훔쳐듣는 자는 없습니다.”
이곳에 오기 전에 먼저 주변을 살핀 듯싶었다.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바깥의 상황은 알아보았나?”
“예. 저주받은 신전에서의 전쟁 이후, 둠이 파벌을 끌어 모아 단번에 팔콘을 죽였다고 합니다.”
“나를 견제하는 거로군.”
전이할 시간조차 쉬이 낼 수가 없어 라이라에게 전황의 보고를 부탁했다. 그리고 라이라가 전해준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둠. 그의 행동력은 정말 놀라웠다.
팔콘은 본래 태양왕과 협업관계에 있었던 파벌의 수장.
혹여나 팔콘이 나와 힘을 합칠까봐 미리 싹을 끊어버린 거다.
“다른 파벌들은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고 있는 건가?”
“둠이 팔콘 진영의 힘을 흡수하자 아르하임과 제로 파벌이 일시적 동맹을 맺었습니다.”
“중립의 데몬로드들은?”
“아직······.”
“안달톤 브뤼시엘을 기다리는 거겠지.”
안달톤 브뤼시엘이 사자왕으로 등극하기 위한 여행을 떠났다. 그가 진정한 사자왕으로 인정받는다면 새로운 지각변동이 생길 거다.
그래서 둠이 속도를 올렸다. 나와 안달톤이라는 변수가 끼어들 틈 자체를 만들지 않겠다는 의지였다.
‘너무 빨라.’
제기랄. 생각 이상으로 빠르다. 이대로 간다면 머지않아 ‘최종국면’에 접어들 것이다. 모든 데몬로드들이 지구로 향하는 최악의 시나리오 말이다.
나도 움직여야 한다. 이곳에서 가만히 발목만 잡히고 있을 순 없었다.
그러기 위한 첫걸음이 연설이었고, 그 다음이 크투가였다.
크투가와 천마의 신체는 막강한 비밀무기가 되어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그 ‘문’을 열 필요가 있었다.
‘믿음, 믿음.’
하지만 그 믿음이라는 게 정말로 애매하다. 억지로라도 태양신을 믿어보려고 했지만 여전히 문은 열리지 않았다.
가만히 라이라를 쳐다봤다.
우리엘 디아블로는 내게 그녀를 부탁한다고 했다. 그녀에게 진실을 전하라고 했다. 그녀라면 받아들여 줄 것이라고도 하였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망설이고 있었다.
“라이라. 나를 믿느냐?”
“어느 누구보다도 믿습니다.”
즉답이었다. 그녀 역시 뚜렷한 주관이 있었다.
믿음. 생각해보면, 나는 믿음에 대한 확실한 주관이 없다. 나를 믿는다 해도 결국은 자기위안일 따름이었다. 결국 나는 누구도 믿지 않는다. 심지어 나 자신조차도.
그래서······ 궁금하다.
그녀의 그 믿음이라는 것이.
“내가 우리엘 디아블로가 아니라면, 우리엘 디아블로의 탈을 뒤집어쓴 다른 존재라면, 그럼에도 나를 믿을 수 있느냐?”
결국 말했다.
라이라 디아블로를 믿음이란 이름의 시험대에 세운 것이다.
< 43. 크투가(4)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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