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신사냥꾼-189화 (190/251)

< 43. 크투가(3) >

연설은 칼과 같은 것이다.

잘 쓰면 좋은 요리를, 잘못 쓰면 거대한 재앙을 불러오는 칼.

그리고 나는 지금 칼날 위에 서 있었다.

‘많군.’

정면을 바라봤다.

이곳, 태양신을 모시는 탑의 가장 위에서.

200층 높이는 되어 보이는 거대한 탑의 아래에 빼곡하게 들어선 마족들. 족히 수백만,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모르겠다.

그들이 이곳을 찾은 건 오로지 하나. 내가 얼마나 ‘실패작’인지 확인하기 위해서다.

연설?

‘그다지 듣고 싶은 이는 없겠지.’

기껏해야 라이라 정도일까.

내가 얼마나 많은 준비를 하고 이 무대에 섰는지 가장 잘 아는 게 그녀였다. 지난 며칠 간 나는 오로지 단 하나의 ‘집중’을 만들고자 심혈을 기울였다.

하지만, 아무도 나에게 기대하고 있지 않다.

역대최악의 태양왕을 먼발치에서 보고자 모인 것일 뿐. 내가 하는 말은 한 귀로 들어가서 반대편 귀로 빠져나올 것이다.

집중하는 마족은 없다.

그래서······ 더 편하다.

‘역설적이지만.’

기대가 없다는 게 이토록 편한 것이었나?

내가 무슨 실수를 해도, 무슨 말을 뱉어도, 더 이상의 최악이 없다는 게 이처럼 안락하고 느긋한 것이었던가.

“역대의 왕들께선 지니신 마력을 풀어헤쳐 위압감을 보이셨습니다.”

교주가 옆에서 넌지시 말했다. 역대의 교주들 모두가 그러했다고. 단 하나도 탈선하지 않았노라고.

마족들은 힘의 논리를 따른다.

그러니 나도 마땅히 그래야 할지 모르겠으나, 내가 바라는 건 더욱 ‘극적인’ 효과다.

나에 의한, 나만을 위한 집중.

그들의 뇌리에 온전히 나의 이름을 때려 박는 것!

그저 그런 왕이 되어선 전세를 뒤집을 수 없다. 그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다. 칼날의 끝은 나를 향하게 될 것이다.

“얼마나 형편없는 마력일지 기대되는군.”

“일전의 태양왕의 마력은 제법 매서웠지.”

“하지만, 백색의 왕이다. 기대도 되지 않아.”

“수많은 ‘도전자’들에 파묻혀 죽겠군. 쯧쯧.”

마족들의 웅성임이 내 귓가에도 들려왔다. 그들의 비웃음 섞인 악의는 예상하고 있던 것보다 훨씬 커다랬다. 기회가 생긴다면 가차 없이 내 목을 물어뜯을 준비가 되어있었다.

‘마족은 호전적이다.’

알고 있다.

알고 있기에 도리어 마음이 편안하다.

보이지 않는 칼날보단 눈앞에 보이는 칼날이 백배는 나았다.

게다가 내 머릿속에 깃든 수많은 연설들.

그 연설들은 그들을 구원하고, 파멸로 밀어 넣으며 수많은 결과를 창조해냈다. 하지만 그들이 사용한 단어에는 힘이 있었으며 듣는 이의 가슴에 분명히 ‘울림’을 선사했다.

나는 지금부터 그 ‘울림’을 만들어야 한다.

그것도 인간과는 태생부터 다른 마족들을 상대로.

그러기 위해선 기세에서 밀려서는 안 된다.

천천히, 오른쪽 손을 들었다.

화르르르르르르륵!

“뭐, 뭐야?”

“불덩이?”

“태양······ 태양이다!”

내 손을 따라 천천히 나의 등 뒤로 거대한 태양이 떠올랐다.

태양신을 모시는 마족들. 정작 진짜 ‘태양’을 본 적 없는 마족이 대다수이며, 선택받은 마족이라 할지라도 태양 앞에 무릎을 꿇었다고 한다.

아이러니한 이야기다.

자기들이 모시는 것의 실체조차 모르는 자들이 대다수라니.

그래서 더욱 효과적이다. 태양의 모습을 구현한 저것은 다름 아닌 ‘크투가’였다.

크투가. 살아있는 불. 불 그 자체인 정령!

“저, 저건······!”

교주조차 놀라고 있었다. 그의 반응으로 보아 이 ‘퍼포먼스’가 성공적이라는 걸 직감했다.

비록 진짜 태양보다는 훨씬 작지만, 그 존재감은 능히 모조품의 자격을 갖추고 있었다. 말하자면 모조품의 품격이라고 해야 할까.

또한 태양은 정확히 나의 등 뒤로 솟아 내게 조명효과를 주었다. 그리고 모든 생물의 눈은 ‘빛’을 따라가게 되어있었다.

입을 열었다.

“위대한 태양의 지침을 따르는 동지들이여!”

동지들이여!

나는 나의 위압감을 내비추지 않았다.

내가 그들에게 바란 건 ‘동질감’이다.

동질감만큼 호소력이 강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

연설의 꽃은 호소다. 호소력이 강할수록 그 힘은 증대하며 모두에게 울림을 낳는다. 명성을 떨친 연설가들은 그 ‘호소’를 무기삼아 인류를 이끌었다.

나는 지금부터 그들에게 호소할 생각이다.

“우리는 아주 중요한 갈림길에 서있다. 하지만 갈림길의 끝에는 거대한 영광이 기다리고 있을 것임을 나는 알고 있다. 나는 그대들의, 동지들의 가능성을 믿기 때문이다.”

낮지도 높지도 않은 자세를 유지한다. 목소리의 톤, 피부의 떨림조차도 내 스스로컨트롤해야 했다.

마족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그들은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어댔다.

그러나 적어도······ 그들의 시선을 끄는 데에는 성공했다.

“하지만 우리의 가능성을 믿지 않는 자들이 있다. 그들은 실로 시시하고, 앞과 뒤가 다르며, 별 볼일 없는 이유를 들어 우리를, 우리의 신을 폄훼하지!”

부르르르!

몸을 떨었다. 격하게, 감정에 몸을 던진다.

본래 나는 무신론자다. 신을 믿지 않는다. 하지만 이곳의 마족들은 태양신을 믿고따른다. 그러니 지금 이 순간만큼은 나 역시도 그들과 같은 부류가 되어야 한다.

신을 폄훼한 자는 적이다. 나는 독실한 신자이며 그들의 대변자다. 그것은 지금 내 뒤에 떠오른 태양이 증명한다.

화르르르르르르륵!

태양의 불길이 더욱 강해졌다. 나의 감정에 동화하듯, 세상을 집어삼킬 것처럼.

역대의 태양왕들은 자신을 과시했다. 그들의 교리, 그들의 근본인 ‘태양’을 저버려두고 오로지 자신만을 따르라고 강요했다.

그래서 이곳의 마족들은 태양왕을 따를지언정, ‘존경심’이 없었다.

전대의 태양왕이 죽어도 아무도 슬퍼하는 자가 없지 않나.

그 누구도 전대의 태양왕을 기리는 자가 보이지 않는다.

마음 깊숙한 곳에서 우러러 나오는 떨림이 없어서다. 그들의 마음 깊은 곳에 박혀있는 것을 간질여준 왕이 여태껏 없었기 때문이다.

“태양신께선 분노하고 있다. 그들의 어리석음에 진절머리를 치고 계신다! 하지만우리는 어떤가? 우리는 그분의 분노에 응답하지 않았다.”

눈을 부릅떴다.

끼아아아아아악!

그에 맞춰, 신조 람이 울부짖었다.

태양의 주변을, 나의 위를 돌며, 모두에게 경각심을 일으켜 세웠다.

“그 결과 우리는 어찌 되었던가? 심연은 본래 태양신의 것이었으며, 그 권한은 적통인 우리자신에게 있다. 하지만 사천왕이라 울부짖는 개, 돼지보다 못한 가짜들에게 주도권을 넘겨주었다!”

심연의 패주. 그 자리를 놓아줘서 되겠느냐?

태양신의 적통, 그 아들 된 도리로서 창피하지 않느냐!

전대의 왕들과 같은 말이었지만 중심이 다르다. 나는 어디까지나 태양신을 중점에 두고 있었다. 그저 죽이고, 멸망시키라는 말이 아니라.

“우리는 다시금 일어서야 한다. 비록 우리는 이 울타리 안에 있지만 태양신은 심연의 모든 것을 내려다보신다. 그 부름에 우리는 응답할 필요가 있으며, 그래야만 비로소 불신자들을 몰아내는 위업을 세울 수 있을 것이다.”

아직 끝이 아니다.

“동지들이여, 각성하라! 위대한 시간이 이제 시작되었다. 우리는 눈을 떴다! 언제까지 눈을 감은 척 방관할 셈인가? 나는 알고 있다. 나의 동지들이여, 그대들도 계속해서 고뇌하고 있었다는 것을! 하지만 단순히 바라기만 해선 우리의 세상은 오지 않는다. 우리는 언제나 울타리 안에 갇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길 바라는가?”

두근! 두근!

심장이 저려왔다.

이곳에 모인 모든 이들의 심장이 거칠게 뛰기 시작했다.

울타리를 부숴라. 바깥의 적이 아닌, 내부의 나 자신을 각성시키는 거다. 이러한 관점은 그들로서도 처음 접하는 것. 적어도 작은 파문 하나쯤은 생기게 만들기에 충분할 터였다.

“우리의 신을 폄훼하는 가짜들에게 우리는 몇 번이든 소리쳐야 한다. 단합하여 한 가지 목소리를 내어야만 한다! 결코 굴하지 말며, 불신자들에게서 등을 돌리지 말라. 단합하라. 그리고 복종하라. 신의 이름 아래!”

“······.”

투박했다. 어쩌면 촌스러워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그들의 감정에, 그들의 신앙에 호소하고 있었다.

또한 그들의 승리하기 위한 길에 내가 있음을 분명히 밝혔다.

태양신의 아들. 단순한 왕이 아닌 신이 되어 이곳 심연을 정벌하겠다는 의지.

받아들일까? 아니면 너무 나간 걸까?

연설장은 조용했다. 더 이상 나를 비아냥거리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나는 가만히 등을 돌렸다. 그러자 태양이 가라앉았다.

* * * * *

사지가 떨렸다. 태양이 떠오른 직후 모든 게 바뀌었다.

태양교의 교주, 코로나는 자신이 느낀 게 결코 착각이 아니라고 확신했다.

‘진짜 태양이 아니다. 진짜 태양은 아니지만······.’

그러한 ‘불’은 처음 보았다. 정말로 신의 가호라도 받은 것처럼 보였다. 우리엘 디아블로. 그는 정말로 불의 사자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코로나가 전율을 느낀 건 태양이 떠올라서가 아니다. 그는 좌중을 휘어잡았다. 모든 이들이 입을 닫고 그의 말을 경청했다.

역대의 어느 왕들도 신을 자신보다 위에 두진 않았건만. 도리어 신보다 자신을 우상화하는 경우가 많았다. 힘의 논리로 돌아가는 심연이니만큼 당연한 것이지만, 우리엘 디아블로는 달랐다. 분명히 달랐다.

‘그는 우리에게 물음을 던졌다. 명령이나 증오 같은 게 아닌, 믿음에 대한 의문을.’

여태껏 단 한 번도 접근하지 않았던 방식이다. 누구도 의문을 가지지 않았던 그러한 부분에 그는 직격탄을 던진 것이다.

우리들의 안일함으로 인해 신의 이름이 더럽혀진 게 아니냐고.

맞는 말이다.

하지만 역대의 왕들은 모두 신자들을 박해했다. 형식상의 문제로 인하여 교주인 코로나를 남겨두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그의 발언은 코로나에게 있어 더없이 충격적이었다.

‘누가 왕이 되어도 상관은 없었다. 어차피 누가 되던 똑같았으니까.’

군단장들에게 협력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군단장들은 이 성에서의 실세였고, 새롭게 즉위한 태양왕은 언제 쓰러질지 모르는 초개와 다를 바 없었던 탓이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코로나는 군단장들에게 협력한 것을 후회했다.

‘그는. 그분은 다르다. 진정으로 신의 사자가 되고자 하ㄷ신다.’

아아!

발언 내내 그는 스스로를 낮추고 있었다. ‘동지’라는 심연에선 거의 쓰지 않는 단어까지 거침없이 내뱉으며 말이다.

태양교의 교주, 코로나는 비로소 눈을 뜬 기분이었다.

‘단합! 맞다. 우리는 단합되어야 한다. 태양신의 아들인 우리가 언제부터 강자와 약자를 나누었던가? 오랜 시간 우리에게 주어진 의문은 바로 그것이었다.’

이곳 심연에서 유일하게 신을 믿고 따르는 게 이곳이다. 수백만 마족이 태양교의 교리를 믿고 따르지만 이곳이 심연인 탓에 잊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누가 왕이 되어도 개의치 않았다. 약자는 죽거나 잡아먹혔고, 강자도 결국은 스러지기 마련이었으므로.

영원불멸하게 남은 왕은 단 하나도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오만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결코 자신을 낮추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신을 자신의 아래에 두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단순히 ‘태양왕’일뿐. 본인의 이름을 남긴 왕은 없었다.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자들이 있을 것이다. 그들을 모아서 그분의 힘이 되어드려야 한다.’

코로나는 눈을 감고 그가 보았던 광경들을 재차 떠올렸다.

어쩌면 최초로 영원불멸한 왕이 탄생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가 정말로 신의 지침을 따르고자 한다면, 코로나는 전력을 다해 도울 것이었다.

설령 칼날 위에 선 위태로운 상황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코로나는 상기 된 표정으로 눈을 떴다.

그리고 새로 즉위한 왕을 맞이하면서도 결코 뛴 적이 없던 그가, 어느 때보다 빠르게 발걸음을 움직이며 뛰기 시작했다.

< 43. 크투가(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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